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하셨는지요, 트레이너 씨.”

휴일 대낮의 일이었다. 노크하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오늘도 그의 담당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서 있었다. 오늘따라 안 쓰던 아가씨 말투까지 쓰면서 도도한 척을 하고 있었다.

“후훗. 트레이너 씨는 오늘도 박색하시네요.”

“어려운 말로 사람 상처줄 거면 들어오지 마.”

“쉬운 말로 하면 들어가도 되는지요?”

“말로 해서는 안되겠네.”

트레이너는 혀를 짧게 차고 문을 홱 닫으려 했다. 언제나처럼 메리 제인을 신은 발이 문간에 끼어들어 진로를 방해했다. 능숙하게 문틈을 비집고 사토노 다이아몬드가 트레이너의 집에 입성했다. 여기까지야 뭐 늘상 있는 일이다. 오히려 그녀가 휴일 전날인데 그의 집에서 잠을 자지 않았던 게 더 이상할 정도다.

“트레이너 씨.”

“왜 그러니?”

“어떠신지요? 저 부쩍 어른스러워졌냐요?”

“아닌 것 같은데.”

“오호호. 그럴 리가 없다요.”

거실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는 동안 말투가 점점 회귀해 원래의 반존대가 된다. 그녀가 소파에 풀썩 앉아 메지로 맥퀸처럼 옆머리를 가볍게 넘기며 훗, 하고 웃었다.

“저, 사토노 다이아몬드. 오늘로 17세 생일을 맞이하였거든요.”

“엑. 그랬냐.”

그녀가 기대한 반응이 아니다. 오히려 최악이다. 아무래도 트레이너는 그녀의 생일을 까먹은 모양이다. 전속계약을 맺고 3번째 함께 맞이하는 생일인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지? 굳은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는 그를 다이아는 망연자실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파들파들 떨리는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기력을 쥐어짜내 가벼운 헛기침을 했다.

“괜찮습니다. 저 사토노 다이아몬드. 이제 어른인 걸요. 트레이너 씨가 굳이 생일을 챙겨주지 않으셔도 괜찮답니다.”

냉정함마저 느껴지는 도도한 말투와는 정 반대로 그녀의 귀는 머리에 붙듯이 누워 축 늘어져 있었다. 눈에 띄게 시무룩해진 얼굴이었다. 화를 내지 않는다는 것이 어른이 되었다는 증거일까. 트레이너가 몇 번이나 사과하는 것을 괜찮다고, 아무렇지도 않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그와 시선이 떨어지면 다이아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다이아는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그에게 필요할 거라고 하이쿠와 미술사 서적을 몇 권 내밀고, 자기 몫의 소설책을 챙겼다. 그가 생일을 까먹었다는 사실이 엄청난 충격이었는지 책을 어느 쪽으로 들어야 할 지 잠시 헷갈려했다.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읽기까지 했다. 침울한 얼굴로 조용히 소설을 읽어내리면서 그녀는 옆에 앉아있던 트레이너에게 몇 번이나 슬픈 강아지같은 시선을 보내곤 했다.

소설이 그녀의 아픈 마음을 서서히 위로해줄 무렵, 갑자기 방의 전등이 전부 꺼졌다. 대낮인데도 커튼을 쳐둔 거실이 어두워졌다.

“오늘은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냐요! 씨이!”

어른이라는 사실도 까먹고 소파를 발꿈치로 내리찍으며 짜증을 내는데, 허공에서 촥, 하고 성냥불이 켜지는 소리가 났다. 약간 매캐한 인화의 냄새와 함께 공중에 피어나는 8개의 촛불이 그녀의 시선을 끌었다. 큰 초 하나를 중심으로 둥글게 늘어선 7개의 작은 초가 꽂힌 케이크를 들고 트레이너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트레이너 씨이?”

“암만 그래도 내가 네 생일을 까먹겠냐. 의심조차 안한다니 내가 상처받을 지경이다.”

“우와, 우와, 우와, 우와, 우와, 우와아!”

조심스럽게 들고 온 케이크를 테이블에 올려두자마자 텐션이 확 올라간 다이아가 달려들었다. 곧바로 초를 불어버리려는 것을 막고 앉아, 그가 작게 박수를 치면서 생일 축하 노래를 불렀다.

“생일 축하 합니다~. 생일 축하 합니다~.”

“훌쩍......”

“흐~흐흠 다이아의~ 생일 축하 합니다~!”

감동이 순식간에 증발해 사라지고, 소금기 가득한 눈으로 다이아는 트레이너를 노려보았다. 원래라면 ‘사랑하는’이 들어가야 할 부분을 허밍으로 대충 때워버린 것이다.

“이 무쌩긴 트레이너 씨가! 아주 혼나는 수가 있다요!”

벌써 그녀의 소매가 펄럭펄럭 날려 그를 때리고 있었다. 그가 팔로 얼굴과 주요 장기를 보호하면서 외쳤다.

“초부터 불어! 초부터! 또 케이크 쳐서 쓰러트리지 말고!”

“빨리 다시 제대로 노래 불러줘요!”

“무쌩긴 트레이너한테 사랑하는 어쩌고 들으면 너도 소름끼칠 거 아니냐?”

“무쌩긴 거랑 아무 상관 없거든요! 무쌩긴 트레이너 씨야!”

흥이 완전히 깨져버렸는지 다이아는 볼을 부풀려 대충 초를 불어버렸다. 우마무스메의 압도적인 폐활량에서 나온 입바람이 케이크의 생크림 장식까지 흔들 지경이었다.



“어쨌거나 생일 정말로 축하해. 이렇게 또 축하할 수 있게 돼서 기뻐.”

“기쁘면 노래를 제대로 불러줬어야지......”

“어지간히 뒤끝 심하네.”

“그치만 안심했어요. 헤헤. 트레이너 씨가 정말 잊어버렸으면 너무 슬펐을 테니까요.”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넓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케이크와 그를 바라보았다. 잠시 여운을 맛보는지 그녀는 그 자리에 멈춰 앉아 웃고만 있었다. 그대로 돌이 되었나 싶을 무렵 그녀의 양손이 정중하게 올라갔다.

“그래서, 선물은요?”

“선물도 준비했지. 자.”

다이아의 양손에 팔랑, 하고 얇은 종이쪼가리가 하나 얹혔다. 티켓처럼 생긴 물건이었다.

“엥. 돈? 상품권? 그런 건 별로 안 기쁜......”

트레이너가 불을 켜 주자, ‘뭐든지 소원 하나’라고 적힌 수제 티켓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그를 올려다보며 다이아가 안쓰럽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트레이너 씨. 아무리 저랑 어울려 놀고 싶어도 이런 애같은 선물을 준비하면 안 되죠.”

“물질적인 선물은 아직 못 골라서 그래. 나중에 줄 테니까, 일단은 이걸로 만족해주면 고맙겠어.  밥을 차려줄 수도 있고, 어깨 안마를 해줄 수도 있다고? 나 스포츠 마사지 자격증도 있다?”

“제가 10년 전에 아빠한테 선물하던 걸 받으니까 기분이 묘하네요......”

복잡한 표정으로 티켓을 내려다보며 미소짓던 그녀가 갑자기 불에 덴 것처럼 놀랐다. 트레이너의 얼굴을 홱 올려다보며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뾰......”

뾰로 시작하는 단어가 몇 개 되지 않는데다가, 그다지 길하게 들리지 않아 트레이너는 약간 움찔했다. 하지만 뭐, 애초에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정말로 소원 씩이나 빌 만큼 다이아가 급하다면, 어디까지나 담당으로서 검토해볼 정도는 된다.

‘와, 나 방금 엄청 추악한 변명을 생각해낸 것 같은데.’

“근데 이걸 소원 씩이나 빌어서 할 일인가. 역시 됐어요.”

쯧, 가볍게 혀를 차고 다이아는 티켓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여전히 그녀를 내려다보는 트레이너와 눈을 마주치며 배시시 웃었다.

“이런 게 소원이면 없어보이잖아요. 안심하셔도 돼요. 게다가.”

얼굴을 붉혀 시선을 피하면서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어차피 나중에 하게 될 거니까 상관 없어요. 지금은.”

“대체 무슨 자신감이냐.”

“자신감이라거나 하는 건 아니예요.”

부끄러움에 붉어지는 볼을 멋쩍게 긁다가, 다이아는 시선을 다시 그에게로 돌렸다. 정말 중요할 때면, 정말 이때다 싶을 때면 강인해지는 그녀의 마음. 가장 단단한 그녀의 의지가 눈 속에서 빛나고 있었다.

“트레이너 씨 말고는, 생각할 수 없으니까요.”

마주보는 둘의 표정이 풀어진다. 서로의 눈 안에서 녹아내렸다. 모든 독점력이 음습하고 축축한 것은 아니다. 독점력도, 욕구도, 날 것 그대로인 게 좋을 때도 있지만 멋진 옷을 입히고 싶을 때가 있지 않은가.

“아하하, 라고 할 뻔~. 트레이너 씨 설렜어요?”

역시 부끄럽긴 한지 다이아는 책으로 얼굴을 가려 소파 위로 스멀스멀 기어올라갔다. 그의 눈치를 한 번 살폈다. 그가 정말 설렜는지, 혹은 실망했는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몹시 궁금한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소설의 페이지로 자신의 표정을 가리려고 애쓰는 갭이 귀엽다.

“글을 읽으면서 배웠거든요.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서, 좋아하는 마음을 품었다고 해서, 그게 무조건 같은 호감으로 돌아오는 것은 아니라고요. 진심이 늘 통하는 것도 아니라고요.”

책 위로 그녀의 눈이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치만 트레이너 씨는 진심에 항상 진심으로 돌려주고 계시잖아요. 어떤 종류의 감정이든 말예요. 저는 그걸 알고 있으니까.”

천천히 다가와 그녀의 옆에 앉는 트레이너에게, 역시 지금 순간은 맨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자기 기분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그의 기분도 움직이고 싶다. 다이아가 책을 무릎 위로 올려두고 환하게 웃었다.

“그것만으로도 저는 지금 너무 행복해요.”

순수한 기쁨으로 빛나는 웃음이었다. 그녀는 원석이면서도 어쩜 이렇게 빛이 나는지. 트레이너의 몸이 조금 더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감정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마음은 서로에게 이끌린다. 반대된다면 자석처럼 이끌린다. 같다면 섞이는 것처럼 이끌린다. 공유된 기분에 따라 그가 그녀의 바람대로 움직였다. 그는 그녀의 등 뒤로 팔을 감아 끌어당겼다. 말없이 품에 안아주었다. 책을 살며시 내려두고 그의 다리 위에 조심스럽게 올라와 앉아서 그녀가 속삭였다.

“아직은 당신의 어린아이로 충분한 것 같아요.”

‘그치만 언젠가, 절 여자로 만들어 주세요.’ 하는 뒷내용은 마음 속에 고이 담아두었다. 언젠가 이것도 전해질 날이 있을 것이다.

“어른이 됐다고 방금 전까지 엄청나게 까불어댔지만 말이지.”

“어지간히 뒤끝 심하네요.”

“아직은 어린아이인가.”

트레이너의 손가락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내렸다. 이번엔 조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그가 속삭일 차례였다.

“나도 아직은 네 담당 트레이너로 충분하지만. 언젠가는 너와 사토노할 날을 기대하고 있을게.”

“......사토노?!”

단어 선정에 놀라 쿡쿡 웃으면서도 다이아는 그의 얼굴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조금만 몸을 움직이면 닿을 거리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가슴이 심하게 콩닥거렸다. 품 안에 있으면 들킬 것 같다. 그러니까 기세를 올려 가리려 한다.

“트레이너 씨는 무쌩겨서 도저히 키스는 무리지만, 볼에 뽀뽀 정도는 해 드릴 수 있는데요?”

“어, 사양할게.”

“어째서?”

거절의 멘트가 나올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그녀는 몹시 당황했다. 당황한 마음이 두뇌에서 필터를 치워버렸다.

“혹시 트레이너 씨는 남자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사람에겐 곧바로 마음 속에서 ‘그럴 리가 없잖냐’고 반박하게 되는 바보같은 발언을 할 때가 있다. 지금이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피차일반이다. 그나 그녀나 서로 분위기를 차갑게 만들면서, 마치 가까워지기 싫어하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왜 매번 이런 식일까 가벼운 자괴감이 들 무렵,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 왔다. 언젠가 꿈 속에서 그가 좁혀주길 바랐던 그 거리가 좁아지고 있었다.

그녀의 볼 위에 조심스럽게 내려앉는 그의 입술, 가볍게 눌리는 느낌에 다이아가 몸을 떨었다. 허그나 손잡기나, 다른 무언가랑 비슷하게 몸이 맞닿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찌릿찌릿한 걸까? 볼이 얼얼한 듯한 기분에 그녀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열렸다.

“한 번만 더요.”

장난스럽게 목 안에서 웃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한 번, 조심조심, 볼에 와 닿았다. 맛보는 것처럼 여닫혀 붓질하는 느낌에 그녀의 꼬리가 곤두섰다. 말로 표현하지 않지만 요구하듯이 볼이 그의 얼굴을 다시 향했다. 다시 한 번, 다시 한 번, 호화스러운 생일선물이 그녀의 피부를 간질였다. 그 아래 흐르는 피를 조금 덥게 만들었다.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아서 머릿속이 조금 뿌옇게 되었다.

“역시 지금 써야겠어......”

“어허. 낙장불입이야.”

스멀스멀 주머니 안 티켓으로 들어가려는 다이아의 손을 그의 손이 막았다. 움직이지 못하게 꽉 안아 막으면서, 꽉 잡혀버렸다. 생일이었다. 오히려 선물을 주고 싶어지는 생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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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Q 1. 섹스는 언제 하나요?

안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