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리 집에 도둑이 든 것 같아.”

 

“흐응─ 그거 큰일이잖아.”

 

큰맘 먹고 꺼낸 말이었건만, 담당마의 반응은 아무렴 어떻냐는 듯 시큰둥했다.

 

그 반응이 서운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원래도 쿨한 아이니까.’

 

그러려니 하기로 했다.

 

게다가 스칼렛의 반응이 유독 싸늘한 이유가 있다.

 

실은, 최근에 한 번 싸웠더랬다.

 

중앙 트레센의 트레이너가 된 뒤로 자꾸만 들어오는 선자리.

 

계속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해 얼굴만 비추고 돌아왔다. 그런데.

 

“너, 말도 없이 어딜 다녀온 거야? 담당과의 훈련도 빼먹을 정도로 중요한 용무였던 거야?”

 

그날따라 스칼렛은 짜증이 많았고, 나도 나대로 컨디션이 나빠서 조금 말다툼을 해버렸다.

 

어른스러운 아이지만 그래도 아직은 역시 어린애. 자기한테 관심을 온전히 쏟아주길 원하는 걸까 싶었다.

 

싶으면서도, “어른에겐 어른의 사생활이란 게 있어”라는 말로 대화를 끝내려고 하는 나에게, 자기가 첫 번째가 아니었느냐는 둥, 정신이 팔려 다른 여자를 만난다는 둥.

 

꼬리에 꼬리를 무는 것처럼 꼬투리를 잡히게 되어서….

 

“여자친구도 없었던 주제에 여자 맘을 아는 양 굴지 마!”

 

“스칼렛, 잘 들어라. 내가 보기에 넌 여자가 아니라 단지 까탈스러운 꼬마애야. 그리고 누가 여자친구가 없었대.”

 

“…하아?”

 

“왜 선자리를 나갔는지 잘 생각해보라고. 스칼렛은 우등생이니까 알 거 아니야? 나도 슬슬 그런 나이니까.”

 

“…….”

 

조금 신경을 긁는 소리를 하고 말았다.

 

머리가 식고 돌아보니 어른스럽지 못한 대응이었노라고, 통렬히 자각하고 있는 요즘이다.

 

2.

엘리자베스 여왕배에 이어 아리마 기념까지의 출전을 준비하는 나날.

 

트레이닝실의 공기가 부쩍 차가워졌다. 날씨만의 탓은 아니다.

 

스칼렛은 내 지도를 순순히 따라주고 있고, 컨디션도 의외로 나쁜 것 같진 않다.

 

않아서 다행이지만, 말다툼이 있던 뒤로 둘 사이의 대화량은 눈에 띄게 줄었다.

 

스칼렛은 한창 섬세할 시기니까. 나 때문에 레이스에 악영향을 미치진 않을까.

 

아니, 나 같은 게 뭐라고, 자의식 과잉이다…… 그런 상반된 생각에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어라, 너는 분명 다스카의….”

 

“오우.”

 

스칼렛과 같은 기숙사 방을 쓰는 우마무스메, 보드카의 제보가 들어왔다.

 

듣기로는, 자신의 룸메이트가 요즘 들어 밤에 침대에서 사라진다는 이야기였다.

 

“무단외박을 했단 소리야?”

 

“쉿, 목소리 낮춰.”

 

활기차게 인사를 받아준 것과 다르게, 최근 스칼렛의 행적을 설명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떨떠름하기 그지없었다.

 

그나저나 다른 애도 아니고, 그 스칼렛이 무단외박을 하다니.

 

역시 걱정된다. 오늘은 시간이 늦었으니, 당장 내일에라도 스칼렛과 상담을 가져봐야겠다.

 

3.

“남자 혼자 사는 집에 뭐하러 들어온 거람.”

 

담당마가 걱정되는 것과는 별개로, 내게도 처리해야 할 문제가 목전에 있다.

 

일전의 도둑 이야기인데, 이상하게도 금전적인 피해는 전혀 없었다.

 

기껏해야 볼펜이나 머그컵 같은 잡동사니가 사라질 뿐. 가장 크게 사라진 물건도 아끼는 옷 한두 벌 정도다.

 

솔직히 말해 도둑이 든 것이 아니고, 다만 내 건망증으로 어딘가에 들고 나가서 잃어버린 건 아닐까 의심이 들기도 했다.

 

‘신경과민일지도 모르고. 요즘 꽤 피곤했단 말이지….’

 

그래서, 의혹을 불식시키기 위해 큰맘 먹고 지른 최신형 홈 씨씨티비가 여기 있다!

 

“그럼 어디 한번 확인해볼까.”

 

거실 구석에 숨겨둔 카메라를 들고 와 티비에 연결한 후 단말기를 조작했다.

 

그리하여 화면에 나타난 것은…….

 

─삑, 삑, 삑, 삑.

 

“……어라?”

 

너무나도 익숙한 붉은색 실루엣.

 

잠시 눈을 의심했지만, 나의 담당마가.

 

스칼렛이 틀림없었다.

 

나는 벙찐 채로 그녀의 갖가지 기행을 살폈다.

 

화면 속 그녀는 너무나도 익숙하게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세탁실의 빨래를 뒤져 냄새를 맡았다.

 

그런 다음엔 싱크대를 빌려 내 칫솔을 쓰고, 침실로 들어가 이불 위에 몸을 굴렀다.

 

그리고 이건 기분 탓일까.

 

‘왠지, 카메라 쪽을 본 것 같은데….’

 

그 외에도 스칼렛은 어느 유명 홍콩영화에 나오는 한 장면처럼 집안 풍경을 조금씩 바꿔나갔다.

 

그러고 보면 넥타이나 양말이 빨간색으로 바뀐다거나.

 

어째 집안 물건들이 조금씩 바뀐다 했었지.

 

왜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

 

스스로의 무신경함을 통탄하고 있던 때에.

 

“트레이너.”

 

스피커에서 나온 것이 아닌 목소리에, 나는 순간 공포로 얼어붙었다.

 

‘언제?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는 못 들었는데…….’

 

그게 아니라면, 어쩌면 집주인인 나보다도 일찍 집에 들어왔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떠올랐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익숙한 얼굴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말했다.

 

"…문은 어떻게 연 거야?"

 

"핸드폰도 컴퓨터도 비밀번호는 전부 생일이잖아. 단순해서 살았어."

 

아무렇지도 않게 내 대답에 답하는 스칼렛.

 

한동안 내게서 아무 말이 없자, 그녀는 인상을 한껏 찌푸리고 말했다.

 

“함께 1등을 목표로 한다고 했으면서. 당신에게 1등은 나야. 내 1등은 당신이야. 왜 그런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걸까? 응?”

 

“……스칼렛. 지금 네가 하는 행동은 엄연한 범죄야. 누군가 본다면 나쁜 소문에 휘말릴지도 몰라.”

 

“모두에게 1등일 필요는 없어. 그걸 가르쳐준 건 당신일 텐데. 어째서, 어째써……!”

 

이런. 이야기가 수평선을 달린다.

 

나는 급하게 선수를 치듯 말했다.

 

“나한테 있어서는 네가 항상 1등이야.”

 

그 말에 스칼렛은 와락 분통을 터트렸다.

 

“거짓말쟁이! 그런 주제에 맞선을 보러 나가? 이 나를 바람맞히고서? 어떻게 된 거 아냐?”

 

“……스칼렛.”

 

설마 설마 했는데, 정말로 그게 이유였던 건가.

 

나는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다시 한번 말해 봐.”

 

스칼렛은 귀를 쫑긋 세우고서, 내 얘기를 듣고도 못 믿겠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결국 똑같은 얘기를 한 번 더 하고서야, “뭐야, 그런 거였나.”

 

하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래, 그러니까 오늘은 이만 돌아가자. 밤도 늦었고, 내가 데려다줄게.”

 

전부 훈훈하게 끝난 줄 알았다.

 

“아니.”

 

“…응?”

 

알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까 당신 말이 맞는 것 같아. ‘슬슬 그런 나이’라는 거.”

 

“응?”

 

“나는 앞으로 몇 년이나 기다려야 하는데, 그럼 너무 늦잖아?”

 

─휙!

 

쿵. 스칼렛은 나를 바닥에 깔아 눕혔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라, 저항할 틈이 없었다.

 

“1등이 아니면 싫어.”

 

“잠깐, 스칼렛!”

 

“흐흥, 트레이너, 순둥순둥하게 생겨서 아기 당근일 줄 알았는데, 이쪽은 완전히 어른 당근이잖아…!”

 

틀렸다.

 

성인 남성의 완력으로는 도저히 우마무스메를 이길 수 없어.

 

─찌지직!

 

스칼렛은 맨손으로 내 트레이닝복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이어서 자신의 옷도.

 

그녀의 나이대라곤 믿을 수 없을 만큼 발달한 흉부에, 나는 그만 상스럽게도 발기하고 말았고, 그 뒤로는 뭐어.

 

“아핫! n년 전까지 란도셀 메고 있던 애한테 이렇게나 흥분하는 거냐고……♥

 

밤새도록 우마뾰이 당하고 말았다.

 

2500m를 달리는 우마무스메의 체력은 인간의 상식이란 범주를 아득히 뛰어넘는 것이었다고밖에, 나는 할 말이 없다.

 

4.

스칼렛이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그녀가 대설 속 아리마 기념에서 빛나는 트로피를 거머쥐고도 한참 뒤, 벚꽃이 피는 계절이 돌아오고서였다.

 

스칼렛의 배가 더이상 숨기지 못할 만큼 커지고, 나는 그대로 이사장실에 끌려갔다.

 

“징계! 매스컴이 뒤집히다 못해 매그니튜드 9.0! 트레센에 기자들이 끊이질 않는다!”

 

원래라면 얄짤없이 중징계 확정인 안건이었지만, 애엄마와 일부 우마무스메들의 강력한 항의로 무산.

 

대신 ‘확실히 책임을 져서 나쁜 선례를 만들지 말도록!’이란 내용의 장장 한 시간에 달하는 설교를 들었다.

 

구구절절 맞는 말씀이라 내내 땅바닥 무늬만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담당마를 이렇게 어린 나이에 은퇴시키게 될 줄이야.’

 

솔직히 말해 트레이너 실격이다….

 

…지나간 일에 대한 자책은 여기까지 하고, 이후의 사정을 말하자면.

 

나와 스칼렛은 첫째를 맞기 전에 급하게 결혼식 일정을 잡았다. 그녀의 각질에 어울리는 속도위반 결혼이었다.

 

근황은 그게 전부다. 아이를 보는 게 익숙지 않은 초보 부부라 정신없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 것입니다…… 뭐 그런 평범한 얘기.

 

아, 참고로 그 옛날 스칼렛이 집안에 잠입했던 건, 혹시나 내가 여자를 집으로 들이면 튀어나와 위협을 가해서, 그 여자가 나에게 정나미가 떨어지도록 할 계획이었다고.

 

둘째를 무사히 해산한 뒤로, 지금은 셋째를 뱃속에 품고 있는 와이프에게 들은 이야기다.

 

“정말 위협으로 끝낼 거였어?”

 

“후훗.”

 

“……위협으로 끝내려던 거 맞지?”

 

가끔은 우리 여보가 무서울 때가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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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기된 유명 홍콩영화는 왕가위의 중경삼림)

 

(오타나 비문, 해석불일치 있으면 기탄없는 충고 부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