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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지난 이야기들

똑똑.

휴일 대낮이었다. 언제나처럼 트레이너 씨는 집 안에 있을 것이다. 일찍 일어났을 수도 있고 늦게 일어났을 수도 있다. 아무튼 집에 있을 것이다. 그의 담당,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그 사실을 아니까 문을 두드렸다. 소매가 긴 에메랄드색 원피스를 입고, 조그만 크로스백을 하나 메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그의 휴일의 평화를 깨트릴 생각이었다.

똑똑똑.

그런데 대답이 없다. 까치발을 들어 슬쩍 희뿌연 창문을 바라보았다. 불투명한 유리 너머로 불이 켜진 흔적은 없다.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다. 그녀로서는 휴일에 트레이너가 집에 없다는 상상을 해본 적이 없었다. 조금 더 서서 기다리다 몇 번 더 노크해보고, 벨도 눌러보았다. 여전히 대답이 없다.

“설마......”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살짝 웃으면서도, 그녀는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무쌩김’이라고 저장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다섯 번 반 통화연결음이 들리고 시끌시끌한 음악 소리가 뒤따라왔지만 그가 말을 시작할 쯤에는 잦아들었다.

“어, 다이아야.”

“트레이너 씨?”

“혹시 우리 집에 와 있니?”

“문 앞인데요.”

“어쩌냐. 나 나와있는데.”

도저히 방법이 없다는 듯 던진 ‘어쩌냐’하는 말에 그녀의 눈썹이 고저차 200미터의 비탈길을 형상화하듯 일그러졌다.

“어쩌냐뇨? 당장 돌아오세요!”

“아니, 그럴 수가 없다니까?”

“귀엽고 소중한 하나뿐인 담당이 이 여름날에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니까요?”

“오늘은 저녁이나 돼야 들어가. 키타짱이나 다른 친구들이랑 놀아.”

“아이씨!”

이를 꽉 물어가며 다이아가 험악한 소리를 냈다. 감정이 격해져 얼굴이 상기되었다. 좀처럼 보이지 않는 표정이었다.

“제가 당장 오라고 하잖아요! 만사 제쳐두고 와야 하는 거 아닌가요?”

“제쳐둘 수 없는 일이 있는 거라고.”

“대체 어디서 뭘 하는데요!”

“애초에 난 네가 왜 그렇게 화를 내는지 모르겠는데.”

“뭐라고요? 그야......!”

거기까지 말하고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왜 이렇게까지 화가 나서 험악한 말까지 써가면서 트레이너를 윽박지르고 있을까? 트레이너의 말대로 키타짱이나 다른 친구들과도 얼마든지 놀거나 할 수 있다. 자율적으로 훈련을 할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혼자 시간을 보내도 상관없을 것이다.

“그야! 그러니까......”

몇 번 말을 더듬다보니 왜 자신을 최우선으로 하지 않느냐는 의문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할일이 있는 것이고, 휴일에도 가끔은 바쁘게 지낼 수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런 일이라면 분명 사전에 이야기가 되었을 것이다. 준비하면서 그녀에게 알릴 수도 있다. 왜 이렇게 무신경하게 구느냐는 서운함이 뒤이어 떠올랐다.

‘왜 자신이 갑작스럽게 트레이너의 2착이 되어야만 하는가?’

하는 표현이 떠올랐고 입에 담을 뻔 했지만, 생각하면서 돌아오기 시작한 그녀의 이성이 그걸 막았다.

‘왜 트레이너의 2착이 되면 안 되는데?’

당연한 의문이다. 그의 우선순위에서 밀리는 게 서운하다는 건, 그의 우선순위가 되고 싶단 뜻이다.

‘왜 굳이?’

그는 그녀의 담당 트레이너일 뿐이다. 무쌩겨서 친구도 없고 일하고 게임만 하는 사람을, 그녀가 인심 좋게 놀아주는 것에 불과하다. 그런 그가 사생활에서 그녀를 챙기든 말든 솔직히 알 바 아니다. 자존심 상할 일이 아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화가 나고 가슴이 답답한 걸까. 다이아는 자신이 왜 그러는지 아직 다 이해할 수가 없다. 혹시나, 하는 가능성 몇 가지가 떠올랐지만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다. 말도 안 된다고 일축해버리자, 익숙한 휴리스틱이 감정 상태에 맞는 그럴싸한 이유를 만들어냈다.

“트레이너 씨처럼 무쌩긴 게 절 무시하니까 기분 나쁘잖아요!”

잠시 침묵이 흘렀다. 오랜 시간 대답이 없자 다이아의 기세가 조금 꺾이고 불안감이 싹트기 시작했다.

“......아, 그러셔.”

그 싹을 짓밟는 듯한 풉, 하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전까지는.

“방금 웃었어요? 어딜 감히!”

“문 손잡이에 우유 주머니 보이지? 거기 열쇠 있으니까 들어가서 놀던가 해. 혹시나 급할 때 먹으라고 간식 사다놨으니까 배고프면 먹어라.”

“그 정도 배려까지 해 놨으면 그냥 오라고요!”

아, 하고 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절대로 부엌에 손대지 마라. 알겠지?”

“......몰랐는데요?”

“어른이라며? 어른스럽게 행동해.”

“부엌에 손대지 말라느니 어른 대접도 안해주면서.”

“......좋은 지적이야. 그치만 안 되는 건 안 돼. 그게 싫으면 그냥 기숙사로 돌아가.”

가벼운 알림음과 함께 통화가 종료되었다.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봤지만 곧바로 수신거부된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우유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신발을 정리하려다가, 흥! 하는 소리와 함께 대충 벗어던졌다. 불 꺼진 조용한 집에는 그녀의 행동거지를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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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다는 건 자신이 세상의 중심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과정이라고 하던가. 자신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자신이 특별하지 않다는 걸 느끼는 과정이라고 하던가. 그 과정엔 실패와 좌절이 항상 함께한다.

“어느 쪽이냐 어느 쪽이냐, 어느 쪽이냐! 어느 쪽이냐아아악!”

가령 일본 더비같은, 일생 단 한 번 뿐인 사건에서 겪은 실패라면 어떨까.

“가장 안쪽의 츠우카아인가? 츠우카아인가, 사토노 다이아몬드인가!”

유난히 말이 빠르고 텐션이 높은 실황 중계가 호들갑을 떨어댈 정도로 근소한 차이였다. 사진을 판독해야 할 정도의 차이, 고작 8 센티미터.

“......”

트레이너의 집 거실 소파에 앉자마자 그 생각이 났다. 솔직히 당시엔 별로 화가 나진 않았다. 사츠키상에서 거둔 3착 성적이 더 아쉬웠다. 또 졌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만큼 모든 것을 쏟아부었기 때문에 후회할 여유도 별로 없었다. 다시 심기일전해서 준비하면 이길 수 있을 거란 희망까지도 있었다.

그런데 왜 그의 집에 아무도 없다는 이 사소한 사실이 그녀를 이렇게까지 거슬리게 하는 걸까.

“으으으으!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가!”

그녀는 냅다 양 팔을 휘둘러 소파 바닥을 팡 소리나게 내리쳤다. 그런다고 분이 풀리진 않았다. 오히려 분노를 부채질했다. 몇 번이나 옷자락을 펄럭거려 열을 식히면서 그녀는 부엌 쪽을 바라보았다. 작은 피크닉용 바구니에 간식거리가 잔뜩 담겨 있었다. 평소라면 좋다고 먹었을 테지만 오늘은 다르다. 마치 집에 없을 것을 준비했다는 듯한 배치가 그녀를 더 짜증나게 했다.

“하아......집에 오면 혼내줘야지.”

갑자기 기운이 쭉 빠질 만큼 지쳐서 다이아는 그대로 소파에 누워버렸다. 물이 99도까지는 그럭저럭 얌전하다가 100도가 되면 맹렬하게 끓기 시작하는 것처럼, 방금 전의 거절이 사소하지만 마지막 1도였나보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제대로 된 실패라든지 좌절이라든지, 결핍같은 것을 겪어보지 못한 그녀였다. 그게 한 번에 몰려오자 피곤해졌다.


가볍게 낮잠을 자고 일어나자 조금은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녀는 거실 불을 켜고 트레이너의 집 구석구석을 모험이라도 하는 것처럼 들쑤셨다. 만화 따위에서 나오는 것처럼 흥미진진한 것은 없었다. 숨겨둔 것도 없었다. 침대 밑에는 먼지 뿐이었다. 몇 번이나 기침을 해대고 나서 다이아는 탐색을 포기했다.

“배고프다......”

아까까지는 간식이고 뭐고 식욕이 돌지 않았지만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바로 식탁으로 걸어가 준비된 간식을 쏟아놓고 품평했다. 다 아는 맛들이다. 집에서는 못 먹게 하지만 트레이너는 얼마든지 사주는 것들이다. 식탁 위에 넓게 펼쳐두다가 그녀가 부엌 찬장 위로 눈을 돌렸다.

“절대로 부엌에 손대지 말란 것도 징크스 아니야?”

보통 사람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면 조금은 마음이 동하는데 사토노 다이아몬드라면 말할 것도 없다. 찬장을 열어 컵라멘 몇 개와 주전자를 꺼냈다. 주전자에 물을 가득 채워 가스레인지 위에 올려두었다.

“바보 취급도 정도껏 하셔야죠. 컵라멘 정도는 저도 해먹을 수 있거든요?”

이제 레버를 가볍게 돌리면 불이 올라오고, 끓을 때까지 기다리면 될 일이다. 그녀가 가볍게 레인지 레버를 쥐어 돌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원위치했다가 돌렸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하. 살짝 눌러서 돌리면 되는 거죠?”

인터넷 검색으로 새로운 정보를 얻어 재시도했다. 딱딱대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아무 일도 없다. 불은 일어나지 않았다. 다시 꾹 눌러 돌렸지만 여전히 딱딱거리는 소리 뿐이다. 오기와 승부근성으로 몇 번을 힘주어 레버를 돌리던 중이었다. 똑, 하고 나면 안되는 금속음과 함께 손잡이가 빠져버렸다.

“어라?”

자기 손에 들린 손잡이와, 그 뒤로 끊어진 용수철 따위를 바라보던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이마에 가벼운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뭐가 문제였을까? 이제 이런 징크스조차 깰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린 것일까? 징크스는 고사하고 트레이너의 세간을 망가트려버렸다. 꿀밤을 맞아도 할 말이 없다. 이제라도 깔끔하게 라멘을 포기한 다이아는 젤리와 과자 몇 봉지를 챙겨 소파에 단정히 앉았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 뒤, 쓰레기를 버린 그녀는 부엌 쪽을 몇 번 힐끗거렸다.

“.......”

괜히 양심에 찔려 한참을 서 있던 그녀는 스스로의 소매를 묶어, 벽에 못질된 튼튼하고 큰 모자걸이에 매달렸다. 자신에게 징벌을 내린 것이지만 용서받는 기분도 들지 않고 재미도 없었다. 그냥 철봉 운동을 하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재미 없어.”

애초에 셀프 처벌을 한다는 목적도 잊고 그녀는 몇 번 몸을 움직여 모자걸이에서 내려오려고 했다. 가벼운 기합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들썩였다. 그러나 빠지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녀가 탈출할 것을 막기 위해 절묘한 각도로 구부려놓은 모자걸이다. 묶인 소매가 당연히 걸린다.

“어어, 어쩌지......”

그녀가 가벼운 패닉에 빠져 몸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반동을 받은 몸이 그네가 움직이듯 했다. 소매가 당겨지는 느낌에 바로 멈춰섰다. 좋아하는 옷이다. 망가트리기 싫다.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데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문 손잡이가 돌아갔다. 다이아의 고개가 반응해 돌아갔다.


“......신발 좀 제대로 놓지.”

센서등 아래 보이는 신발장 풍경에 혀를 차면서, 신발을 발로 슥슥 밀어 정리하는 트레이너의 모습이 있었다.

“트레이너 씨? 아직 저녁 안 됐는데요?”

“아니, 네가 그렇게 빽빽거리고 억지를 쓰는데 그럼 내가......”

고개를 든 트레이너의 눈이, 모자걸이에 걸린 다이아의 눈과 마주쳤다.

“대체 거기서 뭐하냐?”

“아니, 여기에는 말 못할 사정이......”

“어지간히 심심했냐? 사실은 내가 벌주는 걸 좋아했다거나......”

“그럴 리가 없잖아요!”

히죽거리는 그의 말에 부끄러워진 다이아가 힘껏 벽을 박차 몸을 띄웠다. 소매가 문제라면 몸의 무게중심을 고리보다 위로 올려 가볍게 빠져나오겠다는 전략이었다. 게임에도 나오는 삼각차기의 원리를 이용한 것이다.

문제는 그녀가 레플리로이드가 아니라 우마무스메라는 점이었다. 수직인 벽을 차면 당연히 반발력은 수평으로 작용하고, 그녀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게 된다.

“꺼흑.”

뚝, 하는 불길한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이 벽에서 사출되어 날아갔다. 꼴사나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그녀가 우당탕탕 바닥을 굴렀다. 바닥의 마찰력을 그대로 받은 그녀의 피부가 가볍게 쓰라렸다. 딸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부러진 모자걸이가 그녀의 옆에 함께 구르고, 가벼운 소리와 함께 에메랄드색 원피스가 눈처럼 바닥에 내려앉았다.

“......?”

왜 원피스가 그녀의 눈에 보이는지 이해하는 데는 좀 긴 시간이 걸렸다. 이해한 뒤로는 몸이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잽싸게 원피스를 챙겨 가까운 방으로 들어가버렸다. 소매는 끔찍한 꼴이 되어있었지만 그게 문제가 아니었다.

“흐엥, 이제 시집 못 가!”

가장 보여주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최악의 방식으로 옷 안쪽을 보여줘버렸다. 되는 일이 없다. 작은 일에도 세상이 끝난 것처럼 느껴지는 어린아이다운 생각으로 그녀는 우는 소리를 냈다. 문을 살짝 열고 빼꼼 고개를 내밀어 빽 소리질렀다.

“어쩔 거야,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다이아는 이제 시집 못 가!”

“......너같은 건 시집 가면 안 돼, 이것아!”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튀어나와 사토노빔을 갈기려던 다이아는 그대로 굳어버렸다. 트레이너는 가스레인지 앞에서 얼굴을 감싸쥐고 서 있었다.


“에헤헤. 트레이너 씨. 화났어요?”

잠시 후, 가스 밸브를 제대로 열어 끓인 물이 컵라멘에 떨어지는 걸 바라보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혀 짧은 소리를 냈다. 트레이너는 만감이 교차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각보다 덜 박살나서 다행이지. 에휴. 일찍 가보겠다고 말이나 한 게 다행이다.”

“그러고보니 엄청 일찍 오셨네요? 푸히, 사실은 제가 보고 싶으셨다거나......”

그의 째리는 시선에 다이아가 쭈그러들었다.

“그럴 리가 없겠죠. 그냥 걱정돼서 오신 거겠죠.”

“집도 집이지만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떡하냐.”

“......절 걱정하신 거예요?”

“면목 없어서 아버님 얼굴을 어떻게 봬.”

“......그러고보니......”

자기 컵라멘에 물을 붓는 트레이너의 이마를 휙 째려보고 다이아는 고개를 숙였다. 원피스 자락을 살짝 들어, 다리 한 쪽을 식탁 위에 올렸다. 울며불며 떼쓰는 소리를 냈다.

“어떡해요! 아까 트레이너 씨 때문에 무릎 다쳤어요! 피 나는 것 같아요!”

당연히 피는 나지 않는다. 그냥 좀 빨개진 것 같긴 했다. 트레이너는 분노를 억누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매몰차게 그녀의 다리를 식탁 아래로 밀어버렸다.

“꺼흑.”

“그게 왜 나 때문이야. 지가 매달리고 지가 떨어져놓고.”

“트레이너 씨가 이상한 말을 하니까!”

거기까지 말한 다이아는 갑자기 배를 잡고 깔깔 웃기 시작했다. 감정 기복이 유독 격한 시기인 걸 감안해도 이상한 짓이었다. 트레이너는 어찌 반응할 지 모르고 그냥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한참을 웃던 그녀가 그를 힐끗 보더니,

“뭘 봐요? 무쌩겨가지고.”

하고 쏘아붙이고 다시 깔깔 웃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투닥거리고 싸우는 것 같은 대화를 하고 있는데, 신기할 정도로 기분이 풀어지는 느낌이었다. 즐거웠다. 집에 오면 혼내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도 잊어버리고 그녀는 얼굴이 새빨개질 때까지 웃었다.



=================



“트레이너 씨. 신기하네요.”

“뭐가.”

밤이 되었다. 깨끗하게 씻고 파자마를 챙겨 입은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수건으로 머리를 말리면서 다가왔다. 트레이너는 게임 화면에 정신이 팔려서 돌아보지도 않았다.

“트레이너 씨는 사츠키에서 졌을 때도, 더비에서 졌을 때도, 다음엔 더 잘할 거라고 경기장에서 한 마디 하신 게 전부고 아무 위로도 격려도 안 해주잖아요.”

“한 마디 했으면 됐지. 그걸 내가 천년만년 붙들고 있어야 되냐?”

“그야 주변 사람들은 만나기만 하면......”

“격려해준답시고 얘기를 또 꺼내면 그 때 생각이 다시 난단 말야.”

얘기에 집중하던 탓인지 트레이너의 캐릭터가 바닥을 힘차게 미끄러져 절벽으로 떨어져 미스 판정을 냈다. 다이아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에, 죽었대요. 게임 못 해. 바보.”

“......실패로부터 배울 점은 분명히 있는데, 우선은 감정적으로 추스르는 게 먼저지.”

“치. 그냥 귀찮았던 건 아니구요?”

“귀찮은 건 지금 이러는 게 귀찮은 거고......”

“어휴, 알았어요. 맨날 짜증만 내.”

그러면서도 입꼬리를 살살 올리면서 다이아는 그의 등 뒤 소파에 편안하게 앉았다. 수건으로 머리 물기를 말리면서도 등을 힐끗힐끗 보곤 했다.

“맞는 말인 것 같긴 해요. 키타짱도 다른 친구들도 친절해서 그런 건 줄은 알지만, 친절해서 더 신경쓰이고 가끔 상처받는 것도 있거든요.”

“넌 냅두는 게 최고야. 격려라고 해봤자 내가 뭐라고 하냐? 야, 2등도 잘한 거야. 3등도 잘한 거야. 이런 말이 씨알이나 먹히냐?”

“사토노 빔!”

“커흑.”

발 끝으로 등을 쿡 찌르자 그의 허리가 활처럼 휘었다. 몇 번이나 반복해 그의 신경을 거스르면서 다이아가 말했다.

“그렇다고 오늘처럼 방치하면 트레이너 실격이라고요. 담당 기분 맞춰주는 것도 중요한 일인데.”

“평소에도 실컷 보잖아. 휴일에는 방치 좀 하고 살자. 솔직히 너도 내 무쌩긴 얼굴 안 봐서 좋지 않았냐?”

“음......”

늘어지게 하품을 하고, 마지막으로 그의 등을 발 끝으로 쿡 찌르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웃었다.

“모르겠는데요.”

“난 네 얼굴 안 봐서 간만에 기분 좋았는데.”

“그래서 휴일에는 꼭 여기 있어야 돼요. 트레이너 씨 기분 나쁘라고.”

“제발 기숙사 가서 자라.”

“싫다요~.”

머리 말린 축축한 수건이 그의 목에 날아와 폭 떨어졌다. 이성을 잃고 그가 일어나 꿀밤을 먹이기 전에,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소파에서 탈출해 침실로 들어갔다. 배려도 뭣도 없고, 서로 놀리고 투닥거리기 바쁜 곳이었지만, 어쩐지 여기가 제일 편안했다. 잠이 솔솔 올 만큼.

“쿨......”

“어휴. 적당히 좀 하지.”

잠시 뒤 들어와 불을 꺼주고 이불을 덮어주면서 트레이너는 한숨을 쉬었다. 베개에 침을 흘릴 것처럼 편안하게 잠든 모습을 한참을 내려보다가 고개를 몇 번 저었다.

“그래도 얼마나 좋냐. 패배에도 좌절에도 꺾이지 않는 다이아몬드가 말야. 이렇게 강한 걸 보니까 킷카상은 이기겠다.”

문이 닫히고 방이 어둠에 잠기자,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잠결에 자신이 환청이라도 들은 것인가 싶어 몸을 몇 번이나 흠칫거렸다.

“뭐야, 왜 저래. 왜 저래. 왜 저래......”

이불을 귀까지 올려 덮고 그녀가 몸을 둥글게 말았다. 어쩐지 잠이 확 깨버렸다. 하지만 밖으로 나가기는 좀 그랬다.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앞, 그 뒤에서 디비니티가 몸을 맞댔다! 이 2강이 몸을 맞댔다! 빠르게도 불꽃이 튀는 3, 4코너의 중간 지점! 두 우마무스메가 함께 언덕을 내려간다!”

정말 그의 말대로 그녀가 강했던 것일까. 가장 강한 우마무스메가 이긴다는 킷카상, 서서히 앞으로 뻗어나가 승부를 걸었다. 사츠키상에서 자신을 물먹였던 가장 빠른 동기와 나란히 달렸다.

“비원인가, 2관인가!”

둘 다 아니다.

가문의 비원을 짊어지고 달리고 있다는 것 쯤은 안다. 징크스를 깨기 위해 달린다는 것 쯤은 안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은 신경쓰지 않는다. 그녀의 트레이너가 그런 것처럼, 굳이 그걸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달려가고 있는 건 아직 자신이 실패하지 않았다고, 아직 내가 세상의 중심이고 주인공이라고 몸부림치는 어린아이다.

“사토노 다이아몬드, 여기서 선두로 바뀐다!”

그것마저도 머릿속에서 벗어던졌을 때, 그제서야 날개가 펼쳐지는 것만 같았다. 최종직선에 접어들자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비원이니 어린아이니 어른이니, 최강세대니 유망주니 하는 모든 수식어를 전부 벗어던지자 다이아몬드만 남았다.

안쪽에서 사츠키상 우마무스메가 덤벼들고, 바깥쪽에서 다른 우마무스메가 덮쳐오지만 그녀만큼 가볍지 않다. 최종 직선의 마군에서 혼자 앞으로 뻗어나가는 건, 혼자 빛나는 건 오로지 다이아몬드 뿐.

“마침내, 마침내 비원이 이루어진다! 사토노 다이아몬드! 사토노 다이아몬드!”

골 지점을 목전에 둔 가장 강한 한 명의 우마무스메가 긴 소매를 펄럭이며 달렸다. 그리고 잠시 후, 잊고 있었던 것들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 돌아왔다.

“비원을 이루어냈다, 사토노 다이아몬드! 이 1관만큼은 넘기지 않았다! 사토노 다이아몬드입니다!”

확정된 결과로서.


 
“여, 축하하고.”

골 너머 저편에서 기다리는 무쌩긴 얼굴 위에 손가락 두 개가 척 올라갔다. 사토노 가문 최초의 G1을 승리했는데 대체 무슨 모양 빠지는 인사치레란 말인가. 천천히 속도를 죽이던 다이아가 다시 한 번 가속했다. 처음에는 사토노빔이라도 날릴 셈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순간 마음이 바뀌었다. 짜증을 빠른 속도로 대체하는 감사, 그리고 확정된 승리의 기쁨이었다.

“트레이너 씨이!”

승리의 자리니까, 이 정도 호사는 누리게 해줘야겠다고 환하게 웃으면서 양 팔을 벌려 그녀가 몸을 날렸다. 기쁨으로 감긴 그녀의 두 눈은 트레이너의 몸이 휙 돌아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다음 순간 다시 뜬 눈 앞에 보인 건 잔디가 잘 정비된 땅바닥이었다.

“꺼흑.”

“아가씨!”
“다이아야!”
“다이아짱!”

상황 판단을 제대로 하기도 전에 그녀의 몸은 달려 난입한 많은 손들에 일으켜 세워졌다. 눌러버릴 것처럼 많은 품에 둘러싸여 오도가도 못하고 있었다. 정작 그녀가 안으려던 대상은 사토노 사람들 옆에 느긋하게 서서 히죽거리고 있었다.

“다이아야, 너무 감동받지 마라. 이것도 다 지나간다.”

“야!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혼날래?”

“카메라 돈다. 다이아야.”

“......너무하세요!”

“그치만 뭐, 그저 지금 순간을 소중히 하자고.”

한 발짝 떨어져 느긋한 미소로 바라보다가, 그는 서서히 사토노 가문 사람들에게 합류했다. 다이아의 아버님과 남동생 사이에 서서 그녀의 몸을 하늘로 띄워보냈다. 온전하게 즐기는 헹가래의 순간, 그가 붙잡은 다이아의 오른다리 쪽이 유독 높이 뜨는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