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송해요! 오래 기다리셨죠?”

직장인들의 점심 식사가 대충 끝난 대낮 시간이었다. 카페에 앉아 이따금 LANE이 오는 핸드폰을 바라보고 기다리고 있는데, 문 쪽에서부터 높은 톤의 부르는 소리와 함께 굽 높은 구두가 바닥을 밟는 소리가 났다. 새하얀 블라우스 위에 에메랄드색 뷔스티에 원피스를 입은 여자가 자리로 총총 달려오고 있었다. 모자의 넓은 챙을 꼭 잡아 벗겨지지 않으려 잡고 있었다. 어지간히 모자를 신경 쓰는지 커다란 호박색 두 눈이 위를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준비가 길어져서 조금 늦었네요! 헤헤.”

“아뇨. 괜찮습니다.”

그와 눈을 마주치고 환하게 웃으며, 그녀는 가져온 작은 크로스백을 옆 의자에 내려두고 앉았다. 원피스 자락을 등쪽에서부터 정리해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는 모습이 어쩐지 어색했다. 트레이너는 눈은 그대로 두고 입만 의례적으로 올려 웃었다. 여자는 테이블 위에 양 팔을 올려 트레이너 쪽으로 몸을 숙여 다시 이가 드러나도록 웃었다. 약간 거리를 두는 듯한 남자와 완벽한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 씨, 맞으시죠?”

초면부터 성이 아니라 이름으로 불러버리는 당돌한 여자다. 트레이너는 살짝 올라갔던 입을 근엄하게 다물어버렸다.

“......네. 맞습니다. 그러니까......”

점원이 가져다준 메뉴판을 손가락을 짚어 읽으면서 여자는 다시 헤헤 웃었다.

“네, 제가 사토 다이아입니다.”



트레이너는 소개팅 자리에 나와 있었다. 놀랍게도 주선자는 그의 담당 우마무스메, 사토노 다이아몬드다. 어제 그녀의 머리를 말려주고, 정리해주고, 꼬리털을 빗질해줄 때 있었던 일이다. ‘트레이너 씨랑 지낼 사람은 행복하겠네요~’ 같은 소리를 맘대로 지껄이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확 가려 부끄러워했었다.

그러다 갑자기 못 생겨서, 아니 무쌩겨서 여자 친구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할 거라고 자신이 아는 좋은 여자를 소개시켜 준다고 선심을 썼었다. 꿈 꾼 적도 있었고, 애초에 연애 경험이 없는 것도 아닌 트레이너지만 굳이 꺼낼 필요는 없는 말이다.

“그래?”

대신 그는 히죽히죽 웃는 다이아에게 똑같은 웃음으로 대답했었다.

“그럼 부탁할게. 대신에 우마무스메 말고, 나이대가 비슷한 인간 여성분이 좋겠네.”

“엣......”

잠시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좌우를 바라보던 다이아의 볼이 엄청나게 부풀어 올랐었다. 그녀의 소매가 꼭 사마귀 낫질하는 것처럼 찰싹찰싹 그의 가슴팍을 때려댔었다.

“뭐예요! 뭐예요! 이 바보, 멍청이! 바람둥이! 호색한! 추남!”

“내가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이런 말을 들을 이유밖에 없어요!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어째서?”

몇 번이나 분풀이를 하던 다이아가 그 말에는 얼굴이 갑자기 달아올랐었다. 죄 없는 방바닥를 몇 번 밟으면서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아무튼! 트레이너 씨 미워요! 다시는 저 찾지 마세요!”

빗을 쥔 그의 손을 탁 쳐내고 그녀는 쿵쿵 발소리를 내며 방에서 나가버렸다. 조금 당황해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트레이너는 현관문이 신경질적으로 닫히는 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떨어진 빗을 주워들다가, 침대 위에 놓인 그녀의 가방이 아직 사라지지 않은 걸 발견했다. 이러다 말겠지, 하고 가방을 찾으러 올 때까지 내버려두는 것도 좋겠지만 그는 서두르는 척 달려 현관문을 열었었다. 역시나 다이아가 문 바로 옆에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그녀가 흥, 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뭔가요? 다시는 저 찾지 말라고 했는데요?”

“너 가방 두고 갔길래.”

“가지던가 하세요. 이제 필요 없는 거니까.”

지갑도 들어있고 여벌 옷도 있는 가방을 뭔 자신감으로 필요 없다고 하는 지 모르겠지만, 그렇다는 데 굳이 어울리지 않을 필요도 없다. 풀 죽은 척 알았다고 하고 문을 서서히 닫으려니까 문간에 구두 신은 발이 휙 들어와 걸렸다.

“생각한 것보다는 늦었지만, 그래도 아주 늦기 전에 오셨으니까 한 번만 용서해 드릴게요.”

“아주 늦는 게 얼마야?”

다시 열린 문으로 들어와 신발을 벗는 다이아에게 물었다. 기분이 누그러진 듯 다이아는 고개를 들어 그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신발장 센서등 탓인지 한낮의 햇빛 탓인지 유독 반짝이는 눈이었다.

“100년이요.”


아무튼 100년 기다렸다 그녀를 찾지 않은 보람이 있어서 바로 다음 날 이렇게 소개팅 자리가 잡힌 것이다. 뭐든지 빨리 달리는 말딸사회의 발로인지 주선부터 장소 섭외까지 전광석화가 따로 없었다. 그렇게 자리에 나온 완벽한 인간 여성 ‘사토 다이아’ 씨는 뭐가 그렇게 기쁜지 테이블에 바짝 기대 히죽히죽 웃고 있었다.

“후후. ~~ 씨. ~~ 씨.”

“제 이름이 이상한가요, 사토 씨?”

“다이아, 아니, 다이아 씨라고 불러주세요.”

의기양양하게 씨를 붙일 것을 요구하면서, 그녀는 점원에게 카라멜 드리즐을 두 펌프 추가하고 휘핑 크림을 잔뜩 올린 초코칩 프라페를 주문했다.

“그럼 저는 아이스 바닐라 라떼로.”

“단 걸 좋아하시나요?”

“그렇다기보다는, 쓴 걸 잘 못 먹어서요.”

“후훗. 애기 입맛이네요.”

트레이너의 입맛을 지적하면서 다이아 씨는 입을 가려 얌전히 웃었다. 그는 조용히 팔짱을 끼고 그녀를 노려보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래요. 아무튼 사토 씨.”

“다이아 씨.”

“사토 씨.”

“으으! 다이아 씨라고요!”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덜덜 떨면서 다이아 씨가 분노를 표했다. 금방이라도 그녀의 다리가 쭉 펴질 것 같았다. 맞은 편의 그를 걷어찰 지도 모르는데 왜 그러는 지는 모른다. 성숙한 인간 여성의 사회생활에 호칭 문제는 굉장히 중요한 게 맞지만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사토 씨에 대해 얘기해 주시겠어요? 나이라든지, 좋아하는 거라든지.”

“음. 그래요. 사토 다이아, 26살이예요! 사토노 게임즈에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좋아하는 건 인형 뽑기예요!”

“주선자, 그러니까 다이아쨩과는 어떤 관계신지 여쭤봐도 될까요?”

“엣......어음. 그러니까......”

그녀가 뭐라 궁시렁대면서 모자를 푹 눌러썼다. 실내에서 모자를 벗지 않는 건 또 무슨 경우람.

“초등, 고등, 아니, 중......학교 동창이예요.”

“네?”

“제가 체육 특기생이라 10년 정도 유급해서요! 다이아쨩이랑 곧잘 어울려 놀았거든요!”

타임라인 설정이 엉망진창이다. 10년 정도 유급하다가 갑자기 졸업해서 사토노 게임즈에 입사하기라도 했단 것일까? 애초에 중앙 트레센 학원에 인간 체육 특기생이 있을 리가 없지 않나. 하나하나 지적하면서 놀 수도 있겠지만, 자기 얘기를 하면서도 오른쪽 위를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상대를 보니 그렇게 하기가 미안해진다. 적당히 받고 넘어간다. 그러자 다이아 씨가 잽싸게 공을 돌렸다.

“그것보다 ~~ 씨 얘기를 해 주세요. ~~ 씨에 대해 알려주세요.”

“재미 없을 텐데요.”

당신이 한 얘기에 비하면, 이 생략되어 있지만 사토 다이아 씨는 절대로 그렇지 않을 거라고 눈을 빛냈다.

“재밌게 들을 테니까, 부디 솔직하게! 말씀해 주세요!”

“~~입니다. 들으셨겠지만 중앙 트레센의 트레이너입니다. 아시겠지만 사토노 다이아몬드의 전속 트레이너를 맡고 있습니다.”

“들은 얘기인데, 트레이너 분들은, 특히 전속계약을 맺은 담당 우마무스메와 무척 끈끈한 관계를 맺는다던데요?”

“그게 꼭 그렇지도 않거든요.”

“뭐라고요?”

자기 일처럼 발끈하는 사토 씨를 무시하고 트레이너는 자기 앞에 놓인 음료를 길게 빨았다.

“최근에 성적이 좀 좋지 않았거든요. 다른 트레이너였다면,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였다면. 애초에 그렇게 되지 않게 막았을 수도 있고.”

“......”

“담당이 하고 있는 생각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잘 파악했을 수도 있죠. 더 힘들어하지 않게, 혼자 짊어지지 않게 함께 감당했을 수도 있었을 거예요.”

“저는......”

착잡해하는 그를 바라보다가 조금 목이 멘 것처럼 다이아 씨의 목소리가 조금 흔들렸다. 헛기침을 하며 그녀는 손을 가지런히 모았다. 가능한 한 차분하게 얘기하려고 애 썼다.

“저는, 그러니까 제삼자라 잘 모르긴 하지만요. ~~ 씨만큼 다이아의 마음을 이해해줄 사람은 없었을 거예요. 무엇보다 ~~ 씨는, 다이아가 고른 단 한 사람. 함께 가문의 비원을 이룰 단 한 사람으로 지목된 분이시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트레이너들에게는 항상 그 이상의 바람이 있거든요.”

“그 이상의 바람이요?”

“자기 담당이 최고였으면 하는 바람이요. 원하는 바를 이루고, 출전하는 모든 대회에서 승리하고, 역사에 이름을 남길 우마무스메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요.”

차분하게 그를 바라보는 사토 씨에게서 눈을 피하면서 트레이너는 목이 타는지 음료를 다시 한 번 쭉 빨았다. 바닐라 라떼가 어느새 거의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이아는 가문의 비원을 이뤘습니다. 최초의 G1 우승이죠.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예요. 다이아가,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이제 걸어나갈 길이 곧 사토노의 역사고 발자취입니다. 후대의 사토노들이 따라 걷게 될 발자취요. 그 길을 함께 만들고 걸어가고 싶었습니다.”

“.......”

“자격이 없다 생각해 트라이얼도 참가하지 않은 절 채용해준 다이아에게 보답할 방법이라고 생각했습니다만, 역시 저는 자격이 없었던 건지도 모르죠.”

“......아니예요. 트레이너 씨.”

기껏 맛있게 되어 온 음료를 마실 생각도 않고 사토 씨는 모자를 푹 눌러썼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으니 모자와 트레이너가 마주보고 있는 모양새가 된다. 그녀의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자격이 없는 건 저......가 아니라 다이아쨩이예요. 다이아쨩이야말로 당신같은 분의 담당이 될 자격이 없었던 거예요! 못된 아이! 자기 밖에 모르는 한심한 아이!”

갑자기 주선자를 험담하는 자리로 변해버렸다. 끓어오르는 감정을 격해지지 않게 추스르면서도 연신 사토노 다이아몬드를 매도하고 험담하는 사토 씨를 불러 진정시켰다. 코까지 훌쩍이면서 고개를 들지 못하는 그녀에게 트레이너는 강하게 주의를 준다.

“제 담당을 나쁘게 말하지 마세요. 그런 아이가 아닙니다.”

“그런 아이가 맞거든요?”

“만약 그랬다면, 다시 계약하자고 권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누구보다 빛나고, 자랑스러운 담당이예요.”

트레이너는 손을 뻗어 휴지를 가져오려다 만다. 대신 화장실을 다녀오겠다고 양해를 구한 뒤 빠르게 사라져버렸다. 사토 씨는 그 뒷모습을 눈동자만 올려 바라보다가, 그가 가져오려던 휴지를 가져다 코를 풀었다.


“실례했습니다.”

“아뇨......”

“재미 없는 얘기라니까요.”

“......그러게요!”

에헷, 하고 멋쩍은 웃음소리를 덧붙이며 사토 씨는 막 자리에 앉은 그의 정강이를 애교스럽게 걷어찼다.

“싫다아. 저랑 있는데 다른 여자아이 얘기라뇨. 얼마나 좋아하는 거람.”

“아니, 그쪽이 듣겠다고 고집을 부리니까.”

“떽! 그쪽이 아니라 사토 씨! 아니, 다이아 씨라니까요!”

그러면서도 그녀는 기운을 찾은 건지 길다란 스푼으로 프라페를 푹푹 찍어 입에 집어넣었다. 먹성 좋게 절반 정도를 말도 없이 비우고 다시 그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아무튼, 그렇게 담당 아이를 좋아하신다니까 그 얘기를 더 듣고 싶어지네요.”

“네. 뭐. 좋아하죠.”

라떼를 비우는 겸, 그는 눈을 빛내는 사토 씨에게서 고개를 돌려버렸다.

“그 아이의 달리기를요.”

“그, 그럴 수가......”

기쁜 듯 실망하는 표정이다. 모자가 살짝 앞으로 기울어지려는 걸 바로 고쳐쓴다. 마치 모자 안에서 무언가가 앞으로 밀고 있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기분 전환을 하려는 듯 단 것을 입에 넣는 그녀의 페이스에 맞추려고 트레이너는 물을 가져와 홀짝였다.

“사토 씨.”

“......네.”

“쉬는 날에는 주로 뭐 하세요?”

“아하하. ~~ 씨랑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은데요......”

그녀의 눈이 조금 커졌다. 트레이너가 한 팔을 테이블에 올려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아마 아닐 거예요. 혼자 계실 때도요?”

그가 묻고 싶은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트레이너 씨는 휴일을 보통 담당인 사토노 다이아몬드와 보낸(다고 들었)다. 누군가와 함께 보내지 않는다면, 상대에게 맞추지 않는다면 무엇을 하겠는지. 본연의 당신은 무엇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하는 것이다. 다이아 씨의 입이 수줍은 듯 오물거려 조용한 소리를 냈다.

“레코드를 보러 다니거나 독서를 해요. 레이스 서적도 있고, 수학이나 외국어 책도 있어요. 조용히 차를 마시거나, 미술관에서 그림을 감상한다거나, 뮤지컬이나 콘서트 같은 공연을 보는 것도 좋아해요. 새로운 것들은 거의 다 좋아해요. 해본 적 없는 것들, 먹어본 적 없는 음식들, 본 적 없는 구경거리나 풍경들......”

“게임은요?”

“좋아해요. 그야 저 사토노 게임즈 직원이니까. 아마 ~~ 씨 만큼은 아닐 거라 생각하지만요.”

“그렇구나.”

“조금 재미 없는 대답이었을까요?”

자신 없는 말투였다. 두루뭉술하게 말한 ‘새로운 것들’을 빼면 판에 박힌, 어쩌면 이런 자리에서 기피되는 듯한 취미 내용 뿐이다. 적어도 트레이너 씨가 좋아할 만한 건 아닌 거라 생각하는 것 같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얘기로만 들으면 그렇네요.”

“역시 그런가요.”

“그러니까 직접 해보러 가죠.”

“네?”

“저한테는 몇 가지 빼면 새로운 얘기들 뿐이라 실감이 잘 안가니까요. 바로 재미 없다고 단정짓는 건 불공평하잖아요. 설명도 들어보고, 직접 해보면 평가가 달라질 수 있을 것 같아요.”

솔직한 기쁨으로 그녀의 볼이 가볍게 붉어졌다. 그가 자신의 생활 속으로 뛰어들어 와준다. 그녀가 좋아하는 것을 함께 하려 한다. 그런 자각만으로도 입꼬리가 주체할 수 없이 올라간다. 은은하게 온 몸을 울리는 행복감이 입에 들어오는 프라페의 단맛을 흐릴 정도가 된다. 입을 가리고 소리 죽여 그녀는 한참을 웃었다.



=============



색다른 경험이었다. 트레이너는 어른이니까 모르는 게 거의 없을 줄 알았다. 무엇을 하더라도 자기 생각이 뚜렷하고, 금방 배워서 바로바로 눈앞의 일들을 처리할 줄 아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잘 모르겠는데. 일단은 알았어요.”

음료를 비우자마자 찾아간 미술관에서 트레이너가 가장 많이 한 말이었다. 작품 해설용 태블릿과 AR 음성, 그리고 사토 씨의 설명을 들을 때마다 그의 고개가 좌우로 갸웃거렸다. 그다지 납득할 수 없는 것만 같았다. 몇 번이나 설명을 곱씹이면서, 입술 앞에 손을 가져다대고 집중해서 그림을 노려보다가도 그는 포기한 듯 어깨를 으쓱였다.

“암만 봐도 이거 그냥 아무 거나 겹쳐서 그려둔 건데.”

“많은 것들 중에서 이 사물을 택한 이유가 있어요. 작가랑 당시 시대상을 반영해 생각해보면......”

“그럴듯한 설명인 건지. 그럴듯하게 나중에 붙여둔 건지......”

머리를 긁적이면서도 그는 군말없이 그녀를 따라다니며 이 그림 저 그림을 기웃거렸다. 전시 막바지에 이르러서는 들었던 설명을 짜깁기해 나름대로의 설명을 지어내기에 이를 정도로 성장했다. 생성형 AI가 문맥에 따라 얼버무린, 사실 관계를 떠나 답변하기 위해 한 답변이나 다름없었다. 깔깔 웃으면서도 사토 씨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솔직하게 칭찬해 주었다.

“그렇게 자기 의견을 갖고 솔직하게 표현하는 게 좋아요. 정답과 오답이 없는 거니까요.”

“정답 오답이 없으면, 왜 제 말에 그렇게 크게 웃었어요?”

“주류적인 해석은 있는 거니까요.”

“웃음소리만큼 주류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네요.”

그녀는 진심으로 자기 옆의 남자를 사랑스럽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좀 떨떠름해하고 있었다. 가볍게 부끄러워하는 듯한 어색한 미소였다. 달래주려는 듯 가볍게 팔짱을 껴 기대며 그녀가 웃었다.

“그만큼 유니크하단 거예요.”

그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거리감을 갑자기 좁혀온 게 맘에 들지 않았던 걸까 싶어 그녀는 기댔던 얼굴을 천천히 팔에서 떼어 냈다. 그가 그녀의 모자를 모자챙을 잡아 고쳐 씌워주며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확실한 건 이건 그럴듯하게 나중에 붙여준 설명이네요.”

그냥 넘어갔다. 붙어온 그녀를 마다하지 않았다. 기회였다. 놓치지 않겠다는 듯 미술관을 나와 조금 떨어진 박물관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그녀는 그의 어깨에 기대 있었다.


박물관에서 전시를 보고 난 다음에는 근처 유리공방에서 함께 무언가 만들기로 했다. 그가 어째선지 자꾸 빨간색 무드등을 만드려고 해서 그녀가 질색을 했다. 옥신각신한 끝에 결과적으로는 귀여운 후링을 하나씩 만들어 교환하게 되었다. 작은 해파리같은 투명한 후링에 트레이너는 별을 몇 개 그려 그녀에게 내밀었고, 그녀는 청량한 바다를 새겨 내밀었다.

“여름에 걸면 좋겠네요.”

“잊어버리지 말고 꼭 그때 장식하세요.”

손재주가 그렇게까지 좋진 않아 여러 도움이 필요했지만 그래도 그가 만들어준 하나 뿐인 특별한 후링이다. 그에게 보이지 않게 배시시 웃으며 조심스럽게 종이 포장지에 넣으려는데, 아래 탄자쿠에 적힌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Vers la destinee, d'un pas triomphant>

“누가 탄자쿠에 불어를 적나요?”

쿡쿡 웃으며 그의 허리를 팔꿈치로 살짝 눌렀다. ‘운명을 향해, 승리의 발걸음으로’ 라는 거창한 문구지만 사실은 L’arc de gloire의 가사다.

“보통은 소원을 적잖아요.”

“......이게 소원인가요?”

“소원이랄까. 비원이죠.”

강조하듯 건넨 그의 말을 들으며, 그녀는 구겨지지 않게 탄자쿠부터 조심스럽게 포장지에 넣었다. 새삼 마음이 전해지자 투명한 후링에서 빛나고 있는 별들이 달리 보인다.

“Etoile(별)......이것도 그거네요. 그렇죠?”

“우연의 일치라니까.”

사실상 인정하는 듯한 발언으로 회피하면서 트레이너는 자신이 받은 후링을 몇 번 흔들어 보았다. 청량한 유리종 소리와 함께 탄자쿠의 문구가 흔들렸다.

<낙낙히 입고 그 사람과 만나는 반딧불의 밤>

“탄자쿠라면 역시 하이쿠를 적어야죠.”

“아무리 봐도 옷을 낙낙하게 입는 타입은 아닌 것 같은데요.”

“감상이 그것 뿐인가요?”

“시는 잘 몰라서요. 이것도 설명해 주세요.”

다이아 씨는 입을 다물고 시선을 피했다. 와카와 하이쿠에서 반딧불은 여름을 나타내는 키고(계절어)로 쓰인다. 반딧불의 불빛이 주로 나타내는 것은 ‘구애.’ 조금 느슨하게 옷을 입고 만날 만큼, 믿고 마음을 맡긴 사람을 만난다는 내용이다. 돌고 돌아 완곡하게 숨으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서도, 다 숨기지 못하고 조금은 드러내고 싶은 마음이 정갈한 붓글씨로 적혀 있었다. 괜히 얼굴이 화끈거려 그녀는 다시 설명을 요구하는 그의 얼굴을 홱 밀어버렸다.

“비밀이예요.”


간단히 저녁을 먹고 슬슬 헤어지려고 하는데 비가 떨어졌다. 예보도 없었건만 제법 내린다.

“가서 우산 좀 사가지고 올게요.”

“제가 다녀올게요.”

“아뇨. 제가.”

“저, 모자 쓰고 있으니까.”

그가 고개를 젓더니 나가려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가게 문 앞에 세워둔다. 모자 챙을 잡아 제대로 씌워주면서 빙긋 웃었다.

“너 비 별로 안 좋아하잖아.”

“......음.”

머뭇머뭇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 그가 쌩 하고 빗속으로 달려나갔다. 양 손에 비닐 우산을 하나씩 들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옷에 올라 앉은 물방울을 가볍게 털고 그가 우산 하나를 내밀었다. 사토 씨는 뭐 어쩌라는 거냐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보고 우산을 들라고요?”

“그럼 누가 들어요?”

“키가 더 큰 쪽이 드는 게 맞지 않을까요?”

“아니, 우산 두 개니까 각자 들자는 건데......”

“저기요!”

그녀가 길 가던 사람을 대뜸 큰 소리로 불렀다. 멈춰선 그에게 우산 하나를 넘겨주고 그녀가 볼 옆에 손을 가져다댔다.

“뭐라고 했어요?”

그가 그녀의 모자 쪽에 얼굴을 가까이 해 말했다.

“같이 쓰고 가요.”

비만 싫은 것이 아니다. 인파 속을 걷는 것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비가 와서 그런가, 저녁 시간이라 그런가 거리에 사람이 좀 많았다.

“어깨 젖잖아요. 좀 ~~ 씨 쪽으로 기울여요.”

“내 어깨는 이미 젖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멀쩡하게 갑시다.”

“둘 다 젖는 게 낫죠.”

“......뭐, 보통 때 같으면 그렇게 말했을 겁니다.”

그가 몇 발치 뒤에 보이는 아파트 건물을 바라보았다.

“소유보다는 공유라고 생각하니까요.”

“지금은 보통 때가 아니라고 하시는 건가요?”

“그런 건 아니지만.”

헤어질 시간이 가까워오고 있었다. 솔직해질 수 있는 시간이 그리 많지 않다는 뜻이다.

“오늘은 많은 것을 공유할 수 있었으니까.”

“저랑 놀아서 즐거우셨나요?”

“......최고로.”

“다행이예요.”

“다음에 또 만날 수 있다면, 미술이랑 하이쿠 책이라도 추천해 주세요.”

쿡쿡 웃는 그에게 그녀가 조금 더 기대 왔다. 그의 옷자락을 꾹 잡아 걸음을 멈춰 세웠다. 짧은 소리와 함께 돌아서는 그의 볼을 향해, 그녀가 작게 발돋움했다.

“저는 여기까지. 이만 가볼게요.”

그가 손을 흔들기도 전에 그녀는 우산에서 빠져나와 달려 사라져갔다. 볼 한구석에 그녀가 남겼던 자국이 가을 비바람에 붉게 영글고 있었다.



================



트레이너가 집 문을 열고 들어와보니 방에 불이 환했다. 이제 아주 자기 집인 것처럼 잠옷을 입고 소파에 드러누워 있던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다가왔다.

“오, 트레이너 씨! 더 늦게까지 놀 줄 알았는데요? 일찍 왔네요?”

“뭐, 그렇게 됐어.”

“무쌩겨서 차였다던가. 푸히히.”

“내가 찼다. 이 녀석아.”

부쩍 친한 척을 하며 쿡쿡 찌르는 걸 꿀밤을 때려 진정시키고 그는 재킷을 벗어두었다. 목욕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그가 이 시간에 올 줄 알았다는 듯이.

“그래서그래서, 어땠냐요? 애프터같은 거 하실 거냐요?”

“어쩌려나.”

“엑.”

“당분간은 쉴 테니까 보려면 못 볼 건 없는데 말야. 아무래도 담당이 더 중요하니까.”

“에헴. 좋은 마음가짐이네요!”

조금 여유롭게 몸을 담그면서 그가 문 바깥을 향해 말했다.

“많은 걸 배웠어. 새롭더라고.”

“그렇게 전해주면 될까요?”

“앞으로도 종종 가르쳐 달라고 해야겠다. 혼자 끙끙 앓지 않게.”

문 밖에서는 별다른 대답이 없었다.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배려해주는 모양이었다.


“트레이너 씨이.”

“왜. 뭐야. 왜.”

불을 끄고 자려고 트레이너가 소파에 누웠을 때였다. 천천히 다가오는 그림자가 긴 소리로 불렀다. 스마트폰 플래시를 반짝이는 반딧불이가 느슨한 파자마를 입고 오고 있었다.

“오늘은 침대에서 같이 자요.”

“왜?”

“......그러고 싶으니까.”

플래시가 꺼졌다. 어둠 속에서 일렁이는 다이아의 실루엣, 안 된다고 하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았다. 평소라면 너는 거기 있어라 나는 잔다고 했을 것을,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래.”


“엣헤헤.”

처음 있는 일이다. 한 걸음 어른의 계단을 올랐다고도 할 것이다. 같은 이불 속에 들어가 누워 있었다. 긴장되기도 하지만 기쁜 일이기도 했다. 심장이 조금 기분 좋게 달렸다. 옆에서 나는 트레이너 씨의 냄새와 온도가 마음을 진정시켰다.

“다이아야. 자냐?”

“왜요?”

“이리 더 와 봐.”

오늘따라 행성이 일렬로 늘어섰는지, 다른 무언가가 있었는지 그가 조금 더 가까이 그녀를 끌어들였다. 조금 더울 정도로 바짝 안기자 그녀가 헤헤 웃었다.

“오늘따라 굉장히 어리광쟁이시네요.”

어깨에 그의 얼굴이 닿는 걸 느끼고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그가 잠시 동작을 멈췄다.

“......그러네.”

“비 맞아서 추워요? 다이아가 꼭 안아드릴게요.”

“고마워.”

훈훈하고 따뜻한 밤이었다. 어찌 보면 그렇기만 한 밤이었다. 훈훈하고 따뜻하고, 그 외 아무 일도 없었던 그런 밤, 감전된 것처럼 다이아가 빈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 그 사실이 갑자기 크게 느껴졌다. 같이 자자고 권했던 그녀의 말, 한참을 고민하는 듯 하다 받아들인 그, 그리고 그의 행동들이 하나하나 빠르게 재생됐다. 그제서야 그녀의 머리가 어른의 계단을 완전히 올랐다.


“트레이너 씨! 트레이너 씨이!”

“......아침부터 기운 넘치는구나.”

“어제! 트레이너 씨! 어제! 무슨 의미예요?”

“뭐가?”

“아니! 같이 잔다고 한 거요!”

“무슨 말을 하는 지 모르겠네.”

그는 소파에 앉아 태평하게 신문을 넘겼다. 다이아는 몇 번이나 발을 동동 굴러댔다.

“아니! 같이 잔다고 한 거요!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들었어요?”

“그래. 그게 뭐. 같이 잤잖아.”

“아니! 아니이! 트레이너 씨, 알고 계셨던 거죠?”

몇 번이나 확인하고 물어봐도 트레이너는 이해가 안간다는 듯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렇게 하이쿠를 쓰고 비유와 상징을 설명했는데, 그가 기껏 비유로 받아들여줬는데, 정작 그녀가 그러지 못했다는 것에 분통을 터트렸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버스는 떠났다. 언제 다시 올 지 모른다.

“비겁해! 비열해요! 비열하고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이제와서 피하지 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시끄러워!”

달려들어 소매를 휘둘러대는 그녀를 제지하면서도, 그는 버럭 소리칠 뿐 찔리는 구석이 있어 그 이상 폭력을 휘두르진 않는다. 어제는 소개팅 놀이 때문에 잠시 뭐가 씌였나보다고 합리화하면서도, 언제까지나 그가 그녀 앞에서 비열한 어른일 수 있을지 조금 고민이 되었다.

서로를 알아가고 배워가며 아이는 빠르게 자라고, 사토노 다이아몬드는 어느새 고등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을이었다.












=======






아게마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