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레나~ 빨리 따라오지 않으면 두고 갈거야~"


코트 깃을 세워도 바람이 나부끼고

안 쪽으로는 얼음 같은 공기가 들어오는

삭막한 추위다.


반면 나의 우마무스메, 토카이 테이오는 그녀의 성격처럼 화사한 옷차림이었다.


내가 앞으로 오자 테이오는 뭐가 그리 좋은 지 히히덕 거렸다.


"아까부터 시큰둥하네. 나랑 모처럼 외출인데 싫은 거야?"

"미안 테이오. 추워서 말 수가 적어져 버렸어."

"흠... 그럼 이 테이오 님의 손을 빌려줄까? 방금까지 트레이닝해서 엄청 따뜻하다구!"


테이오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아이가 손을 잡아주세요 라고 내미는 것처럼.

나는 그녀의 손바닥을 지그시 내려다 보았다.


매일 운동하고 달리는 사람이란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몹시 포근해보이는 손이었다.


그녀는 남녀가 손을 잡고 걷는다란게 어떤 건지 모르는 듯 했다.


문득 그녀의 손을 잡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고마워 테이오. 그지만 사양할게."

"에에? 어째서?"

"나한테는 너무 과분해서 말이야."

"뭐야... 와케와칸나이요..."


테이오 급의 유명 우마무스메는 언제 어디서나 파파라치와 기자들에게 노출되기 마련이다.


가십과 쓸데없는 루머를 양산해대는 족속들에게 스캔들은 가장 군침도는 소재 거리.


아무리 최강의 제왕이라지만 그녀는 아직 평범한 소녀다.


이 사실을 아는 지 모르는지, 테이오는 살짝 시큰둥한 상태다.


"후우... 알았어.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 같으니까."


반짝이고 반색하는 테이오. 그녀는 냉큼 내 손을 잡아주었다. 


따뜻하다 못 해 뜨거운 그녀의 손은 손난로처럼 내 차가움을 날려주었다.


"가자 가자! 또레나~"


모처럼의 휴일. 집에 틀어박혀 쉬고 싶지만, 이 것도 나쁘지 않으려나.


테이오는 아이처럼 팔을 흔들었다. 바이킹처럼 힘차게 두 팔을 흔드는 걸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테이오는 나와 눈이 마주쳤다. 내 표정을 본 것인지 살짝 긴장한 것 같았다. 머리 위에 난 귀를 보면 알 수 있다.


들뜬 얼굴은 수줍은 소녀처럼 바뀌어 버렸다. 그런 과정을 지켜보는 것도 재밌다.


테이오는 어린 아이 같아서 감정을 숨기지 못 한다. 있는 그대로 얼굴에 떠오르고, 있는 그대로 노출되는 제왕.


기분 좋아서 안아달라고 할 땐 떼어내는 게 골치 아프지만. 이정도라면 괜찮지 않을까.


이렇게 손을 잡고,

아무도 없는 새벽의 찬 공기를 마시면서.


얼어붙은 강가 위에 난 다리를 지나고.

꽃 봉오리가 새싹처럼 돋은 나무를 바라보면서.


잠시 그녀가 깃들어간 풍광을 바라본다. 

자랑스럽게 전시된 트로피처럼 늠름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활기차게 점프하면서 기쁜 얼굴을 보이기도 하고. 

천진난만한 꼬마처럼 뒤돌아서, 응큼한 표정을 짓기도 한다.


그 다양한 일면이 재밌어서 웃어버리고 말았다.


"나랑 같이 가는게 그렇게 좋아?"

"응. 응!"


테이오는 다른 손을 자신의 가슴에 올려두었다.

무언가 큰 결심을 하는 것처럼.


그녀와 나와의 거리는 점점 가까워진다.

두 걸음. 한 걸음.


이내 팔과 팔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워진다.


"테이오... 너무 가까운데..."

"그래? 평소에 하던 대로 하는 건데?"

"지금은 야외니까..."


테이오는 다시 시큰둥한 모습으로 돌아갔다.

훅 하고 윗 바람을 부니, 그녀의 하얀 털이 깃털처럼 올라갔다.


나는 테이오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테이오는 기쁜 듯 베시시 웃었다.


"제왕이 되니까 어때?"

"알아보는 사람도 많고 좋았어!"

"힘들지는 않아?"


테이오는 고개를 저었다.


"으응. 또레나랑 떨어지는게 조금 두려웠어. 그래도 매번 응원해주니까... 이렇게 휴일에도 나와주니까."


테이오는 바싹 마른 입술을 조금씩 혀로 축였다.

이상하다. 원래는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본래의 기적의 명마. 제왕의 귀환은 이런 아이가 아니었는데. 무엇이 달라진걸까.


"또레나. 우승한 뒤에 한 약속 기억나?"


우승한 뒤에 약속이라...

아아. 약속이라면 그건가.


테이오는 그걸 준비하고 있는 건가.

그래서 오늘은 좀 달라보였던 걸까.


"감기 걸리겠어 테이오."

"난 제왕이니까. 감기 같은 거 안 걸린다구."

"제왕이랑 감기랑은 다르다고. 난 네 담당이니까."


그 말에 테이오는 헛숨을 들이마셨다.

무언가 당황한 듯 두 눈이 떨린다.

부자연스럽게 바들 거리는 몸뚱이. 팔락거리는 꼬리와 귀까지.


"그럼... 또레나 코트 주면 되겠네~ 나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해주겠지?"


나는 지퍼를 내렸다.

갈색 코트를 그대로 테이오의 어깨에 씌워주었다.


"정말 주는 거야? 고마워!"


테이오는 킥킥 웃었다.


"여전하네 또레나는."

"여전하네 테이오. 늘 부주의하다니까."

"히히 미안해. 잘 보이고 싶었어."


테이오는 내 손을 잡아 끌었다.


"자! 테이오 선수! 우리의 주목 받는 초신성!"

"잠깐만..."


정면을 바라보며 결의에 찬 눈. 순식간에 부푸는 가슴.

터질듯한 허벅지. 앞 발이 한 걸음 앞으로 내밀어오른다. 옆에서 그토록 봐왔던...


"게이트 인! 전원 준비 완료!"


나를 처음 만나게 했던 그 순간.


"잠만... 테이..."


테이오는 전속력으로 나를 끌어달렸다.

바람처럼 빠르게 우리는 내달렸다.


"테이오 잠깐만!"


테이오는 웃으면서 말했다.


"테이오 현재 순위 1등! 압도적으로 유지 중입니다!"


가슴이 떨린다.

그녀가 뛰는 모습을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이렇게 단시간에 집중 해버리는 모습은.


내가 알던 덤벙댕이 테이오가

내가 아는 무적의 테이오로 변모한다.


승부와 열정이 있고, 힘들다고 칭얼대도.

부상을 입어도 결코 포기하지 않았던.

무너져도 다시 일어나는 그 토카이 테이오가


나를 유성처럼 끌어당긴다.

매일 매일 새벽마다 달리고

땀에 찌들면 내가 주는 물과 음료를 마시고.

늘 회장 얘기를 하면서 칭얼 거리기나 했던 테이오는.


어느새 이렇게 멋있어 졌구나.


"어땠어?"


테이오는 히히 웃었다.

이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란 듯이 펄펄 기운이 넘쳤다.


"정말... 빠르네..."

"당연하지. 이 몸은 무적의 테이오라고!"


잠시 나는 숨을 골랐다.

갑자기 달려서일까.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이다.


"괜찮은 거야 또레나?"

"어. 아마도..."


가슴이 먹먹하다.

머리가 띵하고, 세상이 빙빙 도는 것처럼 어지럽다.

이게 무슨...


"또레나?"


마지막으로 보인 건 테이오의 얼굴이었다.

그 뒤로는 어둠만이...



눈을 떴을 때 보인 건 하얀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었다.


"여긴 어딥니까?"

"안심 하시오. 병원입니다."


나는 이불을 쓱 들추어 보았다.

다행히 무사하군.


"그럼 테이오는..."


테이오는 문가에 숨어서 울고 있었다.


"무서워...! 하지만 또레나... 하얀 옷 무서워! 또레나..."


뭘까 저 심한 내적 갈등은...

그러고보니 테이오는 흰 가운이라면 치를 떨었지.

유령 복장만 봐도 줄행랑을 쳤었다.


나는 의사 분들을 나가게 한 뒤 테이오를 들여보냈다.

테이오는 울먹였다.


"미안해 또레나. 죽지 마!"

"이런 걸로 안 죽어."

"죽으면 양지 바른 곳에..."

"괜찮다고."


테이오는 코맹맹이가 되어서 눈물과 콧물을 훌쩍였다.


"나 때문에..."

"아냐 테이오."


나는 테이오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좋았으니까."

"좋아... 좋..."


뇌의 처리가 멈춘 듯 테이오는 버벅거렸다.

테이오의 퓨즈가 타버린 듯 하다. 귀는 2배로 쫑긋 거리고, 꼬리는 강아지처럼 펄럭거렸다.


몹쓸 말을 해버린 걸까.

트레이너와 우마무스메의 연애는 불법인데.


"처음에 만났을 때 생각났었어."

"아! 내가 또레나 머리를 뛰어넘었을 때?"


"응. 여자애 모자 주워주겠다고 나까지 뛰어넘었잖아."

"허들 같아서 뛰어넘었지 뭐야."


토카이 테이오는 웃으며 말했다.


"그 다음날에 경기장에서 만났었지."

"기억나! 내가 계속 선두였어!"


"회장 얘기도 많이 했었지."

"에에... 회장은 정말 대단하다구...! 또레나도 역시 회장의 멋짐을..."

"잠만! 그건 많이 들어봐서 알아."


"회장이랑 레이스도 했었지."

"응! 그 때는 회장이 이겼긴 했지만..."

"의기소침해져서 울먹이기도 했지."

"그 얘기는... 부끄러워..."


"회장한테 쳐들어 가서 선전 포고도 했지."

"또레나 없으면 힘들었어..."

"아냐 테이오."

"에?"


"그 때의 너는 정말 대단했었어."


나는 웃으며 말했다.


테이오의 귀가 쫑긋 거린다.


"당연하지! 나는 무적의 테이오 님이니까!"

"맞아. 그럼 일어날까?"

"에? 지금 가도 돼? 또레나 아프면 쉬어야 하지 않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네가 계획한 플랜이 있었잖아."

"그렇지이... 또레나한테 고백한다는 플래이어엇!?"


나는 풉 하고 웃어버렸다.

어른스러워 졌다 싶었는데. 


테이오는 뒷짐을 지었다.


"어? 으에?! 눈치... 챘었어어?"

"응."

"눈치 못 챘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언제? 언제부터?"

"처음 만났을 때부터?"

"흐에? 그 처음이 언젠데?"


어디부터 얘기해줘야 할까.

언제부터 그녀에게 빠지게 된 걸까.


"모르겠네. 그냥 다 좋았어."

"또레나..."


테이오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이번엔 너무나 부끄러운

한 명의 여자, 한 명의 소녀같은 모습이었다.


"그, 그럼... 옷 돌려줄게!"


테이오는 다시 코트를 내밀었다.

방금 전까지 그녀가 입고 있었던.

따뜻한 토카이 테이오의 온기가 느껴지는 옷이었다.


옷을 입으니 따뜻했다. 킁킁 거리면 그녀의 샴푸 향기가 느껴졌다.

그녀의 살짝찌근한 땀 냄새도.


"냄새 맡지 마 또레나! 회장한테 이를 테니까!"


그건 곤란하다.

토카이 테이오는 손을 내밀었다.

나와 네가 처음 만났을 때처럼.


"그럼 갈까?"



맥퀸이 헛 된 바람을 불어다 준 걸까.

아니면 소녀가 성장하면서 품어버리는 동경심인 걸까.

내가 테이오를 너무 어리게만 봐왔던 걸까.


나는 그녀를 아마추어 시절 때부터 알았다.

제왕이 되기까지 좌절하고, 승리하고.

싸우고 화해하고.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의사다... 싫어..."


테이오는 내 뒤로 몸을 숨겼다.

의사는 무서워하는 그녀지만.


"테이오. 그럼 눈 감고 갈까?"

"에에. 눈을 감으면 앞으로 갈 수가 없잖아."

"내가 잡아줄테니까."


확 하고 달아오른 얼굴이다.

테이오는 콧대를 높였다.


"좋아!"


나는 눈을 감은 그녀를 붙잡고 병원을 나왔다.

선선하고 맑은 공기. 추운 겨울이었다.


"이제 눈 떠도..."


그 순간 테이오는 내 목을 끌어당겼다.


"테이오?"


바짝 다가온 그녀.

샤파이어처럼 푸른 눈동자. 날 보며 웃는 분홍 입술.

올려닿는 까치발. 그녀의 고개가, 입술이 닿을 듯 말 듯 가까이 온다.


"놀. 자. 또레나."

"사람들이 본다니까..."

"놀아줘. 놀아줘! 놀아줘!"


똑같다. 내가 아는 테이오.

겨우 단 음식을 바치고 진정 시켰다.

하마터면 당할 뻔 했다.


"맥퀸이 알려준 거지?"


테이오는 먹는데 집중했다.

다음부터는 제대로 주의를 줘야할 것 같다.

예전이라면 몰라도 이런 스킨십은 위험하다.


그나저나 안 좋은 걸 학습한 건 아닐까.

이렇게 스킨십을 한다면, 먹을 걸 사준다는.


나는 그녀가 먹고 있던 와플을 빼앗았다.


"으에에... 내 와플...!"


"살 쪄. 테이오."


나는 테이오가 먹고 있던 와플을 씹었다.

근데 이거... 간접 키...


"와플 먹고 싶어! 나도 줘!"


테이오는 구차하게 매달렸다. 엉엉 울면서.

마치 실연이라도 당한 여자처럼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내 와플 줘어!"

"테이오 이거 놔!"

"와플 줘어!"


나는 하는 수 없이 와플을 줘버렸다.

테이오는 마지막 남은 크림까지 싹싹 핥아 먹었다.

엄지 손가락을 훑던 테이오는 기분 좋은 지 미소 지었다.


아이처럼 순수한 미소였다.


우리는 여러 장소에 갔다.

테이오가 언제 고백해올지 몰라서 매 순간이 긴장의 연속이었다.

밥을 먹고, 지그시 서로를 보면서 장난을 치고.

전망대에 올라서 도시를 보고.


영화를 보다가 손을 맞잡고.

따뜻한 그녀의 손을 붙잡고.


그런 두근거림에 싸여 영화가 들어오는 듯 마는 듯.

나는 테이오의 얼굴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러면 안 되는데.

나는 트레이너인데.


순간 테이오와 눈을 마주쳤다.


"왜 그래?"

"나가자 테이오."


영화관을 나왔을 때는 깜깜한 저녁이었다.

테이오는 중요한 장면을 놓쳐 아쉬웠는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아마 테이오는 그 순간을 노린 거겠지.

남자와 여자가 키스하는 순간을.

테이오 답지 않게 철저하다. 맥퀸이 알려줬으려나.


나는 자판기에서 커피를 꺼내 하나는 내가. 나머지 하나는 테이오에게 주었다.


"또레나."

"응. 테이오."

"좋아해요."


나는 커피를 마시던 입을 멈췄다.

자판기의 불빛에 비친 그녀는 떨리는 얼굴이었다.

고백을 처음 하고 결과를 들으려 두근 두근하는.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나도. 나도 널 좋아해.


"대답... 안 해줄 거야?"


나는 미소 지었다.


"이게 내 대답이야."


나는 테이오의 머리에 커피를 부어버렸다.

그녀의 트레이드 마크인 하얀 유성은 석유처럼 끈적하게 오염되어 버렸다.

상황을 파악할 범위를 넘어버린 탓에 테이오의 초롱초롱한 눈은 꺼져버렸다. 입은 아무 소리도 내지 못 했다. 울음이 베어 나오고, 입술은 우물 우물 거린다.


이게 뭐야. 무슨 일인거야? 트레이너?


"이따가 맥퀸이랑 같이 이 영화를 보기로 했거든."


테이오는 멍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울먹거린다. 슬프고, 치욕스럽고, 분해하는 얼굴이었다. 배신 당했다는 표정이었다. 바로 그거야 테이오. 내 가학심을 충족시켜 줘.


"오늘 즐거웠어. 혼자서 갈 수 있지?"


테이오의 몸은 옅게 떨리고 있었다. 흐끅 흐끅 대며 눈물을 참아낸다. 하얗던 그녀의 제복도 거뭇한 커피 자국으로 번지고. 두 손은 가슴으로 모아서 어쩔 줄 몰라하며 주먹을 꼭 잡는다.


분해 한다. 싫어 한다. 하지만 등을 돌리지 못 한다.

대답을 듣지 못 했으니까. 자존심에 용납하지 못 하니까.

그게 제왕. 나의 제왕이니까.


테이오. 3관왕. 루돌프마저 물리쳐버린 나의 테이오.

나는 등을 돌았다. 테이오의 울음 소리가 조금씩 멀어진다.


나는 골목에 숨어 테이오를 훔쳐 보았다.

사람들이 괜찮냐며 그녀를 위로한다.

그녀는 사람들의 위로를 떨쳐내었다.


"난 괜찮아... 괜찮다구... 나는..."


제왕이니까.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