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 2019년에 출판된, 지금 시점에서는 5년이나 된 책이고,


출판 당시 아마존 베스트 셀러였을 정도로 인기있던 책이라 읽을 사람들은 이미 다 읽었을 것이라고 생각함





그래도 퀘스트 등으로 VR 시장에 입문한 뉴비들이 많아진 지금,


VR 웨이브의 태동기였던 2012~2014년 쯤의 불꽃같은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꼭 읽어보라고 추천할만 함







(ModRetro, MTBS3D 포럼 시절, 2010년에 PalmerTech 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제작한 첫 프로토타입 PR1. 보면 알 수 있듯이 Cabletron Systems의 기성품을 개조하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고졸에 별다른 기술도 없었지만, 2010년 아주 우연히 VR에 빠져들어 2년만에 작은 킥스타터 제품 수준의 VR 헤드셋을 만들어낸 팔머 럭키


책에서는 그의 유년 시절이나 과거사보다는, 실제 '오큘러스' 라는 '회사'의 역사를 읽는 느낌으로 진행된다





그가 소박하게 진행하려 했던 2012년의 킥스타터가 어떻게 우연히도 전설적 개발자인 '존 카맥'의 눈에 띄게 되고,


이로 인해 폭주 기관차인 '브렌단 이리브'라는, 현재는 VR판에서 뒷구석으로 잊혀진 CEO를 만나게 되는지의 이야기들 말이다






(럭키의 킥스타터용 프로토타입을 처음 써보는 이리브와 안토노프)



이미 '스케일폼'이라는 성공적인 미들웨어 스타트업을 창업한 경험이 있던 이리브는,


자신의 오랜 갱들을 모아 이 20살의 미숙한 초짜 꼬마의 작은 프로젝트를 2조짜리 불타는 기관차로 만든다





VR 구현에 필요한 1급 기술자들을 어벤져스 소집하듯이 스카웃하는 과정은 그의 미친 추진력을 잘 보여주는 부분






https://youtu.be/GVDXXfbz3QE?si=xad-CvB6bNYL1ZBd




아주 우연히, 개인적인 사이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오큘러스를 발굴해낸 존 카맥


그가 없었다면 팔머 럭키의 VR 프로젝트는 조용한 킥스타터로 지나가듯이 묻혀질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당시 시중에 나와있던 아주 형편없는 VR 헤드셋들을 보며 '역시 아직인가' 하고 실망하던 차,


카맥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제대로 된 광각 헤드셋을 제작하는 팔머를 발견한다


아주 조잡한 DIY 조립킷만 보낼 수 있었지만, 그 엉성한 만듦새에도 팔머의 제품은 당시 시중의 모든 VR 헤드셋을 능가하는 수준





하지만 기본 원리와 구성품 자체는 아주 간단했던 만큼,


누군가 진정으로 VR에 관심이 있었다면 2010년 이전에도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었다


단지 이 모든 아이디어들을 합칠 사람이 없었던 것






(당시 밸브의 AR 기술 책임자였던 마이클 애브라시(사진 좌측)를 만난 팔머. 오른쪽은 그 유명한 게이브 뉴웰이다)



의외로 밸브 내부 개발자들 사이에서 월급이나 축내면서 무쓸모 기술 연구한다고 하대받던 AR/VR 개발팀


어차피 실현화 가능성 없다며 빠꾸 먹어서 실제 하드웨어 제작 및 양산은 꿈도 못 꾸던 밸브의 과학자 애브라시


오큘러스가 "스팀에서 VR 게임 카테고리를 만들어줘요" 하고 부탁해도 "응, 돈 안 되서 관심없어" 하고 씹는 밸브





이후 오큘러스 자체 플랫폼 및 스토어 개발하려 하니, 갑자기 "VR은 스팀이죠!" 하고 스팀VR 출시


오큘러스 개발용 SDK 배포하려니 "그런거 말고 우리 스팀VR 씁시다" 하고 OpenVR로 VR게임 개발 헤게모니 장악 시도


오큘러스는 하드웨어 개발 무제한 지원해준다고 마이클 애브라시를 꼬드겨서 스카웃 해가니, 갑자기 관심도 없던 VR 헤드셋 하드웨어 개발 자기들도 한다면서 HTC 끌어들여 Vive 개발




...밸브는 아주 알 수 없는 회사다






(니라브 파텔이 2012년에 그린 오큘러스 터치 컨트롤러 초안 및, 이후 프로토타입들)

(니라브 파텔은 이후 모듈형 노트북 회사 Framework를 세운다)



원래는 DK2와 함께 완성되었어야 했을 오큘러스 터치 컨트롤러


"VR에서 손 따위는 중요하지 않아!"라는 어이없는 의견으로, 터치 컨트롤러는 Rift 발매 이후에야 별매품으로 출시된다


이후 모든 VR 컨트롤러 형태의 표준이 된 걸작 디자인





"스티브 잡스의 애플이라면, 좌우 대칭형의 요술봉으로 VR을 조작했을거야!" 라고 이를 끝까지 반대하던 오큘러스의 CEO 이리브 브랜단


HTC 바이브와 소니 PSVR의 좌우 대칭형 요술봉 컨트롤러를 보고 무슨 생각이 들었을까






(기어VR 프로토타입들과 존 카맥)



제니맥스와의 다사다난한 갈등 이후 오큘러스 CTO로 정식 이직한 존 카맥


하지만 독불장군답게 본사 근처로 이사하지 않고, 텍사스 자택에서 마음대로 근무하는 조건을 건다





그는 자청해서 "내가 가장 적격"이라며 삼성과의 기어VR 합작 프로젝트를 총책임


CEO인 이리브는 "PCVR이 진또배기지, 모바일 VR은 단순히 삼성 OLED 패널 공급받기 위한, 협상용 장난감 프로젝트"라고 굉장히 무시했지만,


카맥은 모바일 VR이 진정한 미래라며 이때부터 PCVR보다는 모바일VR 개발에 열중한다


이후 모바일VR의 발전형인 스탠드얼론VR이 대세가 될 걸 보면...





당시 삼성 기술자들에 대한 오큘러스측 엔지니어들의 인상은,


삼성맨 양복쟁이들이 뭔가 엉성한 프로토타입을 가져와서 시연한 다음 오큘러스 실무진들이 이것저것 조언 및 수정을 해주면


"아이고, 그런건 기술적으로 불가능하다, 말도 안 된다, 구현 못 한다"


...라고 해놓고선 다음 미팅때는 어떻게든 공밀레로 구현하고, 오큘러스측에서 더 뽑아먹을 기술은 없는지 계속 틈틈히 기회를 엿보는 기술자 무리들







힐러리 반대 광고 캠페인에 익명으로 1만달러를 기부하며 "나 '님블 리치맨 (가명)'은 트럼프를 지지하는 비밀의 백만장자 후원자다!" 라고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던 팔머 럭키


기레기의 속임수에 넘어가 신상이 털리며 고작 저 "Too Big To Jail (힐러리는 너무 거물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감옥에도 안 간다)" 광고판을 게시하는데 돈을 대줬다는 이유로 백인우월주의자, 인종차별주의자, 극우주의자 프레임은 몽땅 다 뒤집어쓴다





그 상황에서 이 20살 청년이 생각해낸 해결방법은 "내가 트럼프를 지지하는 이유"라는 성명문을 내는 아이디어;;


이는 당연히 오큘러스가 소속된 대기업인 페이스북 내부에서 기각된다


이 상황에서 CEO인 이리브는 "어쩔수 없다"며, 이미 페이스북에서 내쳐지던 팔머에 대한 구제책은 딱히 마련하지 않고 그를 토사구팽







책은 시간 순서대로 당시 일화들의 생생한 재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일들이 얼마나 정신없는 속도로 불 같이 진행되었는지 알 수 있고,


오큘러스 초기 역사와 당시 분위기를 간접적으로 체험해 보는 느낌





물론 굉장히 오큘러스 중심적, 거기에 팔머 럭키 중심적으로 서술된 책이기도 하다


그래서 마무리도 팔머의 퇴사와, 그가 방산 스타트업 '안두릴'을 창업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다 읽고나면 아예 밸브/HTC 쪽의 개발 타임라인과 소니의 프로젝트 모피어스로 시작되는 PSVR 개발 타임라인, MS 진영의 홀로렌즈 개발과 Window Mixed Reality 개발 타임라인 등등을 통합해서 전체적인 VR 개발 역사의 흐름을 따로 정리해봐도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으면 알 수 있는 흥미로운 타임라인:



밸브에서 근무하던 마이클 애브라시는 원래 AR을 더 밀어주며 AR 기술과 AR 게임 개발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오큘러스 체험 후 AR보다 VR이 기술적으로 구현하기 더 쉬우며, 그를 발판으로 AR까지 구현할 수 있겠다는 깨달음을 얻음


이후 그는 자기를 제대로 지원해주지 않는 밸브를 버리고 오큘러스로 이적해, 아직까지 메타 리얼리티랩 수석 과학자로 관련 연구를 총 책임하고 있음





밸브에서 애브라시 밑에서 일하던 AR 엔지니어가 제리 엘스워스(Jeri Ellsworth)


애브라시의 탈주 후 밸브는 애브라시가 담당하고 있던 사내 AR 개발팀을 전부 해고하는데, 여기에는 제리 엘스워스가 포함


오큘러스는 그녀를 스카웃하려 했으나, VR에 관심도 없고, 자기 프로젝트를 날아가게 만든 원흉인 오큘러스를 혐오하던 제리는 아예 자기 회사를 따로 창업


'테크니컬 일루젼(Technical Illusions)'이라는 이 회사는 이후 '캐스트AR (castAR)'로 이름이 바뀌며 계속해서 AR 게임을 연구





아래는 이후 내가 추가적으로 찾아본 타임라인:



그러나 castAR은 2017년 직원들을 해고하며 망한것 처럼 보였음


이후 2019년에 킥스타터로 Tilt Five 라는 제품을 출시


2021년 12월에서야 배송을 시작하지만, 애매한 컨셉 때문에 반응은 미적지근





https://youtu.be/Jse-GwkcYgI?si=4C8dstr8mCKf17w0



이런식으로 읽다보면 익숙한 이름들, 혹은 처음 들어보는 이름들을 보며 이 사람들이 어디에서 왔으며 이후 어디로 가게 되었는지 따로 찾아보는 것도 나름 재밌다





미래의 '피스톨 휩' 개발자인 Denny Unger가 DK1 처움 써보고 눈물 흘리면서 


"드디어 내가 꿈꾸던 VR 시대가 왔다!"


이러고 VR 게임 전용 스튜디오 Cloudhead Games 창업하는 내용도 재밌고


(아예 팔머한테 연락해서 오큘러스 로고 디자인도 해주는데, 채택은 안 됨)





책값은 25,200 원


동네 도서관 찾아보면 한권씩 있을지도





아래는 저자 블레이크 해리스와의 인터뷰

https://venturebeat.com/business/blake-harris-talk-how-the-history-of-the-future-almost-didnt-happen/view-al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