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arca.live/b/umamusume/96614754

그냥 지난 이야기


“안녕하세요. 트레이너 씨.”

휴일 대낮이었다. 조금 일찍 일어나 집안 정리를 좀 하고 식사도 일찍 끝내놓았다. 간식이나 깨작거리면서 게임 좀 하려고 소파에 길에 앉았더니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현관을 열어보니 그 트레이너의 담당,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소매가 긴 에메랄드색 원피스를 입고 양 손을 앞에 모으고 있었는데, 쇼핑백 몇 개가 손에 들려있었다. 휴일의 평화가 깨지는 거야 익숙한 일이지만 인상이 찌그러지는 건 어쩔 수가 없다.

“또 왔니.”

“살 게 있어서 지나가다 들렀어요. 폐가 된다면 돌아갈게요.”

“아냐. 폐는 무슨. 어서 들어오렴.”

꾸벅 인사하고 돌아가려는 걸 문을 활짝 열어 초대했다. 저번에 정말 돌려보냈다가 기분 풀어주는 데 엄청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던 트레이너는 차라리 자기 휴일을 불편하게 지내는 게 낫다고 판단했다. 그가 과장되게 환영의 뜻을 표하고 나서야 조금 굳어있던 다이아의 표정이 풀어졌다.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죠. 에헴. 실례하겠습니다.”

“그래, 실례하렴.”

다이아는 신발장에 가지런히 신발을 정리해 두고 안으로 조용조용 들어갔다. 1년이란 시간 동안 그녀는 부쩍 행동거지가 어른스러워졌다.

어른한테 1년이란 시간은 긴 듯 짧은 듯 휙 지나가버리지만 아이에게는 얼마나 긴 시간인지.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1년 사이에 엄청나게 변했다. 그 전 1년에는 몸이 부쩍 자라더니만, 이번 1년 동안에는 정신적인 변화가 무척 컸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15살이 되었다. 좋게 말하면 이른바 질풍노도의 시기란 것이다.

“으음.”

나쁘게 말하면 중2병이 올 시기다. 안으로 들어가다 벽에 걸린 거울 앞에 멈춰선 그녀가 머리를 이리저리 매만지거나 한 바퀴 돌아보거나 하면서 미소지었다.

“매일매일 이뻐져서 큰일이양.”

거울을 보는 일이 부쩍 많아졌다. 원래도 자기 외모에 신경을 쓰는 편이긴 했지만 정도가 좀 심해졌다. 거울 속에 빨려들 듯한 그녀를 꺼내줄 생각으로 트레이너가 냉장고 문을 열며 물었다.

“마실 거라도 줄까?”

“트레이너 씨는 오늘도 무쌩겼네요. 히히.”

물론 변하지 않은 것도 있다. 환절기 날씨처럼 이전 계절과 다음 계절이 혼재된 상태와 같다지만, 그녀의 안에는 어른과 아이의 모습이 무분별하게 뒤섞여있다지만, 아직은 아이에 가까운 상태인 것이다.

“마실 거, 필요하냐고.”

“젤리 있으면 주세요. 없으면 사다 주세요.”

긴 머리를 손으로 쓸어넘기면서 그녀가 명령조로 말했다. 단정치 못하게 풀썩 소리가 나도록 소파에 앉아서 흐뭇한 얼굴로 쇼핑백 안을 뒤적거린다.

“젤리가 마실 거냐? 그리고 너, 나한테 젤리 맡겨놨냐?”

“꼭 맡겨놔야 달라고 하나요? 없으면 사다 달라니까요?”

‘뭐 저렇게 당당해’ 하는 혼잣말을 속으로 삼키면서 트레이너는 식탁 위 지갑을 집어 주머니에 넣었다. 어차피 나중에 먹을 컵라멘도 사놔야 했으니 나가는 김에 사다줄까 싶었다. 그 모습을 힐끗 확인하고 다이아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트레이너가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젤리값 내놔.”

“......어머?”

다이아는 손을 내미는 그를 눈동자만 돌려 확인하더니, 퍽 재밌는 농담을 들은 것처럼 입가를 오른손으로 살짝 가렸다.

“트레이너 씨 월급으로는 젤리도 사지 못하는 건가요?”

“아니. 내 월급으로 네 젤리를 왜 사. 네가 먹을 거니까 네 돈으로 사야지.”

“쩨쩨하게 돈에 연연하는 남자는 인기 없대요.”

“어. 나 쩨쩨하게 돈에 연연하고 무쌩겨서 인기 없어. 젤리값 내놔.”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겠어요? 어른이 되어가지고!”

“너도 이제 애 아니라면서.”

팔짱을 끼고 볼을 부풀려 불만을 표하는 사토노 다이아몬드. 하지만 트레이너도 전혀 물러남이 없다. 몇 번을 더 손을 위아래로 흔들어 돈을 요구하자 그녀의 부푼 볼에서 바람이 푸-하는 소리를 내며 빠져나왔다.

“됐어요. 그까짓 젤리, 안 먹고 말지.”

트레이너가 바보같이 헤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본심을 토해버렸다.

“우와. 그러는 너도 진짜 쩨쩨하다. 사토노 그룹 영애님이 담당 트레이너한테 젤리값 삥 뜯어가는 게 말이나 되냐?”

“사토노 그룹이랑 관계 없거든요! 그게 뭐 내 돈인가?”

흥! 하는 커다란 소리와 함께 그녀가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녀의 얼굴 표정이나 반응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해주는 누운 귀와 늘어진 꼬리를 보고 트레이너는 위화감을 느꼈다. 혹시, 혹시, 하고 떠오른 가설을 검증해보기로 했다. 점점 더 다이아를 향해 가까이 다가가면서 입꼬리를 올렸다.

“혹시 다이아야.”

“뭐예요?”

“너 돈 없니?”

“......사토노 그룹 영애님이 돈이 없다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하세요!”

“와, 너 젤리 사먹을 돈도 없는 거구나?”

주먹을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트레이너가 히죽히죽거렸다. 다이아의 귀가 미묘하게 부들부들 떨렸다. 제대로 반박도 못하는 걸 봐서는 정곡을 찔린 것 같았다. 볼이 살짝 상기되어 있다. 여기서 우마무스메를 더 자극하는 건 위험한 행동이겠지만 이 잠재적인 재미를 참으면 남자가 아니다. 작년에 뇌진탕으로 입원했던 걸 다이아도 기억하고 있을 테니 폭력을 쓰진 않을 거란 확신도 있었다. 비열한 어른이라 욕해도 어쩔 수 없다. 어른은 원래 약간은 비열한 존재니까.

“와아, 다이아야! 사토노 다이아몬드! 이게 무슨 일이래?”

“......흐지 므세요.”

“이래서야 그냥 평범한 여중생 아니냐고!”

“그믄 흐세요......”

빠득빠득, 그녀의 귀여운 이가 갈리는 소리가 났다. 어린이 기준으로 막대한 분노를 참고 있는 게 눈에 보인다. 여기서 한 번 더 밀어붙이면 맛있겠지만, 얼마 전 사츠키에서 3착을 거둔 담당의 향후 클래식 노선을 위해서라도 참는다. 트레이너가 길게 한숨을 쉬면서 몸을 일으켰다.

“그 많은 용돈 다 어디다 썼대. 물어보진 않겠지만 적당히 써.”

“제가 알아서 해요. 참견하지 마세요.”

“젤리 사다줄 테니까, 무슨 맛이 좋은 지나 말해.”

“정말요?!”

다이아가 양 손을 정중히 모아 고개를 홱 돌렸다. 화내던 중이란 걸 싹 잊어버린 듯 동그랗게 뜬 눈동자에 생기가 돌았다. 퍽 귀여워서 보고 있으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깨달은 모양이었다. 급히 표정을 차분하게 고치고 ‘흥’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손톱 다듬는 척을 했다.

“포도맛이랑 딸기맛이랑 복숭아맛이요.”

“한 가지만 골라.”

“그리고 소다맛이요.”

트레이너의 째려보는 시선을 ‘네가 그러면 어쩔 건데’ 하는 눈빛으로 무마하면서, 다이아는 쇼핑백의 내용물을 꺼내 바라본다. 몇 장이나 되는 레코드판을 보고 트레이너가 옷자락을 몇 번 펄럭거려 열을 식혔다. 하지만 낙장불입, 사준다고 한 젤리는 사줘야 한다.

“모르는 우마무스메가 사탕 사준다고 꼬드겨도 따라가면 안 돼요~.”

대답을 자꾸 해주니까 안되는 거라 생각하면서, 트레이너는 다이아를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을 열고 나가버렸다. 다이아도 트레이너 쪽을 보고 말하지 않았으니 쌤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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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기맛이 없더라. 아무튼 주는 대로 먹어라.”

트레이너가 편의점 봉투에 컵라멘과 과자, 음료수, 젤리를 챙겨 돌아왔다. 투덜대면서도 그녀가 요구한 맛을 최대한 가져왔건만 다이아는 대답이 없다. 잠이라도 들었나 싶어 거실로 가보니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귀를 뒤덮을 듯한 헤드셋을 끼고 음악을 들으면서 발을 까딱거리고 있었다. 웬 노트같은 것을 무릎을 굽혀 위에 두고 끄적이고 있었다.

‘짜식. 휴일이라지만 숙제라거나 바쁜 거겠지. 레이스 전략이라도 검토하나?’

자식 방에 불이 켜져있으면 부모가 이런 감정이 되곤 하는 건가. 집중하는 그 모습이 괜히 기특해서 자기가 마시려던 주스까지 컵에 이쁘게 따라 가져가 힐끗 노트를 바라보았다. 노트의 첫 단어는 다음과 같았다.

<사토노빔(다이아의 광채)>

A라고 적고 B라고 읽는 기묘한 고유명사들이 늘어서 있었다. 위력은 어떻고, 사정거리는 어떻고, 색상이나 강약점 따위가 뒤를 잇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자기 부모가 어떤 감정을 느꼈을지 늦게나마 깨달았다.

“야!”

“히으?”

배신감 섞인 그의 일갈에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몸을 경직시켰다. 그제서야 그가 돌아온 것을 눈치챘는지 허둥대다가 노트를 휙 숨겨버렸다. 답지않게 얼굴을 붉혀가며 당황하고 있었다.

“뭐, 뭔가요! 저는 사생활도 없는 건가요?”

“공부하는 줄 알았지! 레이스 생각이라도 하는 줄 알았지!”

“머리, 그래요! 머리 좀 식히려고......”

되도 않는 변명을 하려던 그녀가 갑자기 말을 멈춘다. 잠시 숨을 고르더니 혀를 쭉 내밀어 푸-하는 소리를 길게 냈다.

“뭐래요. 부모님이라도 되세요? 왜 답지 않게 꼰대질이세요?”

아무래도 ‘내가 왜 저 사람 눈치를 봐야 하지?’하는 결론에 이른 모양이었다. 아이와 고양이는 교활하고 영악하다. 누구 눈치를 보고, 누구에게 아양을 떨어야 할지 잘 안다. 아무래도 트레이너는 사토노 다이아몬드에게 그런 대상이 아닌 것 같았다.

“뭐. 답지 않긴 했지.”

트레이너도 그 점은 마찬가지라 빠르게 분노가 식어버린다. 처음에야 분노였지만 당황하는 걸 보고 약간의 가학심을 충족시키려던 것 뿐이다. 사춘기 애들은 사소한 일에 까칠해지고 잘못 들쑤시면 기분만 상하게 만든다. 본전도 못찾을 장난이나 할 만큼 그는 어리지 않았다.

“혼자 바보짓하는 거면 차라리 낫다. 아이돌 좋다고 따라다니지 않는게 어디냐.”

“그치만 아이돌도 무쌩겼고......”

그가 내민 젤리와 주스를 입에 넣으면서 다이아가 웅얼거렸다.

“무엇보다 요즘 나오는 것들은 새롭지도 않고, 수준 낮고 한심한 것들 뿐이거든요.”

“우와......”

더 얽히기 싫어진 트레이너는 의식적으로 그녀와 거리를 둔다. 혼자 뭘 하든 신경쓰지 않을 생각으로 TV 옆에 거치된 독에서 컨트롤러를 뽑고 있는데, 그의 등 뒤에서 꼭 과시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라이딘적인 무언가가 없어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거라구요.”

“......뭐? 무슨 딘?”

“라이딘이요. 용자 라이딘이요.”

“내가 아는 용자 중에 라이딘이란 애는 없었는데.”

그의 발언에 다이아의 입꼬리가 슬금슬금 올라 광대에 걸렸다. 얄팍한 우월감으로 가득찬 웃음을 오른손으로 숨기며 그녀가 트레이너 쪽으로 몸을 굽혔다.

“에, 진심? 트레이너 씨는 무쌩겼는데 상식도 부족하네~. 라이딘 몰라요? 1975년 4월 4일부터......”

방송년도를 듣고 트레이너가 그녀의 말을 잘라먹었다.

“임마! 우리 엄마보다 나이 많은 걸 내가 어떻게 알아!”

“아무튼 그거라구요! 당시에 제일 잘팔리던 마징가를 뛰어넘을 수 있게 최대한 반대되는 요소를 차용했다구요! 동양식 갑옷을 모티브로 한 디자인과 활이라는 무기,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입......”

차라리 사토노빔인지 뭔지 적을 때가 좋았다고 한숨을 쉬고, 트레이너는 고개를 돌렸다. 돌려봤자 절레절레 저어대는 게 보이니 의미는 없는 행동이었다.

“알았어, 알았어.”

“하나뿐인 귀여운 담당이 진지하게 얘기하면 진지하게 들어주시죠?”

다이아는 시큰둥한 트레이너의 반응에 볼을 가볍게 부풀렸다가 좋은 생각이 났는지 표정이 펴졌다. 그가 얘기를 들어주지 않을 때 폭력 다음으로 잘 먹히는 방법이 있었다. 그녀가 헛기침을 두어 번 하고 헤드셋에서 들려오는 노래를 따라부르기 시작했다.

“눈부신 하늘을~ 빛나는 바다를~ 넘겨줄까 보냐~ 악마의 손에는~.”

“......야, 다이아야.”

바로 반응이 왔다.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표정이 조금 밝아졌다.

“모두의 바람을~ 한 몸에 받아서~.”

“내가 위닝 라이브랑 연습 이외에는 내 앞에서 노래하지 말라고 했지?”

“자아 되살아나라~ 라이딘~ 라이딘~.”

“사토노 다이아몬드!”

게임 콘솔의 슬립모드를 해제하려던 것도 잊고 트레이너는 고개를 홱 돌려 그녀의 풀네임을 입에 담았다. 주의를 완벽하게 끌었으니 하려던 얘기를 계속하면 되겠지만, 마침 곡의 클라이막스 부분이니 좀 더 그가 싫어하는 행동을 해도 좋을 것 같았다. 아무튼 트레이너 씨가 짜증내는 얼굴을 보는 게 묘한 쾌감이 있었다.

“페이드 인~ 페이드 이인~! 이윽고 넘쳐나는 신비의 힘~!”

자리에서 일어나는 트레이너를 지그시 바라보면서 다이아가 목청껏 노래했다. 반, 아마 4분의 3 정도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그가 험악한 표정으로 그녀의 소매를 들어올려 튼튼히 묶을 때도 그녀는 깔깔 웃기 바빴다.


“아무튼 트레이너 씨. 살아남으려면 그런 식으로 발상을 바꿔야만 해요.”

벽에 못질된 커다한 모자걸이에 걸린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말했다. 그녀가 주저리 주저리 떠드는 걸 최대한 무시하려고 애쓰면서, 트레이너는 컨트롤러를 그립에 끼웠다.

“마리오를 뛰어넘으려면 어떻게 해야 한다? 용사가 공주를 구한다는 전형적인 스토리는 내버려 두더라도, 정 반대되는 걸 하면 된다는 거죠!

트레이너 씨처럼 무쌩긴 이탈리안 뚱보 대신에 잘생긴 금발 청년, 빨간 옷이 아니라 파란 옷! 아니, 파랑은 소닉을 생각나게 하니까 적당히 녹색 정도가 좋겠네요! “

“하이고, 무기는 검이라도 쓰게 할 거냐?”

“오오, 트레이너 씨! 역시 게임 얘기를 하니까 말이 좀 통하네요?”

참다 못한 트레이너가 반응하자 다리를 신나게 버둥거리면서 그녀가 콧대를 세웠다. ‘겨우 그정도 밖에 안되나’ 하는 시선을 아래로 쏘아보내고 있었다. 우월감에 차서 한 다음 말에 트레이너는 다시 한 번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니거든요! 검 말고도 활이라거나, 폭탄이라거나, 다양한 무기를 동시에 쓰는 거예요!”

“......다이아야.”

그녀의 소매를 풀어주려는 트레이너의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드디어 자신의 발상을 인정해준 모양이라고, 감동이라도 받은 모양이라고 그녀는 지레짐작했다. 다시 한 번 그녀의 콧대가 높아졌다. 그가 팔을 들어올려 모자걸이에서 해방해주자, 그녀는 운동선수다운 신체능력을 과시하듯 자연스럽게 허리에 다리를 감아 안겨 내려왔다. 소파로 돌아가는 그의 등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다이아가 히죽거렸다.

“에헴! 뭔가요? 칭찬하셔도 되는데요?”

“자.”

그가 컨트롤러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었다. 터져나오려는 웃음을 들키지 않으려고 바로 고개를 홱 돌려버리고, 그가 TV 화면을 가리켰다.

“일단 저거라도 하고 있어봐.”

“얼마나 감동했으면 목이 다 잠겼대요? 참나.”

웃음을 숨기려고 조곤조곤 말한 것조차, 그녀의 귀에는 형편 좋게 받아들여진 모양이다. 기세등등하게 컨트롤러를 집어 세이브 데이터를 불러왔다. 그리고 잠깐의 로딩 후, 그녀가 말하던 모든 것이 TV 스크린에 나타났다.

“엣......”

“후욱, 후욱, 허억......”

귀까지 빨개져서 혼자 끅끅대며 웃는 트레이너의 등 뒤로, 왕국만한 눈물을 흘리고 싶은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있었다. 자신만이 통찰했다고 생각한 것이, 실은 세상 전체로 보면 얼마나 흔하고 평범한 인사이트였는가. 사람과 세계를 시시한 것으로 치부하기 쉬운 열다섯 살 아이는 오픈 월드를 통해 진정한 어른의 세상을 배우게 된다.

“사토노빔!”

“꺼흑!”

물론 처음에는 인정하기가 쉽지 않다.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다리 끝이 트레이너의 허리와 등을 마구 찔렀다. 힘을 죽여 분노를 표현하는 그 타격이 오히려 감정의 기폭제가 되어 트레이너는 꺽꺽대고 웃었다. 그녀는 새빨개진 얼굴로 트레이너를 연신 걷어찼다.

“사토노빔! 사토노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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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해가 떨어지고 날이 어둑어둑해졌다. 이 시간이 되도록 자리에서 미동도 안하고 게임에 빠져 있던 다이아도 역시 이렇게나 늦으면 배가 고파지는 모양이다. 이번 주 가장 신나게 웃은 데다가, 그녀가 귀찮게 하지 않은 덕에 트레이너는 편안한 휴일을 보낼 수 있었다. 기분이 상쾌해서 그녀가 당장 먹을 것을 내오라고 명령해도 웃는 얼굴로 응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오늘 있었던 일은 무덤에 들어가는 그 순간까지 비밀로 간직하는 거예요.”

나가서 적당히 사온 햄버거 세트를 테이블 위에 세팅하면서 그녀가 엄숙하게 말했다. 옆에 케찹을 짜면서도 트레이너는 아직 담당의 흑역사 제조 순간을 함께했다는 기쁨에 취해있었다.

“싫다면?”

즉시 ‘사토노빔’이 그의 정강이에 직격했다. 인상을 찌푸리는 그를 가볍게 째려보면서 그녀가 으르렁댔다.

“무덤에 들어가는 그 순간이 조금 가까이 다가오겠죠?”

“무서워 죽겠네.”

그는 반사적으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지껄였다. 다 짜낸 케찹을 입에 물고 빨자 다이아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으,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 더럽고 품위도 없고 무쌩겼어요.”

“아니, 무쌩긴 건 관계 없잖아.”

“대체 다 짜낸 케찹을 왜 빨아요?”

“오히려 왜 안 빠는데? 이게 얼마나 맛있는데.”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벌레를 보는 표정으로 의자를 살짝 뒤로 빼 그와 거리를 두었다. 그래도 담당 트레이너라는 점을 참작해 따로 테이블을 쓴다거나 하지는 않는 모양이다.

“상스러워요. 밥맛 떨어지게.”

“식사량 조절도 되고 오히려 좋네.”

“이렇게 예쁜 여자와 함께 식사하는 데도 그런 행동을 하시니까 트레이너 씨는 여자친구도 없고, 휴일에 혼자 집에 틀어박혀 있는 거예요.”

“아니, 휴일에 집에 박혀있는 건 피곤해서 그런 거고. 박혀있으면 네가 놀러와서 나갈 수도 없고.”

“이해는 해요.”

엄지와 검지로 우아하게 프렌치 프라이 끝을 하나 집어 입으로 가져가면서 그녀가 끄덕였다.

“저처럼 귀엽고 멋진 우마무스메가 집에 있는데 나가기 싫어지겠죠.”

“밥도 혼자 못해먹는 게 혼자 냅두면 집이 무슨 꼴이 날지 모르잖냐.”

“뭐, 저로서도 편히 부릴 충견이 있으면 안심되긴 해요.”

“사람한테 개가 뭐냐.”

“미안요. 개는 귀엽게 생겼죠.”

그의 항변을 가볍게 웃어넘기며 그녀는 테이블 위에 버거 포장지를 깔끔하게 펼쳐두었다. 잠시 내려다보더니 손바닥을 위로 해 양 손을 그에게 내밀었다. 트레이너는 이게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싶어서 바라보다가, 강아지가 하는 것처럼 손을 그녀의 손바닥 위에 두었다. 오답이었나보다.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표정이 질색을 하며 찌그러졌다.

“이게 무슨 짓이예요?”

“손 내밀라는 거 아냐?”

“아닌데요?”

“뭔데 그럼?”

“포크랑 나이프요! 버거 먹을 거잖아요.”

“아.......”

멋쩍게 양 손을 뺀 트레이너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기 선반으로 돌아섰다.

“아니, 나는 개가 어쩌고 하니까 놀리려는 줄 알고......”

괜히 무안하니까 목소리가 자꾸 높아졌다. 다이아가 슬슬 웃음 시동을 거는 소리를 무시하려고 큰 소리로 그가 짜증을 냈다.

“애초에 버거를 왜 포크랑 나이프로 먹는 건데?”

“그만 하세요. 추하네요.”

식사는 조용하고 격식있게 진행됐다. 부쩍 말수가 적어진 트레이너를 힐끗거리며 다이아가 몇 번인가 손바닥을 내밀곤 했지만 정중하게 무시했다. 그가 이를 악물고 그녀를 무시할수록 식사가 즐거워지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 케찹 좀 더 주세용.”

“너는 케찹 하나를 스스로 안 짜먹냐?”

“트레이너 씨 양 손으로 짜 주세용.”

굳이 양 손이라고 강조하는 표정을 올려다보고 트레이너는 꿀밤충동에 휩싸였지만, 여기서 발끈하면 애기들은 더 신나서 놀린다. 악플보다는 무관심이 낫다는 생각으로 케찹에 손을 가져가는데 전화가 울렸다.

“아, 아버님이네. 잠깐만.”

그가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애초에 그녀의 아버님인데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혼나는 꼴사나운 모습을 보여주기 싫은가보다고 가볍게 넘겨버렸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케찹을 하나 가져다 뜯어 쭉 짜냈다.

“......”

그녀의 눈이 케찹 포장지와 굳게 닫힌 방문을 번갈아 힐끗거렸다. 바보 같은 짓이라고 생각은 들지만, 한번도 해보지 않은 바보짓이기도 하다. 이걸 한 번 핥거나 빠는 건 징크스를 깨는 것일까 아닐까, 그녀의 머릿속 법정이 바쁘게 굴러갔다.

통화를 마친 그가 방에서 나왔을 때,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케찹 포장지에 징크스 판정을 내리고 있었다.

“읍!”

찰칵, 하는 셔터음이 들린 건 그녀가 포장지를 바닥에 내던진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그녀의 얼굴이 순간 빨개졌다.

“으으! 뭐하는 짓이야!”

“기념할 만한 순간을 찍고 있어. 다이아가 상스럽고 더럽고 추하고 무쌩긴 행동을 하고 있잖아.”

“......아윽.”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땅을 박찰 듯 다이아의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이제 어린애가 아니다. 무려 열다섯 살이다. 한 발짝 더 어른이 된 그녀는 무턱대로 나서지 않는다.

“.......흥! 그래봤자 제대로 된 순간을 찍진 못하셨겠죠!”

대신 어른답게 혀가 길어진다.

“게다가 이건 징크스를 극복하는 성스럽고 고귀하고 아름다운 순간, 트레이너 씨와 달리 저는 떳떳하거든요! 우마스타에 올리신대도 상관 없어요!”

“진짜로?”

“그럼요! 누가 보면 버거를 먹다가 사진을 찍혀서 놀란 저라고 생각할 터예요!”

“진짜로 올려?”

사진을 찍는다고 그녀가 케찹을 빠는 순간이 담기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로 다이아가 느리진 않다. 하지만 이 장소 모두가 알고 있다. 어쩌다 당황한 표정의 그녀가 사진 구석으로 케찹을 내던지고 있는지. 그 기억만큼은 어느 사진보다도 선명할 것이다.

“아뇨......죄송합니다. 잘생긴 트레이너 씨, 자비를 베풀어 사진을 지워주세요......”

“오, 이걸 가지고 있는 한 나는 잘생긴 트레이너 씨가 되는 건가?”

자신 없게 귀를 접고 몸을 구부려, 양 손을 다소곳이 모아 그녀가 항복의 의사를 전달했다. 트레이너는 승리자다운 여유를 만끽했다. 물론 사토노빔이 날아올 수도 있으니 적당한 거리를 두고 깐족거린다.

“그런 거냐? 사토노 다이아몬드? 이 사진이 있는 한 나는 잘생긴 트레이너 씨가 되는 거냐?”

“우으으.......”

그러나 원하는 반응이 나오진 않았다. 그녀는 볼을 점점 부풀리면서 번민에 빠져있다. 격렬하게 저항하는 것보다 그게 더 상처받는다. 트레이너는 흥이 완전히 깨져 스스로 사진을 지워버렸다. 아까보다도 조용하고 엄숙하게, 상처입은 트레이너와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가 버거를 깨작였다.


“근데 너 왜 집에 안 가냐.”

“오늘은 여기서 잘 건데요?”

“하? 왜? 어째서?”

식사 이후 통금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다. 청천벽력같은 소식에 놀라는 트레이너와 달리 그녀는 태평하게 소파에 누워 책을 보고 있었다. 아주 양말까지 벗어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기숙사 가면 키타짱이 하도 환하게 불을 켜놔서 잠을 잘 수가 없어서요.”

“아니, 안대를 하고 자면 되잖아.”

다이아는 눈동자를 살짝 내려 그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히죽 웃었다.

“안대용!”

“하, 젠장......”

불쾌해하는 그의 표정을 보고 성공이라 판단했는지 다이아는 꼬리만 살짝 움직여 인사하는 시늉을 했다.

“그렇게 됐으니 오늘 쓸 칫솔과 잠자리를 준비해주시길 요청드립니다. 트레이너 씨.”

“잘 생각으로 왔으면 처음부터 칫솔 정도는 가지고 다녀라. 어?”

지갑을 챙겨 나갈 준비를 하고, 트레이너는 괜히 소파를 걷어차 짜증을 냈다. 떠나는 뒷모습을 향해 다이아가 영혼 없이 웅얼거렸다.

“아아, 트레이너 씨랑 살 사람은 행복하겠네~. 자상하고 잘 챙겨주고 잘 놀아주고......”

“또 무쌩겼다느니, 얼굴만 안 마주치면 행복하겠다느니 덧붙이겠지.”

“다 들리거든요! 그렇게 생각 안했거든요! 사람 말을 끝까지 들으세요!”

“알았다, 알았어. 뭔데. 뭐냐.”

“잘 놀아주고, 편의점에서 푸딩도 사다주고! 좋겠네!”

키득거리는 소리에 가슴 한켠이 벅벅 긁혀 트레이너는 이를 갈았다.

“오늘 나도 불 켜고 잘 테니까 그런 줄 알아!”

“뭐래~.”

쾅 소리가 나게 문이 닫히자 다이아는 잠시 자신의 행동을 돌아보고 후회했다. 심지가 굳고 의지가 강하다는 장점이 어째서 그의 앞에서는 고집이 세다는 단점이 되는 건지. 왜 유독 그를 짜증나게 만드는 게 이렇게 즐거운 건지. 아가씨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을 왜 아무렇지도 않게 하면서 낄낄대게 되는 건지 생각해보았다.

“나이를 먹으니 생각이 많아지네.”

누가 들으면 큰일날 소리를 하면서 그녀는 책을 내려놓고 양말을 챙겨 신었다.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을 반성하고 나자, 제대로 고맙다는 말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트레이너 씨!”

“넌 왜 또 여깄냐?”

막상 편의점 앞에서 계산을 마치고 나온 그를 마주하자 그런 생각이 쏙 들어갔다는 것만 빼면, 그녀의 행동은 대견한 것이었다. 봉투를 넘겨받아 안을 확인하면서 그녀가 말했다.

“푸딩 제대로 샀는지 확인하려구요!”

“임마, 제대로 샀어! 내 것까지 2개나 샀다고.”

“히히.”

기분 좋게 꿀밤을 맞으면서, 그녀는 고생하셨으니 봉투는 자신이 들겠다고 생색을 냈다.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은 트레이너의 옆에 적당히 붙어 발을 맞춰 걸으면서, 다이아는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삐졌어요?”

“뭘 삐져. 애기 상대로 그럴 만큼 속 좁은 사람 아니다.”

“고맙습니다. 트레이너 씨.”

괜히 낯간지러워 다이아는 봉투를 높이 펄럭거렸다. 버스럭대는 소리가 시끄럽다고 타박하면서도, 트레이너는 가볍게 입꼬리만 올려 미소지었다. 그 미소를 향해 그녀가 확인하듯 덧붙였다.

“트레이너 씨랑 있는 시간, 싫어하지 않아요.”

“뭐, 그렇겠지.”

그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해달라는 대로 해 줘, 먹을 거 사다줘, 소파에 꼬리털 날리고 다녀도 아무도 뭐라 안하고.”

“트레이너 씨도 즐겁죠? 제가 놀아드리니까?”

“꼭 그런 건 아닌데......”

다이아가 이마의 다이아몬드 모양 유성에 양 손을 가져다대는 걸 확인한 트레이너가 발언을 잽싸게 정정했다.

“그럼! 즐겁지! 누가 누구랑 놀아주는 건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래!”

“그럴 줄 알았죠.”

버석버석대는 편의점 봉투 소리가 집을 향해 걸어갔다. 또 하루가 평범하게 지나가고, 다이아는 또 하루 란도셀 매던 어린아이에서 멀어져 갔다. 별 것 아닌 하루 일들에서, 아마도 배워나가는 것이 있을 것이다. 서서히 스스로를 조정해가며 어른이 되어갈 것이다.

‘그러니 지금 함께 노는 시간을 소중히 여기도록 할까.’

그런 의미에서 트레이너는 깨끗이 씻고 잠을 청하는 다이아에게서 조금 떨어져 앉아 공포 영화를 틀어놓았다.

“어우, 무섭다. 불 좀 켜야지.”

“야! 나가서 자,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그녀가 던진 베개에 내쫓겨 트레이너는 마루에 불을 켜고 누워있었다. 얼마 뒤 침실의 불이 켜지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가 눈을 감았다. 불이 꺼지지 않는 집에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