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한 번 해요! 사토노 빔!”

“아니, 다이아야.”

“사토노 비이이임!”

“......크아아아악!”

“에히히히, 흐히히, 히히. 헤헤헤헤.”

휴일 아침이었다. 잠에서 깬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침대에 엎드린 채였다. 핸드폰에서 벌써 몇 번째 재생되는 트레이너의 꼴사나운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모빌을 가지고 노는 아이처럼 웃어댔다.

“꺼흑.”

“헤헤헤. 바보. 바보. 히히.”

트레이너가 서랍장에 머리를 박는 장면에서는 침대를 발로 몇 번이나 차대면서 웃었다. 영상이 끝나면 다시 처음부터 루프하도록 설정된 비디오 플레이어 앱이 다시 당황하는 트레이너의 얼굴을 띄운다.

“다시 한 번 해요! 사토노 빔!”

“헤히히. 무쌩겼다~. 헤헤.”

“다이아쨩......”

샤워를 마치고 나온 룸메이트 키타산 블랙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쓰럽다는 듯 불렀다. 샤워하러 들어가기 전부터 지금까지 줄곧 같은 영상을 보면서 똑같은 반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도 가장 친한 친구니까 잘 되길 바라고 좋은 말을 해주고 싶은 그녀가 덧붙였다.

“다이아쨩은 트레이너 씨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웅? 아닌데에? 히히.”

다리를 까딱이며 가볍게 친구의 발언을 일축한 다이아였지만, 키타산이 자리를 벗어나게 두지는 않는다.

“그야 트레이너 씨는 재밌고, 착하고, 일도 잘하고, 똑똑하고, 날 위해 열심히 노력해주지만......”

“응. 그래. 그렇지.”

“그치만 그냥 담당 트레이너 씨일 뿐이고~, 존경하고 감사하지만 좋아하는 건 좀 아닌 것 같구......”

“그렇지. 올바른 거리감이라는 거구나.”

다시 한 번 영상 속 트레이너가 서랍장에 머리를 박자 다이아가 꺄르륵거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게다가 무쌩겼짜나! 히히.”

친구의 시선 밖에서 키타산 블랙은 말문이 막혀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이런 상황에서 진정한 친구라면 현실을 직시하게 해주는 것이 옳을까, 친구가 장밋빛 세계에 빠져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옳을까. 트레센의 도움대장이라 자처하면서도 이럴 때는 자신의 경험 부족을 실감하게 된다.

“그리고그리고, 트레이너 씨는 짜증도 잘내고, 꿀밤 때리려고 하고, 모자걸이에 막 걸고......”

“다이아쨩.”

“왜 그래, 키타쨩?”

“그러면 다이아쨩은 이번 발렌타인 초콜렛 선물 안할 거야?”

갑자기 재생되던 영상이 뚝 끊기고 방이 소름끼치도록 조용해졌다.

“왜 얘기가 그렇게 흘러가지? 키타산 블랙?”

침대에 엎드린 자세 그대로 굳은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어쩐지 절 입구의 사신상같은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풀네임으로 불리면 등줄기가 서늘하고 소름이 끼친다. 키타산 블랙은 멋쩍게 뒷머리에 손을 올려 웃었다.

“아, 아니. 뭐 깊은 의미가 있는 건 아니고.”

“아니고?”

“아무래도 발렌타인은 호감 있는 이성에게 초콜릿을 주는 날에 가까우니까.”

“가까우니까?”

“잘 생각해보면 의리초코라거나 하는 것도 있으니까, 당연히 준비하겠구나! 그렇지, 응응.”

슬슬 냉기를 뿜기 시작한 룸메이트의 등을 살피면서, 키타산 블랙은 지뢰가 될 만한 발언을 최대한 피해 조심조심 대화를 이어나갔다. 도주에 능한 그녀답게 포지션 센스와 위험 회피는 엿바꿔먹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암시해가면서. 정말 불편한 침묵이 잠시 흐르는 동안에도 그녀는 몇 번이나 도망쳤다고, 도망쳐낸 거라고 자신을 안심시켰다. 그 마음속 소리에 화답하듯 잠시 뒤 다이아의 꼬리가 몇 번 휙휙 움직였다.

“아아~! 난 또 뭐라고! 당연히 초코는 준비할 생각이야, 키타쨩! 물론 감사의 의미로 말이지!”

“휴......”

“그러는 키타쨩도 트레이너 씨를 꽤나 신경쓰는 모양이야? 초코 얘기도 하고?”

‘키타쨩도......?’

‘도’ 대신 들어갈 만한 조사가 얼마든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무시했다. 괜히 언급했다가 풀네임으로 불리고 싶지 않다. 대신 큰 소리로 웃어 분위기를 띄웠다. 그녀가 제일 잘하는 거니까.

“아하하! 뭐 그렇달까.”

“그럼 엄청나게 정성 들여서, 수제 초코를 선물하거나 하겠네?”

“그건......”

키타산 블랙이 양 손을 초조하게 모아 웃었다. 살짝 고개를 돌려 말끝이 흐려지는 친구의 얼굴을 확인한 다이아의 귀가 쫑긋거렸다. 그녀에게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완전 사랑에 빠진 소녀네, 키타쨩.”

헌데 왜 그녀가 이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지? 조금만 덜 친했다면 거울이나 보라고 했겠지만 일이 그렇지가 않아서 키타산 블랙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응, 그렇지. 맞아. 네가 다 맞아.”

“괜찮다면 내가 협력해줄게! 원하는 결과물은 다르겠지만, 그래도 우린 친구잖아?”

우쭐대는 다이아에게 큰 미소로 대답하면서도, 키타산 블랙은 어쩐지 샤워를 다시 해야할 것 같은 찜찜함을 느꼈다.

“응, 고마워! 다이아쨩! 정말 최고야!”



=======================================



“트레이너 씨이.”

“또 뭐야. 왜, 왜 또.”

그런 의미에서 이번 휴일 낮시간에도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트레이너의 집을 방문했다. 4월에는 봄 천황상 출주도 잡혀있고, 여름부터는 프랑스 원정도 가야 한다. 만나야 하는 사람도 늘어나고 자잘하게 신경쓸 거리가 늘어난 트레이너는 평소보다 더 방문객을 귀찮아했다. 정작 그 원인인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조금도 그 사정을 신경쓰지 않았지만.

“좋아하는 보석이 있으신가요? 어떤 색인가요? 어떤 모양인가요?”

밥 먹을 때는 개도 안 건드린댔는데, 컵라멘을 들이키는 옆에서 다이아가 자꾸 귀찮게 했다. 후루룩, 면을 길게 빨아들여 씹으면서 트레이너는 인상을 찌푸렸지만, 그래도 성심성의껏 눈알을 굴려가며 고민해줬다.

“하얗고 동그란 진주를 좋아해.”

“네? 못 들었어요.”

어느 쪽도 상대의 의도대로는 대답해주지 않는 상황. 트레이너는 단무지 4개를 집어 대각선으로 입에 쑤셔넣어 씹어댔다.

“빨갛고 둥글어서 빛을 받으면 성채현상을 일으키면서 별 모양 광택이 나는 루비를 좋아해.”

“질문이 잘못된 모양이네요.”

“잘못된 건 네 귀야.”

“좋아하는 보석이 있으신가요? 그건 왜 다이아인가요?”

설문조사에서 제일 하면 안되는 질문이 튀어나왔다. 슬슬 인내심의 한계가 가까운 트레이너 씨는 ‘더 떠들지 말라’고 에둘러 표현했다.

“왜냐면 다이아는 밥 먹을 때 말 안 걸거든.”

“......정말!”

정작 인내심의 한계를 맞이한 건 사토노 다이아몬드 쪽이었다. 볼을 복어처럼 부풀려 최대한의 불만을 표했다. 금방이라도 그를 향해 뻗을 것 같이 꽉 말아쥔 주먹을 땅으로 쭉 뻗어 몸을 경직시켰다. ‘나 화났어요’ 하고 광고하는 듯한 발구름 소리에 트레이너의 머리가 울렸다.

“트레이너 씨, 요즘 대하기 힘들어요! 어려워요! 대체 왜 그러세요?”

“......뭐?”

“요즘 짜증만 내시고 화만 내시고! 너무해요!”

“너야말로 왜 그러냐? 나는 항상 이랬는데. 꼭 혼나고 싶어서 안달난 애처럼 굴잖아.”

“아, 아아아니거든요? 그런 사람이 어딨어요! 바보! 무쌩......”

언제나처럼 트레이너 씨를 매도하려던 다이아의 말이 갑자기 멈췄다. 아무럴 것도 없었던 놀림의 말이 갑자기 목에 걸려서 나오지 않았다. 목에 자물쇠가 있는 것 같다.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 자물쇠를 쥐고 있는 게 자기 자신이라는 자각이 있기 때문이었다. 부끄러움을 얼버무리기 위해 그녀가 소매 안으로 손을 깊숙히 집어넣어 채찍처럼 휘둘러댔다.

“아무튼! 너무해요! 너무한 트레이너 씨야! 그러다가 혼나요!”

“야! 아파! 그만......”

몇 번이나 손으로 쳐내고 팔로 막고 하는 통에 탁, 하는 소리가 났다. 컵라멘 그릇이 그녀의 소매에 맞아 기울어지는 걸 모두가 보았을 때는, 이미 테이블에 국물이 훅 쏟아진 다음이었다. 황급히 키친타올을 뽑아다 바닥에 더이상 떨어지는 것을 막으면서 트레이너가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이럴 생각까지는 없었던 다이아도 그 자리에 그냥 굳어버렸다.

“히! 미안해요! 미안해요! 정말 그러려던 게 아니라!”

“사토노 다이아몬드!”

풀네임으로 불리면 괜히 주눅드는 건 다이아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움츠러들어 어찌할 바를 모르는 꼴을 올려다보고 있자니 또 진심으로 화내는 건 아닌 것 같다. 식사긴 해도, 끽해야 컵라멘 국물 아닌가.

“나를 때리는 건 참을 수 있어.”

그렇다고 화를 안내는 것도 트레이너의 신조에 맞지 않는다. 그는 키친타올을 한 장 더 뽑아 손을 슥슥 닦고 일어나 다이아에게 다가갔다. 양 팔을 잡자 그녀의 몸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컵라멘을 때리는 건 도저히 참아줄 수가 없다. 이의 없지?”

‘너한테 화를 내기는 하지만 진짜로 네가 미워서 그러는 게 아니다’는 뜻을 담아, 최대한 장난스럽게 운을 뗐다. 정말 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다이아가 진심으로 그가 매일같이 화만 내서 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면 오히려 그가 미안한 일이니까. 다이아는 그 신호를 제대로 수신한 모양이었다. 그가 편안하게 묶을 수 있게 소매를 더 길게 빼 맡기면서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네. 트레이너 씨. 다이아는 나쁜 아이예요.”

단지, 그에게 말할 수 없는 여러가지 속뜻이 담긴 대답이었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부쩍 이상한 꿈을 꾸는 일이 늘어났다. 지금처럼 그녀가 무엇인가 잘못을 저질렀고, 트레이너 씨는 벌을 주려고 그녀의 소매를 묶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데도 표정이 잘 보이지 않는 그가 그녀는 조금 무서웠다. 그가 하는 대로 순순히 따라 몸을 맡겼다.

그가 그녀를 벽에 잘 못질된 커다란 모자걸이 앞으로 데리고 간다. 손목을 이끄는 힘이 그렇게 강하지 않지만, 아예 이끌지 않더라도 상관없을 만큼 그녀는 기꺼이 따라간다. 다이아는 부쩍 키가 컸다. 이전만큼 가볍게 안아올려서는 모자걸이에 걸 수가 없다.

“......흐윽.”

트레이너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아 안았다. 그의 손가락이 옆구리를 가볍게 파고드는 것이 느껴지면, 빨갛게 달궈진 도장을 내리누르는 것처럼 화끈거렸다. 나머지 한 손이 그녀의 팔을 위로 올려 원을 그리게 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몸을 앞으로 숙이면 그의 얼굴에 닿을 거리였다. 그렇게 생각하면 가슴이 마구 뛰었다. 온 몸이 심장으로 된 것 같았다. 정신이 몽롱해질 만큼 숨이 가빠오면, 자신이 그걸 바라고 있다는 것도 느끼게 된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라기보다는 그럴 수가 없었다. 이유는 모른다. 꿈이란 게 갖는 일종의 변덕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녀의 마음 어딘가에 걸린 또다른 자물쇠같은 것이리라. 그에게 무쌩겼다고 말하기가 점점 꺼려지는 마음만큼 강한, 그래도 그가 무쌩겼다고 말하고 싶은 마음.

어쨌건 서서히 그녀의 팔이 모자걸이에 걸린다. 그가 손을 놓으면 중력에 이끌린 팔이 모자걸이를 짓누르면서 약한 압박감이 찾아온다. 이제 허리를 놓으면 온 몸에 중력이 걸려 자연스럽게 대롱대롱 흔들릴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는다. 꼭 미련이 남는 것처럼 그의 팔은 여전히 그녀의 허리에 머물러 있다. 그녀의 무게를 지탱하고 있는 것처럼, 혹은 그녀의 체온, 혹은 말랑말랑함을 느끼려는 것처럼 멈춰 서 있다가, 서서히 가까워져온다. 그녀가 차마 가까워지려 하지 못한 그 거리를 좁혀온다.

“......앗.”

뻔히 눈에 보이면서도 놀란 소리를 내버리고 만다. 꼭 그런 소리를 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처럼 목이 알아서 소리를 만들어낸다. 찌르르르 흐르는 전류에 어색하게 굳어버린 몸을 그가 덩굴처럼 감아온다. 등이 벽에 바짝 붙는 느낌이 강해진다. 꼬리를 움직일 수가 없다. 다시 놀란 듯한 소리와 함께 다이아의 팔이 홱, 그의 등으로 채듯이 넘어갔다. 오히려 당기는 듯한 손짓이다.

“후우, 후우, 후우......”

몸은 자꾸 산소를 요구하는데 숨이 자꾸만 얕아졌다. 다이아는 눈을 질끈 감아버렸다. 눈 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더 보고 싶으면서도, 눈을 감으면 강해지는 감각을 더 선명하게 하려 필사적이었다. 시야가 차단된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났다. 심장이 달리기를 하는 것처럼 피를 펌프질하는데도 몸 곳곳이 피가 안 통하는 것처럼 저릿한 느낌이 났다.

그녀와 그 사이의 거리는 이제 거시적으로는 의미가 없는 수준이다. 그림자가 하나가 되어 엉길 정도의 거리다. 선명한 온도와 감각이 그녀의 몸을 씻어내렸다. 가벼운 거부감 뒤로 찾아오는 기쁨, 바라던 것을 얻었을 때의 충족감이 다시 다음을 바라게 만들었다. 다음이 무엇인지 머리로는 어렴풋이 알지만, 지금 체험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모르는 그녀의 꿈은 보통 여기까지였다.

잠에서 깨어나면 꿈은 현실의 공기 속으로 녹아 사라진다. 빠르게 흩어져 없어져버린다. 증발되고 남은 어렴풋한 기억이나 그런 듯한 느낌, 그리고 채 증발되지 못한 그녀의 잠자리가 몇 안되는 증거였다. 이불을 살짝 들추어 보거나 거슬리게 들러붙은 잠옷을 떼려 몸을 굴리다 보면 찾아오는 것은 자괴감과 죄의식이었다. 그렇게 보아선 안될 사람을, 그렇게 보일 리 없던 사람을 그렇게 보았다는 죄책감. 그리고 그럼에도 또 같은 것을 바라게 되는 죄의식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고 인정할 수 없지만, 트레이너의 말이 맞다. 그는 항상 그녀에게 약간 짜증내고 화냈다. 그는 언제나 똑같았고, 그녀가 달라졌다. 그녀가 괜히 제발 저린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만 똑같은 것도 인정할 수가 없다. 그러니까 그녀는 최대한 그를 자극해보려 애쓴다. 그가 손을 뻗어 그녀를 모자걸이에 걸게 유도한다. 계속 유도하다 보면, 어쩌다 그녀의 꿈으로 그가 따라올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애매한 희망과 함께.

그러니 다이아는 스스로를 나쁜 아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두 상충되는 감정 사이에서 자신은 판단을 보류했으면서, 공을 떠넘기려 한다는 걸 아니까. 무엇보다도, 그가 어떻게 판단해주길 바란다는 걸 마음 속으로 알고 있으니까.


“다이아야.”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니 그녀가 이미 벽에 걸린 모양이었다. 벌써 매달려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데 그녀가 말이 없으니 이상하게 여긴 트레이너가 가볍게 불렀다. 그제서야 다이아가 백일몽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 쯤에 있던 모양이다.

“......네, 트레이너 씨.”

그녀는 자기 목소리에 놀랐다. 자신이 이렇게 낯선 소리를 낼 거라고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트레이너 씨도 놀란 눈치였다. 그의 고개가 살짝 갸웃거렸다.

“다이아야?”

“......뭐든지, 말씀하세요.”

“......너 어디 아프냐?”

꼭 조롱하는 듯한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그녀를 현실로 완벽하게 끌어당겼다. 몸과 팔에 걸리는 모자걸이의 압력이 느껴졌다. 살짝 붉어진 얼굴로 핫, 하고 숨을 들이마시며 다이아가 트레이너를 바라보았다. 꿈같은 일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관찰중이었다. 하다하다 망상에 빠져있었단 걸 깨달은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니거든요? 멀쩡한데요?”

“감기냐? 감기면 집에 가라. 괜히 나한테 옮기지 말고.”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아주 혼난다요!”

반동을 주어 다이아가 사토노 킥을 날렸지만 허공을 가를 뿐이었다. 트레이너는 물리적으로든 정신적으로든 거리두기가 능숙했다. 그가 헛발질을 비웃는 사이 그녀의 다리가 진자운동을 해 벽에 돌아와 부딪혔다.

“꺼흑.”

“어른한테 혼난다느니 버릇없게 구니까 물리법칙이 널 용서하지 않는 거야.”

“히엥, 아파! 다리도 아프고 슬슬 팔도 아파요! 내려주세요!”

“이제 몸무게가 많이 나가서 모자걸이는 좀 힘드려나......”

은근슬쩍 거슬리는 말을 더해 히죽거리며 트레이너가 다가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는 그녀의 우는 소리와 노랫소리에 약했다. 그가 가볍게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들었을 때,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고개가 홱 그를 향해 가까워졌다.

“콜록! 콜록콜록! 아우, 다이아 죽어! 콜록콜록!”

“아, 임마! 진짜 맞고 싶냐?”

“콜록콜록!”

“에휴.”

머리며 어깨에 그녀의 억지 기침을 뒤집어 써 험한 말을 하면서도, 트레이너는 그녀가 바닥에 얌전히 착지할 수 있게 팔을 놓지는 않았다.



====================



“트레이너 씨, 안녕하세요.”

시간이 그냥 흘러가 발렌타인 데이가 찾아왔다. 이제 뭐 당연히 다이아가 올 것이라 생각하고 트레이너는 아예 노크에 대답도 하지 않고 문부터 활짝 열었다. 그러면서도 몹시 실망한 척 얼굴을 찌푸리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또 너냐.”

“푸히히. 오늘도 무쌩기셨네요!”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세등등하지?”

트레이너가 아예 승부복을 갖춰입고 온 다이아를 흘기며 불만을 표했다. 그러든지 말든지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와 다이아는 신발을 휙휙 벗어날렸다. 문을 닫는 트레이너를 무시하고 거실로 들어가면서 그녀는 어깨에 멘 크로스백에서 작은 선물상자를 하나 꺼냈다.

“보나마나 트레이너 씨는 무쌩겨서 초코도 못 받으셨겠죠? 받을 예정이 있으셨다면 분명 학원에도 나오셨을 거구요. 푸히히. 그런 트레이너 씨가......”

의기양양하게 반바퀴 돌아 선물을 전달하려던 다이아는 거실의 풍경을 보고 얼어버렸다. 분명 리모콘이나 게임기 컨트롤러 정도가 올라와있을 터인 테이블 위를 점령한 알록달록한 선물상자들이 그녀의 눈을 채웠다.

<자네, 발렌타인 데이 축하하네! 항상 고생이 많아!>

심지어 사토노 그룹 명의지만 누가 봐도 그녀의 아버님이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메시지 카드가 붙은 초콜릿을 발견한 그녀가 선물상자를 떨어트려버렸다. 선물상자가 왈칵 열리면서 루비, 에메랄드, 진주 따위 보석 모양을 한 수제 초콜릿이 마룻바닥을 굴렀다.

“어, 어어, 어떻게......”

“아이만 선물 받을 일이 많은 줄 아냐? 이게 어른의 저력이다, 이 녀석아.”

아까의 기세가 팍 죽어 눈동자가 사방팔방 흔들리는 다이아의 뒤에서 트레이너가 히죽거렸다. 그녀가 떨어트린 상자를 주워 열어 떨어진 초콜릿을 주워 담아넣다가 그가 말했다. 

“루비도 있고, 진주도 있고, 에메랄드도 있고, 사파이어도 있는데, 다이아몬드가 없네?”

“왜, 왜냐하면......”

떨리는 입술로 간신히 말을 시작했을 때, 어째선지 그녀의 눈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에 젖은 소리를 닦으려고 애쓰면서 그녀가 말을 이었다.

“트레이너 씨는, 흑, 밥 먹을 때 말 거는 다이아를 안 좋아하시니까......흑.”

“무슨 말을 하냐. 그냥 그때 지나가는 말이었는데 그걸 아직도 맘에 담아두고 있었어?”

방아쇠를 당긴 것 같았다. 다이아의 눈에서 방울방울 눈물이 떨어졌다.

“왜, 왜 나만......”

“응?”

“왜 나만 신경쓰고, 나만 걱정하고, 나만 맘에 담아두고, 나만 끙끙 앓는 거냐고요!”

“그게 무슨......”

“왜 나만 트레이너 씨 말에 안절부절 못하고 하나하나 신경써야 되냐고요! 불공평하지 않냐요! 흐엥!”

슬픔만큼이나 큰 분노로 그녀는 발을 동동 굴렀다. 갑작스러운 말에 놀라 트레이너는 뭐라 대답도 못하고 굳어 서 있었다. 대답이 없는 것에 더 감정이 격해진 다이아가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나랑 노는 건 그냥 그렇게 지나가는 일 밖에 안되는 거냐고요! 트레이너 씨 기억에 뭐 하나 남는 것도 없이 자고 일어나면 잊어버리는 거냐고요!”

“아니, 야. 나도 안 잊어버렸잖아. 기억하니까 지나가는 말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거 아니냐?”

“......”

다이아가 갑자기 조용해졌다. 생각해보니 그랬다. 논리적으로 반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이성 너머 격해진 감정은 메시지를 공격할 수 없으면 메신저를 공격하라 명령했다.

“아무튼 트레이너 씨는 혼 좀 나야 돼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명분이 부족해서 사토노 빔을 먹일 수는 없다. 그도 조금은 그녀를 신경쓰고 있었단 사실에 갑자기 질투가 좀 풀린 것도 있었다. 그렇게 되니 감정을 발산할 대상은 테이블 위의 초코 뿐이었다.

“이런 시판 초코 따위에 헤벌쭉해진 트레이너 씨는, 벌을 받아야 돼요!”

다이아가 테이블로 달려들어 상자를 마구 풀어헤쳤다. 타즈나 씨와 이사장님 명의로 된 편자 모양 초콜릿도, 카시모토 리코 트레이너 명의로 된 카카오 76% 다크 초콜릿도, 키류인 트레이너와 해피 미크 명의로 온 아몬드 밀크 초콜릿도, 라이트 헬로 명의로 온 위스키 봉봉도 되는 대로 입에 털어넣었다. 트레이너는 기가 찰 노릇이었다.

“이게 어떻게 나한테 벌주는 거냐, 네가 포상 받는 거지.”

“트레이너 씨가 벌을 받으면 제가 기쁘잖아요!”

“우와......”

기세 좋게 초콜릿을 처박아대는 다이아의 발언에 질려하면서도, 트레이너는 목 막히지 않게 천천히 먹으라고 우유를 한 잔 따라주었다.


“꺼윽. 트레이너 씨이......괴로워요.”

초콜릿과 상자 잔해가 어지럽게 구르는 거실 소파에 힘겹게 기대 다이아가 작은 소리로 호소했다. 처음 초코를 입에 넣던 기세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제는 목구멍 끝까지 초코로 코팅된 듯한 끈적한 감각에 혀뿌리까지 시큰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트레이너 씨를 징크스에 빠트리려던 못된 진심초코들을 심판했네요.”

“누가 봐도 인사치레용 초코였는데.”

“인사치레용 초코가 사실은 쿨한 척 하는 진심 초코라는 징크스를 박살냈네요.”

“징크스 박살내다 몸 상하겠다, 이 녀석아. 하루텐 준비도 해야 되는데 살 찌면 어쩌려고.”

“맛있게 먹으면......꺼윽.”

입에 들어간 머리카락 몇 개를 빼 주면서 트레이너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맛있게 먹으면 0칼로리라는 징크스가 깨진 걸 보니, 비탈길 훈련을 빡세게 굴려야 할 것 같았다. 초코색으로 코팅된 혀를 쭉 빼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다이아는 묘한 성취감에 기쁜 모양이었다.

“이제, 트레이너 씨가 받은 유일무이한 초코는, 제가 드리는 감사의...... 의리초코, 뿐......”

“다시 말해 인사치레용 초코란 거네.”

다이아는 대답이 없었다. 인사치레용 초코라고 인정하면 아까 박살냈다고 주장한 징크스대로, 사실은 쿨한 척 하는 진심 초코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고 인사치레용 초코가 아니라고 인정하면, 진심 초코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여기까지 와서 다이아는 아직 그에게 진심을 전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트레이너는 진주 모양 초코를 집어먹다가, 상자 아래에 깔린 메시지 카드를 발견했다. 다이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마음>

메시지 카드라고 할까. 트레이너 본인의 친필이다. 2년 전에 자기 마음 돌려달라고 울부짖으면서 그녀가 쓸 것을 강요한 내용이었다. 꾸깃꾸깃한 접힘선 탓에 종이는 찢어질 것 같이 위태로웠다. 트레이너의 입꼬리가 따뜻한 곡선을 그리며 올라갔다. 그 모습을 다이아는 녹아내리는 듯한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거! 감사의 마음인 거 기억하시죠?”

“그랬지.”

“그러니까 그 초코는, 감사의 마음을 꾹꾹 눌러담은,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감사 의리초코예요! 인사치레용 초코와도 진심 초코와도 달라요!”

스스로 찢었다고 생각할 만큼 대단한 재치라 여겼지만, 필사적으로 어필한다는 것은 이미 찔리는 구석이 있다는 뜻이다. 어른은 아이가 부리는 보이는 수작질을 쉽게 간파한다. 하지만 어른이니까, 트레이너는 아이의 가벼운 술수를 적당히 눈감아주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 좋은 걸 받았으니 나도 뭔가 줘야겠는걸.”

“......네?”

게임기를 두는 서랍장을 열고 선물상자를 하나 꺼내 내밀었다. 안에 들어있는 것은 잘 세공된 다이아몬드 모양을 한, 하얗게 칠해진 초콜릿 몇 개였다. 트레이너가 피식 웃었다.

“다음 달은 바쁠 거라 미리 답례할게. 내가 제일 좋아하는 보석 모양이야.”

눈이 휘둥그레져서 다이아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트레이너를 그저 바라만 보았다. 입이 멍청하게 벌어져 다물어지질 않았다. 방금까지의 메스꺼움이니 괴로움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마약에 가깝게 분비된 엔돌핀이 그녀의 입을 사정없이 올라가게 만들었다.

“우와! 우와! 우와! 우와! 우와아!”

“오늘은 너무 많이 먹었고, 내일이나, 뭐 적당한 때 하나씩 꺼내 먹어.”

즉시 상자를 낚아채 소중하게 품에 끌어안으면서, 다이아가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이런 걸 어떻게 먹으라고 하실 수가 있어요! 세상에 단 하나뿐인 트레이너 씨의 진심 초코......”

“아니, 그거 인사치레용이니까.”

“제일 좋아하는 보석이라면서요! 바로 저, 다이아몬드가!”

“그래. 바로 다이아몬드가.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사토노 빔!”

“꺼흑.”

헛소리를 나불거리는 그의 다리를 걷어차 조용하게 만든 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상자를 들고 방방 뛰어 그의 침실로 들어갔다.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 매트리스를 팡팡 차면서 기쁨을 표현했다. 정강이가 회복된 트레이너가 와서 이 닦으라고 야단을 쳐도 소용이 없었다.

초콜릿을 너무 많이 먹은 탓일까, 밤새 가슴이 두근거리고 긴장될 정도로 행복해서 다이아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입맛이 너무나도 달았다.


“히엥! 어떡해! 흐아앙!”

다음 날 아침이었다.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행복이 산산조각나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품에 안아들고, 평생 소중히 간직하겠다고 다짐한 것까지는 좋았다. 안그래도 체온이 높은 우마무스메다. 이리 뒤척이고 저리 구르면서 기쁨을 표현하는 와중, 잠결에 상자가 살짝 구겨져 열린 모양이었다. 아끼다가 뭐 된다더니, 그녀가 가장 아끼는 원피스와 하나가 된 소중한 선물이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었다.

“뭘 어떡해. 일단 가서 머리 좀 감고 씻고 나와라. 이도 닦고.”

“그러게 사탕을 줬어야지 왜 초코를 줘가지고!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빨리 안 가?”

서럽게 울면서도 다이아는 그의 분노를 피해 호다닥 샤워실로 들어가버렸다. 그녀가 머물다 간 자리에 남은 초콜릿색 끈적한 자취가 배인 이불과 매트리스를 내려다보면서 트레이너는 얼굴을 가볍게 감싸쥐었다.

“언제 어른 될래, 진짜......”




 


========





또또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