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를 먹기 좋은 휴일 오전이었다. 그 트레이너는 아침 일찍부터 일어나 집안을 청소하고 부엌에 가 있었다. 밀가루에 베이킹 파우더, 베이킹 소다를 티스푼으로 떠 넣어 섞고 있을 때 현관에서 부드러운 금속음이 들렸다. 여별 열쇠가 문을 여는 소리를 뒤따라 가벼운 숨소리가 났다. 아직 밖은 그럭저럭 추운 날씨, 실내의 따뜻함에 안도하는 듯한 소리다.

“아,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이네요.”

운동화를 가지런히 벗어두고 들어온 우마무스메가 수줍게 웃으며 인사한다. 빵모자로도 모자라서 진녹색 후드 모자까지 뒤집어쓰고 있었다. 우유를 계량해 계란과 함께 반죽에 부어 섞던 트레이너가 손을 흔들었다.

“안녕, 슈발. 오랜만이네.”

“아으, 네에.”

슈발 그랑은 손에 든 커다란 슈퍼마켓 비닐봉투를 가져다 식탁 위에 올려두고 후드를 내려 벗었다. 그러면서도 빵모자까지는 차마 벗지 못하고 푹 눌러써버렸다. 오랜만이라는 인삿말 때문이다. 평소 트레이닝 때 보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어제도 봤다. 휴일에 놀러오는 게 오랜만이란 뜻이다. 그 점이 불만까지는 아니지만 조금 부끄럽다.

‘굳이 그렇게 인사하지 않아도 됐을 텐데.’

괜한 말로 상기시키면 의식해버린다. 왜 그녀가 한동안 트레이너의 집에 놀러오지 않았는지를.


지금도 가끔 실감이 나지 않지만 둘은 사귀는 사이다. 벌써 계약한지 3년이 넘었다. 계속 함께 하다 보니 서로의 좋은 점과 나쁜 점이 보였다. 그녀 생각에 트레이너 쪽에서는 항상 좋은 모습만 보여줬고, 아마 좋아하기 시작한 것도 그녀가 먼저였을 것이다. 아마도 나쁜 점은 그녀 쪽에서 훨씬 많이 보여줬을 것이라고 늘상 생각했다. 단지 그것 때문에 자기 마음을 알아채면서도 말도 못하고 끙끙 앓기만 했는데, 정신을 차려보니 트레이너 쪽에서 먼저 어프로치를 해 왔다. 허둥지둥하는 사이에 그녀는 고개를 막 끄덕이면서 잘 부탁드린다고 말하고 있었고, 트레이너는 잘 부탁받은 대로 잘 하고 있었다.

뭘 잘했는지는 구체적으로 말하라면 막상 떠오르는 게 없지만, 돌아보면 다 좋은 기억 뿐이다. 같이 낚시도 가고, 훈련이 끝나면 물병도 건네 주고, 고기만두도 같이 먹고, 손도 잡고, 다정한 말도 해 주었다.

‘전이랑 똑같잖아......’

막 관계가 시작된 설렘과 행복이 주는 취기가 살짝 가시고 나니 찾아온 자각이었다. 그래도 연인이니까 뭔가 다른 점이 있어야 하지 않나 싶었다. 연인다운 행동, 신체적인 접촉, 그런 꽁냥꽁냥이 있어야 되지 않을까 싶었다. 자신은 부끄럽지만 트레이너 씨가 원한다면 절대적으로 괜찮다는 결론을 내린 게 지난 주의 일이었다. 답지 않게 굉장한 열의를 낸 날이었다.

“오, 오늘은, 많이, 덥슙, 습니......!”

해가 바뀐지 얼마 안된 시점이었다. 코타츠 안에서 갑자기 덥다고 슈발 그랑이 입고 있던 카디건 단추를 다짜고짜 풀기 시작했다. 뻔하다면 뻔한 멘트, 나름대로 열심히 조사해서 고안한 핑계거리였다. 긴장감에 멋대로 꼬이는 혀 때문에 동작은 더 거칠었다. 단추를 거의 뜯어낼 듯이 카디건을 벗어던지고, 셔츠를 아래에서부터 잡아올려 벗으려는 때였다.

“아, 그, 그렇구나! 몰랐네! 창문, 창문 열어, 줄까?”

트레이너가 허둥지둥 코타츠에서 빠져나와 창문의 잠금장치를 풀고 있었다. 외풍 들어오지 말라고 엄중하게 발라놓은 뽁뽁이가 가위에 잘려나가는 소리에 슈발 그랑이 그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아, 아뇨! 그 정도로 덥지는, 않, 않은 것도!”

“그러면, 전부는 아니고 반만......”

트레이너의 말이 멈춰버렸다. 그의 시선이 전부는 아니고 반만 열린 그녀의 셔츠 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훈련과 잦은 군것질 사이에서 나름대로의 밸런스를 형성한 안정적인 56허리와, 슬금슬금 바스트의 라인이 시작되려고 하는 능선 위에 덮인 속옷의 레이스 장식 일부가 눈에 비치고 있었다. 그의 눈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깨달은 슈발 그랑이 불에 덴 것처럼 놀라 몸을 돌렸다.

“으으. 아무것도 아니예요......”

부끄러워져 얼버무리면서도 그녀는 자괴감에 빠졌다. 그녀는 왜 매번 이런 식일까. 돌려말하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한 걸음을 떼고 멈춰서 있느라 어색해지기만 했다. 마음이 쿡쿡 쑤시는 걸 막으려고 체념해버린다. 애초에 그녀에게 힘든 일이었다고, 그녀에게 이성적인 매력 같은 건 처음부터 없었던 거라고. 그러니 트레이너 씨도 모른 척 창문을 열려고 한 거라고. 슬프지만, 아픈 것보단 낫다. 마음의 응급처치가 끝나 고개를 돌렸을 때, 트레이너는 적당히 뽁뽁이를 다시 붙여두고 코타츠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아.”

“엣.”

기실은 슈발 그랑의 생각과 말과 달리 아무것도 아니지 않았다. 트레이너의 눈에는 그녀의 기립근이 만드는 라인이 분명하게 들어왔다. 길을 잃고 헤매는 꼬리도 들어왔다. 맨허리에서부터 좌우로 퍼져나오는, 꼬리 아래의 라인도 보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닿자마자 트레이너가 홱 하고 몸을 앞으로 숙여버렸으므로 자세하게까지는 볼 수 없었다. 하지만 그에게 어떤 이변이 일어났는지 모를 만큼 그녀는 바보는 아니다. 알지만, 실제로 보고 겪는 건 처음이다. 얼굴이 훅 붉어졌다.

“아으으.”

“미안, 미안해!”

“아니, 아니예요!”

사과받고 싶지 않다. 애초에 사과할 일이 아니다. 민망하기는 하지만 그녀가 의도한 것이다. 이미지 트레이닝에선 이렇게까지 허둥대지 않았지만, 그래도 목적대로 된 것이다. 어떻게든 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수습할 수 있다면 괜찮을 것이다. 슈발 그랑은 눈을 질끈 감고 큰 소리로 용기내 외쳤다.

“저, 정말 잘하셨어요!”

“어...... 고, 고마워......”

수습이 되긴 했다. 싸늘할 정도로 차분해져서 그렇지. 멍하니 TV를 함께 보다가, 귤 몇 개를 까먹고, 기숙사에 돌아온 슈발 그랑은 꼬박 일주일을 이불을 차면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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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이너 씨, 물이랑 샴푸 떨어졌을 것 같아서 사왔어요.”

“맞아. 챙겨줘서 고마워.”

과연 일주일이나 지나니 부끄러운 일도 평범한 흑역사가 되어 희미해졌다. 언제나의 궤도로 돌아온 생활,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장을 보다가도 트레이너의 집 재고상황이 떠올라버리는 것이다. 채소와 우유 따위 몇 가지 식재료와 티슈를 빼서 제 위치에 넣어두고 슈발 그랑은 트레이너의 앞에 서서 모자를 벗었다. 두 손에 모자를 꼭 쥐고 고개를 살짝 숙여 귀를 가볍게 쫑긋거렸다. 트레이너는 설탕을 넣어 마무리한 반죽이 섞이는 동안 버터를 프라이팬에 둘러 녹이고 있었다.

“저기, 트레이너 씨.”

“응?”

“......”

팬 온도를 세심하게 체크하던 트레이너가 반죽을 3분의 2국자 정도 뜨는 것을 확인하고 슈발 그랑은 모자를 다시 쓰고 고개를 돌렸다.

“아니, 아무 것도 아니예요.”

잘했다고 쓰다듬어 주기를 바랐지만 잘 어필이 되지 않았나보다. 그만큼 트레이너 씨가 바빴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면서도 표정이 좀 굳어버렸다. 이런 걸로 입술 튀어나오는 건 철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지만 어쩔 수 없다. 서운하다. 서운해하는 자신이 밉다. 그러는 사이 첫 반죽이 프라이팬에 부어져 가볍게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슈발.”

“네?”

“혹시 먹고 싶은 거 있어?”

“음......계란 프라이라거나, 베이커윽?”

팬케이크에 무엇을 곁들여먹으면 좋을까 고민하던 슈발의 팔을 그가 가볍게 끌어당겼다. 살짝 놀라 바보같은 소리를 내는 사이, 그녀는 그의 양팔 사이에 들어가 그와 함께 프라이팬 안쪽을 바라보게 되었다. 등 뒤에 난로를 틀어둔 것처럼 온기가 와 닿았다. 꼬리가 괜히 거슬리지 않을까 신경쓰는 동안에도 그는 팬케이크를 내려다보면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둘 다 괜찮지. 이번에는 설탕을 그렇게 많이 안 넣어서, 밥같은 느낌으로 먹기 좋을 거야.”

“......”

“계란은 한 쪽만 익혀서? 아니면 전부?”

“......한 쪽만요.”

한 팔로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고 있으면서도, 그녀의 어깨죽지를 품에 안고 있으면서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굴고 있었다.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거라기엔 너무 다정하다. 배려받고 있는 거라 느꼈다. 바라던 대로 몸을 가까이 하면서도, 그녀가 지나치게 의식해서 허둥대지 않도록, 주의를 다른 데 돌릴 수 있도록.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안해졌다. 편안해지자 기쁨이 배어나왔다. 모자 챙을 살짝 잡아 내리는 만큼, 그녀는 입꼬리를 슬며시 올렸다.

“슬슬 거품이 올라오는데, 지금 뒤집을까?”

“......아뇨. 조금 더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뒤집개를 든 그의 손에 조심스럽게 손을 포개면서 슈발 그랑이 속삭였다. 그가 뒤집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고, 그 위에 손을 포개두었다.

“적당한 때 말해줘. 같이 뒤집자.”

“......네에.”

폭신하게 부푼 표면에서 거품이 터지면서 증기가 빠져나오는 팬케이크 반죽을 함께 내려다보았다. 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리는 시간처럼, 그저 때가 오기를 기다리는 일일 뿐인데 행복했다. 낚시 의자에 앉아 나긋나긋 얼굴과 몸에 내리쬐는 햇살을 받고 있는 기분이었다.

“이제 뒤집는 게 좋지 않아? 슬슬 연기가 올라오는데.”

“엑. 으엑.”

너무 느긋했던 모양이다. 어느새 뽀얀 증기가 새카만 연기가 되고 있었다. 허둥지둥 뒤집자 보기 좋은 갈색이 아니라 숯검댕이같은 검정이 그녀를 반겨주고 있었다.

“으으, 저건 제가 먹을게요.”

“저건 내 거야.”

울상이 된 그녀를 다독여주면서 트레이너가 다음 반죽을 국자에 담고 불을 살짝 줄였다. 키친타올을 하나 뽑아 타기 시작한 버터를 침착하게 조금 닦아냈다.

“첫 팬케이크는 원래 망치는 거랬어.”

“제가 조금만 집중했어도......”

“적당한 온도라든지, 시간이라든지, 처음에는 그걸 정확하게 알 방도가 별로 없거든. 그러니까 시험삼아 굽다가 망친다는 거야. 너만 그런 것도 아니고, 나도 그렇고, 이 말을 만든 사람들도 그랬을 거야.”

“그치만.”

끄트머리부터 가볍게 갈라 안이 익은 것을 확인한 트레이너가 첫 팬케이크를 접시에 대충 빼놓았다. 다음 반죽을 조심스럽게 팬 위에 올려 가리켰다.

“슬슬 얘는 잊어버려. 다음 팬케이크에 집중하자. 이번엔 위대한 팬케이크를 만드는 거야.”

“......흐흐, 뭐예요. 위대한 팬케이크가.”

달궈진 팬 위에서 빠르게도 거품이 일기 시작한 팬케이크를 바라보며 웃는 슈발의 허리를 조금 더 가까이 감싸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위대한 우마무스메가 먹을 거니까.”


세 개, 네 개, 팬케이크 반죽이 올라가 익는 동안 옆 화구에 프라이팬 하나가 더 추가되었다. 아직 날이 추우니 음식이 금방금방 식어버린다. 따끈할 때 먹으려면 계란과 베이컨을 같이 익혀놓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혼자 하면 망치기 딱 좋지만, 둘이 같이 하면 그럴 일이 적다. 머릿속에서는 벌써 그의 위장을 사로잡았지만 실제로는 주방보조 역할이나 하고 있는 슈발 그랑도 집중력을 발휘했다.

“아으.”

중간중간 요란하게 배가 울리는 소리를 내서 곤란하긴 했지만, 그때마다 트레이너가 팬에서 이것저것 바로 꺼내 챙겨줬다. 직접 요리하는 사람의 특권이라나. 접시에 잘 플레이팅된 음식은 아니었지만, 갓 익은 것을 입 안에서 식혀가며 먹는 느낌도 좋았다.

“허흐허흐.”

“천천히 먹어.”

“허흐. 흐헤.”

트레이너가 소리 죽여 웃는 것을 느끼고서야 자기가 얼마나 바보같이 보였을지 자각하게 될 만큼, 그녀는 이 시간에 푹 몰입해 있었다. 의외로 집중이라는 건 의식적으로 눈에 힘을 빡 주고 자세를 낮추고 근육을 긴장시키는 것이라기보단, 그냥 이 상황에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는 것. 그녀는 함께 브런치를 해 먹는 이 시간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뭐가 바보같을지, 이건 이래서, 저건 저래서 이상해보이지 않을까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자, 서서 먹는 것도 좋지만 이제 식탁에서 제대로 먹어보자.”

식탁에 접시들을 올려두고, 냉장고에서 코울슬로와 그녀가 사 넣은 우유를 꺼내면서 트레이너가 웃었다.

“오, 제대로 4.5로 사왔구나. 고마워.”

고개만 끄덕여 대답하면서, 슈발 그랑은 모자를 벗어 빈 의자 위에 내려두었다. 얼굴 전체가 느긋하게 풀어져 있었다. 나중에 거울을 보면 이불을 찰 지도 모를 표정일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지금은 이런 식으로 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라 느꼈다. 의자를 끌어다 앉은 그의 옆에 살짝 다가와 서서 동의를 구하듯 바라보고 있으니, 두 손이 올라와 그녀의 볼을 이리저리 매만졌다.

“왜 이렇게 귀엽게 하고 있어?”

“흐흐흐, 헤헤.”

마지막 확인까지 받자 슈발 그랑은 긴장이 다 풀려 헤벌쭉 웃었다. 약간 몽롱한 것처럼 즐거웠다. 아직 본격적인 식사는 하지도 않았는데 배가 불렀다.



“어, 어때?”

“너, 너무 긴장하시는 거 아, 아닌가요.”

식사와 뒷정리가 끝나고 얼마 뒤, 가벼운 외출복으로 갈아입은 트레이너가 방에서 걸어나왔다. 셔츠 칼라를 정리하는 손이 살짝 떨리는 것을 보고 달래주면서도 슈발의 목소리 역시 뻣뻣하게 굳어 있었다.

“아니. 그게. 이......상해보이지는 않을까?”

“아뇨. 괜, 괜찮을 것 같은데요. 애, 애초에, 그냥 자매들, 보러, 보러 가는 거고.”

일주일 전부터 이미 잡힌 약속, 슈발 그랑의 자매인 비르시나와 비블로스 커플과 만나서 놀기로 한 날이다. 슈발 그랑과 비교해서야 이런 당당한 사람이 따로 없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보면 트레이너 역시 트레센 학원의 명랑한 이들 사이에 끼면 기가 빨려나가는 내향적인 쪽이다. 생판 모르는 남이면 차라리 나을 수도 있겠지만 여자친구의 가족이라고 하면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을 것이다. 애시당초 진짜 가족인 슈발 그랑조차 가끔 힘겨운 것이다.

“최대한 좋은 인상 심어주고 싶은데.”

“자, 자연스럽게! 자연스럽게 하면 될 것 같아요! 지금 엄청 멋있다고 생각해요!”

서로 긴장하고 있는 걸 뼈저리게 공감하고 있으니 힘이 되어주고 싶다. 언성을 높여가며 슈발 그랑은 그의 양 팔을 꽉 잡았다. 그가 조금 아파할 정도였지만, 그런 굳건함이 조금은 정신이 들게 했나보다.

“너한테 멋있다니까......그럼 다행이야.”

“네, 네. 그러니까 일단 긴장을 좀 푸시고. 심호흡이라도 할까요?”

“그러자......”

깊이 들이마시고, 길게 내뱉었다. 함께, 타이밍을 맞춰서, 눈을 바라보면서,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천천히 진정이 되자 편안하게 손을 깍지껴 잡고, 아까보다는 조금 얕게 함께 숨을 쉬었다. 격려하는 것처럼 손을 몇 번 꽉 잡았다가 풀었다 하면서 서로 할 수 있다고 말해주었다.

“괜찮아지셨어요?”

“나는 괜찮아. 슈발 너는?”

“저도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럼 갈까?”

“가죠. 마음 변하기 전에 빨리 가요.”

일이 실제로 벌어지기 전까지는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끝도 없이 고민해버리는 내향적인 사람들, 잽싸게 짐을 챙겨서 현관으로 걸어가다가 멈춰버렸다.

“역시 청심환이나 보심단같은 거 들고 갈까?”

“제, 제가 챙겼으니까 빨리 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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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훨씬 거북했다. 즐겁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붕 떠서 어색했다. 가장 어리고 목청이 큰 비블로스의 의견대로 테마 파크에 갔다 왔다. 그나마 두 자매가 놀이기구를 타는 동안 슈발과 트레이너는 가방을 맡아두고, 함께 음료를 마시면서 쉬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게 다행이었다.

“먹을만 하네요.”

“그러게.”

한 손에 음료를, 한 손에 츄러스를 들고 우물거리면서 둘은 자매가 타고 있을 놀이기구를 올려다보았다. 비블로스의 찢어지는 것 같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괜히 따라 웃다가 슈발 그랑이 그의 귀쪽으로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대 속삭였다.

“트레찌이, 나 저기 가고 시퍼. 아나죠.”

자매의 말투를 따라하면서 슈발 그랑이 히죽거렸다. 트레이너도 잠시 생각하다가 슈발의 귀 근처로 입을 가져갔다.

“어, 어허. 너무 어리광부리면 못 써.”

“흐흐흐.”

아까까지 비블로스와 트레이너가 나누던 대화를 따라하면서 둘은 소리 죽여 웃었다. 그러면서도 슬슬 자매들이 나올 시간이 되진 않았나 출구쪽을 눈치보는 것처럼 힐끗거렸다. 조용조용 분위기가 고조되자 슈발 그랑이 이번에는 비르시나를 따라했다.

“어머. 비블로스, 트레이너 씨께서 곤란해 하시잖니.”

검지를 볼 근처에 가져다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녀가 나긋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트레이너를 향해 정중하게 배꼽인사를 보냈다.

“죄송합니다. 트레이너 씨. 모쪼록 넓은 마음으로 양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완전 똑같아.”

키득키득 웃으면서 다 먹은 츄러스 포장지를 버리던 둘의 눈에 가판대에서 파는 머리띠가 들어왔다. 서로의 눈치를 살피다가, 놀이기구 출구 쪽을 동시에 살핀 둘이 가판대 쪽으로 한 걸음 다가갔다.

“저거 한 번 써볼래?”

“그, 그럴까요?”

트레이너가 고른 귀엽고 복슬복슬한 고양이귀 모양 머리띠를 집어들어 조심스럽게 머리에 쓰고 슈발 그랑이 약간 움츠러들었다.

“어, 어때요?”

“귀여워.”

칭찬에 기분이 좀 업되는지 그녀가 쪼르르 트레이너의 앞에 와서 머뭇머뭇 주먹을 볼 옆에 대고 웃었다.

“에헤헤. 그러니까, 그게......냥!”

“귀여워. 귀여워.”

“슈발냥냥!”

“크히히.”

“헤헤.”

최대한 남들에게 들리지 않게 조용히 웃으면서, 이번엔 슈발이 똑같은 머리띠를 가져다 트레이너의 머리에 씌워주었다.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에 어색해하면서도 트레이너는 잠시 주위를 확인하고 슈발 그랑을 향해 주먹을 몇 번 휘둘렀다.

“냥!”

“에! 헤헤.”

“트레냥냥!”

“슈발냥냥! 흐흐, 히힛.”

“슈발냥냥아. 우리 사진 찍을래?”

“......어음, 좋아요. 트레냥냥 씨.”

아까보다도 더 조심스러운 움직임이었다. 무슨 비밀 미션이라도 되는 것처럼 가판대 옆쪽에 나란히 숨어서 핸드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켰다. 활기찬 사람들처럼 핸드폰을 위로 들어올려서 좋은 각도를 만드는 것이 아닌, 일단 들키지 않고 사진을 찍으려는 로우 앵글샷이었다. 최대한 가까이 붙어 어색하게 웃으면서 포즈를 이리저리 취하고 있는데, 휙 하고 그림자 하나가 난입해 큰 소리로 외쳤다.

“에! 슈바찌! 슈바찌트레찌! 둘이 뭐해? 사진 찍어?”

“으긱?!”

“나도 찍을래! 나도 낄래! 같이 찍자!”

“아으으......”

“어머어머.”

나긋하게 웃으면서도 비르시나 역시 굳이 거리를 두지 않고 끼어든다. 둘만의 시간이 어느새 단체사진 촬영회로 변해갔다. 슈발 그랑의 트레이너는 모두의 사진을 찍어주기 위해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빠져나가고, 비르시나와 비블로스, 그들의 트레이너와 슈발 그랑이 포즈를 잡았다. 슈발 그랑과 그녀의 트레이너를 빼고는 모두 가판대에서 머리띠를 사서 쓴 뒤였다.



“트레찌, 트레찌! 나 이쁘게 나왔지? 나 귀엽지?”

“그럼, 귀엽지. 엄청 귀여워.”

“에헷. 에헷. 에헴.”

패밀리 레스토랑에 와서도 세 자매의 특징이 유감없이 드러났다. 적당히 거리를 둔 듯 하면서도 거의 틈 없이 나란히 앉은 비르시나 커플, 그리고 평범하게 앉은 슈발 그랑 커플이 아예 다리 위에까지 올라가서 어리광을 부리는 비블로스와 그걸 받아주는 그녀의 트레이너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격하게든 자상하게든 뭐라 말하고 싶어 안달이 난 비르시나의 움찔거리는 입술을 제지하는 것처럼 그녀의 트레이너가 뭐라 속삭이자, 그녀가 타겟을 슈발 그랑에게 돌렸다.

“그나저나 슈발 그랑, 놀이기구도 거의 못 탔는데 즐거웠니?”

“응, 뭐, 그럭저럭. 재밌었어.”

“그렇다면 다행이야. 비블로스가 하도 고집을 부려서. 밥 먹고 어디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니?”

“으, 아니. 딱히, 잘 모르겠는데......”

“생각나면 언제든 말해주렴.”

“아으, 응.”

솔직히 그냥 집에 가서 조용히 있고 싶다고는 말하기 애매했다. 가족들 뿐이라면 피곤하니까 조용히 쉬고 싶다고 말할 수 있었겠지만 그들의 트레이너가 있는 자리라면 얘기가 다르다. 딱 봐도 그녀를 ‘챙겨주고’ 싶어서 안달이 난 표정들이다. 부담스러워 죽겠다.

“언니, 프리쿠라도 찍고, 프리O라도 하고, 배팅 케이지도 들어가고, 야시장도 가볼래!♡”

“그것도 좋겠네.”

“슈바찌도 같이 가줄 거지?♡”

“엑.”

슈발이 당혹스러워하며 고개를 살짝 돌리자, 비블로스의 몸이 고양이처럼 쭉 늘어나 테이블을 가로질렀다. 그녀의 볼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면서 요구해댔다.

“같이 가자! 같이 가자!”

주문한 요리가 나오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말려들었을 것이다. 배가 고프긴 했는지 비블로스의 주의가 음식으로 완전히 쏠려버렸다. 식사를 시작하고 잠시 동안 슈발 그랑은 평화와 안식을 맛볼 수 있었다.

“오늘 모이자고 한 건 중요한 할 말이 있어서야. 가족들에게 먼저 알려야 할 거라 생각했어.”

비르시나가 두어 번 헛기침을 하더니, 가방에서 예쁜 봉투에 들어있는 카드를 나눠주기 전까지는.

“알다시피 나는 조만간 은퇴하거든. 그러고 나면, 여기 계신 트레이너 씨랑 결혼하게 될 거야.”

“에~, 우와아!”

“추, 축하해. 언니.”

“그래서 말인데. 슈발 그랑이랑 비블로스에게 축가를 부탁하고 싶어서 말야.”

옆에 앉은 비르시나의 트레이너 씨가 청천벽력같은 말을 꺼내기 전까지는. 포크를 쥔 슈발 그랑의 손이 미묘하게 떨리고 있었다. 전채로 먹은 샐러드가 얹히는 느낌인지 표정이 몹시 거북했다.

“제, 제가요?”

“강요하는 건 아니야. 그치만 기왕이면 자매니까......”

“아으.”

강요는 아니지만 강요와 다름 없는, 상냥한 폭력이 슈발 그랑을 덮쳤다. 어차피 이런 날이 오기야 할 거라 생각했고, 머릿속에서 몇 번 연습도 해봤으니 결국은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왕이면 식사 끝나고 말해주면 좋지 않았냐고 그녀는 속으로 원망의 말을 삼켰다.

“슈바찌! 긴급상황이야! 오늘 일정은 전부 취소하고 나랑 가족 회의ㅡ”

“비블로스. 거기까지 하렴.”

비르시나가 텐션이 마구 올라가려는 비블로스의 볼을 콕 찍어 진정시켰다. 어리둥절해하는 그녀의 볼을 매만지면서 자상하게 웃었다.

“오늘은 언니도 껴서 놀아야 하니까.”

“아~, 그렇구나! 그렇네! 히히.”

“나도 도와줄게, 비블로스.”

자기가 실수했다는 걸 솔직하게 인정하며 웃는 비블로스의 머리를 트레이너가 좌우로 헝클어트리면서 웃었다.

“셀럽이 되실 몸이니까, 비블로스가 가장 빛날 수 있게 말야.”

“정말? 트레찌 정말 좋아!”

자기들의 세계에 빠져서 식사는 뒷전인 둘과 그들을 지켜보는 비르시나를 힐끗거리면서, 슈발 그랑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슬슬 지치기 시작했다. 돌아가고 싶었다. 깨작깨작 빵을 집어먹고 있는데, 옆에서 트레이너가 그녀의 팔꿈치를 톡톡 건드렸다.

“움?”

테이블 아래로 그녀의 트레이너가 핸드폰 메모앱에 뭔가 적어 내밀고 있었다.

< 나도 슈발이 가장 빛날 수 있게 힘낼게 >

슈발 그랑의 눈썹이 치켜올라갔다. 동그란 눈을 돌려 바라보자 트레이너가 살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빵을 삼키고 그녀가 조심스럽게 속삭였다.

“정말요?”

메모앱의 글자가 쭉 지워지고, 다음 내용이 쓰여졌다.

< 슈발이 제일 귀여우니까 :) >

“그, 그렇지 않아요......”

그를 향해 살짝 허리를 돌려 앉아 슈발 그랑이 웃었다. 붉어진 얼굴을 최대한 자매들에게 보이지 않게 숨기면서도, 그에게는 조금 드러냈다. 숨기지 못할 기쁨이라면, 그런 기쁨을 준 사람에게 보여주는 게 맞을 테니까.

“슈바찌! 슈바찌트레찌! 둘이 무슨 재밌는 얘기해? 왜 둘만 웃어? 나도 끼워 줘!”

“으아! 아무 것도 아니야!”

“거짓말쟁이는 쿡쿡이로 혼내준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래도!”

찔러들어오는 손가락을 막으면서도, 슈발 그랑은 꼬리를 살짝 움직여 그의 다리 위에 편안히 올려두었다. 온 사방에 쩌렁쩌렁 울리는 마음이 아니더라도, 어떤 말보다도 그녀의 안에 메아리치는 한 마디였다.



“드디어 풀려났네.”

“휴, 기 빨려요.”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안도의 한숨을 쉬면서 둘은 그래도 잘 버텼다고 작게 웃었다. 맞추기 좀 힘들었다 뿐이지, 나름 재밌는 일들이 많았다고 조잘조잘 떠들다가 조용해졌다. 도로를 구르는 차의 소리와 차체의 진동음만 남아 조금 졸음이 올 무렵, 슈발 그랑의 핸드폰이 울렸다.

“엣.”

비르시나가 보낸 LANE을 보고 슈발 그랑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트레이너가 메모를 보여줬을 때, 그녀가 웃고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이었다. 꿈을 꾸는 것처럼 잔뜩 녹아내린 웃음이었다. 자기 표정이 어떻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그보다 훨씬 풀어져서 바보같아 보일 정도였다.

<좋은 사람을 만났네. 언니도 좋은 사진을 찍었어.>

몰래 찍었다는 것에 반발하는 마음보다, 앞선 말에 동의하는 마음이 컸다. 슈발 그랑은 잠시 화면을 내려다보며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장했다.

<응.>

<이렇게 웃는 거 처음 봤어.>

<나도.>

그녀도 그 말에 동의했다. 옆에서 운전하는 저 남자 앞에서 자신은 이런 식으로 웃는구나, 하는 실감이 다가왔다. 자연스럽게 흐르고 있었지만 그래서 어렴풋했던 행복의 모습이 좀 더 구체적으로 와닿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치만 싫지 않아.>

이렇게 바보같이 웃고 있는데, 행복하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자신이 싫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의 본심이 손가락을 타고 문장이 된다.

<이렇게 웃는 내가 좋아. 이렇게 웃을 수 있는 내가 좋아.>

한참 뒤, 비르시나에게서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 스탬프가 도착했을 때, 트레이너 씨가 차를 멈춰세웠다. 그녀 눈에 보이는 적신호와 교차로가 눈에 익었다. 오른쪽으로 꺾으면 학원으로 갈 것이다.

“트레이너 씨.”

“응?”

“그,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모르겠지만요.”

“응.”

“예전만큼, 제가 싫지 않아요.”

“......응.”

부드럽게 웃는, 받아들이는 듯한 미소에 그녀의 마음이 조금 더 용기를 얻는다. 처음부터 이거였다. 모를 것도 없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제가 제 모습을 좋아할 수 있는 건, 아마, 아니 분명, 당신이 절 그만큼 좋아해주셨기 때문이겠죠.”

“그렇게 말해주니까 기쁘네.”

“그리고, 분명, 저도.......”

마지막 한 마디를 남기고 모자를 고쳐쓰는데 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신호가 바뀐 모양이다. 슈발 그랑의 눈이 잽싸게 차선을 스캔했다.

“으아, 그냥 직진해 주세요!”

“응? 알았어.”

우회전 차선에서 살짝 비켜나 직진하는 걸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그녀는 왜 매번 이런 식일까. 중요한 말 한 마디가 남았는데, 머뭇거리다가 또 화제가 돌아가버리지 않았나. 분명 얼마 전까지의 그녀라면 자괴감에 빠졌을 것이다. 지금 웃는 것도 실소에 가까운 것일 터였다. 하지만 아니다. 그냥 즐겁다. 즐거운 마음에 오히려 조금 오만한 발상까지 피어날 정도다.

“그렇게 즐거워?”

“그, 그게, 그렇잖아요!”

한참을 즐겁게 웃던 그녀가 큰 소리로 외쳤다.

“이, 이러는 제가, 얼마나 귀엽냐구요!”

말해버렸다. 숨기고 얼버무릴 필요 없는 날것 그대로의 본심을, 조심성 없이 외쳐도 괜찮은 사람이 옆에 있었다. 정말 그렇죠? 하고 확인하듯이 힐끗거리기도 전에 그의 외침이 돌아왔다.

“슈발 그랑, 너는 귀여움마저 최강이란 말이냐!”

이 사람에게만큼은, 자신은 1착이다. 비블로스도, 비르시나도, 키타산 블랙도, 사토노 다이아몬드나 크라운도, 두라멘테도 없다. 오로지 그녀가 위대한 우마무스메다. 그녀만이 귀여운 우마무스메다. 확신할 수 있었다. 그녀를 괴롭히던 구름이 걷혀 맑게 개인 마음에, 더는 모자를 씌워 비를 막을 필요는 없었다. 다시 한 번 과시하듯이 슈발 그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나는 귀엽잖아!”

“너는 귀엽잖아!”

슈발 그랑은 깔깔 웃으며 시트에 기대 누웠다. 지금 이 순간, 둘을 실은 차가 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슈발 그랑은 옆에 앉은 남자를 사랑했고, 무엇보다 그가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사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