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타산 블랙.


그녀는 주변 누구나 인정하는 천재 우마무스메다.




주법, 경합, 스퍼트 타이밍.




어릴 적부터 알 리 없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한 손으로 나이를 셀 수 있는 꼬마의 나이에, 그녀의 달리기는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모든 것이 지루했다.


어떤 것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눈동자에는 생기가 없다. 키타산은 스스로가 미친 게 아닌가 걱정했다. 한 때는 혼자서라도 병원에 가봐야 하는 건 아닐까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했다.


일련의 상황이 정상이 아니라는 걸 눈치챈 부모님은, 키타산에게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나이를 먹고 트레센에 입학하게 될 때 그곳에서 운명의 트레이너를 만난다면... 그 신묘한 유대의 힘이라면, 네 고민도 해결될게다.'




그러니 우선은 여유를 가지거라.


그 말에 수긍하자 당장의 걱정은 사라졌다. 고민이 사라지자 인생에 여유가 찾아왔다. 죽이 잘맞는 친구도 사귀게 되었다.


날이 갈수록 트레센 학원의 입학이 기다려졌다.


그리고, 마침내 트레센 학원에 입학한 키타산은-




"......어?"




미승리전의 그 날.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








어린 티를 벗고 완연한 어른으로 접어든 나이 열넷 때의 일이었다. 


미승리전을 한 번에 통과하고, 객석에 서있던 한 남자를 보게 되었다.


짧은 생을 살아갈 동안 그 무엇도 그녀의 시선을 앗아갈 순 없었다.


분명, 그랬을터인데 ㅡ




"저..사람...은...?"




내 시야를 단번에 앗아가버린 남자가 눈 앞에 나타나버렸다. 나는 서있는 자세 그대로 멍해졌다.


순간.


눈 앞에서 스카웃 제의를 하는 베테랑 트레이너들도, 주변 친구들의 호들갑도 전부 존재감을 잃는다.


객석에서 내려오는 장신의 남자를 뚫어져라 쳐다보면서, 그의 명찰을 속으로 계속 중얼거렸다.


본래 트레센에 재학 중인 우마무스메에게 트레이너의 이름은 잘 알려지지 않는다. 그야 트레이너 쪽에서 먼저 다가와주는게 불문률이니까. 알 필요가 없는 것이다.


그래도 명색이 트레센인만큼 유망한 트레이너의 이름은 알음알음 퍼졌다.


그렇기에 저 남자의 신상 정도는 이미 알고 있었다. 


우수한 성적으로 트레이너 학교를 졸업한 수재. 


나날이 그 명성을 드높이게 될 것이라고.


분명 그저 그런 유망주일 뿐인데 ㅡ


트레이너가 단정한 옆 얼굴을 보이며 곁을 지나친다. 그 모든 순간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온 몸의 감각이 눈 앞의 트레이너를 향한다. 




그의 모습이 멀리 사라지고 나서야 퍼뜩 정신을 차리며 헛숨을 들이켰다.


한 사람 밖에 보이지 않았던 시야가 멀쩡히 돌아온다. 트레이너의 발걸음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던 귀에 주변 사람들의 시끌벅적함이 들려와 박혔다.




"......!"


뭐야...? 방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모든 오감이, 순식간에 들이닥친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다. 입술을 깨물며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갑작스럽게 넘치는 희열감에 몸을 주체할 수 없다. 입가에 웃음이 가득해진다. 


이윽고 바닥으로 힘없이 쓰러지는 몸. 전신에 감도는 얼얼한 아픔과 당황하는 주변인들을 뒤로하고, 나는 정신을 놓아버렸다.








갑작스런 기절 이후, 병원에서 깨어나는대로 잔뜩 놀란 부모님을 재치고 다시금 밖으로 나갔다.


가게에 들어가 따뜻한 녹차를 후룩 마신다. 간간히 와 닿는 삼촌들의 시선을 무시한다. 




'트레이너'를 다시 보기 위해서.




그 남자는 언제나 이 길목을 지나간다고 한다.


하지만 언제 또 이 길목을 지나갈지는 모르겠다.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고 싶은데.


괜히 심장이 두근거려와 가슴에 손을 올렸다. 그를 생각하면 뜨거워지는 몸을 뒤로하고 하염없이 기다렸다.


왜 당신은 내게 특별할까. 심란한 마음으로 거리를 지켜보았다. 곧 얼빠진 소리를 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트, 트, 트, 트레이너다아!!!'




소리 없이 경악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의문 가득한 주변의 시선이 와 닿는다. 온통 그에게 정신이 팔린 나는 아무것도 신경 쓰지 못했다.


서둘러 가게 입구로 달려나갔다. 벽을 짚은 자세 그대로 트레이너를 응시했다.


이렇게 빨리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혹시 하늘의 도움인가? 운명의 상대? 하늘도 나를 돕는건가? 그런거야?


예상치 못한 만남에 심장이 쿵쾅거리고 요동친다. 여지껏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설레임이 가득찬다. 꼬리가 무의식적으로 흔들리고 귀가 한계까지 쫑긋 올라섰다.


그는 저번보다 더욱 잘생겨 보였다. 저런 엄청난 남자가 신입인데, 아무도 관심을 안준다고? 이번 신입생들은 전부 똥멍청이 집합소야? 저런 잘난 사람을, 그대로 냅두고 있다고?


어제 오늘로 두 번째로 보게되는 것임에도 누구보다 가깝게 느껴진다. 감정이 다스려지지 않는다.


천천히 길을 걸어가는 트레이너를 본 순간, 가슴 속의 무언가가 활화산처럼 폭발해버린다. 


다른 녀석들이 다가가기 전에, 내가 먼저 가야해!


벽을 부숴버릴 듯이 잡고 있다가 굳게 결심했다. 흥분한 기색을 감추지 않고 앞으로 도도도 달려 나갔다.


저돌적으로 트레이너의 뒤를 쫒는다. 어렵지 않게 걸음을 따라잡았다.




"트레이너 님!"




내 외침에 길을 가던 트레이너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의아한 눈길이 내게 와 닿는 것을 느끼며 그의 앞에 멈춰 선다.


정면으로 마주보자 숨이 헐떡인다. 조금 달렸다고 숨이 차서? 아니다, 이건 ㅡ


결연한 의지를 담아 그를 응시한다.


내 강한 시선을 받은 트레이너의 어깨가 움찔거린다. 


저 같이 여린 소녀의 눈빛에 그런 반응을 보이시다니! 그 모습도 너무 귀여워요!


그리고, 얼마 전의 나라면 전혀 생각도 못할 말을 내뱉는다.




"저랑 결혼해주세요ㅡ!!!"




결혼해주세요결혼해주세요결혼해주세요결혼해주세요결혼해주세요결혼해주세요......




내 외침이 상점가에 쩌렁쩌렁 울려 퍼진다. 주변 사람들, 뒤따라 온 삼촌들까지 얼빠진 얼굴로 이쪽을 쳐다보고, 고백을 받은 장본인인 트레이너 님도 반쯤 넋이 나간 표정이 되어 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하는 표정, 하지만 나는 씨익 웃었다.


귀엽기는! 이런 박력 넘치는 고백은 처음이실테죠!


처음보는 우마무스메가 와서는 갑자기 결혼하자고 하니 당황스럽겠죠! 현실이 믿기지 않을 겁니다!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하지만, 저는 제 욕심이 더 먼저라서요! 죄송하지만 트레이너 님께서는 더 이상 도망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제 청혼을 받아주셔야 해요!


트레이너 님은 얼굴 대면도, 인사도, 호감을 쌓을 시간도 없이 대뜸 결혼부터 하자는 제 말에 넋이 나가 있으셨지만, 계속 그래서는 곤란해요!


고백을 들었으면 응당 대답을 해주셔야 하니까요! 저는 트레이너 님이 얼른 정신을 차리도록 그의 손을 제 양 손으로 꼭 쥐었습니다!




"저, 키타산 블랙이 장담할게요!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게 해드릴테니까!"




연이은 제 박력에 트레이너 님께서 재차 움찔하며 눈을 동그랗게 뜹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나왔습니다.


청혼도, 그 뒤를 이은 말도 거짓이 아니에요! 한순간의 치기가 아닙니다!


첫 눈에 반했으니까요...! 가슴에 기쁨이 가득 차올라 헤실헤실 웃었다.


잠시 말없이 서 있는 우리 두 명. 고백하고 나서 시간이 조금 흐르자 주변인들이 하나둘씩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저기... 키타지마 아가씨...?"




트레이너가 내게 잡힌 손을 빼내지 못하고 눈동자를 빙빙 돌린다. 당황만 한 게 아니라 잔뜩 어색해 하는 모양새였다.


그럼에도 나는 그가 대화의 물꼬를 열어준 것만으로도 기뻤다. 


이 남자다! 


이 남자가 나의 인생의 동반자다! 


올망졸망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말해봐요. 제게 할 말이 있는거죠? 대답해주려는 거죠?! 잔뜩 기대하며 기다렸다.




"그러니까..."




그러니까 뭐요! 지금 그러니까만 다섯 번 째라구요! 이 키타산 블랙,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습니다!




"대답!"


"어어?"


"결혼하자고 했잖아요! 빨리 대답해 주세요!"




나는 트레이너의 손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자연스레 그가 한 발짝 가까워진다. 그는 자기가 움직여놓고도 놀랐는지 입을 꾹 다물었다.


상대에게 도망칠 여지를 주지 않고 몰아붙인다. 그것이 키타지마 가문의 가훈! 자, 이제 대답해주시죠!




"......그럼, G1을 7번 이긴다면. 그 때 네 청혼을 받아줄게."


"왓쇼이! 약속한 겁니다, 트레이너 님?!"




계 탔다!!! 오늘은 일진이 좋은 날인게 분명해요! 복권을 사야하는 날인거에요!


도중에 'G1 우승은 쉬운게 아니니까 각오 하는게 좋을거야.'는 트레이너 님의 말씀이 들려왔지만, 이 키타산 블랙! 한 번 정한 목표는 반드시 이루고 만다구요?


기쁨에 못이겨 트레이너 님의 허리를 와락 안자, 화들짝 놀라며 몸을 움찔거리는 트레이너 님. 


트레이너의 품 속에 깊이 파고들며, 품안 가득 그를 껴안고 힘차게 외쳤다.




"반드시! 약속한거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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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보니 과거 편을 가장 마지막에 쓰게 되었음


승-전-결-기 순으로 해봤는데 다행히 잘 된거같음


오후 내로 괜찮은 단편 하나 + 저녘 내로 하나 더 올리겠음



가기 전에 스티븐 제라드의 멋진 중거리 슛도 올리고 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