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가 바뀌고 세대가 바뀌어도 통용되는 진실 중 하나가 남자는 여자 하기 나름이라는 것이다. 그만큼 남자의 인생에 여자의 존재는 꽤나 큰 비중을 차지한다. 트레이너와 라모누 사이에 그렇고 그런 일이 있었던 그 이상한 날 이후로, 특히 그의 삶이 급변했다. 완벽하게 자기 취향인 여자를 자신이 어떻게 해볼 수 있었단 - 10초 컷이었다는 객관적 사실은 유의한 영향을 주지 않았다 - 사실이 주는 고양감과 상승감이 대단했다.


“라모누. 오늘은 이걸 입어줘.”


트레이너가 학교 수영복을 내밀면서 말했고, 라모누는 눈썹을 꿈틀거려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안 그럴 이유가 없잖아?”


“......그렇네요. 이해했어요.”


물론 ‘사교활동’ 시의 복장 선정도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이루어지고 있다. 트레이너가 제안하고, 라모누가 컨펌한다. 말하자면 완벽한 상호 합의. 특기사항이라고 하면 안 그럴 이유가 없다는 트레이너의 논리에 라모누가 아직도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는 점이다.


“갈아입을 테니 잠시만 기다려 주시어요.”


“응.”


그로서는 막 동정을 졸업하고 이상적인 형태의 여성이 주는 느낌들에 저항하기 무척 어려웠다. 메지로 저택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거의 자기 방처럼 라모누의 방에서 밤을 보내곤 했다. 물론 레이스도 있고 이것저것 있으니 최대한 자제심을 발휘해 본명이라고 할 수 있는 행위는 일 주일에 5일 정도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라모누도 이 점에 이의는 없다. 다른 종류의 신체 접촉 역시 깐깐한 규제를 받고 있었다.


“자. 입었어요. 이제 그 시시한 욕망이 만족되셨는지?”


“항상 느끼는데, 진짜 섹시하네.”


“천박해요.”


“그러지 말고 이리 와.”


“좋으실 대로.”



딱 한 번 라모누가 그의 요구를 거절한 일이 있었다. 어디서 구해왔는지 다이이치 루비 승부복 레플리카를 내밀면서 오늘은 이걸 입어달라고 했을 때였다. 그녀는 잠시 트레이너가 내민 옷을 받아 바라보더니, 이마에 핏대가 설 정도로 분노해서 승부복을 쫙쫙 찢어버렸다.


“승부복은 우마무스메들의 마음과 염원이 담긴 것. 인생에 어쩌면 단 한 번뿐인 G1 경기에서 승리하고 빛나고 싶다, 전력으로 임하고 싶다, 최고의 달리기를 보이고 싶다는 마음의 표상이예요. 그런 승부복을, 그것도 복제품을 입고 그런 걸 하겠다고? 지금 장난하는 것인지?”


“어, 장난하는 건 아닌데. 꽤 진심이야.”


“그럼 그 진심은 잘못됐어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그를 격노한 얼굴로 노려보는 라모누에게 압도되어 트레이너는 비굴해지면서도, 최대한 평정심을 유지한 말투로 대답했다.


“듣고보니 알겠어. 내 잘못을 인정할게.”


“다시는 이런 제안은 하지 마세요.”


결국 그날 사교행위는 없던 것이 되어, 서로 돌아누워 잠을 청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게 화내는 라모누를 오랜만에 본 것도 있어서, 트레이너는 반성의 시간을 잠시 가진 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당신, 내일도 트레이닝이 있는데 아직도 안 자고 있으신가요?”


“그러는 너도 안 자고 있잖아.”


“저는 일기를 썼으니까요. 당신은 일기도 쓰지 않으면서 잠에 들지도 않으셨다니, 아직도 아까 일을 맘에 담아두고 있는 건가요?”


“그런 것도 있어. 아무래도 내가 좀 도 넘은 요구를 했던 것 같아서.”


“그런 식으로 지나간 일에 쩨쩨하게 연연해하지 마세요. 그릇이 작아 보이니까.”


라모누가 노트를 머리맡에 있는 테이블 위에 두고, 몸을 일으켜 옷장 쪽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잠시 안을 바라보았다.


“따지고 보면 저도 감정적으로 대응하기 바빴어요. 조금 더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을텐데.”


그녀가 옷장에 손을 넣어 한 벌의 옷을 꺼냈다. 희고 검은 배색에 비취색 프릴로 포인트를 준 그녀의 승부복이었다.


“......복제 승부복이 아닌 진짜라면, 당신의 그 천한 요구도 조금은 진심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고요.”


“라모누.”


“왜 그러시죠?”


“네 승부복을 입어줬으면 해.”


“제가 왜 그래야 하죠?”


실크로 된 잠옷을 입은 채로, 옷걸이에 걸린 승부복을 들고 서 있는 라모누의 뒷모습에 대고 트레이너가 대답했다.


“그러지 않을 이유가 없으니까.”


메지로 라모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네요.”




나름대로 라모누와 친애도도 올라가는 느낌이 들고, 충실한 리얼충스러운 나날을 보내다보니 트레이너는 이렇게까지도 우마무스메를 훈련시킬 수 있었나 싶을 정도로 트레이너로서 놀라운 발전을 이뤄내고 있었다.


“시시한 사람.”


라모누는 어쩐지 의기양양한 그를 보고 한 마디 툭 던질 뿐이었다.


“애초에 그 정도 능력이 없는 사람과 트레이너 계약을 할 리가 없지 않나요?”


“그래? 그럼 넌 알고 있었단 거?”


“저는 눈이 있어요. 문자 그대로도, 안목을 나타내는 비유적인 의미로도.”


“그래. 알아. 그것도 아주 예쁜 눈을 가졌지.”


“재미없는 말은 그만 두세요.”


트레이너의 칭찬에도 라모누는 미동도 없다. 조금도 감흥이 없는 표정, 하지만 그런 표정을 짓고 있는 곳이 그의 허벅지 위라는 점이 지금까지와는 좀 달랐다. 그녀는 그의 위에 다소곳하게 앉아, 그의 손에 허리를 내어주고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레이스와 아무 상관 없는 시시한 행위, 하지만


“딱히 안할 이유라도 있냐?”


하는 트레이너의 물음에 이번에도 제대로 반박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녀가 재미없다고 하든 말든 트레이너는 부쩍 능숙한 느낌의 손으로 그녀의 허리와 등줄기를 쓰다듬으면서, 한 손으로 그녀의 볼을 감싸 매만졌다. 일종의 신호를 수신한 라모누가 머리를 한 번 뒤로 넘기고 눈을 감으며 천천히 얼굴을 가까이 가져왔다.


조용하고, 우아하기까지 한 키스. 그녀의 양 손이 그의 뒷목에 머무르고, 트레이닝 일정에 크게 지장이 없는 선에서 둘은 사교적인 목적의 신체적 접촉을 즐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고 둘은 트레이닝복을 다시 챙겨입고 있었다. 위닝 라이브 연습을 위해 연습실을 빌려놨다. 따로 떨어져 서로에게 등을 향한 채로 말없이 옷을 입는다.


“만족하셨는지?”


“언제나처럼 최고였어.”


“저도 3번이나 갔네요.”


“제대로 라이브 연습할 수 있겠어?”


“지장이 갈 만한 일은 하지 않아요.”


트레이너실 창문을 열어두고 서로 옷매무새를 점검한다. 물론 자기가 제대로 입는 것이 이상적이지만, 혹시 모를 실수가 있을 지도 모르니까.



의외로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라모누는 라이브 연습을 정말 열심히 한다. 레이스를 사랑하는 만큼, 레이스의 승리의 영광과 감사에 직결되는 위닝 라이브를 일종의 신성한 의식처럼 사랑하는 면모가 있는 모양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워낙 엄격하고 완벽하길 추구하는 성격이, 설렁설렁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지만.


[즈큥 도큥 가슴이 울려 (훗후-)

바큥 부큥 정말 좋-아-해-]


연습실에 울려퍼지는 우마뾰이 전설, 음악에 맞춰 칼같이 안무를 선보이던 라모누가 양 팔을 벌리고 선 채로 굳어선다. 얼굴이 조금씩 일그러진다. 눈썹이 꿈틀거린다.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다. 그녀가 손짓으로 신호하자 음악이 멈췄다.


“다시.”


“왜? 잘 하고 있었는데?”


“잘?”


“그래. 잘 하고 있었어. 최고로 귀여웠다고.”


“......당신. 이 부분을 다시 보여줘. 50초 부분부터.”


음악이 다시 흘러나온다.


[오늘 승리의 여신은 나에게만 입맞춤해 무지개 저편으로 가자]


트레이너가 음악에 맞춰 안무를 선보이고, 라모누는 집중해서 그 동작을 하나하나 유심히 살핀다. 그의 생각에 그녀의 안무와 다를 것도 없고, 다르다고 해도 오히려 라모누 쪽이 감정 전달이라든지 선이 훨씬 낫다. 하지만 뭔가 그로서는 발견하지 못한 점이 있는 모양이리라고 추측했다. 거울이라도 보고 연습하면 좋겠지만, 참고로 삼는다고 라모누 쪽을 향하고 있다. 그녀를 앞에 두고 위닝 라이브라도 하는 기분이다.


“다시 할 테니 이번엔 제대로 점검해 주시길.”


지적한 부분으로 돌아가 나오기 시작한 곡에 맞춰 라모누가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람을 가르고 대지를 박차고 너의 안에 빛을 밝힐 거야]


[두근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너의 애마가! 즈큥 도큥-]


“다시.”


아무래도 마음에 안들어 견딜 수가 없는지 라모누가 또 음악을 멈추고 생각에 잠긴다.


“당신이 보여준 것처럼 할 수가 없어.”


“하고 있는 것 같은데.”


“가볍게 말하지 마세요. 다시 가겠어요.”


[바람을 가르고 대지를 박차고 너의 안에 빛을 밝힐 거야


두근 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두근]


“다시.”


[즈큥 도큥 가슴이 울려


바큥 부큥 정말 좋-아-해-]


“다시.”


[즈큥 도큥 가슴이 울려


바큥 부큥 정말 좋-아-해-]


“다시.”


[즈큥 도큥 가슴이 울려


바큥 부큥 정말 좋-아-해-]


“다시.”


[즈큥 도큥.........]


도자기 장인이 도자기를 빚듯이, 철을 몇 번이나 달궜다가 식혔다가 하듯이, 요리사가 오믈렛 한 접시를 위해 계란 수십 개를 우습게 내다 버리듯이, 라모누는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같은 부분을 반복했다. 아주 조금씩, 작은 변화가 있긴 했지만, 어느 쪽도 트레이너가 넋을 놓고 바라볼 만큼 아름답게 빛났다. 본인이 만족을 못할 뿐.


휴식도 없이 한 시간하고 20분을 꼬박 같은 동작을 연습한 그녀가 땀범벅이 되어서야 다시 하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게 되었다.


[해피해피 달링 3 2 1 Go Fight 우피우피 허니 3 2 1]


마지막 포즈로 멈춰서 호흡을 정돈하는 라모누에게 수건과 물을 가져다주자, 낚아채듯 받아 얼굴을 닦았다. 물을 마시는 도중에도 눈이 천장을 향해 있는 걸 보면 완전히 만족하고 납득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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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여왕배가 메지로 라모누의 우승으로 끝났다. 관 위에 관 위에 관 위에 관. 결승선을 통과한 라모누는 환하게 웃고 있었다. 진정한 사랑을 바치는 대상, 레이스, 그것을 입증하는 완벽한 승리, 4개의 티아라.


“고생했어, 라모누.”


“고생? 사랑을 위한 일에는 고생이 없는 거예요.”


“인삿말은 좀 인삿말로 들어라.”


“그렇군요. 당신의 표현대로라면 ‘찐’ 이었는지요?”


기분이 퍽 좋은지 농담까지 건네며 미소를 짓는 라모누를 보고, 트레이너는 약간 질투 비슷한 감정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이 여자가 자신에게 웃는 걸 거의 본 적이 없는데, 레이스장만 오면 이렇게 행복해한다니 약간 거슬렸다.


“너 말야. 평소에도 이렇게 웃으면 안되냐? 웃는 얼굴 예쁜데.”


“하?”


“아니다. 레이스랑 내가 같나.”


“닿지 않는 것에 질투하는 건 꼴사납네요. 추해요.”


“아니까 아니라고 했잖아.”


라모누가 그의 툴툴대는 얼굴을 보고 그런건지는 몰라도, 싱긋 웃으면서 돌아섰다.


“알면 됐어요.”


대기실 안으로 사라져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메지로 가의 당주 메지로 아사마가 천천히 다가왔다.


“라모누의 트레이너. 고생이 많았네.”


“아닙니다.”


트레이너는 방금 대화를 떠올리고, 허허 웃으며 약간 오마주를 바치기로 했다.


“사랑을 위한 일에는 고생이 없는 법이죠.”


그 말이 퍽 감동적이었는지 메지로 아사마가 그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렸다.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꽤 힘있는 터치였다.


“일심동체로구먼. 자네도 메지로가 다 됐군.”


“과찬이십니다.”


“아니야. 자네에게 맡기길 잘 했어. 축하연을 열고 싶은데, 오늘도 저택에 올 거지?”


“그, 오늘은 예정이 없는 날이라.”


“?”


“그런 표정 지으셔도, 오늘은 예정이 없었습니다만. 레이스 피로도 있고, 훈련 일정에도 지장을 주기 싫으니까요.”


메지로 아사마는 입꼬리를 아치처럼 만들어 이상하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나 때는 천황상 뛰고도 밤새도록......”


“네?”


“아니네. 축하연은 다음에 하지. 그럼.”


“살펴가십시오.”


그 뒤로도 아르당이니 도베르니 파머니 메지로의 일원들이 와서 형부형부 불러대며 축하를 가장한 연애 질문을 받아주고 있자니 위닝 라이브 시간이 되어 있었다.



위닝 라이브가 끝나고 내려온 메지로 라모누와 통로를 걷고 있는데, 그녀가 물었다.


“당신, 오늘은 혼자 보내는 날이었지요?”


“그랬지.”


잠시 생각하던 그녀가 팔짱을 끼고 물었다.


“안 된다면?”


“뭐가?”


“혼자 보내지 말고, 저랑 보낸다면? 어떠신지?”


“할머님께도 오늘은 저택에 가지 않는다고 말씀드렸어. 축하연도 다른 날로 하기로 했고.”


“알아요.”


그녀가 자리에 멈춰섰다. 트레이너도 따라 멈춰섰다. 라모누가 천천히 사선으로 걸어와 그의 뒤로 와 안아왔다. 위닝 라이브 직후인 것을 감안해도 몸이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시시함이 옮아버렸어요.”


그녀가 자신없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같이 있고 싶어요.”


트레이너는 어색하게 굳어 서 있다가 물었다.


“내가 왜?”


“같이 있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딱히 없네. 그럼, 내 방으로 가자.”



오늘따라 라모누는 적극적으로 굴었다. 돌아가는 차 안에서도 그의 팔을 꼭 안고 놔주질 않아 운전하기 곤란하게 만들더니,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내내 매달려와서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방 문이 열리고 들어서자마자, 신발을 벗는 시간도 아깝다는 듯이 더 가까이 붙어왔다. 후욱, 뜨거운 공기가 끼쳐올 정도였다. 처음 겪는 상황에 조금 허둥대는 트레이너와 달리 라모누는 격렬하게, 그러면서도 마치 사전에 준비한 것처럼 정확한 움직임으로 그에게 들러붙어 이리저리 입술과 손가락을 대고 있었다.


“잠깐, 잠깐만 라모누!”


“뭔가요.”


“오늘은 인자 커버도 안 사다놨는데.”


“......시시한 사람.”


그의 목을 입술로 우물거리면서 그녀가 피식 웃었다.


“오늘은 제가 요구한 거예요. 그러니 피임대책은 제가 세웠어요.”


어찌저찌 풀썩 침대에 쓰러지자, 꽃에서 나는 것 같은 달콤한 향기가 났다. 그녀가 살짝 웃었다.


“절 시시한 여자로 만든 책임을 지세요.”


“어, 어떻게?”


“시시한 짓을 해 주세요. 불편해 죽을 정도로.”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레이스를 뛴 것처럼 녹초가 되어 쓰러진 두 사람은 더는 붙어있기도 지친다는 듯이 살짝 몸을 떼고 숨을 골랐다. 메지로 라모누가 약간 쉰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과 사교활동을 너무 많이 한 모양이예요.”


“갑자기 뭐야......”


“당신을 좋아해요. 레이스에 버금갈 정도로.”


트레이너가 말없이 엎어져 있다가,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난 레이스보다 널 더 좋아해.”


“알아요. 시시한 사람.”


“하지만 레이스도 좋아해. 너에 버금갈 정도로.”


베개에 얼굴을 묻은 메지로 라모누가 후후후후, 하고 목 안으로 웃었다.


“라모누. 다음에는 사교활동이 아닌 목적으로, 하지 않을래?”


“......당신의 천박한 정조관념으로는 이해하지 못하시겠지만.”


라모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엄연히 그건 정혼자와 하는 일이예요.”


“나도 알아.”


“.......”


“하지만 너 말고 내가 누구랑 결혼하겠냐?”


“제 알 반가요?”


“몰라야 할 이유가 있냐?”


트레이너가 천천히 팔을 움직여 라모누의 손을 찾았다. 맞닿자, 그녀의 손도 그의 손가락을 꼭 쥔다.


“그렇네요. 없어요.”



서서히 호흡이 편안해지는 두 사람, 서로의 손을 잡은 채로 어느새 잠에 빠졌다가 일어나보니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휴일이 아닌 날, 지각을 해버린 건 처음 있는 일이다. 서둘러야 하는 급박한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준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함께 샤워를 하고 옷을 챙겨입었다.


“서두른다는 게 서투른 것이 되지 말아야 해요.”


그를 불러세워 타이를 메 주면서 라모누가 타박했다. 머리를 긁적이는 트레이너를 한심하다는 듯이 째려보면서도, 타이를 풀고 새로운 것을 가져와 매어준다.


“색 배합도 신경써야 해요. 추구해야할 것은 완벽이니까.”


“고마워.”


“시시한 인삿말은 됐어요.”


“사랑해.”


“시시한 애정표현도 됐어요.”


라모누의 잿빛 눈이 감흥없는 빛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이제서야 봐줄 만하다는 듯 흠, 하는 숨소리를 냈다.


“단지, 어젯밤에 한 말이 진짜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확인하게 될 거야.”


트레이너가 가방을 열어, 훈련 계획표와 레이스 자료 따위를 꺼내 보여주면서 말했다. 흠흠, 하고 검토하는 라모누의 시선이 자료의 한 구석, 레이스 이름에 꽂혔다.


<아리마 기념>


“완벽한 승리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증명이지 않겠어?”


트레이너가 웃으면서 라모누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널 이기게 해줄게.”


“당신......”


메지로 라모누가 머리에 양손을 올려 그의 손을 꼭 쥐면서, 눈을 감아 얼굴을 붉혔다. 그리고 목에 팔을 감아 안아왔다.


“일심동체가 되었네요.”


레이스 자료가 팔랑팔랑 꽃잎처럼 흩날려 바닥에 떨어졌다. 그녀의 포옹에 응해 등과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주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메지로다운 소리를 하네.”


“메지로다운......?”


라모누가 그의 품 안에서 후훗, 하고 웃었다.


“제가 메지로예요.”


지각했다는 것을 잊을 만큼 둘은 서로의 온기를 나누면서 하나로 안겨 서 있었다. 고개를 뗀 라모누가 언제나의 표정으로 말하기 직전까지.


“자료, 빨리 주우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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