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1



이름모를 외진 차원. 


그곳에는 작고 평화로운 마을이 하나 있었다. 녹색빛의 풀밭 사이로 뛰어노는 아이들의 머리위로는 시리도록 푸른 하늘이 그 배경이 되어주며, 한 폭의 그림을 자아내어 주었다. 


작지만 소중한 평화... 


과학과 마도 문명 사이에서 얽히지도 섥히지도 않으며, 그저 작은 행복만을 추구해오던 마을의 운명이 하루아침에 뒤바뀐 것은, 어느 날의 새벽이었다. 


본래라면 이른 새의 지저귐과 함께 사람들이 하나 둘씩 깨어나 각자의 일과를 시작했어야 할 마을은, 시뻘건 불길에 휩싸여 있었다. 


골목 곳곳에는 시체가 가득하였고, 주변은 무언가가 터지는 듯한 폭음 소리로 가득하였다. 아아...그저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참혹한 광경이었다. 새벽의 어둠이 가득한 하늘 위로는 새하얀 위용을 뽐내는 함선들이 가득하였다. 


시공관리국... 


내려앉은 어느 건물의 지붕 위에 보이는 불발탄에는 '시공관리국'이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었다.


"이런 것은...아무도 원하지 않았어..."


면식도 없는 그들이, 그들만의 정의와 야욕을 위해 벌이는 '평화의 이행'속에서 아무런 잘못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핏덩이와 육편 조각으로 만신창이가 된 소년은 이를 갈며 하늘을 저주하였다. 


그래...그 소년의, 어느 한 이름없는 소년의 이야기를 하지. 


누구보다도 이상에 불타서 그로 인해 절망했던 남자의 이야기를. 그 남자의 꿈은 풋풋했다. 세상과는 동떨어진 작은 마을에서 평화롭게 살아가며 자라난 간소한 이상...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행복했으면 하고 바라 마지 않았을 뿐. 


모든 소년들이 한 번은 가슴에 품지만 현실의 비정함에 포기하고 버리게 되는 유치한 이상 말이다. 어떤 행복이라도 대가가 되는 희생이 따른다는 그 정도의 이치 정도는 어떤 꼬마라도 어른이 될 때까지 분별할 수 있다. 


그 역시 그들과 마찬가지 였으니... 


하지만, 하루아침에 그의 운명이 바뀌게 되었다. 이유모를 참상을 마주하며, 순식간에 그의 이상은 절망으로 변하였고, 절망은 새로운 이상을 창조하였다. 그는 누구보다도 어리석었는지도 모른다. 어딘가 고장나 있었는지도 모른다. 혹은 성자라 불리는 부류의, 상식에서 벗어난 천명을 띠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희생과 구제이라는 두 천칭에 놓여있다고 말하며… 결코 한쪽의 계량접시를 비워둘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했을 때… 결국 모든 것이 불타 사라지고 말았고, 오직 그만이 홀로 목숨을 구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가족도, 친구도, 이상도...그리고 그의 영혼도...그날부터 그는 천칭의 계량대가 되는 뜻을 굳혔다. 더 많이, 더 확실하게 이 세상에서 한탄을 줄이려 한다면 취해야할 길은 하나다. 


한 명이라도 많은 생명이 놓인 접시를 구하기 위해 한 명이라도 적은 쪽의 접시를 베어버린다. 그것은 다수를 살리기 위해 소수를 몰살시킨다는 행위... 


그것이 바로 '정의'라는 행위... 


다시는 이 세상에 참담함을 탄생시키지 읺겠다는 일념... 


완벽한 균형과 질서를 추구하는 일그러짐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누군가를 구하면 구할수록 사람을 죽이는 기술에 숙달되어 갔다. 몇 겹이나, 몇 겹이나 그 손을 피색으로 물들였지만 남자는 절대 굴하지 않았다. 


수단의 옳고 그름을 묻지 말고, 목적의 옳고 그름을 의심치 말며, 그저 공정한 천칭에 다다를 것이라고... 바로 그 하나의 임무만을 자신에게 내렸다. 절대 목숨의 양을 잘못 재지 않을 것. 하나의 생명에 귀천은 없고, 늙고 젊음도 묻지 말아라. 그것은 정량으로서의 단위일 뿐...그 소년은...아니, 남자는 셀 수 없을 정도의 영겁의 세월동안 사람들을 가리지 않고 구했으며, 마찬가지로 가리지 않고 죽여나갔다. 


"아니야...무언가가 잘못되었어. 이건 아니라고!"


하지만 그는 너무 늦게 깨달았다. 모든 사람을 똑같이 공평하게 존중한다는 것은...결국,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는 사실을. 


그 철칙을 좀 더 빨리 명심했더라면 그도 아직 구원받을 여지가 있었다. 젊은 마음을 얼리고 괴사시켜, 피도 눈물도 없는 측량기계로서 자신을 완성시켰다면 그는 냉담하게 산자와 죽은 자를 끊임없이 선별하는 인생을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그것에 번뇌는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달랐다. 


누군가가 환희하는 얼굴이 그의 가슴을 가득 채웠고, 누군가가 통곡하는 목소리가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원통한 원망과 한탄에는 분노가 따랐으며, 적막한 눈물에는 손을 내밀지 않고선 견딜 수 없었다. 인간 세상의 이치를 초월한 이념을 추구하면서도...그는 너무나도 인간적이었다. 


어느날, 갑작스럽게 발생한 참상으로 부터 탄생한 그의 모순이 그를 몇 번이나 괴롭혔는지 모른다. 


우정도 있었다. 


사랑도 있었다. 


그 사랑스러운 하나의 생명과 생판 모르는 타인의 생명이 천칭의 좌우에 놓였다 해도...그는 결코 그르치지 않았다. 누군가를 사랑함과 동시에 더욱 그 목숨을 타인과 같은 값으로 쳐서 평등하게 존중하고 평등하게 단념한다. 언제나 그는 소중한 사람을 만남과 동시에 잃게 되어 있었다. 


아아...이것을 좀 더 빨리 알게 되었더라면 구원의 여지가 있었을까...? 하지만 이미 늦었다. 그에게는 이제 그가 다다르려고 하였던 '천칭의 심판'만이 남겨져 있을 뿐...


"이렇게해서... 아무도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있다면... 아무도 상처받지 않을 수 있다면... 좋아. 나는 하겠어."


절망과 하나가 된 그에게 '세계'는 손을 내밀어 주었고, 그렇게 되돌릴 수 없는 영원의 계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그 자신의 육신이, 그 자신의 영혼이, 그 자신의 이상이 죽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품고 있던 정의는 영원으로서 잔존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수호자'의 덕목이다.


"이 이상 누군가가 우는 것을 바라지 않아... 그저 모두가 웃을 수 있기를 바랄 뿐이야... 그것을 바라는 것이 죄라면, 그 모든 죄를 나 혼자서 짊어지고 나아가겠어... 그것이 나의 사명이니까."


모두의 미소를 위해 악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고대의 어둠이 그의 부름에 응답하였다.


"그러니, 지켜봐주지 않아도 괜찮아. 나의... 변신(変身)!!"


그리고 지금 그에게 최대의 벌이 드리워져 있었다.


.


.


.


■PROLOGUE #2



"하아...도시는 언제나 시끄럽다니까..."


우미나리 시의 공원 한복판에서 한명의 미남자가 중얼거렸다. 옷은 평범한 와이셔츠에 청바지이다. 다만 그의 용모가 주위사람들의 시선을 끈다. 


주위의 모든 기운을 집어삼킬 듯한 흑색의 머리카락과 사람을 사로잡을듯한 아름다움이 있는 적안...게다가 또렷한 이목구비에 건장한 몸. 여성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하다. 


하지만 그는 그런 시선이 귀찮았던 것일까? 주위의 시선이 귀찮아진 그는 일단 근처 거리에 위치한 호텔로 들어갔다. 대충 체크인을 한 뒤, 호텔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앉는다. 그리고 현재의 상태를 파악했다.


"이번에는 일본인건가. 하지만 뭔가 이상해. 영령(英霊)이 천칭의 부름에 응답한 것이 아니야. 게다가, 분신이 아닌 현신이라니..."


그렇다. 그는 수호자... 세계의 부름을 받아, 수많은 평행세계에 천칭의 부름에 의해 소환되어, 인류의 역사를 긍정하고 질서를 수호하는 역할을 맡고있다. 


위업을 이룬 영웅(英雄)이 아닌, 현실에 절망한 망령의 원망. 영령의 좌(英霊の座)에 도달하지 못한 그는 명백한 '세계'의 집행자, 수호자였다. 


인류 스스로가 멸망을 초래하는 일을 막기 위하여 통상의 영령과는 별개로 '아라야의 억지력'... 즉, 인류 존속의 억지력이 사용하는 영령의 명칭이 바로 '수호자'이다. 영령의 부분집합이지만, 따로 '억지의 고리' 라는 수호자의 좌에 거주하며 영령과 구분된다. 


그를 포함한 수호자들은 모든 평행세계를 통틀어 인류멸망을 가속하는 존재에게 '본체'의 '분신'을 보내 제거하는 일을 한다. 수호자는 멸망을 가속하는 자들을 제거할 때 부족함이 없도록, 아라야의 백업을 받기 때문에 상대를 제거하는 것에 실패할 수 없다. 


똑같이 인류사를 수호하는 영령과 구분되는 점은, 영령은 주로 인류를 멸망시키려는 '외부의 존재'를 막는 일을 한다면, 수호자들은 주로 인류가 인류를 멸망시키는 일을 막는 것이다. 


즉, 인간 개인이나 집단을 배제하는게 수호자의 일이다. 과거와 미래를 통틀어, 전염병 확산, 테러, 전쟁, 핵전쟁 등 인류 스스로 자멸을 초래할 위기는 무한하고, 모든 평행세계를 관리해야 하기 때문에 수호자가 된 이들은 그 대가로 얻은 무한한 시간을 전부 인류를 위협하는 인간들을 배제하는 것에 사용하게 된다. 


그것은 그저...심상을 저버린 살인기계일 뿐. 


수호자가 되면서 의지를 박탈당하기 때문에 인간을 수호하기 위해 인간을 죽일 때 본인이 거부권을 행사할 권리 따윈 없다. 


하지만, 지금은 무언가 달랐다. 


현재의 그는 명백한 '본체'였다. 게다가 그가 배제해야 할 '대상'이 떠오르지 않았다. 문득 머릿속에 들어와 있는 기록들을 읽는다. 전혀 처음보는 새로운 지식이나, 그것들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무구들의 사용법과 같은 것들이... 수호자들의 기본적인 고유능력인 '세계의 지식'을 통해 전부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 지식들은 대체..."


하지만, 난생 처음보는 지식들이 점점 더 머릿속에 가득히 차오르는 이 느낌은 영겁의 시간을 살아왔다고 하더라도 익숙해지지 않는 것 같다. 결국 그는 혼란을 느끼며, 이내 결국 마른세수를 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다.


"뭐, 상관없지. 제대로 수육도 되어있겠다. 일단은..."


침대에서 일어나 창가로 걸어가 도시를 내려다 본다. 


도심을 가득히 메우고 있는 빌딩들과, 도시 외곽의 작은 마을들이 이루어내는 풍경은 대조적이면서도 꽤나 인상 깊었가. 마도 문명과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지만, 그럼에도 제법 번화한 듯하다.


"우선은 밖으로 나가볼까?"


그는 우선 자신이 이 세계에 특수한 방식으로 소환된 이유, 또는 자신이 이 세계에서 해야 할 일에 대한 힌트를 얻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어쩌면 그 과정에서 배제 대상을 마주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밖으로 나간 그는 그대로 거리를 돌아다녔다. 


기록된 지식으로 미루어 보면, 이곳은 일본이기는 하지만, 다섯 차례의 성배전쟁이 일어난 후유키시가 아닌, 아니... 성배전쟁이 일어난 차원이 아닌, 완전히 다른 차원이었다. 


길거리의 도보 위로는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고, 경적과 함께 순식간에 도로를 지나쳐가는 차량들은 일상을 증명해주는 수단이었다.


"신기하군. 이런 평범한 세계에서...'세계'는 대체 무엇을 하라는 것이지?"


아직 이 세계에 소환된 지 2시간도 지나지 않았지만, 솔직히 너무나도 평범했다. 비원이나 마술과는 전혀 연관이 없는 평화로운 세계 같았다. 마치 그가 살던, 이제는 이름조차 기억못할 마을처럼 말이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 사이로, 진홍의 눈동자가 슬픈듯이 빛났다. 그렇게 생각을 하며 가던 중, 그는 무언가가 자신의 허벅지에 부딪혔음을 느꼈다. 


그리고 들려오는 작지만 경쾌한 소리...


"꺄앗..."


"....?"


잡생각을 떨쳐낸 뒤 아래를 보니 휠체어에 앉은 작은 소녀가 시장바구니를 떨어뜨린 채로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길의 모퉁이에서 빠르게 걷고 있었던 그와 부딪혀 떨어뜨린 것 같았다.


"아..."


팔을 뻗어 보지만 휠체어인지라 다시 줏을수가 없는 것 같아 보였다. 그는 한번 한숨을 쉰뒤, 무릎을 굽혀 떨어진 식재료나 생필품들을 주워주었다. 


소녀는 어색한 표준말을 사용하며 입을 열었다.


"아...감사합니다.."


"...됐어."


퉁명스럽게 말하는 그를 소녀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마음의 문을 닫은 지 얼마나 많은 세월이 흘렀을까... 


지금까지의 그에게 있어서 '대인관계'라는 것은, 어디까지나 '거래'를 뜻하였다. 하지만, 오로지 순수함을 목적으로 하는 존재와 마주하였을 때는 어떠한 말을 해야 하는가. 어떠한 행동을 해야 하는가. 그것은 그가 오래전에 버린 인간성과 직결되었다. 


그러는 사이, 얼마가지 않아 텅 비워져있던 장바구니가 다시 채워지고, 그는 그것을 소녀의 손에 쥐어주며 물었다.


"...그런데 너가 왜 장을 보는거지? 부모님은?"


"아...부모님..두분 다 돌아가셔서..."


소녀의 대답에 그는 순간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소녀는 분명 아무일도 아니라는 듯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그 미소에는 분명한 슬픔이 담겨 있었다. 그는 내색한 표정을 짓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럼 같이 지내거나 돌봐주는 사람은?"


"...없어요....."


"...그렇군. 혼자 장을 본건가? 그런 몸을 이끌고."


"네....."


고개를 숙이는 소녀의 눈을 보았다. 쓸쓸함, 외로움이 섞인 슬픈 눈동자. 그 자신과 어딘가 닮아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어째서 저 작은 소녀에게, 영겁의 세월동안 현실의 추악함에 절망한 자신을 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것인가... 


그는 순간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일단은 집까지 바래다주마. 장바구니에 대한 피해보상이라고 생각해라."


"아...아니에요! 또 신세를 질수는...."


"먼 산을 보지 말고, 눈 앞의 언덕을 생각해라."


"에...."


결국 소녀는 그에게 압도당해 장바구니를 끌어안고 끄덕인다. 그 모습에 만족한 그는 소녀의 휠체어를 밀면서 소녀의 집으로 갔다.


"...꼬마, 너는 이름이 뭐지?"


"하야테라고 합니다만...."


"하야테라...좋은 이름이군. 상대방의 이름을 들었으면 똑같이 이름을 알려주는 것이 예의 이겠지만...아쉽게도 나는 이름이 없다."


"이름이 없으시다고요?"


"그래. 예전에 사용하던 이름은 있었지만, 오래전에 잊었지. 뭐, 굳이 부르고 싶다면 '쿠우가'라는 가명이 있으니..."


그녀와는 전혀 상관도 없는 그의 말에 아하하... 하면서 어색하게 웃는 하야테를 보고 이내 그 역시 표정을 풀고 말했다.


"그럼 하야테. 네 집은 어디지?"


"아...네! 저쪽이에요!"


밝게 웃는 그 소녀... 하야테를 보자, 그는 어째서인지 마음이 따뜻해짐을 느꼇다. 


이것이 그들의 첫 만남...피가 아닌 인연으로서 가족이 된 두 사람의 운명(FATE)적인 만남이었다. 이것이 이 이야기의 시작점...




서로 다르면서도 같은 외로움을 느낀 사람들의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