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트레센 학원, 지나다니는 학생들을 굽어살피는 삼여신상과 분수대가 있는 정 가운데에 병풍과 돗자리가 정갈하게 깔려 있다. 그리고 그 위에 무릎을 꿇고 정좌한 한 명의 우마무스메, 굳은 표정으로 눈을 감고,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다.

“......”

그녀의 앞에는 조그마한 단상이 있고, 그 위에 햇살을 받아 자개 장식이 빛나는 25cm 정도의 단도가 놓여있었다. 무릎을 꿇고 앉은 그 우마무스메가 눈이 부신지 애써 그 칼의 존재를 외면하려 들지만, 노골적으로 고개를 돌릴 수는 없다.

“......”

돗자리 옆을 둘러싸고 두 우마무스메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녹색 체크무늬 스커트 위 하얀 블라우스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왼편의 우마무스메는 핸드폰을 꺼내 돗자리와 병풍, 나앉은 우마무스메까지를 촬영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흐~흥! 새로운 문화를 체험하는 건 언제나 즐겁네!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

“......Well.”

그녀의 옆에 한 주먹을 말아쥐고, 15도 아래로 고개를 떨군 채 눈을 감고 서 있는 검은 피부의 우마무스메도 있다. 강건한 인상이지만 어쩐지 떨떠름한 기색을 숨길 수가 없다.

“어, 파인이랑 크리스에스다. 안녕~.”

두 대조되는 우마무스메를 향해 다가오는 펑퍼짐한 그림자가 있었다. 하얀색과 파란색 줄무늬가 돋보이는 멘코를 쓴 회색 머리카락의 우마무스메다. 인사하는 소리에 눈을 뜬 검은 우마무스메가 고개를 끄덕였다.

“ㅡGood afternoon, 히시 미라클.”

“응응, 굿모닝. 근데 무슨 일이야?”

“ㅡNothing. 그저......노 리즌이 할복을 준비하고 있을 뿐이다.”



돗자리 위에 정좌한 우마무스메 노 리즌, 일본의 역사를 사랑하고 특히 전국시대를 사랑하는 그런 말딸. 전국시대를 사랑한다기보단, 가끔 아직도 전국시대에 살고 있는 그런 우마무스메다. 군웅할거의 레이스계를 제패해 천하인이 되겠다고 자처하며 승부복 모티브도 랍스터같은 갑옷으로 정할 정도다. 그런 그녀가 할복을 하겠다고 하는게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발단은 간단하고 사소하다.

오늘, 친구 파인 모션과 라멘을 먹으러 가기로 한 약속날짜가 다른 날인줄 알고 담당 트레이너 씨와 외출하기로 덜컥 잡아버린 것이다. 그냥 사정을 설명하고 미안하다고 하면 끝났을 문제, 나중에 조율하면 원만하게 끝날 문제였지만 입이 방정이었다. 노 리즌 그녀의 단점이라고 할까, 실수를 하면 가끔 크게 해버린다는 점이다.

“정말 미안하게 되었소! 소인 노 리즌, 할복하겠소이다!”

그만큼 미안하다는 뜻이었지만, 외국인에게 관용어구를 사용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파인 모션은 사과를 흔쾌히 받아들였다.

“정말? 그럴 거야?”

“......하?”

“응응! 그렇게 하자!”

그 시점까지만 해도 아직 오해를 바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신나서 떠들고 다니는 파인 모션을 저지하고 제대로 된 일본 문화를 가르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황공하오.”

하지만 노 리즌은 그러지 않았다. 왜냐면 그녀는 외국인이 아니니까. 외국인과 달리 본심을 마음 깊이 숨기고, 다테마에를 내세울 줄 아는 민족이었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천하인을 자처하면서 내뱉은 말을 지키지 않는다면 면이 서지 않는다. 체면, 그것은 목숨과 바꿔서라도 지켜야할 명예인 것이다.

당연히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다. 겨우 이딴 이유로 죽는 것도 체면이 깎이는 일이다. 하지만 자신이 그렇게 말하는 것도 체면이 깎인다. 그러니 기다린다. 누군가가 사정을 살펴주고, 그녀를 만류하는 그 순간을, 그녀의 본심을 살펴줄 누군가를.

“......치잇.”

일단 그 누군가가 부회장 나리타 브라이언은 아니었다. 할복을 성!대하게 거행할 수 있도록 시설사용허가 양식을 작성해 파인 모션과 노 리즌이 학생회실을 방문했을 때, 재수없게 또 에어 그루브는 부재중이었다. 소파에 누워서 나뭇가지를 씹던 그녀는 귀찮다는 듯이 돌아누워버렸다.

“......할복? 이건 무슨 만우절 장난이지? 아직 4월이 되지 않았건만.”

회장의 옥좌 앞에 신청서가 배달되었을 때 나온 첫 반응이었다. 우마무스메들의 황제이자 중앙 트레센 학원의 학생회장인 심볼리 루돌프는 아일랜드의 왕녀가 내민 서류를 찬찬히 검토했다. 사유 빼고는 모든 것이 문제가 없는 신청서. 당연히 기각하는 것이 옳지만, 피곤에 찌든 그녀의 눈에는 총기가 사라져있었다.

“뭐, 본인 희망이라면 무턱대고 막는 것도 언어도단. 허가하도록 하지.”

“잠시만, 잠시만, 심볼리 루돌프. 이성을 찾고 진정해라.”

도장을 든 루돌프의 손을 가로막은 것은, 그녀의 책상 위에 놓여있는 파카푸치 인형 ‘루나쨩’이었다. 학생회장은 인형 쪽으로 시선을 돌리더니 그녀를 양 손으로 들어 마주보았다.

“계속하도록.”

“계속이라니? 학생이 자살을 하겠다는데 뭘 더 말한단 말인가? 당연히 말리는 것이 인지상정 아닌지?”

“하지만 루나쨩, 생각해보면 이것 역시 모든 우마무스메의 행복을 위한 길 아니겠는가?”

“아니, 학생이 죽는다니까?”

“생각해보라. 죽는다면 물론 행복할 수 없지만, 그렇다고 크게 불행할 것도 없다.”

“아니, 학생이 죽는다고.”

“게다가 모든 우마무스메의 행복을 실현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행복한 우마무스메의 수를 늘리는 법과, 모수를 줄이는 방법이 있지. 이것도 모든 우마무스메의 행복에 다가가는 길이란 것이다.”

시큰둥한 눈으로 무서운 말을 입에 올리는 심볼리 루돌프의 안색을 살피며 노 리즌은 눈을 질끈 감았다. 글렀다. 이 자도 아니다. 서로 말로 하지 않아도 체면을 살펴주던 아름다운 야마토 정신은 땅에 떨어졌단 말인가? 어쩌다 와의 나라가 이렇게 전락했단 말인가?

“무, 무념.”

“응? 뭐라고 했어?”

“아니, 혼잣말이오.”

“흐~흥! 기대된다! 너도 기대되는 거지, 노 리즌?”

‘기대되겠냐고......’

빨리 도장을 찍어주시라고 싱글벙글대는 아일랜드 동기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노 리즌은 불끈 쥔 주먹을 떨었다.



“에에~, 그럴 수가......”

그렇게 시원한 허가를 받아 할복쇼가 거행될 예정인 분수대 앞으로 돌아가보면, 심볼리 크리스에스에게 전말을 전해들은 히시 미라클의 안색이 창백해지고 있었다. 정말 놀란 건지는 의심스러운 애매한 목소리 톤이지만, 아무튼 경악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장렬하게 눈을 감고 대화에 귀를 기울이던 노 리즌의 마음에 희망이 떠올랐다. 저 평범한 우마무스메라면 이 상황의 이상함을 눈치채줄 수도 있다고.

“.......”

“.......”

“.......?”

그런 그녀의 희망과는 다르게 침묵만이 흐르고 있다. 아까보다도 더 어색하고 무거운 침묵이다. 살짝 실눈을 떠 바라보니 히시 미라클은 크리스에스 옆에 가만히 서 있다. 서 있기만 했다.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손을 배 앞에 모으고 그녀 쪽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게 끝?’

“그나저나 저녁 뭐 먹지.”

“ㅡWell. 무엇이든 과식하는 것은......좋지 않다.”

심지어 화제가 넘어가버렸다. 저녁식사보다 아래에 놓인 자신의 취급에 차마 분개하지도 못하고 슬퍼하지도 못하고, 노 리즌은 비장한 표정으로 눈을 다시 질끈 감아버렸다. 비록 서양의 삿된 말이기는 하지만, 사람 사는 곳이니만큼 통용되는 진리의 말이 떠올랐다. 궁극적인 비극은 악한 사람들의 거친 아우성이 아니라, 선한 사람들의 소름끼치는 침묵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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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조금 더 흘렀다. 언제쯤 할복을 시작하려나 두근대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파인 모션을 제외하면 나머지는 그냥저냥, 의무로 참석해야 하는 행사에 온 것처럼 시큰둥했다. 아예 자기들끼리 이야기하고 있었다.

“파괴의 뒤에 비로소 재생이 있다......불사조는 그것을 위해 불 속에 스스로 뛰어들지.”

셰이커를 흔들며 타니노 김렛은 이렇게 말했다.

‘소인은 불사조가 아니오만......’

“언뜻 자기파멸적으로 보이는 이 행위 뒤에 숨은 긍지는 독수리와도 같지.”

‘대놓고 자기파멸적이오. 게다가 독수리도 아니오.’

“자신의 미학을 관철하려는 자를 끝까지 지켜볼 수 있다니 얼마나 축복된 일인가. 그대들도 그렇게 생각하지?”

틀렸다. 말 이상하게 하는 애꾸 녀석도 자신을 감싸줄 생각이 없다. 서양 물이 든 녀석답게 오히려 자신의 죽음을 에둘러 권유하고 있지 않는가.

‘유럽 교토인같은 새끼가......’

“인간의 위대함은 그가 목적이 아니라 다리라는 데에 있다! 인간에게서 사랑받을 만한 점은 그가 건너가는 존재이자 내려가는 존재라는 데에 있다. 나는 사랑하노라. 하강하는 자로서가 아니라면 달리 살 줄 모르는 사람들을!”

‘아아, 삼여신이여. 아직 주무시고 계십니까.’

신나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인용하고 있는 김렛에게 그녀의 속마음이 들렸다면 이렇게 대답했을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오오~, 잘 모르겠지만 멋있는 말이네.”

“ㅡI agree.”

‘틀렸어.’

“저기저기, 노 리즌! 언제부터 시작하면 될까?”

슬슬 기다리기 지루한지 보채기 시작한 파인 모션을 외면하면서, 눈을 감고 고개를 떨군 노 리즌은 목소리를 떨었다.

“조금 더......절명시를 생각하게 해 주오.”


“와, 자기희생은 언제나 영웅의 덕목이기도 했죠. 게다가 저 완전무장한 모습, 죽는 순간에도 전투복을 입고 있었다던 영웅 롭 로이와도 같네요.”

“풍기의 흐트러짐이 보이지 않으니 완전 OK인쓰. 교칙에 어긋나지 않는 한 누구라도 자유롭게 지낼 권리가 있는쓰.”

“네오 유니버스는 관측해. SPRT가 차원을 넘어가는 순간을.”

“효에. 고귀해욧.”

노 리즌이 절명시를 생각하는 긴 시간동안 몇 명의 우마무스메가 여신상 근처에 모여들었다. 크리스에스에게 사정을 청취하고 각자의 의견을 밝히는 동안에도, 아무도 할복 자체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는 점에 그녀의 마음이 상처를 입는다. 세상에 정말로 자신이 살기를 바라는 사람이 이렇게나 없단 말인가?

“그, 그치만 고귀한 우마무스메쨩이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을 그냥 지켜볼 수는......!”

고뇌와 번민에 찬 표정으로 아그네스 디지털이 머리를 감싸쥐고 괴로워했다.

“하지만 오타쿠로서 감히 개입할 수는......”

“......룸메이트 라모누는, 누구에게도 간섭하지 않는다.”

크리스에스는  그 고통에 공감한다는 듯 다시 주먹을 쥐고 눈을 감았다. 생각하는 것은 그녀의 룸메이트, 지금도 ‘어머, 열심이네.’ 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다.

“ㅡ간섭받지 않는다는 건, 편안하다.”

“여, 역시 그렇겠죠?”

노 리즌은 그냥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 희망도 갖지 않기로 했다. 자신이 불편해 죽겠다는 것도 밝히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알아주지 않는다. 애초에 아무도 자기 마음을 몰라준 것이다.

“살......”

이러나 저러나 그녀는 야마토 혼과 생명을 받아 태어난 일본의 건아. 주어진 상황을 받아들이고 사쿠라처럼 지기로 했다. 마침내 그녀의 입에서 말이 튀어나오자 파인 모션이 핸드폰 카메라 앱을 기동시키며 콧노래를 불렀다.

“살아가는 길 려로와도 같으니 줘야할 마음......”

고개를 푹 숙이고 낮은 소리로 읊은 노 리즌의 절명시. 두음법칙을 무시한, 5-7-5조의 하이쿠를 빙자한 삼행시였다. 아직 사쿠라가 지기는 커녕 피지도 못했는데 왜 자신이 죽어야 한단 말인가. 여전히 체면은 중요하지만 이렇게까지 친구들이 자신의 마음을 몰라준다면 힌트 레벨을 올리지 못할 것도 없다.

‘누군가, 제발 살펴다오......’

그러면서도 혹시 의혹이 제기될 것을 대비해 그저 우연에 지나지 않는다는 변명과,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가는 장면까지 시뮬레이트하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나 한참이 지나도록 반응이 없다. 파인 모션만이 설레는 얼굴로 그녀 앞에 놓인 단도를 힐끗거리고 있을 뿐이다.

“......무념.”

노 리즌은 떨리는 손으로 단도를 집어들었다. 칼집에서 뽑혀나온 서슬퍼런 날이 빛을 발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것을 참고 서서히 날을 자신으로 향해 들어올릴 무렵이었다.

“잠깐!”

허스키한 그 외침에 노 리즌의 손이 기다렸다는 듯 멈추고, 모두의 시선이 발언자에게 쏠린다. 안대를 써 가린 눈에 굳이 손을 또 올려 이중으로 가리면서, 타니노 김렛이 노 리즌을 노려보았다.

“잘 들었다. 너의 에피타프[절명시]......하지만 명명백백하다. 미처 스틱스에 담그지 못한 아킬레스의 발뒤꿈치[실수]가 있다는 것.”

군중의 절반은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고, 나머지 절반은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표정이었다. 심볼리 크리스에스가 그들을 대표해 말했다.

“ㅡGo on.”

타니노 김렛은 큿, 하고 짧게 웃고 덧붙였다.

“하이쿠에는 계절어가 있어야 한다. 수업 시간에 배웠잖나.”

“Oh.”

“오오~, 문학소녀라는 느낌?”

“그렇대, 노 리즌! 아무래도 다시 지어야 하겠는걸?”

노 리즌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는 듯이 고개를 대강 까딱거렸다.

“불각, 송구하오. 다시 짓도록 하겠소.”



절명시를 다시 생각하느라 침묵에 잠긴 노 리즌과, 도란도란 오늘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하며 보통의 여고생처럼 웃고 떠드는 나머지 우마무스메들. 슬슬 기다리다 배가 고팠는지 심심한지 파인 모션은 SP대장에게 지시해 라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합장을 하고 있었다.

“좋은 음식이지만 조금 외롭군.”

그런 그녀의 테이블 위에 타니노 김렛이 마티니 글라스를 올려두고 먼저 얼음을 4개, 그 뒤 셰이커의 내용물을 쪼르르 따라주었다.

“동반하는 영웅이 필요해.”

적당한 꼬치에 끼운 체리 두 개를 잔 위에 올리면서 김렛은 파인 모션과 눈을 마주쳐 웃었다. 라멘에 롭 로이 칵테일을 곁들여 먹는 건 이상하지만, 아무렴 어떤가. 개성도 성격도 다른 두 동기가 이렇게 화기애애한데. 왕녀는 눈을 빛내며 손을 모아 감사의 인사를 건넨다.

“정말 고마워!”

“적당한 고독은 취기를 불러오지. 하지만 역시, 함께했을 때 비로소 오르는 취기가 있다.”

“응응, 친구가 있어서 좋네!”

‘소인은 친구가 아니었던 것이오......?’

외롭다. 괴롭다. 죽고만 싶다. 아니, 죽고 싶지 않다. 하지만 화기애애한 동기들 옆에 혼자 돗자리를 펴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으니 이미 사회적으로는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수많은 우마무스메들과 교직원들이 그녀를 보고 갔으니 내일 - 살아있다면 - 쯤에는 ‘쟤 할복쇼하던 걔 아니야?’하는 수군거림이 들려올 지도 모른다. 킷카상 때 넘어졌을 때도 이렇게 창피하진 않았다. 생각해보면 지금 이것도 체면을 몹시 깎았으니 셋푸쿠 안건이 아닌지?

“저기......”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이 상황을 그저 견디고 있는 노 리즌과 화기애애한 동기들 사이에, 단아한 얼굴을 한 청초한 우마무스메가 끼어든 것은 얼마 뒤였다. 그녀 옆에는 코트를 대충 몸 위에 걸친, 루차도르 마스크를 한 우마무스메도 흥미진진한 얼굴로 상황을 보고 있었다.

“혹시 할복 의식을 거행중인 곳은 이곳인가요?”

“ㅡYes. 틀림 없다.”

“Que? 그라스, 이번엔 또 누구 배를 가르라고 한 겁니KA?”

“엘......그런 말은 당신에게밖에 하지 않아요.”

“헤헤! 그건 좀 기쁩니DA!”

활기찬 Duo구나, 크리스에스가 생각만 하는 사이 그라스라 불린 청초한 우마무스메는 몇 번이나 할복 장소를 힐끗거리더니 물었다.

“그런데, 카이샤쿠닌은 어디에?”

“ㅡWhat?”

“할복은 고통스러운 일. 당연히 고통을 줄이고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한 번에 참수해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전통......”

서슬퍼런 소리를 내는 나기나타를 어딘가에서 꺼내며 그 우마무스메 그라스 원더가 표정을 어둡게 만들었다.

“혹시 카이샤쿠닌을 두지 않는, 전통에 침을 뱉는 행위를 하고 있었다면......”

“하고 있었다면......무어냐.”

노 리즌은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의 친우들 사이에 난입해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뿐더러, 이제 하다하다 옆에서 자기 목을 쳐줄 사람까지 오다니 견딜 수가 없었다. 떨리는 소리로 분연히 떨쳐 일어나 그라스 원더를 노려보았다. 피어오르는 그녀의 귀기에도 밀리지 않는 홍염과도 같은 기개가 있었다.

“이 나, 노 리즌에게 전통을 가르치기라도 할 셈인가?”

“!”

그라스 원더의 몸이 움찔거렸다. 스스로 약간은 무사도에 가까운 존재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1인칭으로 ‘와시’를 사용하는 이 우마무스메 앞에 서자 갑자기 오금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흡사 다이묘 앞에 선 일개 무사의 기분이 되어버리면서도, 여기서 물러나면 불퇴전의 이름이 운다. 그녀가 뺨 옆에 손을 갖다 대 단아하게 웃었다.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은가요? 카이샤쿠닌 없는 할복은 그저 고통스럽고 잔혹한 자살행위가 아닌지.”

“그렇다면 묻겠다. 그대가 이 노 리즌의 카이샤쿠닌이 될 격을 가진 자인가?”

“......검술 실력에는 자신이 있습니다. 마침 날도 갈아놨습니다. 목의 가죽 한 장만 남기고 베어드리지요.”

노 리즌은 진중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가소롭다는 듯 혀를 몇 번이나 차며 그녀가 손바닥으로 그라스 원더를 가리켰다. 굉장히 정중한 삿대질이었다.

“그저 검술 실력! 그 정도는 3일만 가르치면 누구나 할 수 있다!”

“우마무스메는 달리기로 말하는 것. 저는 G1 4승......”

자리에 배석중인 대부분의 우마무스메를 뛰어넘는 G1 승수, 과연 이 정도면 격이 있다 자부할 정도는 된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나면 정말로 나기나타에 목이 뎅겅 잘리고 만다. 긁혀버릴 만큼 완벽한 논리지만, 그러면 메신저를 공격하면 된다는 만고불변의 진리에 따라 노 리즌이 일단 언성을 높여 호통을 쳤다.

“喝!! 어딜 하늘같은 선배 앞에서 G1 승수로 콧대를 드높이느냐!”

“달리기 앞에선 선배도 후배도 없습니다.”

“이 녀석이 그래도!”

금방이라도 뺨을 칠 것처럼 팔을 뒤로 빼면서 노 리즌이 다시 호통쳤다. 목숨이 걸려있는 절박한 상황이니 원래라면 하지 않을 과격한 표현들이 술술 튀어나온다.

“카이샤쿠닌의 격이야말로 할복자의 격을 나타내는 것! 정작 뒤에서는 랩 음악에 심취해 있거나, 서양 치료사 복장을 입고 달리는 네 녀석을 이 나의 카이샤쿠닌으로 둔다니, 천하가 비웃을 것이다! 이 가짜 일본인!”

“그, 그런, 그것은......”

가짜 일본인이라는 일갈에 그라스 원더가 눈에 띄게 움츠러들었다. 상대의 기세가 약해졌을 때 단번에 승기를 잡는다. 그것은 O켓몬 게임에도 기록된 진리다.

“물러나라, 아메리칸 사무라이!”

“......크흑!”

나기나타를 바닥에 떨어트릴 정도로 동요해서, 그라스 원더는 눈물을 삼키며 돌아서 달려가버렸다. 미처 가리지 못한 눈물이 흩날려 땅에 사쿠라처럼 떨어졌다. 동행했던 엘 콘도르 파사는 나기나타를 주워 들어, 슬픈 눈으로 노 리즌을 바라보다가 사라져버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노 리즌은 승리감에 도취된 얼굴로 돗자리에 풀썩 앉았다. 동기들의 명예, 자신의 명예와 목숨을 지켜냈다. 어쩌면 이걸로 친우들도 자신을 다시 보고 살아달라고 말해줄 지도 모른다.

“우와. 심하네. 울릴 필요는 없지 않았나.”

잔을 닦던 타니노 김렛이 중얼거린 말을 듣기 전까지는.

“우우, 이 영어 선생님. 너무해~.”

“ㅡYoung한 꼰대.”

배석한 모두가 한 마디씩 던졌다. 그걸 전부 맞아야 하는 노 리즌에게는 수십 마디의 비난이나 다름없었다. 그녀의 얼굴이 일그러져, 후회와 회한, 고통으로 가득찼다.

“크윽!”

고개를 떨구고 외마디 소리와 함께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고 동기들의 마음이 약해졌는지 금새 조용해졌다. 노 리즌은 그 뒤로도 한참을 자리에 굳어 앉아 괴로워했다. 오랜만에 일어났더니 발이 저려서 죽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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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시간이 지나도록 나타나질 않는다 했더니 여기서 뭐 하냐.”

“......트레이너 공?!”

그 뒤로도 몇 번인가 절명시를 빠꾸먹고 고뇌에 빠져있던 노 리즌에게 긴 그림자가 드리운 것은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을 때였다. 병풍과 돗자리, 단검까지 살펴보고 트레이너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 모인 담당 우마무스메들을 향해 눈살을 찌푸렸다.

“야, 이 암흑세대 나쁜 녀석들아. 친구가 죽겠다고 하면 말려야지 그걸 돕고 앉았어?”

“트레이너 공......”

노 리즌은 감복해서 금방이라도 큰절을 올리고 싶었다. 쇼군이 될 몸이니 그러면 안되겠지만, 충성 맹세를 할 의향도 생겼다. 당장이라도 갑옷 한 켠에 늘 가지고 다니는 충성서약서(현대 일본에서는 혼인신고서라고 부른다)를 작성해 상소하고 싶을 정도였다. 이런 평범하고 상식적인 일에서 감동을 느낄 만큼 삭막한 세상을 그와 함께 헤쳐나가며 아들과 손자를 보는 그녀의 상상을 크리스에스의 낮은 목소리가 찢어버렸다.

“ㅡ트레이너.”

“뭐야. 크리스에스.”

“First, 나를......세대의 필두로 보아준 것, 고맙다.”

“하?”

“You, 우리를 Dark Generation이라 불렀다...... 우리 중, Dark한 것. 내가 유일.”

트레이너는 머리가 아픈지 이마를 감싸쥐고 말이 없다가 대충 인정해버렸다. 더 말싸움하기도 싫었다. 인정을 받아 기쁜지 꼬리를 살랑거리면서도 크리스에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우리는 돕지는 않았다...... 그저 친구의 결정에 간섭하려 하지 않았을 뿐.”

“자랑이다. 너희들, 자살을 방조하는 것도 굉장히 나쁜 행동이라고.”

“엣. 자살? 무슨 자살이요?”

그제서야 소스라치게 놀라는 히시 미라클을 향해 트레이너는 아픈 고개를 돌렸다.

“친구가 할복을 하겠다고 했잖아.”

“장난인줄 알았죠. 요즘 시대에 어떤 정신병자가 맨정신으로 할복을 하겠다고 해요?”

“크윽......!”

어떤 정신병자로 지목된 노 리즌이 시선을 외면하는 사이 트레이너는 미라코의 이마에 꿀밤을 먹였다. 아프다고 우는 소리를 내는 그녀를 무시하고 그가 파인 모션을 째려보았다.

“너는......”

그의 눈에 파인 모션 뒤의 SP대장이 비쳤다. 렌즈가 큰 선글라스로 가려진, 굳은 표정을 한 그녀의 얼굴이 좌우로 천천히 까딱였다. 수트 주머니에 들어가있을 터인 손이 어째선지 불쑥불쑥 튀어나오려고 하고 있었다. 트레이너는 그 모습까지를 확인하고 타니노 김렛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니다......”

“크윽! 트레이너, 방금 권력에 굴복한 건가?”

“외국인이라 잘 몰랐나보지.”

“외국에는 자살 방조라는 개념이 없나 보죠?”

“몰라. 그렇다고 쳐.”

“ㅡScum.”

타니노 김렛을 필두로 한 동기들의 항의를 외면해 대충 얼버무리면서, 트레이너는 돗자리를 몇 번 툭 찼다.

“아무튼 슬슬 그만하고 들어가. 아직 밖은 추우니까.”

모두가 이렇게 상황이 정리되었다고 믿었다. 자세를 고쳐 앉아, 제대로 정좌하는 노 리즌을 빼고.

“그럴 수는 없소! 소인 노 리즌, 천하인이 되려는 자로서 한 번 세운 뜻을 쉽게 꺾을 수는 없소!”

“하?”

아까까지 살고싶어 몸을 비틀던 주제에 무슨 치태인가 싶지만 노 리즌의 동양적인 세계관에서는 이것이야말로 상식이다. 정말 마지못할 이유가 아니라면 한 번 세운 뜻을 쉽게 꺾어버리는 것은 지조가 없는 행동이고 체면을 깎아먹는 일이다. 살아서 치욕을 당하느니 죽어버리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그러니 다시 한 번 나를 제대로 말려주시오, 부탁하오!’

그녀에게도 이건 도박이다. 동기들의 질려버린 듯한 표정, 트레이너의 당혹스러운 얼굴이 보이지만, 그럼에도 할 수밖에 없는, 목숨을 건 곡예였다. 아까와는 달리 식은땀까지 삐질삐질 흘리는 비장한 얼굴로 천천히 단도를 집어드는 그녀를 트레이너가 펄쩍 뛰어 막는다.

“임마! 그만두지 못해?”

“그럴 수는 없소!”

“야, 네가 살아서 앞으로 커리어도 이어나가고 졸업도 하고 해야지.”

“......소인을 생각해주어 고맙소만, 뜻을 쉽게 꺾는 것은 무사의 길이 아니오.”

“아니, 고마우면 그만하라고.”

“아무튼 그렇게는 못 하겠소! 에에잇!”

마음에도 없이 단도를 높이 들어올리는 노 리즌, 이건 죽으려는 것이 아니라 응원과도 같은 제스쳐다. 일단 한 번의 고비를 넘어간 것은 확실하지만 이제 한 번이다. 동양적인 세계관에서 겸양을 보여주려면, 최소 세 번은 거절한 뒤에 마지못해 받아들여야 한다. 목숨이 걸린 중대사다. 그 정도 겸손함이 없다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야, 스탑! 멈춰!”

“이번에는 무, 무엇이오. 트레이너 공.”

트레이너도 진지한 얼굴로 그녀와 눈을 마주치며 생각했다. 식은땀을 흘리면서도, 그녀의 동양적 세계관에 최대한 맞춰주려 노력했다.

“조조를 알고 있겠지? 삼국시대의 군웅 말이야.”

“조조가 뭐 어쨌다는 거요.”

“보리를 밟으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형으로 다스리겠다고 했을 때, 자신이 보리를 밟아버렸단 말이지. 한 군대를 이끄는 존귀한 몸이었던 그는 스스로 목을 자르는 대신에 머리카락을 자른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단도를 든 노 리즌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눈 앞의 남자가 어디까지 스윗해질 수 있는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두려울 따름이었다. 고사를 인용하다니 이 무슨 교양인이란 말인가. 심지어 그 교양인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그녀 한 사람만을 위해 고사를 들먹이고 있지 않나. 어느 우마무스메가 이런 뜨거운 마음을 참을 수 있단 말인가.

“......트레이너 공......”

“그러니까, 노 리즌. 제발 그만하고 기숙사로 돌아가자. 너는 내 귀중한 담당 중 하나니까, 여기서 죽기에는 너무 아깝다.”

하지만 기각이다. 아직 한 번 남았다.

“전국시대 이야기가 아니잖소! 그걸로는 부족하단 말이오!”

부족하다. 공식적으로는 명분이, 비공식적으로는 사랑이. 주객이 전도되어버렸다. 인간 남성이 자신에게 집착하고 자신만을 생각해주는 그 맛에 노 리즌은 완전히 함락되어버렸다. 좀 더, 좀 더 내게 집착하라는 마음이 그녀의 행동과 언행을 지배하기 시작했다. 독점력과 고양감에 눈이 돌아가 그녀가 단도를 한계까지 높이 들어올렸다.

“할 말이 끝났으면 할복하도록 하겠소!”

“기다려! 멈춰! 아직 끝이 아니야!”

“......이, 이번에는, 무엇이오......♡”

“우와아......”

기쁜 마음을 숨기지 못하는 그녀의 풀어진 표정을 보고 동기들이 새파랗게 질려버렸다. 천하인이 어쩌고, 쇼군이 어쩌고, 그냥 암컷이 아닌가. 그러거나 말거나 트레이너는 깊은 한숨을 쉬면서 노 리즌과 눈높이를 맞춰 앉았다.

“담당이 자살했다고 하면 트레이너로서의 내 평판은 어떻게 하라는 거냐?”

“아잉, 전국시대 이야기를 해 달라니깐......”

그녀의 홍조 띈 얼굴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면서 트레이너는 혀를 찼다.

“너 어쩐지 기뻐보인다?”

“할 말이 끝났으면......할복하도록, 하겠소......그래두 돼?”

“누구 커리어를 막으려고! 당장 그만두지 못해?”

“에에에~잇!”

싱글벙글 단도를 들어올리는 그녀의 양 손을 트레이너가 붙들었다. 우마무스메의 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악력이지만 노 리즌의 몸이 뻣뻣하게 경직된다.

“아히익!”

가부키 배우같은 높은 소리를 내면서 즐겁게 웃으면서도, 금방이라도 내리찍을 것처럼 슉슉 위협하는 그녀에게 트레이너가 다급하게 외쳤다.

“아, 어쩌란 거야! 나 전국시대 잘 모른다고! 노부나가나 히데요시 이런 사람들밖에 몰라!”

“......잘 말해주었소!”

노 리즌이 손목 스냅만으로 단도를 저 멀리 던져버리고 덥썩 트레이너의 손을 붙잡았다. 그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면서 얼굴을 붉혔다.

“소인, 아니 소녀 노 리즌! 트레이너 공을 위해서 살겠소! 지금 이 순간부터 이 목숨 다하는 그 날까지......”

“그래. 잘 됐다. 그럼 이제 돌아가자. 손 좀 놔.”

“트레이너 공이 살려주신 이 목숨...... 트레이너 공을 위해 쓰겠소......”

손목에 가해지는 점점 더 강해지는 힘에 트레이너가 기겁을 한다. 늪에 빠진 것처럼 점점 가까이 끌려들어가고 있었다. 랍스터가 먹이를 집어먹는 듯한 광경이었다. 노 리즌이 눈을 감고 입을 삐죽거리기 시작했다.

“......둘이서 알콩달콩, 막부도 세우고, 후계자도 낳아서 기르고, 전국 시대 얘기도 하고......”

“손 놓으라니까?”

“우선 충성을 맹세하는 키, 아니 접문(接吻)을......”

“충성이랑 아무 상관도 없잖아?”

“모에화 사무라이가 나오면 입맞춤으로 계약하는 건 전국시대의 상식이 아니오......”

온 몸을 홀드 기술같은 구도로 구속되어 입술을 빼앗기게 생긴 트레이너를 구해준 것은 묵직한 장전음이었다. 삼각대 위에 총을 거치시킨 심볼리 크리스에스가 살기 띈 눈으로 노 리즌의 머리를 조준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다. 이 가짜 사무라이.”

“크윽......”

재빠른 움직임으로 타니노 김렛이 트레이너의 신병을 확보하고, 히시 미라클과 파인 모션이 그를 호위하는 것처럼 가까이 붙었다. 그 주위를 SP요원들이 둘러싼 것을 신호로 크리스에스가 사선을 돌리자, 안전이 확보된 노 리즌이 언성을 높였다.

“이 비열한 녀석들! 적은 혼노지에 있다더니!”

“착각하지 마라. 그저 정정당당한 승부를 하자는 것이다.”

“하?”

“그래! 자기 목숨을 담보로 협박하는 식으로 트레이너의 마음을 얻으려 하는 건 비겁해!”

“권력으로 협박해 아일랜드로 납치하려는 것도 비겁해.”

잠시 히시 미라클과 파인 모션의 눈싸움이 있었지만, 암흑세대의 ‘암흑’을 담당하는 크리스에스의 중재 하에 조용해졌다. 오로지 사용인, 청부사였던 그녀가 전면에 나서자 드러나는 묘한 박력 - 총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 에 모두가 설득되고 감화되었다.

“ㅡRule은 simple. 정정당당하게 트레이너의 마음을 얻는다. 달리기가 됐든ㅡ”

“나는 킷카상 우마무스메다아아!”

달리기라는 말에 히시 미라클이 큰 소리로 외쳤다. 시동이 늦게 걸리는 우마무스메라는 평판과 따로노는 그 외침에 시선이 쏠리자, 그녀가 멋쩍게 쭈그러들었다.

“라고 갑자기 외치고 싶어졌달까~.”

“ㅡ어쨌든 중요한 건 솔직한 어필이다. Any question?”

모두의 눈길이 한 번씩 마주쳤다. 우마무스메다운 경쟁심에 불타는 눈빛, 보호를 받으면서도 어쩐지 가시방석에 앉은 것 같은 트레이너, 자신들이 왜 여기 있어야 하는지 현타를 느끼면서도 야근수당을 계산 중인 SP들까지, 아무튼 무언의 합의를 보고서야 할복 소동이 원만하게 마무리가 되었다. 그들의 싸움은 이제부터였다.



“여어! 트레이너 공! 소인 노 리즌, 어제의 일은 진심으로 사과ㅡ”

다음 날 아침, 스태미너 훈련을 위해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활기차게 웃으며 들어온 노 리즌이 처음으로 들은 소리는 다음과 같았다.

“아악! 트레이너 씨! 물에 빠져요! 물에 빠져버려! 빠져 죽어버려욧!”

“크으, 크악! 무릎의 파괴신이! 스스로를 삼키려 한다!”

“어떡해! 세금을 마구 쓰는 왕실 지지도가 추락했대! 이대로라면 본국으로 송환당해버려!”

“I miss my homeland.......”

수영장은 아비규환의 지옥도. 일어서면 발이 닿을 수영장에서 발광하는 미라코와, 무릎을 감싸쥐고 구르는 김렛, 우마튜브 영상을 틀어놓고 울고 있는 파인 모션, 갑자기 향수병이 심해진 크리스에스의 울부짖는 소리와 눈물이 다른 우마무스메들을 전부 쫓아내고 있었다. 서로 자기를 봐 달라고, 자기에게 먹이를 달라고 우는 새끼새같은 가련한 존재들 사이에서 트레이너는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지쳐 있었다.

“어, 노 리즌 왔구나. 어서 와. 오늘 훈련은......”

난세다. 노 리즌은 이 군웅할거의 아비규환에서 어떻게 해야 이길지 전략적인 사고를 풀가동했다. 자신만이 성실하게 훈련하면 그것이 최고의 어필이 될 것이다. 그것으로 트레이너의 관심을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막부도 세우고 군신뾰이도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

하지만 가끔 커다란 실수를 해버리고 마는 그것이야말로, 노 리즌. 그녀는 말없이 무릎을 꿇고, 수영복 속에 숨겨두었던 짧은 은장도를 꺼내 들어올렸다.

“소인 노 리즌! 할복하겠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