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크스,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는 악운으로 여겨지는 것. 재수 없는 일, 불길한 징조나 사람이나 물건, 의미 없는 것에 승패를 부여하는 미담같은 것. 따지고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운명인 것처럼 둔갑하게 만드는 것들.

운명은 자신이 개척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그런 징크스를 깨려고 노력했다. 그런 것들을 좋아했다. 징크스를 부수고 자기 길을 만들어 나가는 데 거침이 없었다. 어려울 수록 불타올랐다. 의욕이 넘쳤다. 말 그대로 다이아몬드였다. 지표면 아래의 높은 압력에서 오히려 안정적인 다이아몬드.

“하지만 넌 이미 징크스를 깨트렸잖아? 가문의 비원을 이뤄냈잖아?”

“으으윽......”

“가문의 비원은 이뤘어. 너의 비원을 위해 살 때도 됐잖아?”

피곤하고 지친 데도 밤에 잠을 자기가 힘이 들었다. 몸이 강제로 스위치를 눌러 잠이 들때까지 뒤척이고 나면, 다이아의 꿈에는 거무죽죽한 그림자가 따라와 원치 않는 말을 하곤 했다. 지난 하루텐에서 미칠 듯한 하이 페이스에 휘말려 결국 3착으로 마무리한 이후 부쩍 자주 나타나는 형상이었다. 실체가 잡히지 않는 허깨비, 하지만 도무지 밀어낼 수 없다. 쫓아낼 수 없다.

“생각해본 적 있어? 사토노 가문 말고,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바라는 비원 말이야.”

“그런 거 없어......”

다이아는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그림자에게서 눈을 돌리려고 애썼다. 거짓말이 익숙하지 않았다. 귀에 익은 속삭임이 그녀의 마음을 괴롭히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뚱한 얼굴로 자기 장난을 전부 받아주고, 가끔 짓궂고, 자주 짜증을 내는 그녀의 트레이너 씨. 가장 바보같고 어린아이같은 자신의 모습을 다 알고 받아주는 사람이면서, 늘상 한두 발짝은 떨어져 있는 사람.

“있잖아.”

“없어......”

“꼭 내가 내 입으로 말해야겠어?”

깔깔 웃는 소리에 다이아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어 거부한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인정해버리면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그 목소리에서 눈을 돌릴 수가 없다. 귀를 막을 수도 없다. 무시할 수도 없다. 그만하라고 소리쳐 쫓아낼 수도 없다.

“트레이너 씨랑 더 놀고 싶어.”

“그만해.”

“트레이너 씨랑 더 가까이 지내고 싶어.”

“제발.”

“트레이너 씨를 갖고 싶어. 가능하다면 나만의 것으로 하고 싶어.”

왜냐면 그 목소리는 자기 자신의 것이었으므로. 어쩌면 그녀의 본심에 가장 가까운 것이었으므로.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딱 잘라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이 약하게 느껴졌다. 그런 틈을 그림자 속의 목소리가 손쉽게 파고들었다.

“아주 쉬운 방법이 있어. 네가 가진 것을 조금만 사용하면 돼.”

젖은 눈을 힘겹게 떴을 때,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눈빛은 한풀 꺾여 있었다. 그녀는 분명 잠을 잤는데도 더 피곤해진 몸을 일으켜 샤워실로 향했다. 꽤 오랫동안 물소리가 났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번민하고 있었다. 번민하는 그녀의 마음만큼이나 평소 생활도 방황하고 있었다. 확 낮아진 건 아니지만 전반적으로 하락한 중간고사 점수, 3착으로 마무리한 하루텐, 떨어지는 훈련 기록과 컨디션까지. 킷카상과 아리마 기념을 연속으로 우승하며 발하던 광채를 다이아는 순식간에 잃어버리고 있었다.

스스로를 고무시키고 성장시키던 목적의식이, 동력이, 의욕이, 압력이 눈에 띄게 낮아져 있었다. 대기압으로 나온 다이아몬드는 불안정하다. 서서히 더욱 안정적인 상태로 변해간다. 흑연으로 변해간다.

“무슨 일 있어?”

“으흠.”

휴일 낮이었다. 트레이너의 집에 또 불쑥 찾아와 식탁을 점거하고 메론빵을 입 안 가득 채우면서 다이아는 콧소리만으로 대답했다.

“다른 아픈 데는 없어?”

“흐흠.”

“그러면 다행이지만......”

소세지빵으로 눈을 돌리기 전 여전히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는 트레이너가 그녀는 조금 불편했다. 그가 모를 리가 없을 것이다. 흑연은 자취를 남긴다. 지나간 자리에도, 손 댄 사람에게도. 그녀가 솔직히 털어놓기를 종용하고 있을 뿐이다. 솔직함은 다이아의 장점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솔직하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우유잔을 보는 척 그녀는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감추려고 했다.

“너무 신경쓰지 마세요. 언제는 전 그냥 냅두는 게 최고라면서요.”

반은 진심이었다. 그가 신경을 써주면 써줄수록 마음이 힘들어진다. 죄책감이 커진다. 부끄러워진다. 자기 자신이 추악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나머지 반절의 진심이 그가 신경쓰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지금 이상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신경써주길 원하고 있었다. 가능하다면 그녀만을.

기숙사에서는 뒤척이고 뜬눈으로 밤을 지내는 날이 늘어나고 있었다. 옆 침대에서 등을 밝히고 잠들어있는 룸메이트가 보이니까. 자신보다 1년이나 먼저 본격화가 찾아온 주제에, 저 하루텐에서 그녀를 압도하고 1착을 차지한 키타산 블랙이 보이니까. 축제 등불 앞에서 다이아몬드의 광채가 초라하게 느껴지니까 그녀는 휴일마다 그의 방에 와서 잠을 청하고, 그와 함께 식사를 하고 놀아줄 것을 요구했다. 평일에 그에게 와서 칭얼대지 않는 정도가 그녀의 의지력의 한계였다.

“......그 때는 그 때고, 지금은 아닌 것 같아서 그래.”

트레이너는 우유를 잔에 가득 따라 한 번에 비워버렸다. 그도 그대로 피곤했다. 지금도 프로젝트 라크 건으로 메일이 잔뜩 오고 있었고, 사토노 그룹에서도 그랬다. 다이아의 트윙클 시리즈 첫 3년이 올해로 마지막이었다. 개선문 원정이 끝나고 후속 시즌을 마무리하면 계약이 갱신된다. 말이 좋아 갱신이지 다시 계약하거나, 아예 파기하거나다.

미래를 생각할 때 사람들은 현재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자연스럽게 현재의 연장선일 것이라 추정하니까. 트레이너의 눈에는 부쩍 그녀의 의욕이 떨어진 것이 보이고 있다. 의욕만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대로 시니어 시즌을 초라하게 마무리하고 싶지 않다. 빠르게 오르고 빠르게 떨어졌다는 평가를 듣게 하고 싶지 않다.

“다이아야.”

“흐흠.”

“......받아.”

우유잔을 기울이던 다이아는 눈을 살짝 내려 트레이너가 식탁에 올린 물건을 힐끗 보더니 눈이 휘둥그레졌다. 기껏 목으로 넘어가려던 우유가 왔던 길을 되돌아가 입에서 힘차게 뿜어져나왔다. 그를 똑바로 쳐다보기 힘들어 시선을 피하고 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렇다고 아주 맞지 않은 것도 아니어서 그는 이를 악물고 티슈를 뽑았다.

“트레이너 씨, 이거, 열쇠?”

“처음 보는 것도 아니잖냐.”

“여벌 열쇠를 저한테 주시는 거예요......?”

“너 밤에 잘 못자고 있지? 피부가 푸석푸석하다고.”

다이아는 반사적으로 볼에 양 손을 가져갔다. 신경쓴 적 없었다. 거울을 보면 자신은 항상 예뻤으니까. 아니, 어쩌면 거기까지 신경쓸 여유가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트레이너는 얼굴과 옷을 티슈로 슥슥 닦으면서 기분 나쁘게 웃었다.

“네가 나한테 무쌩겼다고 말할 처지가 아니다. 이 무쌩긴 녀석아.”

“사토노 빔!”

“꺼흑.”

이 때만 기다렸다는 듯 우쭐거리는 트레이너의 말에 발끈해서 다이아는 다리를 쭉 뻗어 그의 정강이 앞부분을 걷어찼다. 스스로 불러온 재앙에 고통스러워하면서도 그는 테이블 위 열쇠에 손을 뻗어 그녀 쪽으로 다시 내밀었다.

“너, 다른 건 몰라도 여기 있으면 잠이라도 잘 자잖아.”

“......그건 그래요.”

“언제든 와서 쉬어. 또, 지금이 아니더라도 좋으니까,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상담해. 내가 도울 수 있다면 도울 테니까.”

심장이 다이아의 가슴팍을 쿵쿵 때렸다. ‘당신 때문이라고’ 하고 가볍게 쏘아붙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왜 다른 건 다 알면서 이런 부분만 몰라주는 걸까. 하지만 야속한 마음은 잠깐 뿐이다. 그녀의 마음에 밀물처럼 들어와 차는 기쁨이 다른 감정을 다 덮어버렸다. 툴툴대면서도 자기 공간과 생활과 침대를 기꺼이 내어 주는 트레이너 씨. 매일 매일, 매 순간 생각하니까 안 보이던 것들이 보였다. 그녀의 기분을 맞춰주려고 얼마나 많은 배려를 해 주고 있었는지가 보였다. 다이아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입꼬리를 올려 미소지었다.

“고마워요. 트레이너 씨. 정말 기뻐요.”

“그래. 나한테 감사해야지.”

하지만 그렇기에 다이아는 열쇠를 그에게 다시 밀어 돌려주었다.

“그리고 죄송해요. 이건 받을 수 없어요.”

“......뭐?”

자신이 들은 말을 의심하는 듯한 트레이너의 표정을 보자 쿵쾅, 쿵쾅, 요동치는 심장이 더욱 불안해졌다. 그 말을 하는 동안에도 그녀의 안에서 차올랐던 기쁨이 빛을 잃고 있었다. 반짝이던 것들이 거무튀튀해지고 있었다. 식은땀이 기분나쁘게 몸에서 올라오고 있었다. 숨이 가빠지는 느낌에 다이아는 고개를 몇 번 흔들었다.

“......메론빵, 잘 먹었습니다. 우유도 감사해요.”

가볍게 몸을 떨면서 다이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에서 나가야 한다는 충동이 들었다. 그녀가 여기 언제까지나 계속해서 있고 싶어졌으므로. 변함없는 그녀의 진심이 그것 때문에 오히려 변질되어버리기 전에.

“다이아야.”

“할 일이 생각나서요. 실례했습니다. 그럼 이만.”

꾸벅 고개를 숙여 표정을 가려버렸다. 숙인 채로 최대한 빠르게 돌아서서 종종걸음을 쳐 집을 빠져나왔다. 트레이너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문이 닫혀버렸다. 황급히 달려 복도에서 사라진 다이아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몇 번이나 눌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마음 속에서 지진이 나고 있었다.

‘아아, 이걸 차버리네. 솔직히 여벌 열쇠를 준 거면 거의 유혹한 거 아니냐?’

‘조용히 좀 해. 조용히 좀!”

기분 나쁘게 온 몸에 막처럼 씌워진 식은땀이 체온을 앗아가고 있었다. 느긋하게 산책이라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 너무 피곤했다. 전화를 걸어 고용인을 부르고, 최대한 그가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지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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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크스, 으레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 여기는 악운으로 여겨지는 것. 재수 없는 일, 불길한 징조나 사람이나 물건, 의미 없는 것에 승패를 부여하는 미담같은 것. 따지고보면 아무 것도 아닌 것이 운명인 것처럼 둔갑하게 만드는 것들.

오도가도 못하게 되었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았다.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자신의 운명을 함께 만들어갈 사람으로서, 가문의 비원을 가로막는 징크스를 함께 뛰어넘을 사람으로 트레이너 씨를 지명해 채용했었다. 어느 가을날, 그녀는 그 트레이너 씨 없이 개선문상의 게이트에 들어갔다. 전초전인 포와상에서 이미 4착을 거둔 뒤였다. 시작하기도 전에 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스스로의 볼을 때리고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혼자서라도 어떤 징크스도 뛰어넘을 수 있을 거라고, 운명은 자신의 것이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고. 자신만만하게 굴려고 애썼다. 그러나 곧바로 가로막혔다. 우마무스메의 형상을 한 높은 벽에 둘러싸였다. 파리 롱샹에서 징크스는 실체를 가진 무엇인가였다.

“영국의 괴물! 이네이블! 4마신차 리드, 압승입니다!”

반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그 가능성은 지금, 저 멀리 앞을 달리고 있었다.

< Officiel - 17 5 4 12 14 >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골 지점을 통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도 이미 게시판의 착순은 확정된 상태였다. 15착 대패. 레이스 사이트에 실리지도 않거나, 번거롭게 클릭을 한 번 더 해야하는 바보같은 착순인 것이 오히려 잘된 건지도 모르겠다고 그녀는 필사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드물게 날씨가 괜찮은 편인 롱샹에서, 그녀는 쫄딱 젖은 쥐처럼 초라했다. 가장 원하지 않던 식으로 그녀의 사춘기가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널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언에이블?’

‘맘대로 해.’

승부복 위에 코트를 뒤집어쓰고 경기장을 도망치듯 빠져나가며,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마음 속의 소리에 체념해 대답했다. 추웠다. 외로웠다. 무엇보다 모든 것이 싫었다.


트레이너 씨에게는 열쇠를 받은 바로 다음날 계약 해지 통보를 했다. 그의 곁은 편안하지만 불편하다. 좋지만 죄책감이 든다. 갖고 싶지만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 그와 함께 있다면 꼭 그를 상처입힐 것만 같았다. 갑작스럽다는 것은 안다. 하지만 이런 결정은 너무 늦기 전에, 오히려 조금 빠를 때 내리는 것이 좋다. 질질 끌다간 그때 가서 좀 더 일찍 그만뒀어야 했다고 후회하게 된다.

‘사토노의 힘을 써서 납치해. 아니면 힘으로 데려와. 어느 쪽이든 쉽다니까?’

꿈에서 그림자가 알려준 방법은 헛웃음이 날 정도로 간단했다. 가게에 가서 갖고 싶은 것을 사오는 정도 느낌이었다. 자유를 속박하고, 주위를 매수해서 사회적인 입지를 좁아지게 만들고, 그녀에게 의존하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게 만든다.

‘아니면 그냥 넘어트려서 따먹어 버려. 어차피 네 트레이너도 바라고 있을걸?’

혹은 강제로 몸을 겹쳐서 빼앗아버린다. 아침부터 밤까지 오로지 그녀의 것이 되게 만든다. 어디로도 가지 않고, 오로지 그녀만을 위해 사는 존재로 만들 수 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그렇게 하고 싶지 않다.


“흐앙! 트레이너 씨! 트레이너 씨! 미안해요! 잘못했어요! 제발 일어나 주세요! 제발 부탁이예요......”

트레이너 씨가 사실은 자신보다 약하다는 것 쯤은 안다. 언젠가 트레이너가 처음으로 다이아의 머리에 꿀밤을 먹였을 때, 인생 처음으로 겪은 폭력에 판단능력을 상실한 그녀가 그 자리에서 그의 머리에 ‘꿀밤’을 놓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쓰러진 채로 뻣뻣하게 굳어, 팔다리가 차갑게 되어버린 트레이너를 본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얕은 호흡만이 그가 아직 살아있는 존재라는 걸 알려줬었다.


눈이 퉁퉁 불도록 울면서 빌어도 트레이너 씨가 일어나지 않는 것을 꼬박 일주일을 지켜봤다. 손을 머리에 올려봐도 쓰다듬어주지 못하고, 놀려도 발끈하지도 않고, 장난을 쳐도 웃어주지 않는다. 그녀의 옆에 있지만 없는 것이나 다름 없게 된 트레이너 씨를 보았었다. 그러니 다이아는 그를 부술 수도 있는 행동은 할 수 없다. 무섭다. 슬프다.

‘내가 아무리 슬퍼져도 그 때보다 슬플 수는 없으니까.’

‘순애보 나셨네.’

방 안에 틀어박히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새삼 자신이 트레이너 씨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느꼈다. 학원에서도 방을 뺐고, 조만간 자퇴할 것이다. 다시 만날 일은 없겠지. 앞으로 자신은 어떻게 되는 걸까. 그것도 역시 무섭다. 슬프다.

그래도 트레이너 씨는 괜찮을 것이다. 충격은 좀 받았을 지도 모르겠지만, 거리두기에 능숙한 사람이니까. 그녀 마음이 아직도 아픈 건 어린애라 그런 거고, 트레이너 씨는 어른이니까 잘 추스렀을 것이다. 유능하고 멋진 사람이니까 아마 새 담당을 맞이했을 지도 모른다. 마음이 쿡쿡 쑤시지만, 그가 웃는 얼굴을 생각하면 쓰라리면서도 기쁘다.

“행복하냐요?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보고 싶다. 그립다. 같이 있고 싶다. 마음을 괴롭히는 충동을 삼키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스스로의 소매를 묶었다. 벽에 천천히 다가가 모자걸이에 소매를 걸었다. 자기 자신을 가둬두기 위해서, 자기 안의 끔찍한 생각들을 벌주기 위해서.

“꺼흑.”

그러나 그녀가 체중을 싣자마자 모자걸이는 부러져버렸다. 쾅 소리와 함께 다이아가 무릎부터 바닥에 떨어졌다. 트레이너 씨가 없어져버리니 이제 스스로 벌주는 것도 제대로 되지 않는다. 되는 일이 없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 삶의 모든 순간이 징크스인 것만 같았다.

“......흑.”

소리를 최대한 누르려고 그녀는 이불 안으로 빠르게 파고들었다. 침대에 얼굴을 묻고 베개로 엄중히 막았다.

“흑, 행복해지셔야 해요, 잘생긴 트레이너 씨이......”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모든 것을 거부하고 낮게 울었다.



===============



“다이아쨩네 트레이너 씨. 그만두신대.”

“뭐?”

문 너머에서 들려온 키타산 블랙의 목소리에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모든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지만 차마 친구까지 마다할 수는 없어 몇 마디 하자고 일어났던 참이었다.

“대체 왜?”

“어, 갑자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으니까 충격이 크시지 않았을까?”

“새 담당은? 프로젝트 라크는? 행복하기를 바랐던 내 기도는?”

“어어......그러니까......”

문을 사이에 두고도 키타쨩이 굉장히 곤란해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걸 왜 자기한테 묻느냐는 반응이다. 다이아는 문에 거의 볼을 붙이다시피 해 악귀같은 표정을 하고 물었다.

“대답해, 키타산 블랙!”

“아으! 모, 몰라!”

“생각해, 키타산 블랙!”

“내, 내가 어떻게 알아! 다이아쨩이 꼭 슈발쨩한테 졌던 나처럼 순식간에 퇴물이 되어버리고 모든 것이 자기 탓이라 생각해서 자기로서는 트레이너를 하기 부족하다고 느꼈을 수도 있고! 다이아쨩이랑 사이가 엄청나게 좋았으니까 꼭 무슨 실연당한 기분이 되었을 수도 있고! 아니면 그냥 지금의 다이아쨩처럼 모든 것이 싫고 아무 것도 생각하기 싫은 걸지도 모르지!”

찰칵, 끼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방이 천천히 열렸다. 퉁퉁 부은 새빨간 눈으로, 다이아가 그녀의 절친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해, 키타쨩?”

아니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드는 눈빛에 키타산 블랙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허리에 양 손을 얹어 그냥 웃어버렸다.

“당연하지, 다이아쨩!”

문이 열렸다. 말라붙은 눈물을 소매로 슥슥 문질러 닦은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조그만 크로스백을 챙겨 방에서 나왔다. 쭈뼛쭈뼛대면서도, 최근 몇 달 사이 가장 활기있어보이는 모습이었다.

“트레이너 씨에게 갈래......”

“어, 좋은 생각이야, 다이아쨩......”

친구의 모습에서 고개를 살짝 돌리면서 키타산 블랙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전에 샤워도 좀 하고, 몸단장도 좀 하는 게 좋은 인상을 주지 않을까?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지만.”


꽈드득, 트레이너의 집 문이 보통 나지 않는 소리와 함께 비틀려 열리고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들이닥쳤다.

“야,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신발을 벗지도 않고 성큼성큼 거실로 들어서면서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그의 집을 향해 오는 짧은 시간동안 다이아의 마음에는 안쓰러움이 들어찼었다. 한편으로는 자신이 없는 트레이너가 그렇게 되었다는게 어쩐지 살짝 기쁘기도 했다. 자기 마음 속 목소리를 완전히 따르는 건 할 수 없더라도, 그가 그녀가 없어서 그렇게 불행하다면 살짝만 힘을 써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기세등등해진 것도 있었다.

“행복하게 살고 있어야지 왜 이렇게 불행......”

쿵쿵 발소리를 내며 들어선 거실 소파에 앉은 트레이너와 마주치자마자 다이아가 굳어버렸다. 평소 휴일에 입는 복장이 아니었다. 무슨 호화로운 파티나 격식을 잔뜩 갖춘 자리에서나 입는 핏 좋은 맞춤 수트 아래에 슬림한 포인핸드 노트로 날렵한 느낌을 주는 타이까지 갖춰 입고 있었다. 마음 고생을 좀 하긴 했는지 살이 빠진 것이 오히려 얼굴의 선을 살려주고 있었다. 살짝 피곤한지 어둑하면서도 어쩐지 상처입은 야수같은 깊고 그윽한 느낌이 나는 눈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트레이너의 눈썹이 살짝 치켜올라갔다.

“......다이아니?”

“네, 사토노 다이아몬드입니다......트레이너 씨, 잘 지내셨나요?”

갑자기 공손해져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다이아는 몸을 부끄러운 듯 살짝 꼬았다. 트레이너 씨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그녀에게 다가왔다. 눈 앞에 와서 선 그를 제대로 올려보지도 못하고 그녀는 눈동자만 움직여 힐끗거렸다. 그가 감정이 격해지는지 팔을 몇 번 움찔였다. 다이아는 꿀밤이 떨어질 거라 생각하고 각오하듯 이마를 때리기 좋게 내밀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못 지냈다.”

“......네?”

“네가 없어서 집이 조용하니까 여기서 더 살기도 싫어져서. 매물로 내놨어. 어디까지 알고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트레이너도 그만둘 거야.”

“......왜요? 새 담당과 새 출발은요?”

“네가 왜 그런 결정을 내렸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슨 일이 있다 싶긴 했거든. 근데 결국 나한테 말해주지 않았잖냐. 지금 담당한테 신뢰받지 못하는데 새 담당이 다 무슨 소용이 있어.”

손으로 입가를 가리고 트레이너는 고개를 떨궈 한숨쉬었다. 50도 아래를 바라보는 그 모습에서 좌절감이 전해졌다. 감추려는 듯 그가 허탈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유가 뭐가 됐든 널 망친 건 나야. 그게 변하진 않아. 나는 자격이 없어.”

“그렇지 않아요. 모든 건 제 잘못이예요. 솔직하게 말씀드리지 못해서 죄송해요.”

‘와, 눈빛 좀 봐. 개섹시해.’

그가 가까이 오자 자기 주장이 강해지기 시작한 마음 속 소리를 애써 무시하면서, 다이아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태도를 낮췄다. 그 태도에 그도 마음이 누그러지는지 고개를 저었다.

“뭔가 말하라고 강요하는 것도 징크스겠지. 말할 수 없는 것도 있는 건데.”

‘타이 확 잡아당겨서 키갈 마렵네.’

“죄송해요. 많이 상처받으셨죠?”

“괜찮아. 너도 힘들었겠지. 이제라도 마지막 인사 할 수 있어서 다행이네.”

그녀를 내려다보며 트레이너가 손을 뻗었다. 그녀가 차라리 바랐던 꿀밤이 아니라, 다정한 손길이었다. 가볍게 그녀의 다이아몬드 모양을 건드려 헝클어트리면서 그가 쓸쓸하게 웃었다.

“너도 그만 괴로워하고 다른 행복을 찾아보자. 지금까지 고마웠어. 다이아야.”

“......흑.”

목이 쓰라릴 정도로 울음을 애써 삼켰다. 눈물 몇 방울이 바닥에 떨어졌다. 싫다. 헤어지기 싫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했던 걸까. 무엇이 정답이었던 걸까. 그에게 상처주기 싫어서 거리를 뒀더니 다른 방식으로 상처를 입혀버렸다. 왜 자신은 이렇게 미숙한 걸까. 왜 트레이너 씨처럼 능숙하게 거리를 둘 줄 모르는 걸까. 아무리 자책해도 돌이킬 수는 없다. 단지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번만 솔직하게 굴고 싶었다.

“트레이너 씨......”

“왜 그러니.”

그녀가 양 소매를 그에게 내밀었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모자걸이에 걸어달라고 부탁하고 싶었다. 말이 제대로 나오지는 않았다. 소매 끝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조용하고 엄숙하게 그녀의 소매를 묶어 벽으로 데려갔다.

“......너 살 많이 빠졌구나.”

그녀를 가볍게 안아 들어올리면서 트레이너가 짧게 말했다. 다이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 좀 많이 먹어. 아직 성장기잖아.”

걱정해주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따뜻해서 아팠다. 그가 그녀를 놓자 서서히 다이아가 바닥을 향해 늘어졌다. 팔 아래를 짓누르는 아픈 느낌에 다이아가 눈물을 뚝뚝 흘렸다. 트레이너는 착잡한 모습으로 그녀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버렸다.

“트레이너 씨.”

“왜.”

“......집에 있는 모자걸이에 걸려보려고 했는데요. 그냥 부러져 버리더라구요.”

트레이너는 잠시 말이 없었다. 어지간히 거기 걸리는 걸 좋아하는구나, 고 조용히 웃다가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당연하지. 그래도 네가 중등부인데. 상식적으로 모자걸이에 몸이 걸려서 버틸 수 있겠냐?”

“그치만 지금 여기는......”

“......뭐, 그렇지. 크기만 봐도 알 거라 생각했는데. 그거 사실 모자걸이가 아니니까.”

트레이너는 둘러보라는 듯이 팔로 그의 집을 빙 둘러 가리켰다. 그 어디에도 모자는 없다.

“나 모자 쓰는 거 안 좋아하거든. 그냥, 너 벌 주려고 특별히 만들어서 달아둔 거야.”

“......네?”

“처음엔 덕트 테이프를 쓸까 했는데, 떼기도 귀찮고...... 네 소매가 하도 펄럭거리니까 벽에 걸어서 벌주면 재밌겠다 싶어서 말야.”

비밀을 털어놓고 한결 가벼운 표정으로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말하자면 다이아걸이인거지. 마음에 들었었다니 다행이야.”

“순전히 절 걸어놓으려고, 이런 걸 만들어 두셨었다고요?”

“예절교육에 도움이 좀 되었으려나?”

트레이너의 농담에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입에서 꼭 우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 더는 참을 수가 없다. 이 사람도 자신을 이렇게까지 생각해준다. 역시 이 사람이 좋다. 역시 이 사람이 아니면 안된다고 생각하자, 갖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거실 밖을 향해 소리쳤다.

“키타쨩, 도와줘!”

“어기여차!”

이미 부서진 문을 열고 밖에서 대기중이던 키타산 블랙이 들이닥쳤다. 트레이너가 뭐라 반응하기도 전에 그녀가 등 뒤에 와 있었다. 분명 퇴물이라던, 레이스를 몰라도 이름은 안다는 우마무스메의 속력은 조금도 쇠퇴하지 않았다. 그녀의 손날이 트레이너의 목 뒤를 가볍게 때렸다. 스르르 풀리는 것처럼 트레이너가 바닥에 쓰러져 기절했다.

“다이아쨩, 괜찮아?”

“나는 괜찮아......”

소매가 뜯어지든 말든 밑으로 힘을 주어 땅으로 내려서면서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미소지었다. 쓰러진 그에게 다가가 자세를 낮추자 키타산 블랙이 그녀의 등 위에 트레이너를 올려 주었다. 묘한 성취감에 그녀의 입이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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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으......”

“정신이 좀 드세요, 트레이너 씨?”

트레이너가 눈을 떴을 때, 약간 어둑한 장소에 있었다. 몸이 제대로 움직이질 않는다. 자세히 보니 의자같은 곳에 덕트 테이프로 칭칭 감겨 묶여있었다. 그가 몇 번 몸을 좌우로 움직여보지만 허사다. 그와 살짝 떨어진 곳에 앉아 양 손가락을 모아보이며, 다이아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후후, 단 둘이네요......”

“뭐 언제는 단 둘이 아니었냐? 왜 새삼스럽게.”

“아, 그러네요.”

트레이너의 일침에 다이아가 살짝 얼굴을 붉혔다. 생각해보니 휴일마다 그의 집에 단 둘이 있었다. 돌이켜보면 지금이랑 다를 것도 없다. 장소가 좀 공기가 탁하고 어두운 것만 빼면. 그가 몇 번 기침을 했다.

“여긴 또 어디야?”

“안심하세요. 사토노 저택의 지하실이니까요.”

굉장히 충동적이었던 행동 탓에 장소 섭외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계획을 세웠다 하더라도 아마 별장을 하루 이틀 정도 빌리는 게 전부일 것이다. 키타쨩이랑 놀다 간다고 해도 아버님 허락도 받아야 하고......

여기까지 들키지 않고 그를 데려온 것만으로도 키타산의 도움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터였다. 막상 일을 벌이고 나니 납치라는 것도 생각보다 힘든 거구나 싶었다. 그녀가 과정을 복기하는데 트레이너가 몸을 떨었다.

“좀 추운데......”

“앗, 잠시만요.”

다이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다급히 사라졌다. 잠시 후 호다닥 돌아온 그녀의 손에 난로가 들려 있었다. 멀티탭을 끌어와서야 간신히 그에게 닿게 난로를 연결할 수 있었다. 온기가 그에게 충분히 가도록 방향을 정하고 다이아가 미소지었다.

“괜찮으세요? 이제 따뜻하신가요?”

“너는 괜찮니?”

“네. 저는 체온이 높으니까 괜찮아요! 헤헤.”

“다행이야. 감기 조심하렴. 나는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이 좀 있어서......”

트레이너가 몇 번 기침을 더 하자 다이아가 안절부절 못하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로 창고로 쓰는 지하실에 도움 되는 물건이 있을 리가 없고, 그녀는 다시 위로 올라가 따뜻한 차를 한 잔 가져와 그의 입에 살살 불어서 가져다댔다.

“천천히 드세요. 뜨거울 지도 모르니까.”

“것보다 이게 무슨 짓인지부터 설명해주지 않을래?”

“......이해가 느리신 편이네요. 잘생, 무쌩긴 트레이너 씨. 당신 지금 납치당하신 거예요.”

“......왜?”

“왜겠어요?”

가슴이 갑갑해져서 다이아가 몸을 벌컥 움직였다. 그 기세에 찻잔에서 차가 찰랑 쏟아져 그의 다리에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뜨거움에 그가 놀라서 움찔거리자 다이아가 허둥댔다.

“어떡해, 어떡해! 미안해요! 이러려고 한 게 아닌데......”

급한 대로 소매로 차를 닦아주다 다이아가 정신을 차렸다.

‘너 대체 뭐하냐?’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녀의 입꼬리가 배시시 올라갔다. 그대로 그녀의 소매가 다리를 지나 테이프가 단단히 감긴 그의 몸을 올라갔다. 너무 단단히 감았는지 촉감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조금 실망한 듯 다이아는 헛기침을 했지만 금새 기세를 되찾았다.

“장난은 이제 그만하죠. 트레이너 씨도 제가 왜 이러는지 아시잖아요......”

소유욕과 독점욕에 물든 위험한 눈빛을 하고, 다이아가 천천히 그의 다리 위로 올라 앉아 몸을 가까이 했다. 핸드폰 진동이 울리기 직전까지.

“하.......”

한숨을 쉬며 핸드폰을 꺼내 확인한 다이아의 표정이 사색이 된다. 아버님이다. 그녀가 두 손으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이아야? 방에서 나왔더구나. 지금 어디 있니?”

“아, 아빠...... 잠시 요 앞에 나와 있는데요. 어쩐 일이신가요?”

“아니......네 전 트레이너 말이다. 오늘 만나서 차 한 잔 하면서 얘기를 좀 하려고 했는데. 연락이 안 돼서 말야. 혹시 네가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

“아아,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다이아는 아버님께 거짓말을 하며 시선을 어색하게 돌렸다가 따가운 트레이너의 눈빛을 느끼고 다시 반대로 눈을 굴려버렸다. 어쩐지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전화 너머로 아버님의 가벼운 한숨이 들려왔다.

“그러니. 약속을 어길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네. 집에 한 번 찾아가봐야겠구나.”

다이아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억지로 힘으로 열어 부서진 현관문, 빠개져 꺾인 모자걸이에 아직 남아있을 그녀의 옷소매 쪼가리 따위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눈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버님께서 현장을 발견하신다면, 끔찍하게 아끼던 트레이너를 찾기 위해 모든 것을 동원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 끝에는 그녀가 있을 터였다.

“아, 아하하......에! 트레이너 씨!?”

어색하게 웃던 다이아가 화들짝 놀라는 척 소리치며 트레이너를 돌아보았다. 절절하게 호소하는 눈빛을 보내면서 전화기 화면을 가리켰다. 세상 한심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혀를 차면서도 트레이너는 고개를 끄덕여 전화기를 가져오게 했다. 그가 목을 가볍게 풀고 활기찬 소리로 인사했다.

“예, 아버님! 접니다!”

“아니, 자네. 연락도 안 받고 대체 어디서 뭘 하나?”

“아, 그게. 죄송합니다. 전화가 꺼져버려서요. 지금 댁에 와 있습니다.”

“댁? 우리 집 말인가?”

“예! 아무래도 제가 찾아뵙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말이죠! 주제넘은 일이라면 죄송합니다만......”

눈에 침도 안 바르고 술술 거짓말을 뱉는 트레이너를 다이아는 손에 땀을 쥐고 바라보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만 흐르다가 아버님이 큰 소리로 웃었다.

“아, 그랬구만! 뭐, 주제넘은 일도 아니지. 나는 오히려 환영이지! 어디, 당장 나가겠네!”

전화가 끊어지자마자 다이아는 트레이너의 몸을 감은 테이프를 마구 뜯어내기 시작했다. 울고 싶었다. 큰 소리로 주저앉아 오열하고 싶었지만 아버님한테 혼나는 것보다 낫다.

“히엥! 왜 아빠는 트레이너 씨를 나한테서 찾아?”

“차라리 잘 된 거 아니냐? 다른 데서 찾으셨으면 넌 모자걸이로 안 끝났어.”

신체의 자유를 찾아 몸을 몇 번 풀면서 그가 서둘러 지하실 바깥을 향해 걸었다. 아버님이 지금도 2층에서 내려오고 계실 터였다. 그의 뒤를 종종걸음으로 따라가는 동안 다이아의 마음 속이 의혹으로 가득 찼다.

‘야! 쉽다며! 간단하다며!’

‘이, 이럴 리가 없는데...... 아버님은 내가 뭘 하든 묵인해주시거나 사토노의 힘을 빌려주셔야 하는 존재인데.’

‘사토노의 힘은 무슨. 나 용돈 타서 쓰는데.’

‘......블랙 카드지? 그렇지?’

2층에서 내려온 아버님과는 타이밍 좋게 현관 앞에서 마주칠 수 있었다. 무사히 상황을 얼버무린 트레이너와 아버님이 다정하게 식사를 하러 나가는 뒷모습을 다이아는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분명 허탕을 쳐서 기분이 나빠야 하는데, 어쩐지 자랑스럽게 느껴져 마음 한 켠이 뿌듯했다.


그를 만날 수 있어서 마음이 놓인 탓인지 많은 일이 있어서 지친 건지 방에 돌아와 잠이 들었던 다이아가 눈을 떠보니 익숙한 낯선 천장이 보였다. 낯선 이유는 그녀의 방이 아니었기 때문이고, 익숙한 이유는 그녀가 잘 아는 방이었기 때문이다.

“일어났냐?”

“......트레이너 씨?”

친숙한 짜증 섞인 목소리에 부스스 몸을 일으키려고 보니 잘 움직이질 않았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몸을 일으킬 필요는 없었다. 그녀의 몸은 꼿꼿할 정도로 잘 일어나 있었으니까. 단지 벽에 걸려있을 뿐이었다. 언제나의 모자걸이에 덕트 테이프를 덕지덕지 붙여 최대한 편안하게 매달리게 만들어놓고 있었다. 발받침으로 쓰던 낮은 의자를 트레이너가 치워버리자 순식간에 자세가 불편해지긴 했지만.

“엥? 엥? 뭐예요? 무슨 일이예요?”

“이해가 느리네.”

트레이너가 어깨를 으쓱대 비아냥거렸다.

“너 납치된 거야.”

“엥? 왜요? 어째서요?”

“왜겠냐? 참나. 지가 계약 끊을 때는 언제고 납치나 하고 말야.”

몸을 흔들어 하나하나 덕트 테이프를 뜯어내는 다이아를 윽박질러 멈춰세우면서 트레이너가 으르렁거렸다. 움직일 수 없는 그녀의 이마에 몇 번이나 꿀밤을 때리더니 종이 한 장을 꺼내 들이밀었다.

“긴말 할 것 없어. 당장 전속계약서에 서명해.”

기존 시니어 시즌에 더해 앞으로의 몇 시즌이 옵션으로 걸려있는 새로운 전속 계약이다. 벌써 트레이너의 서명이 되어 있다. 모든 사항이 기입되어 있다. 남은 것은 사토노 다이아몬드 본인의 서명 뿐. 다이아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을 잃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트레이너가 종이를 더 가까이 들이밀면서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전속계약서에 서명할 거야? 경찰서 가서 우리집 문 박살내고 주거침입한 거 진술서에 서명할 거야?”

“그치만......”

죄책감때문에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는 그녀의 오른손 쪽 테이프를 트레이너가 뜯어냈다. 그녀의 엄지에 대충 유성매직을 칠하더니 천천히 문서를 가져가기 시작했다.

“아직 상황이 이해가 안되나본데, 너한테 딱히 선택권은 없어. 앞으로도 나랑 놀고, 나랑 훈련하고, 다시 프랑스 가서 개선문 이기는 거다? 징크스 깨러 다닐 거지?”

“......흑.”

무슨 일인지도 모르겠고 왜 이러는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안심이 되었다. 마음이 놓이고 지금까지 쌓인 것들이 풀어지자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그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생각해주고 있었다. 그녀를 붙잡으려고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녀만이 상대를 바라보고 있던 게 아니란 걸 느끼자 너무 기뻤다.

엄지가 서류에 꾹 눌리는 느낌이 났다. 압력이 높아진다. 마음의 온도가 높아진다. 다시 마음의 환경에 맞는 형태로 변해간다. 지장이 제대로 찍힌 것을 확인하고 트레이너가 그제서야 흡족한 웃음을 지었다. 트레이너 씨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어서 기뻐하고 있다. 그녀와 똑같다. 긍정적인 감정이 마구 피어오르자 잊고 있던 당당함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내면을 장악하던 그림자가 구석에 몰렸다.

‘야, 넌 얼마나 무쌩겼으면 납치나 강제력에나 의존하냐?’

‘하?’

‘나는 이쁘니까 트레이너 씨가 이렇게 매달려주잖아. 네 방식으로 저렇게 할 수 있어?’

‘아니, 그래도 난 혼인신고서에 사인하지 너처럼 전속 계약가지고......’

‘사토노 빔!’

사토노 빔(하단, 물리)을 맞은 그림자가 쭈그러들었다. 서서히 사라져간다. 감히 자기 잘못을 지적하려는 무쌩긴 그림자를 토벌하고 나자 그녀의 마음이 환하게 갰다. 눈물이 걷히기 시작한 얼굴을 환하게 펴고 그녀가 테이프가 뜯긴 다리를 까딱거렸다.

“트레이너 씨이! 내려주세요! 안아주세요!”

그런 그녀의 분위기와 정 반대로 트레이너는 계약서를 챙겨두자마자 서서히 표정이 찌그러지더니, 언제나의 뚱하고 짜증 많은 얼굴로 돌아갔다. 풀썩 소파에 누워 몸을 쭉쭉 폈다.

“트레이너 씨이!”

그녀의 외침을 무시하고 늘어지게 큰 소리로 하품을 하면서 그는 눈을 감았다.

“아무튼 네가 있으니까, 막 피곤해지는 것이, 이제 잠이 좀 오는 것 같네......”

“트레이너 씨! 내려주세요!”

“내려달란다고 내려주는 것도 징크스야, 이 녀석아.”

그가 마음이 놓여 편안해지는 건 좋지만 언제까지나 매달려있는 건 또 싫다. 다이아가 몇 번이나 벽을 밟아 소리를 울리며 소리쳤다.

“야!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빨리 내려줘요!”

“이거거든~.”

트레이너가 눈을 감은 채로 웃어버렸다. 다이아는 한참을 그가 더 기뻐할 수 있게 빽빽 소리지르다가, 포기하고 잠을 청했다. 트레이너 씨와 마찬가지로, 그녀도 그가 있으니 막 나른해지는 것이, 잠이 오려는 것 같았다. 게으름이 꼭 죄악이라는 것도 징크스다. 번민에 시달리던 사람들에게는, 이런 게으른 시간이야말로 쉽게 얻기 힘든 축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