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는데 보이지 않는 것 같은 하얀색 공간, 떠 있는데 떠 있는 것 같지 않은 느낌에서 오는 이질감에 불에 덴 듯 놀라 정신을 차렸다.

 그런 내 뒤에서 누군가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남자로 보였다. 하지만 이런 기묘한 공간에 있는 기묘한 사람을 내 뇌 속에서 받아들이려면 꽤 시간이 걸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몇 발짝 물러났다. 꽤 큰 소리였는데 그는 놀란 기색도 않고 무덤덤하게 말했다.

"좋아, 정상이군. 넌 죽었어."

 죽었다...? 무언가가 내 머릿속을 꽉 막고 있는 듯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것도 찰나 최근의 기억부터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수많은 빛, 그리고 사람들. 소음이 어지럽혔고 나는 바닥에 누워있었고 답답했다. 남자건 여자건 할 것 없이 나의 주변을 왔다 갔다 했고, 몇 명의 사람들에 의해 모두 물러나게 되었다. 아마 심장마비, 인듯했다.

 가장 먼저 든 감정은 혼란. 내가 죽었다고? 나는 어제도, 내일을 바라보며 살았다. 하지만 나에게 더는 내일이 없게 되었다. 자신에게 이런 일이 생길 거라고 생각하며 사는 사람들은 분명 1000명 중에 한 명도 안될 것이다. 이런 반응이 정상일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에 든 감정은 억울함. 왜 나한테. 아까 그 1000명 중 한 명이나 죽일 것이지. 왜 나를. 아직 하고 싶은 일도, 해야 하는 일도 많은데.

"나...난 억울해! 내가 왜 죽어야 하는 건데?! 이... 이제야..."

"좋아, 네가 저쪽에 남기고 온 것들을 모두 말해보라고. 신은 공평해야 하지만, 공평하다고 납득시킨다면 널 살려주지."

 신은 제안했다. 그리고 나는 불현듯 아내와 아이들의 얼굴, 그리고 부모님, 내가 사랑하던 모든 사람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그들이 알면 적어도 슬퍼하겠지. 이를 필사적으로 언어로 옮기기 시작했다.

"나. 나는 저쪽 세상에 나를 남겼어... 내가 사랑하던 사람들, 혹은 나를 사랑하던 사람들. 그들의 기억 속엔 내가 있겠지."

 하지만 절망적이게도 신은 말했다.

"심오하군, 하지만 네가 없었다면 그것 또한 없었을 테니 남긴 것으로 봐야 하겠지. 그렇다고 한들, 봐. 100년 후에 그것들이 아직 남아 있을까? 기억을 담당할 뇌는 이미 풍화되었고, 감정을 느꼈을 마음은 차게 식었지. 결국 허상일 뿐이야.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조차 언젠간 끊기기 마련. 결국 기억되지 않을 거야. 다음?"

 세상에 남긴 것이라면 아직 꽤 있다. 남들에 비교해서 많거나 적은 양은 아니지만 나는 확실히 돈을 벌기는 했다. 주제에 적금을 꼬박꼬박 넣어서 30년 남짓 일생 몇천만 원의 돈 정돈 마련해놨고 그것이 나의 아내, 혹은 자손들에게 남겨졌을 것이다. 혹은 꽤 많은 양의 보험금이 그들에게 남겨졌을 수 있다. 

"하하, 돈? 좋아. 하지만 그것도 허상일 뿐이지. 가정 하나 해볼까? 네가 여기에 온 지 1500년이 지났다고 하자고."

 나는 아직 말도 하지 않았지만 신은 술술 말을 하기 시작하였고 그 모습에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흡 하고 짧게 들이쉬었다. 공기에서는 아무 향도 나지 않았다.

"1500년이 가늠이 안 된다고는 하지 말아 달라고. 여기선 억겁의 시간도 무리가 아니니까. 그러면 1500년이 지난 지금, 네 돈은 어디에 있지?"

"아마 분명, 내... 자손의 자손의 자손의 자손--"

"이라고 할 줄 알았지. 하지만 이봐, 세상에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가 통용이 되던가? 결국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야. 다음으로 어필할것이 또 있나?"

 분명히 있다. 나는 공부도 해왔고 일도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 남긴 게 없다니. 그럴...리... 없다. 내 자식들, 바탕화면의 폴더 안에 정리된 수백 수천 개의 파일, 책장을 가득 메운 서류... 나는 살아날 생각에 필사적으로 뇌를 뒤지기 시작했지만 전부 허사였다. 힘없이 숨을 뱉듯 말을 뱉을 뿐이었다.

"결국..."

 나는 아까와 같이 숨을 삼켰다. 별 의미 없는 숨이지만 결심의 의미가 큰 듯했다. 피하려고 해도, 인정해야 하는 사실이므로.

"결국... 난 아무것도 남긴 게 없구나..."

 그리고 나는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눈물에 내가 그동안 세상에 남겼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모두 흘린다는 생각으로.




 정신없이 우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며칠일 수도 있고, 몇 달일 수도 있고, 혹은 몇 년일 수도 있었다. 이제 눈물은 흐르지도 않았고, 속은 텅 빈 듯이 공허했다.

"이제 좀 알겠나? 억울하거나 말거나, 결국 전부 허상이지. 모두 존재하지 않아. 참으로 야속하지 않나?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 않나? 하지만 죽어보니 어떻나? 쌓아올린 모래성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기분이, 과연 어떤가?"

"애...애초에 날... 놀리려고..."

 신은 후후, 하고 짧게 웃었다. 그 모습을 누군가는 비웃음이라고 평할 수 있겠지만, 내게는 그저 쓴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이제야 알았나, 하는.

"죽음이란 건, 딱 그 정도야."

 그리고 신은 말을 이어나갔다.

"아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