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려돌려 빠칭코!”

“돌려돌려 빠칭코!”

두 남성이 아파트 복도를 걸으며 신나게 외치고 있었다. 둘 다 타이 없는 캐주얼 정장을 입고 있었는데, 그런 단정한 차림과는 전혀 맞지 않는 대사를 치고 있었다.

“자네, 그런 거랑 연이 없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그쪽에도 조예가 깊군 그래?”

왼쪽에 선 나이든 쪽의 남자는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아버님이다.

“어우. 그 정도는 아니지만 예전에 잠깐 빠져살던 적이 있었습니다.”

어깨를 때리는 아버님의 손바닥에 몸을 살짝 굽혀 겸손하게 대답하는 젊은 남자는 다이아의 트레이너다. 실실 웃는 그의 얼굴을 살피고 아버님이 흥겹게 웃었다.

“흐하하. 죄업이 깊은 친구구만. 그래서, 좀 따고 다녔나보지?”

“예, 빠칭코의 절대공식이 있거든요.”

“호오?”

의문에 곧장 답하듯 트레이너가 오른손을 번쩍 들어 외쳤다.

“정답! 사토노하기!”

다이아의 아버님이 등을 젖혀 자지러지게 웃었다. 

“크하! 점점 더 자네가 마음에 들어! 아무튼 빨리 가지.”

“예, 아버님.”

죽이 잘 맞는 암군과 간신배인지, 나이를 초월한 우정인지 모를 어깨동무가 아파트 복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올라 탔다. 문이 닫히자, 층계참 벽 뒤에 숨어있던 그림자가 스멀스멀 튀어나왔다. 어두컴컴하고 칙칙한 기운이 에메랄드색 원피스를 입은 그림자의 주인에게서 뿜어져나오고 있었다.

잠시 후 1층으로 내려온 그림자의 주인,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택시에 올라타 도로를 질주하는 검은색 차량을 가리켰다.

“저 차를 따라가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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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야, 여기 와서 서 봐라.”

모든 것의 발단이 된 건 2주 쯤 전 휴일 대낮이었다. 그날 트레이너는 벽 앞에 서서 잠시 고민하다가 소파에 앉아있던 사토노 다이아몬드를 불렀다. 그녀는 이제 아예 휴일 전날부터 와서 방을 점거하고 눌러 앉아있었다. 그녀가 느릿느릿 일어나 벽과 트레이너 사이에 와서 섰다.

“으흠.”

다람쥐처럼 빵빵한 그녀의 볼이 계속 우물거리고 있다. 간식으로 먹으려고 사둔 크림빵의 소재를 파악한 트레이너의 눈썹이 찌그러졌다.

“그게 왜 거기 가 있냐?”

“아아~.”

“입 안 다물어?”

자랑하듯이 보여주는 꼴을 견디지 못하고 그는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반응이 다이아의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리게 했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올해로 16살이 되었다. 중등부 3년째, 레이스 우마무스메로서는 시니어급에 접어드는 시기다. 작년 아리마 기념에서 현역 최강이라 불리던 키타산 블랙을 꺾었다. 커리어의 절정기라는 평가에 정신적인 성장도 이루었다.

이제 애보다는 사실상 어른에 가깝지 않느냐는 말을 듣지만, 멀리서 지켜보는 사람들한테 어른스럽게 보이기는 쉽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녀를 접하는 입장에선 아직 애에 더 가깝다.

아무튼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고 있다. 누구처럼 막 기세좋게 크고 그런 건 아니지만, 성장을 나타내는 징표 중 하나가 그녀의 키다.

“팔 좀 올려 봐라.”

“으흠.”

여전히 크림빵을 우물대면서 다이아는 양 팔을 위로 들어올렸다. 원래 모자걸이가 있던 위치에 가볍게 손목이 감기는데도 발이 땅에 닿았다.

“키 많이 자랐네.”

흐흐, 웃는 소리를 흘리면서 다이아는 크림빵을 삼켰다. 자랑하듯 모자걸이를 쥐고 몸을 살짝 앞으로 내밀었다.

“후히히. 이제 벌 못 주겠네요?”

“새로 올려 달려고. 높이 체크해야하니까 가만히 있어 봐.”

벌 줄 자리를 봐야 하니 가만히 있으라는 말을 누가 듣나. 다이아의 몸이 이리저리 움직였다. 처음에는 분명 그의 신경을 긁으려는 시도였다. 장난이었다. 과장되게 몸을 왔다갔다하면서 그의 반응을 살피고 즐길 셈이었다.

“가만히 좀 있으라고.”

“......아.”

그녀의 팔에 꾹 눌리며 전해지는 힘있는 느낌에 다이아가 굳어섰다. 손 안에 그녀의 양 손목을 잡아 벽에 밀어둔 트레이너가 그녀의 키와 팔의 위치를 번갈아 확인하고 있었다. 그가 나머지 한 손으로 주머니에서 마커를 꺼내는 동안에도 그녀는 미동도 없었다.

‘손 크다......’

새삼스러운 재인식이었다. 자신의 손목을 누르는 손의 느낌을 강하게 의식하자, 눈앞에 드리운 그림자와 그걸 만들어내는 몸에 시선이 갔다. 휴일이라고 적당히 편안하게 입은 셔츠 아래로 숨길 수 없는 윤곽이 괜히 도드라져 보였다.

이상하다. 기분이 이상하다. 어딘가에서 불을 피워놓은 것처럼, 연기가 올라오는 것처럼 간질거리는 느낌이 났다. 겪어본 적 없는 애매한 감각과 생각들에 머리가 당황했다. 다른 것보다 그녀의 표정이 무척 이상했을 테지만, 거기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으으.”

“아, 미안. 아팠니?”

바보같은 소리를 내자 트레이너가 손을 풀어주었다. 걱정하는 표정과 말투가 어쩐지 얕잡히는 것처럼 들렸다.

“아뇨......”

그녀는 고개를 살짝 저었다. 아프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다른 모든 것이 불명확했지만 한 가지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손을 놓은 그 순간이 명백하게 그녀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

그녀는 그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여기서 손을 다시 잡으라고 말하면 이상하게 들릴 것만 같았다. 애시당초 턱선이 눈에 들어온 순간부터 그런 말을 할 수도 없었다. 말문이 막힌 것도 처음이었다. 그녀를 향해 내려온 시선을 홱 고개를 돌려 피해버렸다.

“뭐, 뭘 봐요.”

“네가 먼저 봤잖아.”

“무쌩겨가지고. 쳐다보지 말아요.”

언제나처럼 편한 레파토리로 상황을 얼버무리고는 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중 가장 자신없는 소리였을 것이다.



그렇다고 신경쓰이는 상황에서 도망가는 것은 사토노 다이아몬드답지 않다. 방금 체크한 대로 모자걸이를 엄중하게 달고 있는 트레이너의 뒤에 서서, 그녀는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등 넓다......’

잡생각에 사로잡힌 채 그녀는 가볍게 벽에 못을 박는 망치소리를 들었다. 시선은 망치를 쥔 그의 손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의 손이 크다는 것쯤은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벌써 함께한 시간이 3년을 향해가고 있다. 주로 걷어차거나 꿀밤을 때리는 식이었지만 신체 접촉도 제법 있었다. 더 어릴 때는 그의 품에 안겨서 울기도 했다. 아무럴 것도 없었던 것이 갑자기 달리 보이는 건, 자신이 변했기 때문일까, 트레이너가 변했기 때문일까?

“흠. 좋아. 이걸로 3년은 문제 없다.”

그까짓 모자걸이가 뭐라고 대단한 작품이라도 만든 것처럼 흐뭇해하는 트레이너. 삐뚤어진 부분이라도 있나 확인하는 그의 앞에 슬금슬금 다이아가 와서 섰다.

“다 됐어요?”

“보면 모르냐?”

“그러면......”

조금 긴장된 얼굴로 그녀가 몸을 살짝 앞으로 숙였다.

“제대로 됐는지, 시험해보실래요?”




그녀가 내민 양 소매를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트레이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체 뭐냐. 가만보면 너 여기 매달리는 거 엄청 좋아하네.”

“......그런 거 아니거든요.”

그의 손이 그녀의 기다란 소매를 능숙하게 묶기 시작했다. 꼭 시간이 느릿해진 것처럼, 소매자락이 매듭이 되는 과정이 다이아의 눈에 새겨진다. 손이 빠져나갈 구멍을 가로막히는 느낌이 꽉 조여왔다. 또다. 또 이상한 기분이 된다.

“트레이너 씨.”

“왜.”

자기 상황이 괜히 찔린 그녀는 그의 눈치를 살폈다. 지금 이 기분이 정말로 이상한 걸까? 트레이너도 실은 그녀와 비슷한 기분이지 않을까? 모두가 평범하게 느끼는 거라면 차라리 마음이 편안하지 싶었다.

“무슨 생각 하세요?”

“점심 뭐먹을까 생각하고 있어.”

“......으으.”

자신만 어쩐지 안절부절 못하는 것 같아서 분하다. 저게 어른의 여유라는 걸까. 그녀는 아직 아이라서 이렇게 요동치고 있는 것일까? 그러는 사이 트레이너는 그녀의 팔을 들어올려 모자걸이 쪽으로 들어올렸다. 갑작스러운 부유감과 팔에 가해지는 힘에 그녀가 놀라 몸을 움찔였다.

“윽!”

방심한 목에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나온 소리에 트레이너도 멈칫했다. 슬금슬금 그녀의 얼굴이 빨개졌다. 살짝 눈을 돌려 떨리는 눈으로 그를 보았다가 바로 피했다. 입을 틀어막고 얼굴을 가리고 싶을 만큼 부끄러웠지만 손이 묶여있었다. 가릴 수 없다는 걸 알자 더 화끈거렸다.

조심스럽게 그의 손이 떨어지고, 천천히 내리누르는 중력에 그녀의 몸이 바닥으로 쳐졌다. 높이 조절은 제대로 된 모양이다. 발이 아슬아슬하게 땅에 닿지 않는다. 다이아는 고개를 살짝 들어 매달린 소매를 바라보았다. 고개를 내리자 자기 움직임에 앞뒤로 살짝살짝 움직이는 몸이 눈에 들어왔다. 자기 심장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트, 트레이너 씨......”

다리를 몇 번 버둥거리면서 그녀가 불렀다. 트레이너는 평소라면 그녀를 매달고 트레이너는 게임을 하든, 식사를 하든 자기 할 일을 했을 것이다. 확인하라고 그를 앞에 세운 건 그녀였다. 생각해보면 무슨 터무니 없는 짓인가. 진열중인 상품이 된 기분이 그녀의 부끄러움을 가속시켰다.

“제대로 된 것 같으니까, 그만 내려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트레이너는 선선히 그녀의 허리를 돌아 등에 팔을 감았다. 평소였다면 그녀가 조금 더 거기서 고통받게 두었을 테지만, 언제나의 분위기가 아닌 것을 그도 알고 있었다. 다이아가 그걸 신경쓸 여유가 없었을 뿐이다. 애초에 그걸로 놀리거나 하지도 못했겠지만.

짧은 부유감과 함께 그녀가 모자걸이에서 벗어났다. 그의 팔에 감싸인 채로 천천히 바닥에 내려섰다. 땅을 디뎌선 감각이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알딸딸한 표정으로 서 있으니 그가 그녀의 팔을 잡아 들었다.

“뭐하시는 거예요?”

“소매 풀어줄게.”

“아......”

당연한 것에 놀랐다는 사실이 또 부끄러워졌다. 어색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자유로워진 팔을 몇 번 흔들어보다가, 그녀가 방에 들어가 가방을 챙겨 나왔다. 갑자기 그와 같은 공간에 있다는 것이 부담스러워져서 견딜 수가 없었다.

“트, 트레이너 씨. 할 일이 생각나서 가 볼게요. 실례했습니다.”

“점심 안 먹어?”

“네, 괜찮아요. 그럼 주중에 봬요!”

꾸벅 인사하고 나가버리는 뒷모습을 트레이너는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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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박 2주 동안 다이아는 휴일에 찾아오지 않았다. 번민에 빠져 있었다. 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그와 같은 공간에 있기가 힘들다. 어째선지 굉장히 불편했다.

원인을 생각해보자고 키타산에게 같은 행동을 요구해본 적도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키타산의 동정 섞인 눈빛 외에 이상한 점은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가족들도, 학원의 그 누구한테도 이런 기분을 느끼지 못했다. 오직 트레이너만이 그녀를 고민하게 만들었다.

올해는 특히나 중요한 개선문 원정이 있는 해니까, 평소의 분주한 트레이닝을 하면서는 이런 감정을 잊어버릴 수 있었다. 잠깐잠깐 휴식할 때만 거리를 두면 그만이었다. 그럴 수록 그녀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사실이 턱 앞까지 들이밀어지는 걸 느꼈다.

‘나는 저 무쌩긴 사람을 이성으로 의식하고 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야 트레이너는 남자가 맞지만 그 전에 교육자다. 자신을 이기게 해준 사람이고 가문의 비원을 이루게 해준 사람이다. 그 점에 감사하는 건 맞지만 이건 별개의 문제다. 물론 여러 가지 소문이나 사례들이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건 그들 얘기다. 그녀와는 상관 없다. 죄의식과 분함 따위 감정이 소용돌이쳐 그녀는 번민하고 있었다.

그러나 자존심 상하는 건 그에게 아무런 변화가 없단 점이었다.

지금도, 기껏 용기내서 찾아왔더니 아버님이랑 어깨동무하고 빠칭코나 드나들고 있지 않은가. 자동문 너머로 사라지는 두 뒷모습을 다이아는 원한 서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자자, 자네에게 오늘 소개해줄 기계가 있다네.”

직원들의 정중하고 호들갑스러운 안내를 받아 별실에 빠칭코 기계가 하나 놓여 있다. 우마무스메 레이스를 모티브로 한 파치슬로였다.

“와, 이걸 URA에서 허가해줬다고요......?”

“안 해줬지. 예전에 진행하던 프로젝트에서 폐기된 거라고 해두지.”

아버님은 조금 씁쓸한 얼굴로 주머니에서 유키치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한 번 돌려 보시게.”

준비된 의자 앞에 앉아 트레이너는 기계의 세팅 상태와 내부 구조를 간단하게 살폈다. 손을 풀면서 대충 어느 정도로 해야 구슬이 스타터에 들어갈지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지폐를 투입하자, 바보스러울 정도로 많은 구슬이 쏟아져나왔다.

“?”

트레이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안 하던 사이에 레이트가 바뀌었나보다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레버를 가볍게 돌려 구슬을 쏘아보냈다. 구슬이 몇 개나 들어가는지, 들어가려면 레버 조작을 어떻게 해야할 지 진지한 얼굴로 구상하고 있었다.

“......엥?”

그런 구상을 비웃는 듯한 상황에 트레이너가 다시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진공 청소기가 달린 것처럼 구슬이 구멍에 마구 빨려들어가고 있었다. 첫 구슬부터 무지개색 게이트가 펑펑 열리면서 코스를 돌기 시작했다. 시작부터 잭팟이다. 오른편의 어태커가 활짝 열렸다. 바쁘게 돌아가는 숫자를 보며 아버님이 뒤에서 박수를 쳤다.

“오, 운이 좋구만! 아니, 실력인가?”

버튼 하나로 모든 기능이 개방되는 싸구려 성인 게임도 이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다. 돈을 쓸어담는 발칸포같은 기계였다. 경악한 트레이너가 레버를 가장 왼쪽으로 돌려봐도, 오른쪽으로 돌려봐도, 무슨 운명의 힘이 작용하는 것처럼 구슬이 빨려들어갔다. 보통 구슬이 몇 개 빨려들어가면 닫히는 어태커도 거의 상시개방상태다. 게임의 요란한 사운드로도 묻을 수 없는, 쇠구슬 쏟아지는 소리가 어지러웠다.

“크윽! 이거 일났구만!”

가게가 엄청난 손해를 보게 생겼다고 분해하면서도, 아버님은 어디서 가져왔는지 커다란 박스를 그의 옆에 넌지시 놔 주었다. 기계가 거의 헐떡거리면서 마지막 구슬을 톡 떨어트리고서야 모든 것이 끝났다. 트레이너가 처음 투입해 빌린 구슬이 채 떨어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허, 참! 자네같은 사람들 뿐이면 빠칭코 영업을 할 수가 없겠구만!”

아버님은 뻔히 보이는 접대용 멘트를 치면서 그의 어깨를 두들겼다. 흐뭇한 얼굴로 상자를 직원에게 넘겨 교환해오라 지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의자에 앉아 벙한 표정을 짓는 트레이너를 일으켜 세우자, 직원이 고급 만년필 하나를 가져왔다.

“받으시게. 내가, 아니 우리 업장에서 주는 기념품일세.”

윙크까지 해 가면서 아버님은 트레이너의 허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다 알지 않느냔 투였다. 떨떠름한 얼굴로 만년필을 받아 챙기는 그를 보고 아버님이 허허 웃었다.

“앞으로도 우리 다이아를 잘 부탁하네. 오늘은 내 그것 때문에 불렀어.”

“......아버님이랑 놀 줄 알고 기대했는데 말이죠.”

“자네! 질척거리지 좀 말게! 난 바쁜 사람이야, 놀 시간이 없단 말이네!”

시계를 확인하면서 아버님이 웃었다. 이래봬도 사토노 그룹의 총수다. 그럼에도 시간을 내 주었다는 걸 상기시키면서도 꽤나 흐뭇한 얼굴이었다.

“다음에 사토노 게임즈 사옥으로 오게. 신작 테스트 업무 정도라면 할 시간이 있을 테니까.”

“일은 싫은데......아버님 말씀이니 따르겠습니다.”

화기애애한 별실의 분위기를 지켜보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다시 한 번 알 수 없는 불길에 속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만년필은 참 우연히도 옆 건물에 그걸 애타게 찾는 사람이 있어서 쿨거래를 할 수 있었다. 명문가는 개인 보너스를 주기도 한다더니, 어떻게 보면 사토노다운 방식이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적당히 거리를 배회하다 저녁시간에 맞춰 트레이너가 아파트에 돌아왔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열쇠를 꺼내는데, 문앞에 커다란 상자가 하나 놓여 있다.

“오?”

송장에 인형이라고 적혀 있고, 상자에도 거대 파카푸치를 만드는 브랜드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보내는 사람 이름에 적힌 ‘사토노 그룹’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씀은 없으셨는데, 이것도 나름의 포상인가?”

문을 열고 상자를 들어올렸다. 상당히 무겁다.

“이거 배송한다고 얼마나 힘드셨을까. 집에 있었으면 물이라도 가져다 드리는데.”

낑낑대면서 겨우 신발장까지 옮겨두고 그가 숨을 몰아쉬었다. 운동 좀 했던 그에게도 이정도인데 일반인들이 이걸 사서 집에 들일 수 있을까?

“아니 또 모르지. 내용물이 뭔가 더 들어 있는 건지도.....”

커터를 꺼내 조심조심 테이프를 열고 상자를 열면서, 기대가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그는 평범한 일반인이고, 당연히 이득을 좋아하니까. 활짝 상자 날개를 열었을 때, 그 기대는 무참히 배신당했다.

“이얏!”

“끄악!”

상자에서 갑자기 우렁찬 기합과 함께 튀어나온 무언가에 코를 부딪혀 그가 뒤로 넘어갔다. 코를 부여잡고 괴로워하는 와중에도 그 무엇인가는 그의 팔이며 어깨며 등을 주먹으로 쿵쿵 치고 있었다.

“이 바보! 바보! 멍청이! 추남!”

“이게 무슨 짓이야? 너 다이아냐?”

“그럼 뭐 아버님이겠어요?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몇 번이나 제재니 처벌이니 하는 단어를 입에 담으며 폭력을 행사한 뒤에야 그녀의 기분이 좀 풀어진 모양이었다. 씩씩대며 팔을 멈췄어도, 그녀는 아직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왜 나 안 찾는데요!”

“아니, 네가 안 오는 걸 내가 뭐라고 하냐?”

“나랑 노는 게 그렇게 싫었냐요?”

밟으려는 것처럼 발을 구르는 것을 몸을 굴려 피해 트레이너가 몸을 일으켰다.

“내가 싫으면 나랑 계약 해지하고 아버님이랑 계약하시던가요!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갑자기 와서 무슨......”

트레이너는 바보가 아니다. 눈치도 제법 있고 머리도 그럭저럭 돌아간다. 얼굴이 벌개져서 눈물까지 글썽이고 있는 자기 담당을 보고도 무턱대고 항변할 만큼 냉혈한도 아니다. 그가 조금 표정을 풀고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미안! 내가 잘못한 것 같네!”

“같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놀아달라고 부탁했어야 하는 거였지? 날 시험해보려는 거였지?”

다이아의 귀가 쫑긋거렸다. 생각해보면 그녀도 뒷일 생각 안하고 난입하긴 했지만, 누가봐도 이 상황, 질투심에 불타는 여자친구 행세가 아닌가. 아직 자존심이 그걸 허락하지 않는 그녀로서는 딱 괜찮게 도망칠 각을 받았다. 이 상황에서도 배려할 만큼 여유 있는 어른인 건 짜증나지만, 판을 깔았는데 올라가지 않으면 그것도 이상하다.

“당연히 그렇죠! 그리고 트레이너 씨는 탈락했거든요! 바보에다 무쌩긴 트레이너 씨는 벌을 받아야 해요!”

그녀의 앞 머리 다이아몬드 모양 주변을 그녀의 손이 감쌌다. 자세를 잡고 그녀가 외쳤다.

“사토노 빔!”

“응?”

“사토노 빔! 사토노 빔!”

몇 번이나 외치는 소리에 트레이너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차츰 풀었다. 평소의 사토노 빔(물리)이 아닌 진짜 사토노 빔이다. 엄밀히 말하면 이것도 그녀가 노트에 설정을 적던 중2병 시절의 가짜지만, 진짜로 만들 방법이 있다. 다이아는 그걸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윽.”

트레이너가 발을 뒤로 힘껏 박찼다.

“크아아아악!”

보이지 않는 힘에 휩쓸리듯이 그가 뒤로 힘차게 쓰러져 굴렀다. 몇 바퀴나 굴러 쓰러지는 그 모습을 바라보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 사람은 자신을 안다. 오랫동안 지켜봤다. 자신의 바보같은 점을 안다. 그럼에도 자신을 받아들여 주고 있다.

컨트롤하기 어려운 감정 상태, 피어오르는 독점력을 눌러 담는, 전긍정의 경험에 그녀의 눈에 눈물이 살짝 고였다. 이 사람에게 받아들여졌다는 기쁨이 지금까지의 모든 부정적인 감정을 씻어내렸다.

다이아가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핸드폰을 꺼내들어 카메라 앱을 켰다.

“다시 한 번 해요! 사토노 빔!”

“아니, 다이아야.”

“사토노 비이이임!”

“......크아아아악!”

그건 그거고 지금은 그를 괴롭히면서 즐기고 싶다. 꼴사납게 뒤로 날려 굴러가는 트레이너의 모습을 화면에 담으면서 그녀가 소리 죽여 웃었다.

“꺼흑.”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트레이너가 서랍장에 머리를 박았다. 뒤통수를 감싸쥐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까지를 카메라에 담은 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그에게 달려갔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양 팔을 벌려 그의 허리에 감았다.

“이번만 특별히 용서해주는 거예요!”

“끄으으......고맙다.”

“많이 아파요?”

“약 좀 가져 와. 피나는 것 같으니까......”

다이아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그의 정수리 쪽을 유심히 봐도 피부가 좀 빨개졌다 뿐, 상처같은 건 없다. 그냥 그 나이대 어른들 특유의 엄살이다.

“어휴. 무슨 애기도 아니고. 피 안 나요!”

“아니, 진짜로 아프니까.”

“호오. 아픈 것 날아가라~.”

정수리에 몇 번 숨을 불어넣어주자, 어쩐지 그가 잠잠해진 것 같았다. 다이아가 조심스럽게 다친 곳(으로 추정되는 부분) 주위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어때요? 아픈 것 날아갔나요?”

“날아갔겠냐?”

삭막한 어른이네, 싶은 짜증스러운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게 좋았다. 그녀는 요 몇 주 머리가 복잡했다. 고민한다고 답이 나오지도 않고, 답이 나온대도 받아들일 자신이 별로 없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게 있다면, 그와 놀면 즐겁다. 행복하다.

“이제 날아갔나요?”

“날아갔겠냐?”

“그럼 날아갈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봐요.”

앞 일은 잘 모르겠다. 이것도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일까? 시간이 지나면 해결이 될까? 몇 가지 의문들이 떠올랐지만, 그녀는 그의 입버릇대로 그저 지금을 소중히 여기자고, 그의 얼굴을 조금 더 다정하게 안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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