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날을 맞은 중앙 트레센의 교정 한 벚나무 아래, 키가 큰 우마무스메와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가 서 있었다. 수줍게 손에 든 커다란 초콜릿을 내밀며 얼굴을 붉히는 트윈테일의 우마무스메, 한참을 머뭇거리다가 속에 품어둔 마음을 꺼내놓는다. 오랫동안 감춰둔 커다란 속마음, 트레이너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이윽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우마무스메, 히시 아케보노의 눈에 조용히 눈물이 들어찬다. 환희와 기쁨으로 벅차오르는 기분을 주체하지 못하고 손을 떨었다.


"트레이너, 그럼 우리......"


트레이너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조용히 눈물을 떨어트리며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트레이너가 내 맘을 받아주다니......"


천천히 트레이너에게 다가가면서 그녀가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꿈만 같아......!"



따르르르르르르릉!


갑자기 귀청을 울리는 알람 소리에 눈을 떠 보니, 어느새 4시였다.


딸깍.


알람시계를 끈 히시 아케보노는 눈을 떠, 아직 어둠이 깊은 기숙사의 익숙한 천장을 바라보았다. 가볍게 한숨 쉬면서 쓰게 웃었다.


"......역시 그런가."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옷을 갈아입고, 위생모와 마스크, 니트릴 장갑 따위를 챙겨 나온다.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그 고백으로부터 몇 년이 지났다. 트윙클 시리즈가 끝나고 마음을 전했을 때, 아케보노의 꿈과 실제 트레이너의 대답은 정 반대였다. 그의 생각에 그녀는 너무 컸고, 너무 착해 빠졌다고 했다.


"미안. 네가 대가 없이 주는 것들...... 솔직히 말하면 빚지는 기분이 들어. 부담스러워. 너도 좀 더 살아보면 알 거야. 대가 없는 친절은 때때로 무서운 거거든."


결정적으로 이미 트레이너에게는 만나는 사람이 있었다. 아마도 결혼을 전제로. 자신이 비집고 들어갈 틈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을 때, 그녀는 언제나처럼 방긋 웃으면서 대답했었다.


"응, 응. 그렇구나아. 알았어, 토레나. 그, 괜한 말 해서 미안해......"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애쓰면서, 괜한 말이 되어버린 자기 마음을 다시 꾹꾹 눌러담으면서 돌아선 그녀는 그저, 트레이너를 보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없었다.



계약도 그걸로 끝났다. 그리고 졸업, 그녀는 트레센 학원의 영양사로 취직해 일하고 있었다. 이른 시간에 출근하는 건 조리업무 보조를 위해서기도 했다.


아직 차가운 새벽공기에 그녀가 내뿜는 한숨이 하얗게 퍼져나간다. 조금 허탈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던 아케보노는 볼을 양 손으로 몇 번 두드리면서 정신을 차려 웃었다.


"오늘도 힘내자."


트레이너에게야 장점으로 보이지 않았지만, 남을 돕기 좋아하는 선량한 그녀의 성격은 모두가 필요로 하는 것이었다. 중앙 트레센 학원의 우마무스메가 얼마나 많이 먹는지 생각하면, 아케보노의 존재만으로 확실하게 업무부담을 줄여주고 있다.


새벽 5시, 조리실의 창문으로 연기와 김이 살벌할 정도로 빠져나온다. 준비된 식재를 몇몇 조리원이 분주하게 나르는 뒤편, 커다란 철제 솥 앞에서 아케보노는 긴 주걱을 움직여 밥과 재료를 젓는다. 그녀의 눈 앞에서 오므라이스에 들어갈 밥이 춤을 춘다.


주방, 특히나 대량조리를 하는 곳이라면 힘 쓸 일이 많다. 아케보노가 가진 힘이 여기서도 진가를 발휘한다. 조리 시작시간을 30분 앞당길 수 있는 것도 그녀 덕분이다. 보통 인간에 더해 우마무스메도 섞여있는 트레센 급식실이지만, 그들 중 누구도 아케보노처럼 한 번에 무거운 것을 옮길 수 없다.


힘든 일을 견딜 만한 일로 바꿔주는 정도의 힘에 더해, 어떤 상황에도 불평하는 법이 없는 생글생글 웃는 그녀의 성격은 견딜 만한 일을 조금은 즐거운 일로 바꿔주는 힘도 있었다.


바깥에서 요란한 구보 소리가 들리는 새벽 6시 10분이 되면, 업무가 끝나고 휴식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까지 생겼다. '트레센!' 하는 구령 소리에 맞춰서 아침 달리기를 하는 학생들을 바라보면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도 있고 약간의 동경이나 보람을 담아 바라보는 사람도 있다.


"......."


한때 저 달리는 무리의 한 명이었던 아케보노는 말없이 앉아 물을 마시며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스완 스테이크스, 타카마츠노미야 기념, 스프린터즈 스테이크스 등을 우승한 명 스프린터였던 그녀였고 달리는 것도 좋아했지만 이제와서는 그 모든 게 꿈만 같다.


아직 그녀의 팬들이 남아있는 것도 안다. 레이스를 보러 가거나 하면 알아봐주거나, 함께 사진을 찍거나 사인을 해주는 일도 있다. 하지만 어딘지 공허하다. 무릎에 생긴 고질적인 문제 탓에 예상보다 일찍 은퇴한 데다가, 트레이너에게는 자기 아이덴티티이면서 최고 장점을 어필할 수 없었다. 잘 되지 않았다. 마지막이 좋으면 다 좋은 거라 하는 세상에서, 마지막이 여러모로 좋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그녀는 스스로 결론지었다. 꾸깃꾸깃 물병이 그녀의 손 안에서 찌그러졌다.


"저는 슬슬 돌아갈게요."


"언제나 고마워요."


자리에서 일어나 말하자, 한 조리원 아주머니가 감사를 전한다. 싱긋 웃어 대답을 대신한 그녀는 잠시 방에 돌아와 옷을 세탁기 안에 던져넣고 샤워를 했다. 다른 옷으로 갈아입은 그녀가 다시 학원의 본관에 들어섰다. 영양사실에서 원래 업무를 보기 위해서였다. 아직은 이것저것 배울 것이 많다. 피곤할 법도 하지만 차라리 피곤한 게 낫다. 애매하게 정신이 깨어있으면 아까처럼 꿈을 꿀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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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근 도장을 찍고 얼굴 도장을 찍은 다음은 급식실에서 식판을 챙겨 아침 식사를 한다. 아케보노는 자기가 만든 음식을 다른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는 걸 좋아했다. 그녀 자신도 몇 시간을 일했으니 배고플 때이기도 했다. 잔뜩 받아다가 교직원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잘 먹겠습니다."


손을 모아 감사기도를 하고, 숟가락을 들기 전에 주위를 한 번 힐끗거렸다. 혹시 오늘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있을 지 기대하면서.


그녀의 트레이너는 아직 학원에서 일하고 있다. 우수한 스프린터를 양성한 성과도 있고, 다음 담당을 구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느끼기에도 똑똑하고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마 다음 담당도 좋은 성적을 남기고, 행복하게 달리게 해 주겠지. 그치만 그보다는, 역시 그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 행복이 자신과 함께가 아니라도 좋다.


"......오늘도 없네."


이틀째 보이지 않는다. 다른 일이 있거나, 어쩌면 식사를 하고 와서 들르지 않는 것이리라. 그가 보이지 않는 것에 조금 실망하면서 보노는 숟가락을 들었다. 오므라이스의 가운데를 갈라 안의 밥을 확인했다. 별다른 의미는 없고, 자신이 일을 제대로 했는지 반성해보는 시간이다.


"안녕하세요, 히시 아케보노 영양사."


"이사장 비서님. 좋은 아침이예요."


일이 아니었다면 조금 무례하게 보일 정도로 밥과 반찬을 뒤적거리던 그녀가 식사를 시작했을 때, 앞에 식판이 놓였다. 언제나의 녹색 옷을 입은 하야카와 타즈나 씨가 맞은 편에 앉았다.


"일은 좀 어떠세요? 동료평가가 아주 좋던걸요."


"아직 정신 없어요. 그래서 좋은 점도 있구요."


"그런가요."


아케보노의 눈치를 한 번 살핀 타즈나는 다음에 하려던 말을 그냥 삼켰다. 긴 사회생활이, 때로는 건드리지 않는 게 좋은 부분이 있단 걸 알려주었기 때문에. 잠시 말없이 식사를 떠 넘기던 두 우마무스메, 타즈나가 맛있다는 말을 건네고, 대답 대신 아케보노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그, 혹시, 트레이너는......"


"네?"


조금 당혹스러워하는 타즈나의 반응에 아케보노의 마음이 내려앉는 것 같았다. 뭐라 둘러대려고 운을 떼던 그녀는 마음을 굳힌 듯 눈을 감고 잠시 생각하다가 짧게 말했다.


"어제 갑자기 무단 결근을 하더니, 밤에 갑자기 사직서를 제출했더라구요."


"사직서를......?"


"네......결혼하게 되었다나요."


그 말을 하면서 타즈나는 아케보노의 눈치를 다시 한 번 살핀다. 그녀와 트레이너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는 상황에서 꺼내기 조심스러운 말이었다. 하지만 사실을 숨기는 것도 어떤 상처를 입힐 지 모른다. 나중에 아느니 지금 아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아케보노는 잠깐 고개를 숙여 식판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오만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지나다녔다.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벌써 몇 년이나 만났으니 결혼을 결정하는 것도 이상하지 않다. 곧 봄이 찾아오니까 행복한 한 쌍이 되겠지. 하지만 위화감도 있다.


"분명 담당이, 곧 시니어 급에 접어드는 걸로 아는데요."


"네. 계약 문제는 학원에 일임한다고 하더군요."


“직접 출근해서 말한 건가요?”


“아뇨. 사직서에 같이 적혀 있었어요.”


잠시 침묵, 타즈나는 튀김을 뒤적거리고, 아케보노는 애먼 오므라이스를 숟가락으로 초조하게 조각내고 있다.


“이상하지 않나요. 그렇게 담당을 중요한 시기에 내팽개칠 사람이 아닐 텐데요.”


“이상하죠. 그치만 이미 일어난 일이니, 이상하고 말고도 없죠.”


타즈나가 새우튀김을 하나 입에 넣고 씹으면서 대답했다. 조금 지친다는 표정이기도 했다. 그녀가 여기서 일하는 동안, 이런 ‘이상한’ 일을 얼마나 겪었겠는가. 그런 이상한 일들로 희생당한 우마무스메들을 얼마나 많이 마주했겠는가.


“아주 없는 일도 아니니 일단 이사장님께도 올려는 두었지만요. 솔직히 뒷처리를 하는 입장을 배려해줬으면 하네요......”


그 한숨으로 식사 자리가 단숨에 타즈나의 푸념 자리로 변해버린다. 온 학원이 뾰이촌이라느니, 담당에게 코가 꿰여서 그만두는 트레이너는 얼마나 많으며, 이전 담당과 지금 담당의 치정 문제라든지 하는 여러 이야기들이 그녀의 입에서 쏟아져나온다. 음식을 먹으면서도 자유롭게 입을 출구로 쓸 수 있는 스킬이 놀랍기만 했다.


“자기 마음을 받아주지 않는다고 강제로 트레이너를......아.”


타즈나가 젓가락과 입을 멈춰버렸다. 하면 안 될 말을, 하면 안 될 사람에게 해버린 걸 깨달은 모양이었다. 보노는 조용히 음식을 입에 넣으며 식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주워담기도 늦었다, 타즈나가 갈 데까지 가보자고 생각했는지 눈을 질끈 감아버린다.


“이런 말 하기도 뭣하지만 보노 씨도, 기회가 있지 않았나요?”


“그치만 그건, 토레나가 불쌍한걸요...... 누굴 좋아할 지는 토레나 자유니까.......”


“그건 그렇죠. 가끔 그 당연한 상식이 먹히지 않아서 그렇지.”


“......잘 먹었습니다.”


오므라이스 한쪽 끝을 그대로 남긴 채 보노가 손을 모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쩐지 기운이 없어 보여 타즈나가 걱정한다. 괜찮다고 웃으면서 아케보노가 작게 대답했다.


“혹시 내일부터 이틀 정도, 연가를 쓸 수 있을까요?”


아케보노가 영양사 업무를 시작한 지도 벌써 2년 조금 넘었다. 그동안 단 하루도 쉬지 않았으니 확실히 뭔가 이상하긴 했다. 충격이 컸을 수도 있겠다. 타즈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관련 절차를 도와주겠다고 말하는 외에는 선택지가 없었다. 식당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이 어쩐지 작아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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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숙사에 도착하자 안에 웬 우마무스메 둘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트레센 저지를 입고 있었지만 본 적이 없는 얼굴이다. 돌아온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묻는다.


“히시 아케보노 씨?”


“그런데요?”


“저희가 찾는 물건이 있어서요. 최근에 OO 트레이너 씨에게 택배 받으신 거 있죠?”


“그런데요?”


대답 대신에 척, 하는 소리와 함께 접이식 나이프가 날아든다. 황급히 팔을 들어 막았지만 피가 튀었다. 뒤이어 찔러들어오는 팔을 손바닥으로 쳐 궤적을 틀어버린 뒤 그대로 잡아 돌려버렸다. 팔이 부자연스럽게 돌아가 뒤를 보고 선 우마무스메가 비명을 지르는 앞으로 다른 우마무스메가 나이프를 질러들어왔다. 잡고 있는 우마무스메로 나이프를 막아버리고 앞으로 강하게 밀자 둘이 떠밀려 벽에 부딪혔다. 그대로 달려들어 뒤쪽 우마무스메의 목을 잡아 들어올리고, 나이프를 쓰기 전에 복부에 주먹을 먹이자 컥, 하고 숨을 멈추더니 조용해진다. 그대로 내리꽂아 쓰러진 우마무스메 위에 얹어버린다.


경찰에 연락을 넣고 방 안으로 들어가 트레이너에게 온 택배 상자를 열어본다. 며칠 뒤에 찾으러 갈테니 잠시만 맡아달라고 한 물건, 마일 훈련용 레이싱 슈즈가 들어있었다. 신발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그녀가 밑창에 부자연스럽게 튀어나온 부분을 발견하고 열어봤다가 이내 덮어버린다. 눈을 질끈 감는다.


“토레나, 대체 무슨 일을......”


잠시 생각하던 그녀는 신발을 상자 안에 다시 넣고 옷장 안에 모셔둔다. 피를 닦고 반창고와 붕대를 감고 있는데, 하야카와 타즈나를 대동하고 형사 하나가 순경 둘을 데리고 왔다. 아케보노와 눈을 마주치고 쓰게 웃으며 신분증을 내보였다.


“경시청 형사부 제 1 기동수사대, 비코 페가수스입니다. 잠시 동행해주시죠.”


휴가 첫 날이 엉망이 되는 순간이었다. 조사를 받고 돌아오니 어느새 저녁이 되어있었다. 침대에 누워 옷장을 바라보며 조용히 생각하던 그녀는, 억지로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도 꿈도 오지 않았다.



“응, 나야. 그, 저번에 말해준 거 말인데.”


다음 날 오전 아케보노는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 너머로 조금 걸걸한, 높은 톤의 목소리가 당혹감을 표현한다.


“아니, 보노야. 잊어버리라니까. 그거 그냥 술김에 한 말이라고.”


“내가 잊어버릴 줄 알고 한 말이야?”


“......아니지.”


“그럼 그 회사 위치 찍어서 우마톡으로 보내.”


단호하고 짧은 그녀의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힘,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아으, 하고 곤란해하면서도 걱정하는 것도 같다.


“보노야. 너 숨기는 거 있지.”


“너랑은 상관 없어.”


“왜 상관이 없어. 나한테 이런 부탁까지 하는 마당에.”


“이거 부탁 아니야. 요구야.”


“보노야.”


히시 아케보노의 얼굴이 찌그러졌다. 아마 그녀를 꽤 오래 알고 지낸 사람도 본 적 없는, 분노로 벌개진 표정. 이를 악물고 그녀가 수화기에 으르렁댔다.


“두 번 말하게 하지 마. 그 회사 위치 찍어서 우마톡으로 보내. 당장!”


“하, 씨발......알았어. 알았으니까, 화 내지 마.


“......미안.”


“됐어. 아, 저번에 부탁한 거, 윈디가 구해놨다더라. 나중에 찾아가라.”


“항상 고마워.”


“친구잖아.”


뚝, 하고 전화가 끊어지고 얼마 안 있어 우마톡으로 위치 정보가 찍혀 나왔다. 트레센 학원 근처 상점가에서 조금 벗어난 뒷골목, 인력 등을 취급하는 작은 사무실의 위치가 나타났다. 말 없이 핸드폰 전원을 꺼 주머니에 넣으면서 아케보노는 방에 들어가 어두운 색 후드티와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었다.



담배 연기가 자욱한 사무실에는 책상에 앉은 남자가 한 명, 우마무스메가 3명, 입구 쪽에 덩치가 조금 더 큰 우마무스메가 1명 있었다. 아케보노가 거기 도착했을 때 시계는 막 10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어디, 어떻게 오셨어?”


“OO 트레이너. 알지?”


트레이너의 이름을 들은 남자가 담배를 재떨이에 거칠게 비벼 끄면서, 입구 쪽에 선 우마무스메에게 턱짓을 했다. 문과 아케보노 사이를 거칠게 막아선 그녀가 팔을 휘감아 목을 조르려 했다.


“끄아아아악!”


아케보노의 편자 박힌 신발이 그 우마무스메의 발을 짓밟아 으깨버리지 않았다면. 상대의 발을 밟은 발을 축으로 삼아 그대로 돌아 허리에 무릎을 꽂자 우드득하고 안에서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뒤이어 우마무스메들이 나이프를 뽑아 달려들었으나 휘두르는 중간 궤적에 팔을 붙잡혔다. 홱, 하고  엄지가 몸 안쪽을 향하도록 팔이 돌아가버렸다. 아케보노의 왼쪽 손바닥이 뺨을 때리자 비명소리도 끊겨 그대로 바닥에 날아가 쓰러졌다. 하나 하나 팔이 꺾이고 손목이 꺾여 내던져지자 남자는 일어나 도망가려고 했다.


아케보노가 발을 디뎌 책상을 힘껏 걷어차자 책상이 뒤로 쭉 밀려나면서 남자를 벽에 끼게 만들었다. 고통으로 숨을 멈추면서도 남자는 양 손으로 책상을 밀어내려고 했으나, 그를 내려다보는 히시 아케보노와 눈을 마주쳤다. 그녀의 발 한쪽이 책상 끝에 올라가 있었다.


“OO 트레이너. 알지?”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새끼야아아아아!”


아케보노의 발이 책상을 꾹, 누르자 팔의 저항도 의미 없이 남자의 복부와 명치께가 짓눌린다. 잠시 숨을 돌릴 수 있게 느슨하게 풀어준 뒤에 다시 한 번 묻는다.


“OO 트레이너. 알지?”


“몰라, 모른다고. 모른다고!”


“생각나게 해 줄게.”


그녀의 발이 책상을 밟기 직전 천천히 후퇴하는 걸 보고 남자가 사색이 된다.


“알게, 알겠어! 말할게!”


“그런 말은 좀 더 빨리 해야 했어.”


“끄아아아아악!”


한동안 부러지지 않을 정도로 절묘하게 책상을 밟아 남자를 짓누르던 아케보노가 발을 뗐을 때, 남자는 가쁘고 쉰 호흡만 붙들고 있는 게 고작이었다. 머리채를 잡아 들어올려 책상에서 꺼내 질질 끌고 나가는 동안에도 남자는 별다른 저항을 하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외진 골목, 너저분한 철반에 ‘페브러리 자원’이라고 쓰인 옆으로 난 골목 안쪽으로 들어가자 빨간 나무문이 나타났다. 문을 두드리자 위쪽의 작은 구멍이 열리면서 눈이 드러난다.


“아케보노. 오랜만인 거다.”


“104호, 비어있지?”


“......그 일은 요즘 안하는 것이다.”


“이번 한 번만. 2명.”


므므므, 하고 생각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신코 윈디가 왼쪽 복도를 가리키면서 짧게 말했다.


“빨리 끝내는 거다.”



104호라고 된 방에는 책상과 등, 간단한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의자 하나에 남자를 거칠게 앉혀다 묶고 물을 가져다 뿌리자 정신을 차린다.


“잘 잤어? 생각은 정리 됐고?”


“이 미친 년, 미친 년아!”


“다시 정리해.”


아케보노가 남자의 머리를 눌러 귀를 책상에 바짝 붙이고, 주먹으로 책상을 쾅쾅 두드리기 시작한다. 우마무스메의 진심 주먹을 견디는 튼튼한 금속제 책상이지만, 그만큼 강렬한 진동과 소음을 남자의 고막에 직접 전달한다. 몇 번이나 비명을 질러대지만 아케보노는 꿈쩍도 하지 않고 책상을 두드려 댔다. 해머로 공사를 하는 것 같은 소음이 이어지고 녹초가 된 남자를 다시 앉혀둔다.


“생각은 정리 됐어?”


“나는 진짜, 아무것도 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한 거야. 새로 손대기 시작한 물건이 있는데, 그 년놈들이 빼돌려서......”


“새로 손대기 시작한 물건? 그 년놈들? ”


“......윗선에서 새로, PED를 거래하기로, 했어. 딥 이펙트, 샘플...... OO 트레이너랑 여자친구인가 하는 년이 그걸.......”


아케보노가 의자 다리를 난폭하게 걷어차자 박살나면서 바닥에 처박힌다. 남자가 땅바닥을 굴렀다. 그의 고개 바로 옆을 쿵, 하고 짓밟으면서 그녀가 윽박질렀다.


“확실히 OO 트레이너랑 여자친구 맞아?”


“맞아! 확실하다고! 진짜야!”


“그래서, 네가 한 일은.”


“나는 그냥, 걔들 잡아다 윗선에다 넘긴 것 뿐이야......정말이야. 그냥 짐꾼이라고......”


“어디다 넘겼어.”


“그, 그그, 그게......”


한창 그러고 있는데 진동 소리가 들렸다. 남자의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아케보노가 그걸 뺏아다 발신자 이름을 확인하고 받는다. 심기 불편한 남자의 욕설이 인사를 건네온다.


“뭐가 그렇게 바쁘신데 전화를 안 받으세요. 이 씨발람아.”


“지금 진지한 얘기 중이니까 다음에 전화해라.”


“어랍쇼? 뭐여, 누구? 애인?”


“그러는 너는 이 새끼의 누구냐? 애인?”


“야, 뭔데? ~~ 어딨어. 너 누구냐고!”


아케보노가 남자의 허벅지에 발을 올려 체중을 약간 싣자 남자가 고통에 찬 소리를 올린다. 전화 너머로 그 소리에 약간 당황한 기색이 느껴졌다.


“아이, 씨발! 너 누구냐고! 뭐하는 지 몰라도 ~~한테 손대기만 해!”


“이야. 짐꾼 복지 죽여주네.”


아케보노의 편자가 남자의 허벅지를 더 강하게 짓누른다. 남자의 비명에 맞춰 더 다급한 욕설이 돌아오는 걸 보고 그녀가 짧게 말한다.


“너 혹시 OO 트레이너라고 아냐?”


“얼레, 씨벌. 여기서 그 이름이 왜 나온대?”


“알아, 몰라?”


“몰라, 이 년아!”


“야, 모르신댄다. 네 형님 기억력 좀 키워드려라.”


아케보노가 거의 올라타듯이 남자의 다리를 밟자 히이, 히익 하는 소리에 뒤이어 다시 비명소리가 울렸다. 소리가 잘 울리는 104호실의 특성상 더 크게 들려온 소리에 전화 너머의 언성이 따라 높아진다.


“야! 씨발! 그만해! 그만 하라고 이 개새끼야!”


“기억 났어?”


“그래, 기억 났다 이 미친 새끼야! 우리 물건 빼돌려서 숨긴 새끼! 조만간 이승 뜰 새끼 네가 왜 찾는지는 모르겠는데, 이제 됐냐?”


“안 끝났어. 그 트레이너 당장 데려다 놔. 네 동생이랑 교환해야 하니까.”


잠시 전화 너머가 조용해졌다. 이윽고 들린 건 웃음 소리, 다 알았다는 듯한 큰 웃음소리였다.


“아~아아, 너 그거지? 히시 아케보노지? 어쩐지, 씨발. 크켁켁켁. 너 아니면 누가 그 새끼를 그렇게 신경쓰겠냐.”


“그래서, 바꿔, 안 바꿔?”


“야, 데려 와.”


잠시 뒤에 무언가 질질 끌리는 소리와 사슬 소리가 나더니, 수화기에 힘없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노......”


“토레나? 정말 토레나야?”


“미안......”


“토레나, 토레나!”


애타게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비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씨발 로미오와 줄리엣이야, 미친 년. 심지어 2년도 전에 까였다면서? 나같으면 따먹든가 딴 놈 찾아서 박히든가 했을텐데. 아, 됐고. 네 방에 있는 물건이랑 동생 가져와. 아니면 이 새끼 죽어.”


상황이 역전되어버렸다. 아케보노는 이를 악물고 생각했지만, 달리 트레이너를 구해낼 방법이 없단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장소는.”


“어, 생각 잘했어. 나중에 알려줄 테니까. 준비하고 와. 아, 그리고 이런 상황이니 또 말 안하면 섭한데.”


흐허허, 하고 남자가 웃음소리를 흘렸다.


“경찰에 알리면 이 새끼 죽으니까 처신 잘해라. 그럼.”


소리가 끊어졌다. 아케보노는 전화 화면을 내려다보면서 침묵하다가, SMS로 온 메시지를 확인하고 전화를 바닥에 던져두고 방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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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에서 나와 계단을 내려가 지하로 내려가자 아까까지와 어울리지 않는, 조명이 밝은 새하얀 방이 나타난다. 가운데 놓인 탁자 위에 넓게 융 천이 펼쳐져 있고 그 위에 가방이 놓여 있었다. 신코 윈디가 기다리고 있었다. 가방을 젖히자 권총 하나가 나온다.


“대체 뭘 하길래 10발도 넘는 자동권총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 청산.”


“누구의?”


“질문은 부탁한 적 없어.”


“므므, 알았단 것이다. 아무튼 제대로 된 거니 확인해보는 것이다.”


아케보노가 몇 번 슬라이드를 가볍게 당겨보고 이리저리 조준하더니 총을 내려두고 가득찬 탄창을 확인해본다. 뒤쪽에 조심스럽게 숨기면서 고개를 끄덕이자, 윈디도 고개를 끄덕였다.


“필요한 건 이게 전부인 것이냐?”


“그래. 고마워.”


방을 나서는 아케보노의 뒤에 대고 신코 윈디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보노. 윈디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닌 것 같은 것이다. 사람 목숨도 소중하지만 너무 위험한 것이다.”


“상관 없어.”


“게다가, 그 트레이너는 이제 보노와는 상관 없는 사람이고......”


“상관 있어.”


“구해준다고 해도 보노한테 다시 올 리가 없는 것이다. 보상받지 못하는 마음인 것이다.”


“상관 없어.”


아케보노는 조용히 눈을 감고, 보이지 않게 미소지었다.


“사랑은 바치는 것 자체로 보상이니까.”



아케보노는 기숙사로 돌아와 옷장을 열었다. 아직 고이 모셔져 있는 마일 슈즈 상자를 꺼내고, 자기 승부복을 조용히 바라보았다. 역시 이건 아닌 건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웃고는, 빨간 트레센 트레이닝복으로 갈아입고 오랜만에 머리를 두 갈래로 묶었다. 머리를 묶으면서 거울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은 차갑게 굳어 있었다.


저녁이 되어 차를 끌고 페브러리 자원으로 돌아온 그녀는 남자를 104호실에서 꺼내 질질 끌고 왔다. 입에 테이프를 감아 소리를 막으면서 아케보노가 그의 목에 손을 댔다.


“잠깐 자고 있어.”


목 경동맥을 꾹 누르자 아기처럼 기절한 남자를 트렁크에 던져넣고, 그녀가 차를 출발시켰다. 지정된 장소는 도쿄를 조금 서쪽으로 벗어난 곳의 한 방치된 폐건물이었다. 입구에서 대기하고 있는 두 우마무스메에게, 거추장스러운 동생 쪽을 내던져 넘기고 올라간다. 어둑어둑한 전등이 밝히는 3층의 넓은 공간에 수트를 입은 남자들와 우마무스메 따위가 가득 들어차 있고, 가운데 놓인 낡은 소파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물건 내놔.”


“트레이너가 먼저야. 데려와.”


하, 하고 짧게 웃으면서 남자가 고개짓하자 우마무스메 둘이 사슬로 대충 묶은 트레이너를 질질 끌고 온다. 그 동안 보노가 물건을 한 우마무스메에게 내밀고, 그녀가 남자에게 가져가 확인을 받는다. 보노의 앞에 내던져진. 트레이너는 숨이 붙어 있긴 했지만, 의식이 희미한지 말이 없었다. 남자가 신발 밑창을 들어 물건을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고했고. 이제 가야지?”


남자가 일어나는 걸 신호로 여기저기서 연장을 뽑아드는 소리가 났다. 아케보노의 뒤에서 각목이 날아와 머리를 강타했다. 눈앞에 번개가 치고 뒤통수가 뜨거운 와중에도 몸을 돌려 다음 공격을 피하고 얼굴에 주먹을 갈겨 쓰러트렸다. 그녀와 트레이너를 둘러싸고 선 크고 작은 우마무스메들과 인간들, 여유롭게 물건을 챙겨 걸어나가려는 남자. 그녀의 감각이 비상 상황에 처해 날카로워진다. 아케보노의 눈이 분주하게 돌아간다. 다시 한 명이 그녀에게 달려드는 순간, 뒷주머니에서 총을 뽑아들었다.


탕, 하고 요란한 총성이 울리면서 달려드는 우마무스메의 허벅지에서 피가 솟구쳤다. 뒤이어 14발을 쏟아내자 포위망이 약간 흐트러진다.


“뭐여, 씨발!”


남자가 수행 우마무스메들과 함께 서둘러 도망치는 뒤를 트레이너를 든 아케보노가 쫓으려 시도했다. 어깨로 들이받아 포위망을 뚫고 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지나 복도 한 켠에 안전하게 트레이너를 내려두고, 몰려드는 조직원들과 대치한다. 총을 다시 넣어두고 주먹을 꽉 쥐었다.


“히토미미는 뒤로 빠지면 살려줄게. 우마무스메도, 살고 싶으면 뒤로 빠져. 힘조절 안할 거니까.”


“어디서 허세야, 이 씨발년아!”


몇 명인가가 빠지는 가운데 달려든 한 우마무스메의 얼굴에 아케보노의 주먹이 날아와 박혔다. 토마토같은 게 으깨지는 소리가 나면서 얼굴에 피칠갑을 하고 뒤로 날아가 쓰러져버린다. 쓰러져 의식을 잃은 우마무스메를 향해 몇 번 숨 쉬라고 작게 권하면서 아케보노가 한 걸음씩 다가왔다.


“허세 아니야.”


폭주하며 달려오는 성난 소를 두 손으로 멈춰세울 수 있는 힘, 손바닥으로 물을 때려서 안의 물고기를 기절시키는 정도의 힘, 카와카미 프린세스조차 경악시킨 힘으로 유명한 그녀지만 조금 낡은 정보다. 그건 중등부 때 얘기다. 몸의 성장이 다 끝나지 않은 시기의 정보란 뜻이다.


“지금 기분이 별로 보노하지가 않아.”


다시 달려드는 한 우마무스메가 휘두른 각목을 팔을 뻗어 중간에서 막고 목을 잡아 오른쪽 창으로 던져버리자 와장창 하고 유리가 깨지면서 건물 밖으로 떨어졌다.


“진짜로 죽을 수도 있어.”


다음 덩치 큰 우마무스메가 그대로 들어올려져 천장에 처박혀버리는 걸 신호로 대부분 히토미미와 우마무스메들이 뒤로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 앞에 선 건 아케보노보다도 덩치가 큰 반바 우마무스메, 흔히 말하는 반에이 출신이다.


“나도 죽일 수 있을까?”


“아, 반바시구나.”


손가락 마디로 소리를 내고 어깨를 풀면서 아케보노가 작게 중얼거렸다. 천천히 다가오는 반에이 우마무스메들, 그 주위를 확인하던 그녀가 트레이너를 잽싸게 들쳐메고 돌아서 도망가기 시작한다.


“그럼 레이스는 못하시겠네?”


“씨발, 잡아!”


암만 단거리 마일 주자라고 해도 1600, 1800m까지 속도를 유지하며 달릴 수 있는 레이스 우마무스메를 200m 거리를 짐을 지고 달리는 데 익숙한 반바 우마무스메들이 따라잡을 수 있을 리가 없다. 뒤로 빠졌던 우마무스메들이 따라잡으려고 달리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대차에 해당하는 마신차가 난 다음이었다.


건물을 빠져나온 아케보노가 서둘러 차에 올라타는 남자를 발견하고 주머니에 찬 총에 새 탄창을 끼워넣어 재장전했다. 차에 급히 시동이 걸려 출발하려 한다. 냅다 사격을 가하자 사이드 미러가 날아갔다. 일단 차 앞을 막아서면서 조금 차분하게 탄창을 비운다. 13발의 총성과 함께 차의 앞유리가 뿌옇게 된다. 뭐, 당연히 방탄유리겠지. 차가 출발한다. 아케보노도 출발한다. 차를 향해 정면으로 달려든다. 추격이 있으니 트레이너를 내려둘 수는 없다. 꼭 안아 최대한 보호하는 수밖에 없다.


“미안해. 조금만 참아.”


차의 조금 앞에서 아케보노가 뛰어올라 차 정면을 향해 양다리를 모아 튀어올랐다. 드롭킥과 유사한 자세로, 방금까지의 사격으로 약해진 유리를 산산조각내면서 차 안으로 들어가 그대로 운전석에 앉은 우마무스메에 내리꽂혔다.


“이 씨바-”


남자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그녀의 주먹이 망치처럼 정수리를 내리찍어버렸다. 그대로 운전자를 잃고 동승자를 잃은 차가 이리저리 비틀대다가 나무를 들이받아버렸다. 그 충격으로 남자도 아케보노도 차에서 튕겨나와 땅을 굴렀다. 트레이너는 다행히 큰 상처가 없었지만, 그대로 충격을 받고 여기저기 긁힌 아케보노는 만신창이였다. 하필 이때 무릎이 또 욱신거렸다. 지금까지 버텨준 것만으로 감사하다 해야 하겠지만, 문제는 아까 남겨둔 우마무스메들이 슬슬 건물을 나와 달려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개새끼가, 꼭, 이렇게, 고생을 시켜......”


반바 우마무스메 한 명이 천천히 다가와 숨을 몰아쉬면서 아케보노의 몸을 들어올렸다. 그대로 머리를 들이받자 그녀의 정신이 혼미해졌다. 내지른 주먹을 잡고 팔을 꺾으려 했지만 맘대로 힘을 쓸 수가 없다. 오히려 꽂힌 주먹에 팔이 부러져버렸는지, 아케보노가 팔을 부여잡고 쓰러졌다.


“넌 오늘 진짜, 반으로 접어 병신을 만들어야겠다.”


다시 아케보노의 어깨를 잡아 일으키려는데, 저쪽에서부터 검은 차 한 대가 미친듯이 달려 왔다. 운전석에서 내린 것은 진녹색 점퍼를 입은 비코 페가수스였다.


“내려 놔, 내려 놔.”


“넌 뭐야?”


“히어로, 강림.”


“뭐?”


“경찰이라고, 씨발놈아. 거기 선량한 시민 내려 놔. 뒤지기 싫으면.”


“하, 이 좆만한 짭새가 진짜......”


철컥,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탕, 하고 반에이 우마무스메의 발 앞에 흙이 튀어올랐다. 권총을 꺼내든 비코 페가수스가 나머지 한 손으로 배지가 달린 신분증을 빛내면서 소리질렀다.


“좆만한 ACP탄 한 번 맞아볼래? 개새끼야? 손들고 엎드리라고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제서야 반에이 우마무스메도 포기하고 손을 들어올렸다. 비코 페가수스가 수갑을 꺼내 다가가면서 총을 휘휘 저어 다른 조직원들한테도 찌그러지라 지시했다.


“어, 니네는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고, 니네 발언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변호인 선임도 되고 걔가 대신 말하게 할 수도 있다. 선임 안되면 국선변호인이 붙을 거고. 알았냐?”


“야, 캐럿맨 오타쿠.”


손을 뒤로 하고 수갑이 채워지면서 반에이 우마무스메가 작게 불렀다.


“왜, 새끼야.”


“이제 히어로 놀이는 안하냐?”


“이제 히어로가 직업이야, 개새끼야.”


순차적인 검거작업이 이루어지고, 점점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을 때, 비코 페가수스는 비틀비틀 일어나 자리를 떠나는 아케보노를 발견하고 불러세웠다.


“야, 보노! 어디가?”


“......돌아가야지......다 끝났으니까......”


“왜? 어디로?”


“집에 가서 쉬어야겠어......”


“아니, 병원을 가야할 거 아냐!”


“그렇네......”


팔을 부여잡고, 한 쪽 다리를 질질 끌면서, 피를 흘리면서도 아케보노는 헤헤 웃으면서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아무튼, 나는 여기 없었던 거다?”


“그건 또 뭔 소리래.”


“토레나는, 대가 없이 주는 걸 안 좋아해......빚지는 느낌이 든다고, 부담스러워 할 거야......”


“아니, 야! 이 븅신 모지리년아! 그럼 대가를 받으라고!”


“......어떻게 그래......그러니까, 이해 좀 해 줘.”


이해할 수 없는 것을 이해하라 던져두고 히시 아케보노는 어둠 속으로 사라져갔다. 비코 페가수스는 잠시 생각하다가, 어쨌거나 자신을 가장 이해해준 친구를 어떻게든 이해해보려고 노력하는 의미에서 한 우마무스메의 뺨을 때려 물었다.


“야, 담배 있냐? 존나 말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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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시 아케보노는 휴가를 조금 더 연장해야 했다. 병원에 누워있는 동안 여러 사람들이 병문안을 왔지만, 계단에서 굴러서 그렇다는 말에는 더 깊이 물을 수 없었다. 조심 좀 하지, 하는 말에 헤헤 웃고 있는데 비코가 주스 세트를 사들고 찾아왔다.


그녀의 전 트레이너는 듣자하니 전 여자친구에게 이런저런 방식으로 이용당하고 있던 모양이었다. 그녀가 무엇을 하고 지내는지까지는 모르지만 느슨한 방식으로 협조하면서, 어렴풋이 이게 제대로 된 것이 아니란 느낌은 받고 있었던 모양이다. 단지 그러면서도 끝내 놓지는 못한 모양이다.


“어려서 부모를 잃고, 힘들게 산 모양이지. 남의 친절을 제대로 받아들이지도 못하지만, 그럼에도 친절에 기댈 수밖에 없는 사람 말이야.”


“응, 알아. 착한 사람이지만, 상처가 많은 거야.”


“아무튼 참작의 여지는 있으니, 잘하면 빨간 줄 안 그이고 살 수도 있겠지. 기소를 안할 수도 있고.”


“그랬으면 좋겠네.”


비코가 주스 병을 열어 내밀었다. 왼손으로 받아 마시던 아케보노가 묻는다.


“근데 그날 어떻게 온 거야?”


“응, 신고가 들어왔거든. 살인사건이 있었다고.”


“살인?”


“그래. 너랑 트레이너, 그 새끼한테 던지기 당할 뻔 했다고. 트레이너의 전 여자친구 말야. 이번 딥 이펙트 건으로 제대로 찍혀서 죽었더라. 원래는 트레이너만 이용하려 한 모양인데, 네가 끼어들었다 이거지.”


“......트레이너......불쌍해.”


아케보노의 표정을 살피고 비코가 주머니를 팡팡 쳐서 담배갑을 찾는다. 혀를 몇 번이나 차면서 한숨을 푹푹 쉬어댔다.


“답답아, 이 답답하고 모자란 년아. 이제 좀 잊고 새 출발 좀 해라. 보답도 못 받는 짝사랑이나 하면서 마음 상하고 몸 상하지 말고.”


“응. 이제 정말 그만 해야지...... 이제 트레이너를 괴롭히는 것도 없을 테니까.”


“그래. 이제 진짜 끝났다고.”


“이것도 우리 둘 사이 비밀이다? 짝사랑하던 애가 뒷조사까지 몰래 하고 있었단 거 알면, 기분나빠할 테니까.”


“알고 있었어.”


병실의 문이 열리면서 아케보노의 트레이너가 들어왔다. 놀라움에 그녀의 눈이 커졌다. 무겁고 어색한 침묵 가운데 트레이너가 아케보노의 옆에 앉았다.


“알고 있었어. 비코랑 같이 내 뒷조사 하고 있었던 거.”


“......어떻게?”


“비코가 알려줬거든.”


“그랬, 구나......”


“미안. 약을 떠넘긴 것도, 너라면 어느 정도 알고 있겠다 생각해서 그랬어.”


“믿고 의지해줘서 고마워.”


생긋 웃는 그녀를 트레이너는 복잡한 표정으로 쳐다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또 미안. 대가 없는 친절이 무섭다고 하면서도, 난 진짜 무서운 친절이 어느 쪽인지는 헷갈렸던 모양이야.”


“그럴 수 있는 걸.”


“나 때문에 다치고, 상처입고, 마음도......”


“그것도 알고 있었어?”


“응. 비코가 알려줬어.”


비코 페가수스는 멋쩍게 휘파람을 불면서 주머니를 팡팡 쳐 담배갑을 찾더니, 병실을 돌아나간다.


“그럼, 큐피트는 이쯤에서 실례! 즐거운 시간 보내십쇼.”


드르륵, 탁, 하고 문이 닫혔다. 트레이너가 침묵을 깼다.


“나 때문에 다치게 해서 미안해.”


“그럴 수 있는 걸.”


“보노야.”


“토레나. 나는 대가를 받았어.”


트레이너의 눈을 마주보면서, 히시 아케보노는 얼굴을 살짝 붉혔다.


“토레나를 사랑하고 생각하는 내내, 내 마음은 행복했어. 이미 나는 대가를 받고 있었던 거야. 이미 계산이 끝난 걸로 괴로워하지 말아줘, 부탁이야.”


“그치만 나는 널......”


“응, 알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거. 너무 크고 부담스럽다는 거 알아. 하지만 나는 이게 장점이고, 이것밖에 못하니까......”


슬픔과 기쁨이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아케보노의 눈에 고였다.


“두 사람 몫의 마음을 주는 것밖에 나는 방법을 모르니까. 그러니까 괜찮아. 내가 바보같을 뿐이야.”


다시 어색하게 침묵이 이어졌다. 입술을 깨물던 트레이너가 입을 열었다.


“역시 납득할 수 없어.”


“응?”


“내가 대가를 치르게 해 줘. 아무거나, 말해 봐.”


히시 아케보노는 오랜 시간 고민하더니, 환하게 웃으면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면, 토레나. 한 번만, 한 번만 안아봐도 돼......?”


잠시 머뭇거리던 트레이너가 그녀에게 몸을 가까이 했다. 깁스 중인 오른팔이 직접 닿지 않게 왼팔을 먼저 감으면서, 아케보노가 트레이너를 포근하게 감싸안았다. 눈을 감고, 미소를 머금은 채로 이 순간의 온기를 만끽했다.


“역시, 이걸로 균형이 맞지 않는 것 같아.”


“응......?”


“보노야. 다음에, 이번 일이 좀 마무리되고 네가 나으면, 나랑 식사 하자. 내가 만들어 줄게.”


아케보노는 당장이라도 병상을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만큼 힘이 났다. 이 말을 듣기 위해 지금까지 힘내온 것은 아니었다. 보답받자고 한 일도 아니었다. 단지, 트레이너가 조금은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고 받아들여준 것 같은 기쁨이 있었다. 터질 듯한 기쁨으로 가슴이 쿵쾅거리고, 눈가가 찌릿찌릿했다. 트레이너의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올라왔다.


“미안하고, 고마워.”


히시 아케보노는 자신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손길을 받아들이듯 다시 눈을 감았다. 햇살을 받는 해바라기처럼, 가만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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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이런걸 써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