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자베스 여왕배가 메지로 라모누의 승리로 끝나고, 아리마 기념 출주자를 선정하는 팬투표가 벌어지는 11월 중순의 일이다. 당초 계획보다 늦어졌지만 라모누의 우승을 기념하는 축하연이 메지로 저택에서 있었다.

"언니도 대단하시지만, 여기까지 일심동체로 이끌어오신 형부도 대단하시네요."

브라이트가 손을 모아 느긋하게 칭찬의 말을 건네자 맥퀸과 라이언, 파머와 도베르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트레이너도 허허 웃으며 쑥쓰러워한다. 자연스럽게 형부라 지칭하는 브라이트도 그렇지만, 그 호칭에 부족함이 없음을 모두가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라모누 본인만 빼고.

"브라이트."

다소곳하게 앉아 물을 마시던 그녀가 잔을 내려두고 짧고 무겁게 불렀다. 표정은 시큰둥했지만 어딘지 짜증스러운 기색이다.

"네에, 큰언니."

"형부가 아니야."

"호와아. 그랬지요오. 형부 되실 분."

"그것도 아니야."

"호와아? 그러면, 형부 되실 분 되실 분?"

라모누가 팔짱을 끼고 눈을 감는다. 아주 잠시간의 침묵이었지만, 브라이트를 제외한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감도는 데 충분한 시간이었다. 파머와 아르당이 목 근처 리본을 조금 풀어놓으며 초조해했다. 라모누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흠, 하고 짧은 소리와 함께 덧붙였다.

"그거면 적당해. 문제 없어."

라모누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있었지만, 모두가 소리 없이 안도하는 데는 충분했다. 그녀는 천천히 눈을 움직여 동생들과 트레이너의 어색한 웃음을 살폈다. 특히 그녀의 남편 되실 분 되실 분에 이르러서는 눈을 멈춰세워 검열하는 듯한 시선을 보냈다.

"무척이나 시시한 사람."

그녀는 짧게 중얼거리고 식사를 재개했다. 다행히 그 이후로 큰 트러블 없이 축하연이 끝날 수 있었다.


"당신. 오늘도 여기서 주무시고 가시지요?"

"응. 시간도 시간이고, 할머님께서도 권유하시니까."

그 대답이 뭐가 마음에 안드는 건지 라모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러나 눈빛과 행동에는 드러나지 않는다. 여전히 지극히 무감정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돌아섰다.

"따라오세요."

그녀는 언제나의 자신의 방이 아닌 다른 곳으로 그를 이끌었다. 문을 열자 침대와 책상, 몇 가지 가구가 놓인 방이 나타났다. 지극히 기능적인 면에만 치중한, 얼마 전에 공사가 끝난 것 같은 새 방. 사람이 머문 흔적은 없고, 그나마 방 구석에 놓인 이젤이 미약한 인간미를 발산한다.

"오늘은 여기서 쉬세요. 당신에게도 방이 있어야 한다 생각했어요. 필요한 것들은 구비했지만, 취향에 맞을 만한 물건들은 없어요."

"배려 고마워."

"시시한 감사는 됐어요. 이건 배려가 아니니까."

"그래. 그나저나 너는?"

라모누는 팔짱을 끼고 그를 내려보는 듯한 시선을 보낸다. 질문이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트레이너가 웃었다.

"물론 여기 있겠지! 넌 레이스 다음으로 날 좋아하니까."

라모누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대답했다.

"재미없는 말은 됐어요. 침대 시트가 엉망이 돼서 거기서 잘 수 없을 뿐이예요."

"그랬지, 그랬지. 친애도가 또 상한을 뚫은 느낌이었지."

"부정은 않겠지만 자랑하지도 말아주세요. 저는......"

그녀가 말을 멈춘다. 믿기 힘들지만 말문이 막힌 모양이다. 아니면 단어를 고르는 중이거나. 어쨌건 인상을 찌푸리고 오른손으로 턱을 괴어 생각하던 그녀가 짧게 말했다.

"조금 무서웠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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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밤이 깊어 라모누와 트레이너는 샤워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다. 색만 다른 실크 잠옷을 걸치고, 한 침대에 들어간다. 나란히 눕지만 그 이상 가까이 가지는 않는다. 안전거리를 둔 채로, 서로의 위치에 간섭하지 않는다. 트레이너가 그녀 쪽으로 돌아누워 가볍게 손을 맞잡았다. 그녀는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을 돌려주지도 않는다.

조용히 끌어당겨 팔베개를 해 주면서 이마를 맞대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제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표정을 바꿔주지도 않는다. 시선은 그의 볼에 머물러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눈높이가 그랬을 뿐, 의식적으로 바라보는 것이 아니다. 눈 앞에 있으니 눈에 비친다, 정도의 의미. 단지 드물게도 귀가 이리저리 찾듯이 움직이고 있었다.

“라모누.”

“말씀하세요.”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

“그래 보이나요?”

“그래.”

“......”

또 다시 침묵. 달래듯이 그녀의 옆머리와 볼로 손을 옮겨 쓰다듬는데, 라모누의 손이 그의 오른손을 붙잡았다.

“한 가지 확인해줘요.”

“뭘?”

“아까 제 정혼자, 반려가 될 사람이 될 사람이라고 불렸죠. 정말 흔들림 없는 결정인가요?”

“응. 너도 그거면 문제 없다고 했고, 다들 인정했고. 나도 기쁘고.”

“알았어요. 이해했어요.”

라모누가 잠시 그의 손을 잡은 채로 있다가, 천천히 이마를 떼고 말했다.

“역시 오늘은, 아니 당분간은, 아리마 기념이 끝날 때까지는 ‘사교활동’은 중단하도록 해요.”

“그래? 알았어.”

“......미안해요.”

트레이너가 화들짝 놀라 그녀의 눈을 쳐다보았다. 언제나처럼 별다른 감정이 묻어나지 않는 얼굴, 굳게 다문 입. 그러나 그 입이 방금 미안하다는 말을 담았다. 좀처럼 들을 기회가 없는 말이었다.

“왜?”

“말해야할 것 같았어요. 당신에게 그게 얼마나 중요한지 생각해봤으니까요.”

“아리마 기념이 너한테 얼마나 중요한 지도 알고, 모든 걸 바치고 싶은 마음도 이해하니까 상관 없는데. 혼자 하는 게 아니라 둘이 하는 것인 이상 합의는 꼭 필요한 거고. 굳이 사과할 필요는 없는 거잖아?”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그런데 어째서?”

라모누는 잠시 멈춰 있다가, 대뜸 그에게 몸을 가까이 해 기대왔다. 그녀의 얼굴을 매만지던 손을 잡아 천천히 내려 왼쪽 가슴 위에 올려 꾹 눌러주면서 말했다.

“역시 아니예요. 오늘까지는 괜찮아요.”

“라모누.”

트레이너는 엄청나게 성장했다. 그녀의 마유주머니에서 손을 떼 그대로 등으로 손을 돌려 안아 당길 줄 아는 자제력을 보일 정도로. 언제나와 조금 다른 포용력 있는 허그를 할 수 있을 만큼. 불편해지지 않는 선에서 그녀를 가까이 안으면서 작게 말했다.

“잔뜩 먹은 직후에 다이어트를 선언하는 건 바보같은 짓이야.”

“하지만 역시 굶주려 있죠?”

라모누가 조금 더 가까이, 그의 몸 구석구석을 휘감는 것처럼 밀착하면서 물었다.

“당신의 상태를 보면 알아요.”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그치만 안한다고 죽거나 하진 않아. 참을 수 있어. 길어야 40일인걸.”

“내가 아는 당신은 천하고 시시한 속물이예요.”

그녀가 그의 잠옷 자락을 꼭 쥐면서 중얼거렸다. 트레이너는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라모누의 귀가 옆으로 누워있었다.

“대놓고 남에게 성행위를 하자고 말할 정도로 뻔뻔하고 천박한 사람이예요.”

“아니, 그 때는 내가 좀 어떻게 돼서......”

“어떻게 돼야 그런 말을 하죠? 또 그렇게 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있나요?”

“내 이미지가 그 모양인 건 내 잘못이지만 그 때 분명 다른 우마무스메한테 관심 없다는 말도 했던 것 같아.”

“그때는 제 동생들과 교류가 없었죠?”

“아니,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는 거 아닌가. 내가 네 동생한테 손이라도 댈 까봐 이러는 거야?”

기가 막혀하는 트레이너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라모누의 꼬리가 천천히 그녀의 허리를 타고 넘어와 그의 허리 위에 놓였다.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하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서야 그녀의 귀가 원래대로의 각도를 되찾았다.

“네.”

“아니. 진짜로?”

“최근에 알게 됐어요. 남자들은 한 번 할 수 있으면 ‘나한테는 너밖에 없다’라거나, ‘다른 여자에게는 관심 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한다는 걸요.”

“아니, 라고는 말 못하겠는데 그거랑 이건 다른 것 같아.”

“또 최근에 알게 됐어요. 생각보다 처제를 그런 대상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는 걸.”

“대체 누가 알려준 거야.”

“도베르.......”

라모누가 얼굴을 그에게 더 깊이 파묻으면서 대답했다.

“......가 도보메 지로 명의로 낸 책에서요.”

“돌겠네.”

“저는 남녀의 일은 잘 몰라요. 누구에게 조언을 구하기도 어려워요. 단지 라이언이 비슷한 방식으로 지식을 얻고 있는 걸 알고 있었어요.”

“선 넘네.”

“이런 문답은 됐어요. 어차피 안 할 이유도 없잖아요?”

그녀가 몸을 움직여 뱀처럼 그의 위로 기어올라왔다. 똬리를 틀 듯이 그를 짓누를 때마다, 부드러운 잠옷과 살의 부피감이 스치며 조여드는 것 같았다.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달콤한 향이 났다. 그러나 트레이너가 고개를 저었다.

“있어. 안 할 이유.”

“뭔가요.”

“네가 아리마에 집중하고 싶어하니까.”

라모누의 동작이 멈췄다. 그의 위에서, 내려다보는 라모누의 눈에 확실한 감정이 깃들어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거리를 두고 보면 싸늘한 흔적만이 보이는 잿빛 눈, 이 정도로 가까워지면 알 수 있다. 거기 아직 불씨가 잠들어 있는 것을. 은은하게 타들어가며 다시 커질 날을 기다리는 기대감, 그리고 애정이.

“양심상 날 믿으라는 말은 못 하겠지만, 적어도 네 자신을 믿어주지 않을래? 나보다 레이스를 더 좋아하는 네 자신의 마음 말이야. 나는 레이스보다 널 좋아하지만, 레이스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널 믿고 따를 테니 말야.”

불씨가 연료를 받아 빛나는 게 느껴졌다. 열기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라모누의 눈이 떨린다. 하지만 떨린다는 건, 동시에 불안하다는 것이리라. 라모누가 귀를 늘어트리면서, 슬픈 듯이 인상을 구겼다.

“꿈을 꿔요. 아리마 기념에서 대패하는 꿈을. 거기서 저는 혼자 남았어요. 다른 이들의 환호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고, 레이스를 향해 보내는 사랑이 완벽하게 거절당하고, 경멸받는 꿈. 마치 제 자신의 기억인 것 같이 너무나도 생생한 꿈을요. 깬 다음에도 잊히지 않아서 몸서리치는 꿈을 매일 밤 꿨어요.”

그녀의 손이 그의 팔에서부터 타고 목으로, 턱을 넘어 볼을 향해 올라왔다. 그녀의 긴 손가락들이 그의 볼을 섬세하게 매만졌다.

“당신은 시시한 사람이예요. 레이스보다 절 더 좋아하니까. 하지만 당신은 남들과 달라. 나에게 무조건 고개를 숙이거나 끄덕이지 않았어요. 때로는 대등하게, 때로는 제 위에 서려고 했죠. 당신을 믿으라는 말을 못 하겠다고요? 전 항상 당신을 믿었답니다. 저 끔찍한 꿈을 비켜갈 운명을 함께 만들어갈 사람으로서 믿었어요. 그리고, 당신이 옆에 있으면 그 악몽을 잊을 수 있었어요.”

“라모누.”

“하지만 이제 내 자신을 믿을 수가 없어요. 당신을 레이스 만큼이나 좋아해요. 당신과 있으면 악몽을 잊을 수 있지만, 레이스에 바치는 순수한 사랑이 흐릿해지는 것 같아. 하지만 당신을 떼어내면, 악몽 속에 혼자 던져지는 것 같아.”

어떤 완벽한 것도 작은 흠결에서부터 무너져내린다. 산 사이를 틀어막은 댐이 자갈만한 균열로부터 무너져내린다거나, 나사 하나의 결함으로 다리나 빌딩이 붕괴해버린다. 완벽이란 결과가 아니라 현상에 지나지 않는다. 한때 완벽했더라고 해도 예외가 없단 뜻이다.

두려움과 불안이, 메지로 라모누를 안에서부터 무너트리고 있었다.

“완벽하고 고고한 메지로 라모누는 이제 없어요. 여기 당신의 위에 있는 건 어찌할 바를 모르는 메지로의 우마무스메. 시시한 여자...... 지금도, 레이스에 집중하기보다는 당신에게 미움받지 않을 선택을 하고 말았어요.”

옆으로 귀를 축 늘어트리고 눈동자를 파들파들 떠면서 라모누가 입술을 깨물었다. 들끓으며 올라오는 것 같은 감정을 억누르려고 애쓰지만, 무너져내린 댐은 더 이상 물을 가둬둘 힘이 없다. 트레이너의 잠옷이 조금 젖는다. 잠시 뒤에서야 트레이너가 그녀의 얼굴로 손을 올렸다.

“그런가. 시시한 여자가 되어버렸나. 그렇다면 라모누......”

그가 굳게 다문 입, 무감정해보일 정도로 평온한 눈으로, 라모누의 얼굴을 쓸어주었다.

“나는 조금 더 널 미워할게.”

“당신......”

다급하게 그의 손을 붙잡으려는 그녀의 손이 허공을 갈랐다. 그의 손은 어느새 볼을 넘어 그녀의 뒷머리를 진정시키듯이 쓰다듬고 있었다.

“내가 너 대신, 너보다 레이스를 더 좋아할게. 날 믿는다면, 그런 날 믿고 따라와.”

라모누가 숨을 멈췄다. 놀란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면서 한참을 굳어있다가, 조용히 무너지듯이 기대왔다.

“당신을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시시한 말은 됐어. 대답을 들려줘, 라모누.”

그녀가 가볍게 몸을 떨었다.

“네. 당신.”


서로에게 휘감긴 채로 시간이 흘렀다. 조금 진정되었는지 라모누가 몸을 움직여 그의 위에서 내려온다. 다정하게 그의 팔을 안아오면서, 입술을 그의 어깨에 두고 기댔다.

“그나저나 라모누.”

“말씀하세요.”

“날 다 안다니. 조금 오만한 말 아니야?”

“......그렇네요. 무례했어요. 사과할게요.”

트레이너가 가볍게 쏘아붙이자, 의외로 순순히 사과하는 라모누. 이전이라면 정말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연달아 일어났다. 하지만 트레이너는 거기서 만족하지 않는다.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몸을 일으켜, 그녀의 겨드랑이 쪽으로 팔을 넣어 일으켜세웠다.

“그 말을 해야 할 사람이 더 있지 않아?”

“네.......?”

“네가 다 안다고 생각한 사람들 말야. 이 집에도 더 있지 않을까?”

“.......”

트레이너가 라모누의 잠옷 매무새를 다듬어주고, 문 쪽을 가리켰다.

“지금이라면 다른 면모를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어때, 아르당부터, 시작해보지 않을래?”

“......이해했어요. 대신, 잠시 기다려주세요.”

“어디 안 가니까, 안심하고 다녀와.”

“......후훗.”

싱긋 웃고는, 라모누가 얼굴을 가까이 가져와 그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몇 번이나 절 놀라게 하시네요. 당신. 역시, 처음 절 놀라게 했을 때 그냥 넘어가길 잘했어요.”

“무슨 말이야?”

라모누가 자리에서 일어나 걸어 문을 열고, 그를 돌아보며 다시 생긋 웃었다.

“아무리 저라도, 그런 폭언을 듣고 아무렇지 않았겠어요?”

문이 닫히고, 떠나면서도 볼에 남긴 라모누의 온기를 매만지면서 트레이너가 허허 웃었다.

“널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라모누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돌아왔다.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 있었다. 입가를 가리면서 다소곳하게 웃고, 그녀가 입을 열었다.

“후훗, 자매가 이렇게 가깝게 느껴진 게 얼마만인지. 아르당이 그렇게 웃을 줄 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요. 정말,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조곤조곤, 방에 있었던 일을 속삭이면서 침대에 돌아왔을 때에야, 라모누는 거기서 들려오는 규칙적인 호흡을 느꼈다. 기다린대놓고 어느새 잠이 들어버린 그의 약간 벌어진 입과, 어쩐지 불편해보이는 자세, 그러나 여전히 그녀가 누워있던 방향으로 돌아누운 모양새를 말없이 차근차근 내려보았다. 관찰하듯이, 눈에 새기듯이.

“정말, 시시한 분......”

그녀가 눈을 감아 웃으며, 방 한 구석에 세워진 이젤을 침대 가까이 가지고 와 앞에 앉았다. 반려될 사람이 될 사람을 깨우지 않으려 조심스럽게 연필을 꺼내든 그녀가, 이젤 뒤에 펼쳐진 완벽한 그림을 조용히 캔버스 위에 옮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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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달 조금 넘는 기간, 중대한 대회를 준비하는 것 치고는 평소와 다를 것도 없는 훈련 메뉴의 연속이었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라모누의 트레이너실이 이전보다는 조금 시끄러워진 정도일까. 오늘은 메지로 맥퀸이 초대받아 식탁 앞에서 기대감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역 근처에서 한정수량만 판매하는 케이크...... 큰언니, 정말로 이걸 저랑 드시겠다구요?”

“물론이지. 오히려 너랑 먹고 싶어서 샀단다.”

“사기는 내가 샀지만 말이지.”

책상에 앉아 코스 데이터와 랩타임을 검토중인 트레이너가 덧붙였으나 라모누는 흥, 하고 짧은 소리로 대응하며 케이크 상자를 열어 맥퀸의 앞에 놓아주었다.

“사소한 정보는 아무래도 좋잖아요.”

“그건 그래.”

“큰언니, 감동이어요! 정말 감사드려요! 형부 되실 분 되실 분도 감사드려요! 그럼 즉시 파쿠......어맛.”

큰 실수를 했다는 걸 깨닫고 입을 가리며 얼굴을 붉히는 맥퀸을 바라보며 라모누가 빙긋 웃었다.

“그래. 더 기다리지 말고 파쿠파쿠하자.”

“파쿠파쿠데스와!”

게 눈 감추듯 사라져가는 케이크를 곁눈질하면서, 트레이너는 속으로 ‘정없는 년들’하고 중얼거렸으나, 공식적으로는 레이스를 무엇보다 사랑하는 중이기 때문에 내색하지 않았다. 스멀스멀 아랫배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꼬움이 있었지만, 어쩌면 라모누도 이런 감정을 속에 품고 몇 년을 보내왔을지 모른다 생각하니 조금 더 그녀와 가까워진 기분도 들었다.

완전히 만족해 싱글벙글 돌아가는 맥퀸을 배웅하고 트레이너실 문이 닫히자, 라모누가 하아, 하고 깊이 한숨을 쉬면서 돌아섰다.

“이전에도 동생들이 귀엽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요즘 부쩍 더 그런 느낌이 드네요.”

“친애도가 올라가는 느낌이 들어?”

“네. 메지로 가의 일원, 동생이라는 이름을 치우고 나니, 동료 우마무스메로서 동생을 느끼게 되었네요. 이전과는 다른 각도에서 바라보니 새롭게 빛나는 부분이 많아요. 물론, 아가씨로서 저런 모습은 좋지 않다 싶지만요.”

“아가씨 치고는 나사빠진 모습이긴 하지.”

“제 동생을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내 처제 될 아이 될 아이기도 한데.”

트레이너가 가볍게 웃으며 라모누를 손짓해 불렀다.

“하지만 저 아이, 가장 메지로다운 달리기를 하는 아이야. 그리고 가문이 준 사명대로 천황상을 훌륭히 연패했지.”

“그렇네요.”

“항상 완벽할 필요는 없어. 라모누.”

어느새 그의 허벅지 위에 와 앉은 라모누의 허리를 감아 안으면서 말했다.

“야구도, 9회말 투아웃까지 지고 있어도 괜찮잖아. 경기가 종료되는 순간에만 이기면 되는 거야.”

“전 야구는 잘 몰라요.”

“네 달리기. 선행책 말이야. 아무리 앞서 달린다고 해도 항상 선두인 건 아니잖아. 하지만 선두를 무리해서 탈환하려고 하지는 않지. 그건 왜 그래?”

“마지막 전력을 다할 지점에서 앞서가 이길 수 있을 거라 믿기 때문이죠.”

“그런 거야. 너는 골라인을 넘어서는 그 순간에만 완벽하면 돼. 조금 더 욕심내면 라스트 1펄롱 정도일까. 우위와 열위가 승리와 패배로서, 결과로서 확정되는 그 순간에만 완벽하면 돼. 화보 사진을 찍는 것처럼 말이야.”

“레이스는 원 테이크라는 점만 빼면요.”

“사소한 차이까지 쩨쩨하게 지적하지 말자고. 그릇이 작아보이니까. 아무튼 중요한 건......”

라모누가 장난스럽게 그의 귀에 속삭였다.

“꺾이지 않는 마음?”

“......완벽해야 할 순간에만 완벽하면 된다는 거야.”

“네. 알려주셔서 고마워요. 당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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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트가 열렸다. 좋은 출발을 했지만 완벽한 출발은 아니었다.

두렵지 않았다.

첫 코너를 도는 시점에 라모누의 순위는 8위, 상정한 것보다 앞선 우마무스메들의 견제가 심했다.

염려되지 않았다.

2코너를 지나 3코너로 나아가는 직선, 인코스가 여의치 않아 바깥쪽으로 우회하면서 생긴 거리상의 손실 탓에 상정보다 선두와의 거리차가 있었다.

긴장감에 몸이 굳어버리지 않았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레이스 전개와, 반복적으로 꿨던 꿈이 겹쳐졌다. 마지막까지 뻗지 못하고 결국 침몰해버리는 꿈, 다리를 아무리 재촉해도 닿지 않는 절망감을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계획대로 되지 않았다. 조금도 완벽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이 편안했다. 완벽이란 단지 현상에 대한 기술일 뿐, 역설적이게도 영속하는 상태가 아니란 것을 이제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언제든지 완벽하기 위해 도전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에.

“메지로 라모누, 승부에 나서는가? 이른 타이밍에 치고 나간다?”

가장 메지로다운 달리기, 레이스를 지휘하듯 앞을 점유하고 그대로 우세를 승리로 만드는 것. 하지만 그게 불가능해졌다고 메지로의 이름을 버릴 필요는 없다. 메지로를 대표하는 단어는 역시 스테이어다. 그리고 스태미너다. 조금 느려도 괜찮다. 그 스피드를 긴 시간 유지한다면 결승 지점에서 앞지를 수 있다.

“선두는 도주중인 덴세츠 테이오, 4마신 뒤 사쿠라 유타카 오, 안쪽 마더즈 블러드, 탱고 다이나, 메지로 라모누 올라온다. 올라온다.”

완벽해야할 순간이 왔다고 느꼈다. 알 수 있었다. 스퍼트에 가까울 정도로 페이스를 올려 라모누가 올라가기 시작했다. 코너를 돌면서, 앞서 마군을 형성하고 경합 중인 우마무스메들의 바로 뒤로, 바깥쪽으로 빙 돌기 시작한다. 그녀의 기세를 감지한 마군의 일원들도, 더는 상황을 지켜볼 수만은 없게 되었다. 라모누가 주도하는 게임판에 뛰어들 수밖에 없게 되었다. 상대를 말려죽이는 메지로의 달리기가 시작되었다. 부러지는 순간 지게 된다.

“최종코너를 돌아 마지막의 순발력 대결이 되겠습니다만, 안쪽에서 사쿠라 유타카 오! 바깥에서 메지로 라모누! 사이에서 마더즈 블러드! 마더즈 블러드! 탱고 다이나 온다! 탱고 다이나 온다! 사쿠라 유타카 오 힘냈다! 사쿠라 유타카 오 힘냈다!”

제일 먼저 부러진 건 벚꽃이었다. 발군의 스피드를 자랑했지만, 화무십일홍이었다. 뒤이어 벚꽃과 경쟁하는 전사의 혈통이 무너져내린다.

“바깥에서 힘을 다해! 메지로 라모누! 메지로 라모누! 탱고 다이나! 탱고 다이나!”

파란을 부르는 천황상 우마무스메와 라모누와의 마지막 경합, 황제를 제압했던 강렬한 스탭이었으나, 가을의 방패를 가진 우마무스메도 봄의 방패나 다름없게 짜인 판에서 위세가 약해진 것인지 뻗을 수 없었다.

“나란히 골인!”

결과가 확정된다. 코 차이.

나란히라는 건 그러나 현상의 기술일 뿐이었다. 실질적으로 그 코 차이는 질투조차 닿지 않을 거리였다. 절망과 영광을 가르는 종이 한 장의 차이, 뒤집을 수 없는 코 차이 압승.

“트리플 티아라 우마무스메 메지로 라모누, 일본제일이 되었습니다!”

바람이 불었다. 메지로 라모누의 머리를 뒤로 넘겼다. 그녀의 월계관 모양 머리장식이 벗겨져 바닥을 구르고, 풀어진 머리가 바람에 자유롭게 날렸다. 그녀의 머릿속을 조이고 괴롭히던 악몽이 바람에 날려 나카야마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그녀는 장식을 줍기 위해 돌아서지 않았다. 대신에 기다리고 있는, 자신의 트레이너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활짝 웃으면서 그녀가 양 팔을 벌려 트레이너를 향해 소녀처럼 총총 뛰어갔다.

그리고 거리가 가까워오자, 그대로 양 발을 디뎌 도약해 트레이너에게 드롭킥을 날렸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직격당해 그대로 바닥에 쓰러져버리는 트레이너, 관중석에서 경악에 찬 소리들이 터져나왔다. 쓰러진 트레이너의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라모누가 말했다.

“당신은 내 인생을 망쳤어. 완벽한 메지로의 지보였던 나를, 시시한 여자로 떨어트렸지. 내 몸과 마음을 가져갔고, 마치 자신의 소유인 것처럼 굴었지. 이전의 나는, 완전히 부서져 사라져버렸어. 지금도, 레이스에서 이긴 것보다도, 떨어져 바닥을 구르는 머리장식보다도, 엉망진창 날리는 머리카락보다도 당신을 만나는 걸 더 신경쓰게 만들었어.”

트레이너는 대답이 없었다. 그래도 절묘하게 힘조절한 드롭킥이다. 큰 상처는 없고 그냥 좀 놀랐을 뿐이다. 메지로 라모누는 자세를 낮추어 쪼그려 앉아 그에게 좀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갔다.

“그리고 당신은, 그렇게 부순 내 인생을 구원했어.”

활짝 웃으면서, 라모누가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목에 팔을 감아 안았다.

“내 트레이너, 내 완벽하게 시시한 사람, 사랑을 증명해줘서 고마워요.”

속삭이듯 말한 그녀는, 팔을 감은 그대로 이번에는 얼굴을 떼고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방금보다 조금 더 크게, 주위에서 속도를 죽여 달리는 우마무스메들, 결과를 곱씹던 이들, 관중, 트레이너들, 그리고 카메라, 무엇보다 메지로 라모누 본인과 트레이너도 처음 들을 법한 소리를 냈다.

“사랑해요. 어쩌면 레이스보다도 더.”

그녀의 트레이너는 멋쩍게 등과 엉덩이의 먼지를 털고, 손을 턴 다음 환하게 웃으며 그녀의 등과 허리를 감아 안으며 대답했다.

“드디어, 일심동체가 되었네.”

나카야마의 짧은 직선을 타고 퍼져나간, 레이스와 아무런 관계 없는 말들.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그 증인이 되어주었을 것이다. 그 중 하나인, 보라색 모자를 눌러 쓴 메지로 아사마가 일어서 외쳤다.

“시시하다, 메지로 라모누!”

“시시해요, 큰언니!”

옆에 앉아 지켜보던 메지로 아르당도 외쳤다. 뒤이어 들려오는 메아리들이 있었다.

“시시한 사람들......”

라모누가 기쁘게 웃었다. 저들과 같은 우마무스메가 되었다는 게 싫지 않은 것 같았다.

“당신, 아내 될 사람이 저런 모욕을 받는데 그냥 가만히 있을 건가요?”

“그럼 어떻게 할까?”

나비가 날개를 접듯, 메지로 라모누가 눈을 살포시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시시한 일을 해 줘요. 완벽하게.”

둘 사이의 짧은 직선을 트레이너의 얼굴이 날듯이 다가갔다. 레이스와 아무 상관 없는 시시한 결말, 그러나 아마 어떤 꿈보다 행복한 현실로서 막을 내리기 좋을 것이다. 조금 더 길게 이어져도 괜찮을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