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였을까?

성공의 기쁨보다 실패의 좌절감을 더 크게 여기게 된 게…

그래서 레이스에서 진심이 아닌 척 하게 됐다.

사실은 누구보다 빨리 달리고 싶으면서…

겁쟁이에 솔직하지 못하다는 건 알아.

하지만 이런 나라도 응원해주고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 그 사람은…


"좋은 아침 트레이너씨!"


아침 훈련 시간,

학원 앞에 서 있는 트레이너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하지만 어째선지 듣지 못한 것 같다.


'어? 누구랑 얘기 중이네?'

'오피스 정장 차림의 여자? 처음 보는 사람인데 대체 누구지?'


"설마 헤어진 연인과는 술 한잔도 하기 싫다? 뭐 그런 얘기야?"

"학생들 있는데서 무슨 얘길 하는 거야? 어서 들어가. 곧 트레이닝 시간이야."

"좋아. 그럼 얘기는 오늘 일정 마치고 하자. 끝나고 연락해."

"..."


트레이너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학원안으로 들어가는 여자를 지켜봤다.


"저기…트레이너…"

"어 네이처 언제 왔어?"

"으.응 방금 막 도착했어."

"그…아까…얘기하던 사람은…누구야?"

"아 협회에서 일하는 대학 동긴데 이번에 학원에 출장왔다고 하더라고."

"아…그렇구나…"


역시 다 얘기해 주진 않는구나…


"자 그럼 어서 트레이닝하자!"

"어..응..!"


트레이닝 하는 내내 아까의 그 광경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분명 연인이라고 했지?

응 그랬어.

근데 트레이너는 왜 얘기 안해준 걸까.

아니, 그게 오히려 이상하지. 

트레이너가 담당 우마무스메에게 자기 연애사를 말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래. 내가 뭐라고.

그 사람 생각보다 미인이던데….

나 같은 거랑 견줄 수도 없을만큼…


"네이처."

"..."

"네이처!"

"네, 네네!"

"오늘 무슨 일 있어?

"어,어?"

"평소보다 집중을 못하는 거 같은데 무슨 일 있어?."

"..."

"저기..그게…오늘…그 날인가봐…"

"아…그래…? 미리 얘기 하지 그랬어? 괜히 무리시켰네.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응….고마워…"



평소보다 이른 시간에 기숙사로 돌아왔다.

매일 하던 트레이닝의 3분의 1도 하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기운이 없다.

습관적으로 책상 서랍을 열었다. 

트레이너가 나에게 준 세상에 하나 밖에 없는 트로피들…

역시…혼자 착각하고 있던 거 아닐까?

이 트로피들을 볼 때마다 왠지 모를 기대감을 품었는데…

트레이너도 나를….

아냐! 그냥 내 전담 트레이너잖아!

당연하지… 이게 그 사람의 일인데..

내 컨디션 관리를 위해서 그냥 준 걸 거야.


“아! 정말! 어째서 나는 바보 같이 보답받지 못할 기대감이나 품고 있는 건데!”


종이 트로피를 보며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을 하는 사이 벌써 저녁 7시가 됐다.

트레이너의 퇴근 시간…


“...”


체육복에서 교복으로 갈아입고선 기숙사를 나섰다.


.

.

.


“아 간신히 나왔네.”


계속 술을 권하는 그녀의 권유를 거절하고 어떻게든 나왔다.

지금 시간은 밤 10시….

하… 내일 트레이닝용 자료 정리하고 레이싱 녹화분 분석했어야하는데

이것 때문에 다 어그러졌네.


언젠가 이 업계에서 보겠다고 생각은 했지만

만나자 마자 그런 얘기를 꺼낼 줄은 전혀 예상 못했다.

보는 눈도 많은데서 그런 얘기를 왜 꺼내서…


‘하필이면 타이밍도 안좋았지.’


얘기가 끝나자마자 네이처가 나타난 게 아직도 신경쓰인다.

혹시 들었으려나…

괜히 나 때문에 트레이닝에 악영향이 가지 않을까 걱정이다.


그러고보니 아까 트레이닝에 집중 못하겠다고 한 것도 사실은…


“응?”


술집 유리벽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 네이처가 바로 앞에 보였다.


“어…트레이너씨…어디 앉은 거지?”

“나? 난 여깄는데?”

“어 으왓!!!”


꼬리를 바짝 세우며 놀란 네이처는 얼굴을 붉혔다.

 

“아 저기 네, 네이처씨는 그냥 지나가는 길이었습니다! 아하…하하하…그럼 트레이너씨도 가던 길 가세요…”

“통금시간 지났는데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따라와.”

“아…네…”


.

.

.




별이 총총하게 박힌 밤하늘 아래, 트레이너는 학원으로 가던 길을 걷다가 길가의 벤치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잠시 얘기나 할까?”

“응, 트레이너…바로 학원으로 가는 거 아녔어?”

“나랑 하고 싶은 얘기 있어서 찾아온 거 잖아. 어차피 통금 넘었으니까 잠깐 앉아서 얘기나 하고 가자.”

“트레이너..불량해.”

“통금 넘긴 니가 할 얘긴 아니거든.”

“아하하…그런..가…”


음…그럼 무슨 얘기부터 해야할까…음…


“술 별로 안 마셨나보네…”

“별로 취하고 싶진 않아서 안 먹었어.”

“그래…”

“그…혹시 안 좋게 헤어진 거야?”


트레이너는 굳게 입을 다물고 하늘만 쳐다봤다.

역시 불쾌했겠지?

바보,바보야 난! 왜 단도직입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서…


“뭐, 그 정도까진 아니고 서로 오해하고 싸우고 그렇게 헤어졌어. 남들 다 이별하듯 말야.”

“아..그렇구나…”


다행이다. 트레이너는 의외로 화난 거 같진 않아.


“그, 놀랐달까..트레이너씨도 연인이 있어서…”

“에이 이런 나라도 과거는 있는 법이라고.”

“그..…다시 만나는 건 어때? 미인이던데 아쉽지 않아?”


또 이렇게 말해버렸어. 

자신의 기분 따위 아무렇지 않은 척 진심을 숨긴 채..

나도 이런 내가 싫어..하지만 이럴 수 밖에 없는 걸..

괜한 기대를 했다가 진실을 알고 아픈 것보다 적당히 거리를 두는 게 나아.

그래..그게 맞아..


“이미 예약이 잡혀있어서요. 힘들겠네요”

“어?”

“난 네 트레이너 잖아. 지금은 온전히 너한테 집중해야지. 너가 레이스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열심히 보조하는 게 내 역할이고..”


역시 그렇구나..트레이너씨는 날 그저…


“뭐 그런 것도 있는데, 너랑 보내는 시간이 꽤 나쁘지 않아서 말야.”

“그,그게 무슨 말이야?”

“그냥… 너가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면 나도 같이 기분이 좋아지고 이 시간이 계속됐으면 하고 바라게 된단 말이지.”


안돼. 그런 말을 해버리면…난…난…더 기대해버리는데…


“그래서 큰일이지.”

“응 뭐,뭐가 큰일이야?”

“그러다 보니 전혀 연애할 생각이 안든다? 이거 이러다 영영 혼자 살게 될지도 모르겠어.”


장난스럽게 트레이너가 말했다.


“그…그러면 나,나중에 네, 네이처씨가 트레이널 책임지는 건 어떨까…”

“...막 이래…”


트레이넌 나를 향해 웃은 후 밤하늘을 다시 올려다본다.


“달이 밝네.”

“...응…”


밝은 달빛 아래 우리 두사람의 그림자가 하나로 겹쳐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