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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지 1200 찍은 박신(구구단 8단 못함)이 쇼기(일본장기) 시합 도중에 뜬금없이 <손자> 군쟁편을 인용하는 장면. 


요 부분이 생각보다 깊이 있는 대화 내용인 거 같다는 삘이 확 들어서 나름대로 찾아봄. 


뇌피셜 듬뿍이니까 믿거나 말거나 맘대로 하셈. 




1. 쇼기 차원에서 해석한 내용



다홍이가 박신에게 쇼기로 밀리니까, 그걸 알아챈 박신이 다홍이에게 한 수 물러주는 장면임. 


실제로 한 수 물러준 건지, 아니면 '다홍이에게 도망칠 길을 열어주는 수'를 일부러 둬준 건지는 확실치 않음. 


하지만 둘 중 어느 쪽이든 간에, 어쨌든 박신이 의도적으로 다홍이의 다음 수를 '조종'한 것은 확실해 보임. 





박신이 말 하나를 움직이면서 일부러 '틈을 만들어주는' 연출. 





다홍이가 패배를 인정하기 직전의 컷. 왕장(王將) 앞을 토킨(と金, 보병이 금장으로 승격된 말)이 가로막고 있다. 



원칙대로라면 연장자인 박신이 왕장을, 연소자인 다홍이가 옥장을 가져야 하는데(장기에서 초가 연소자, 한이 연장자인 것처럼), 


꼭 그래야만 할 필요는 없어서, 저 왕장은 아마 다홍이의 왕일 것으로 생각함. 



토킨은 보병(졸병)이 상대 진영(적진)까지 전진해서 승격된 말인데, 보병은 체스의 폰과 비슷하게 앞으로 한 칸 밖에 이동을 못함. 


그런데 이런 보병이 적진까지 당도했다는 것은 경기가 엔드게임(최종국면)에 접어들었다는 뜻. 



장군을 노리고 포위망을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은, 은장이나 각행처럼 대각선(=변칙적)으로 움직이는 말이거나, 


또는 기동성이 보병보다 좋아서 일찍 적진에 들어올 수 있는 계마나 향차 같은 말들이고, 


가장 마지막에 적진에 들어와서 대량으로 승격해버리는 토킨은, 포위망을 완성시키는 마지막 열쇠가 되는 경우가 많음. 



지금 왕장과 토킨이 만났고, 그 근처에는 다른 말이 보이지 않는데, 


이러면 멀리서 날아올 수 있는 각행이나 비차가 대기하고 있는 상황이 아닌 한, 왕장이 직접 움직여서 토킨을 잡아야만 하는 상황. 


왕장의 호위병이 없고, 토킨이 직접 왕장을 노리고 있는 걸 보면, 아마 넓은 시야에서는 포위망(외통)이 거의 완성되었을 듯. 




2. 경마 입장에서 해석한 내용



만화에서는 박신이 "레이스에 대한 고민이군요!?"라고 운을 떼는데, 그러면 당연히 경마와 연관 지어 생각해볼 여지가 있음. 





이게 일본어 원본임. 


박신의 조언이 "追い詰められた時、人間は逃げ道を探します。"로 시작하는데, 


이건 "막다른 곳에 몰렸을 때, 인간은 도망칠 길을 찾습니다"라는 뜻이지만, 


말뜻을 있는 그대로 직역하면 "쫓겨(追い) 막혔을 때, 인간은 도주(逃げ)할 길을 찾습니다"라고 읽을 수 있음. 



경마에서 4가지 각질을 도(逃), 선(先), 차(差), 추(追)로 나누는데, 이 追가 바로 '따르다, 쫓다'라는 뜻이다. 


경마에 어울리게 해석해보면, "추격마들에게 몰려 막혔을 때, 말은 도주할 방법을 찾습니다"라고 읽을 수 있다는 거임. 



박신은 경험이 부족하던 데뷔년(92년)까지는 단조로운 도주마였다가, 


93년 가을에 복귀한 뒤로는 도주와 선행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강선행에 가까운 선행마가 되었음. 



다홍이도 박신과 비슷하게 강선행에 가까운 선행마였는데, 


일반적인 선행마처럼 최후의 순간에 도주마를 따돌리고 승리하거나, 


선행마들을 극한까지 몰고 가서 하이페이스를 강요한 뒤, 선행마들을 지쳐 떨어뜨리고 혼자 이기는 등등, 


레이스의 주도권을 쥐고 흔드는 경우가 많았다고 함. 



박신은 자신과 비슷한 포지션을 구사하는 다홍이에게, 


"도주/선행마들을 갖고 놀고자 한다면, 숨 쉴 구멍을 일부러 열어줘야 한다"고 조언한 셈. 




3. 실전에서의 적용



다홍이가 경기 페이스를 자기 마음대로 쥐고 흔든 사례를, 아래 영상으로 참조해보자. 





2008년 오사카배 경기. 파란색 가면을 쓴 9번마가 다이와 스칼렛임. 


시작하자마자 2펄롱 구간까지 상당한 속도를 발휘해서 튀어나가 도주를 하는데, 초반 구간 동안은 약간 빠른 페이스로 가져감. 


이러면 당연히 선행마군도 다이와 스칼렛에 맞춰서 빠른 페이스를 가져가고, 스태미너를 소모할 수밖에 없음. 


그런데 2마신 차이로 리드하던 다이와 스칼렛이, 3코너 지나면서(영상 1:07) 페이스를 낮추더니 점점 선행마들과의 거리가 좁혀짐. 


그러다가 4코너를 지나는 순간(영상 1:38)부터 갑자기 페이스를 다시 올린다. 





한신 레이스장에서는 4코너부터 골라인까지 이어지는 최종 직선에 오르막이 있음. 



3코너 구간에서 늦췄던 페이스를, 4코너 지나면서 다시 끌어올렸기 때문에, 


다이와 스칼렛의 페이스를 맞췄던 선행마들은 자기 페이스가 완전히 엉키면서 다이와 스칼렛을 따라갈 수가 없음. 


G2 클래스 경기에서 인터벌 트레이닝을 강요하는 도주마가 있다? 선행마들은 당연히 지쳐 쓰러질 수밖에 없는 것.



오르막 구간이 시작되는 시점(영상 1:54)부터, 


다이와 스칼렛에게 반 마신 차이로 바짝 붙었던 선행마들이 급격히 뒤로 밀려나는 걸 볼 수 있을 거임. 



도주마 미호노 부르봉의 사례에서처럼, 앞에서 뛰는 말들은 자기 페이스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뒤에서 밀고 올라오는 말들이, 스태미너가 바닥났거나 페이스가 엉킨 선행마들을 순발력으로 잡아먹고 나아가기 때문. 


그래서 '마이페이스'를 중시하는 말들이 도주마가 되는 경우가 많은 것인데, 


다이와 스칼렛은 모든 말들의 페이스를 망가뜨리고 자기 다리의 능력만으로 선두를 지킬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해버린 것임. 



하이페이스로 경기를 몰고 갔다가, 최종직선 직전에 한숨 돌리고, 마지막에 전력질주를 한다는 점에서는, 


의외로 사일런스 스즈카와도 약간 닮은 면이 있는 듯. 


실제로 다이와 스칼렛도, 시간이 가면 갈수록 선행마로서보다는 도주마로서 완성되어갔으니까. 


특히 마지막 경기였던 2008년 아리마 기념에서 보여준 다이와 스칼렛의 도주는 그야말로 예술. 




"초반(1~2코너)에는 몰아세우고, 중반(3코너)에는 느슨하게 풀어줬다가, 종반(오르막)에 승부를 걸어 이긴다."





이렇게 페이스가 망가진 경주마들은 호위병 없이 홀로 남은 왕장이 되었고, 패배를 선언할 수밖에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