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레이너 공부는 잘 되가냐...?"


"이제 면접만 남았어요."


"으응? 벌써 면접까지 갔다고? 그럼 무조건 붙겠네. 넌 주인공이니까." 




우리 할아버지는 치매 환자다.


멀쩡했던 젊은 시절에도 종종 헛소리를 늘어놓곤 하셨다던데, 증상이 심해지신 이후로는 시도 때도 없이 뜬구름 잡는 소리만 입에 달고 사신다.


그렇다한들 그 누구도 할아버지를 홀대하거나 무시하진 않았다. 지금이야 오늘내일 하시지만 한 때는 트레센에서 손꼽히던 일류 트레이너셨으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할아버지는 우리 가족, 그 중에서도 나를 찾으셨다. 


잊을만하면 불려갔지만 딱히 기분 나쁘진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나를 끔찍히도 아껴주셨던데다,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생각보다 재밌었기 때문이다.




"카츠라기 에이스가 재팬컵에서 이긴다는거, 내가 말했었나?"


"네. 3년 전에 이미 맞추셨어요. 그때 주변에서 얼마나 난리였는지 알아요?"


"그럼 아그네스 타키온에 대해서는?"


"그건 또 처음 들어보네요. 아그네스 타키온이라는 이름도 처음 들어봐요."


"아직 안했나보네. 기억해둬. 언젠가 열릴 사츠키상에서 그 녀석이 이길테니까."




그렇게 말한 할아버지는 앓는 소리를 내며 침상에 일어나 앉으셨다. 몇 년간 누워만 계시던 할아버지가 스스로 일어나신거다.


깜짝 놀라 나도 모르게 할아버지께 다가가자 벅찬 숨을 간신히 삼킨 할아버지가 침대 머리맡에서 노트 한 권을 꺼내오셨다.




"당장 먼저 떠난 우리 마누라도 내가 하는 말들을 망상 취급하곤 했는데... 너만큼은 곧잘 들어줬었지."




할아버지는 내 손에 노트를 굳게 쥐어주고 나서야 편안한 얼굴이 되셨다.




"그러니까, 이건 너한테 주는 선물이야. 제정신일 때 주고 싶었는데... 다행이구먼."




정중히 받아든 노트를 가방에 넣자 음음, 하고 고개를 끄덕이시는 할아버지. 그리고선 다시 수척한 표정이 되어 그대로 침대에 누우셨다.




"면접 잘보고. 노트는 합격하고 나서 읽어봐라."


"예 할아버지. 저도 이만 가볼게요. 약 챙겨먹는거 잊지마시구요."


"그래야지. 나도 하루 우라라를 직접 보기 전까진 죽고싶지 않거든."




'우라라'라니. 그건 또 누구길래 저러시는건지. 


어쩌면 향후 나타날 뛰어난 우마무스메일지도 모른다. 일단 이름정도는 기억해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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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센 입학식 당일.


심호흡을 두어번 내뱉은 후,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남겨주신 노트의 내용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누차 말해왔지만 손자야, 너는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정확히는 미연시 게임의 주인공이지.] 




정문에 서있는 타즈나 씨가 이쪽을 보며 고개를 짧게 끄덕인다. 




[비록 시간이 너무 흘러 도움이 될만한건 대부분 잊어버린지 오래다만... 몇몇 배드엔딩만큼은 또렷이 기억나는구나.]




무언의 허락을 받은 그대로 정문 안쪽을 향해 걸어들어간다. 


벚꽃이 한창 만개한 트레센 학원 거리에는 신입 트레이너들과 그들을 구경하러 온 트레센 학생들로 북적였다.




[한 명은 지금도 어디선가 너의 일거수일투족을 관음하고 있을 희대의 변태년이고, 다른 한 명은 엮이기 시작하면 네가 죽을 때까지 인자즙을 쥐어짤 생각 밖에 없는 연쇄뾰이마다.]




"저 사람이 그 신잔의 손자..."


"하, 고귀한 혈통 납셨네."


"소문대로 분위기부터 남다르네요."

 



수근거리는 동기 트레이너들을 지나쳐 시도 때도 없이 이쪽을 힐끔거리는 학생들에게 먼저 다가간다.


친절해보이는 인상에 옅은 웃음기를 띄우고, 의아함과 기대감이 섞인 눈빛을 하며 귀를 쫑긋 세운 학생들에게 줄곧 생각했던 운을 띄웠다.




[트레센에 다니고 싶다면 꼭 명심하거라...! 다른 미친년 개새끼 합법로리 다 괜찮아도 그 두 명만큼은 절대로 안된다!!! 똑똑히 기억해라, 네 인생을 노리고 있는 그 두 명의 이름은ㅡ!]




도저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초면에 미안한데, 혹시-"




......




"그 두 명, 애초에 트레센에 있긴 한걸까..."




트레센 근처의 도시락 카페


그럭저럭 먹음직스러운 도시락 하나를 챙겨 홀로 자리에 앉았다.


트레센 식당으로 가자니 시선이 부담스러워 선택한 나만의 대안이다.


사실 그나마 아는 곳이 여기밖에 없어서도 있지만...


결국 할아버지가 언급한 그 두 명은 찾지 못했다. 


거짓말을 적으셨을 리는 없을테니 어쩌면 이번 신입생들 사이에 섞여있는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도시락을 향해 젓가락을 뻗자, 건너편에서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




밤하늘을 그려낸듯한 윤기나는 묵빛 머리카락과 귀여운 강아지상의 얼굴, 그리고 이쪽을 향해 동그랗게 뜬 눈까지.


일견 활발해보이는 우마무스메가 이쪽을 멍하니 보고있었다.


옷을 보아하니 트레센 학생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며 다시금 젓가락질을 하려고 하자 어느새 이쪽을 보던 학생이 도시락통을 들고 내게 다가왔다.




"저... 실례가 안된다면 함께 식사해도 괜찮을까요?"


"아..."




또박또박 움직이는 입술과 함께 귓가에 들려오는 부드러운 미성.


아니.


지금 트레센 학생이, 신입 트레이너한테 같이 밥먹자고 한거야?...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멍하니 입을 벌리자 당황한 소녀가 황급히 뒷말을 덧붙였다.




"그, 그게! 저도 이번에 트레센에 입학했다보니, 그래서 뭐랄까,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어서... 아, 하하..."




멋쩍게 한 손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웃어버리는 소녀의 모습은 도저히 거절할 수 없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다.


애초에, 트레이너로서 곤경에 처한 학생의 부탁을 무시할 순 없었다.


곧바로 그녀에게 괜찮다고 말하자 왓쇼이! 하는 기합과 함께 내 옆자리로 잽싸게 앉는 소녀.


그건 그렇고 요즘 애들은 인싸의 기준이 다른걸까.


지금도 내쪽을 보며 헤실헤실 웃고있는 이 학생은, 외모만 봐도 먼저 나서서 친해지고 싶어할 사람들이 줄을 설 것 같은 소녀였다.


다들 입학식 첫 날이라 어색해서 그런걸지도 모르겠다.


약간의 동정심을 담아 마주 웃어주자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팍 숙인 소녀는 귀를 쫑긋하고 세우더니 챙겨온 도시락 보따리를 풀어냈다.




"실은 전에 이 카페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내심 말이라도 걸고 싶었는데, 이렇게 함께 먹게 되어서 정말 좋네요!"


"그래...?"




전이라.


내가 이 카페에 마지막으로 들렀던 게 2년 전이었을텐데.




"그래서... 이렇게, 트레이너 님을 위해 도테야키(소 힘줄 조림)도 직접 만들어왔어요!"


"도테야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잖아! 


나도 모르게 어른의 체면을 벗어던지고 감탄사를 내뱉자 쿡쿡, 하고 웃은 소녀가 내 앞으로 도테야키가 담긴 도시락통을 내밀어왔다.




"히힛, 역시 트레이너 님이라면 좋아하실 줄 알고 있었어요! 저번에 오셨을 때 엄청 맛있게 드시는걸 보고 만들었으니까요! 트레이너 님이 오사카 출신이신만큼 엄~청 신경써서 만들었다구요?"




세상에. 내가 오사카 출신인건 어떻게 알고 그런 노력까지...!


감상에 젖은 기분으로 말없이 도테야키를 우물거리고 있자 잔뜩 신이 난 소녀가 귀를 파닥이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왔다.




"지금도 트레센 근처 0가에서 살고 계신거 맞죠? 아앗, 오해하진 마세요! 저번에 오셨을 때 신분증 주소가 살짝 보여서 알게 됐거든요...!"


"이번에 트레센에 들어가면서 집에서 독립하게 됐는데, 마침 트레이너 님 옆 집이 비어있더라구요! 그래서 저도 그곳으로 이사할 생각인데..."




이 도시락 카페에는 2년 전에 딱 한 번 온게 끝인데. 내 출신과 주소, 입맛까지 모두 알고 있다니.




어쩌면, 이 아이...




"그걸 다 기억하고 있었던거야? 대단한데!"




엄청난 천재 우마무스메가 아닐까?!




"히얏-!? 가, 갑자기 그런 부끄러운 칭찬을..."


"아니아니, 진짜 대단한거라고!"




이정도의 기억력과 잠깐 본 것만으로도 상대를 읽어내는 분석력이라니.


마치 현역 시절의 비와 하야히데가 생각나는 재능이다!


그렇다면 기회다.


이 아이라면, 할아버지의 노트에 적혀있는 두 명에 대해 알지도 모른다.




"혹시 키타산 블랙과 미호노 부르봉이라는 학생도 알고 있어?"


"에...? 무슨 일로 찾으시는건가요?"


"실은 말이지..."




전부 사실대로 털어놓을 순 없지만 얼추 그 두 명과는 만나고 싶지 않다는 취지를 전하자 고민하던 소녀가 있는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 두 분만 찾으시면 된다는거죠? 저도 최선을 다해서 도와드릴게요!"


"정말 고마워!"




똑똑한데다 남을 도울 줄 아는 성품까지!


이 학생의 트레이너가 될 사람은 분명 축복받은 사람일 것이다.




"그러고보니 통성명도 안했구나. 이름을 알 수 있을까?"




미래가 유망한 우마무스메가 분명했기에 이름이라도 알고싶어 넌지시 운을 띄워본다.


그러자 일순 멈칫한 소녀가, 마치 전야제를 맞이하는 보름달처럼 해맑게 웃으며 대답했다.




"...제 이름은 떡타산! 떡타산 화이트에요! 말씀하신 두 분을 찾을 때까지 앞으로 같이 힘내보죠, 트레이너 님!"


"나야말로 잘부탁해, 떡타산!"


"왓쇼이-!"




출근 첫 날부터 이런 훌륭한 학생을 만나다니. 이래서 할아버지가 내게 주인공이라고 한걸까?


이 소녀와 함께한다면 그 두 명을 찾는 것도 금방일 것이다.


키타산 블랙, 미호노 부르봉...


여전히 오리무중인 그녀들이지만, 찾아낸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피해다니며 트레센 제일가는 일류 트레이너가 되고 말 것이다.


...반드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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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에게 경고하는 할아버지의 표정 (상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