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백색의 기사라고 불리는 사람이 있대.“

 

그리 말한 공주가 물끄러미 자신의 호위기사 윌리엄을 바라보았다.

 

그것도 우리 기사단 중에.“

그렇습니까.“

윌리엄은 그게 누군지 알아?"

잘 모르겠군요.”

흐음……정말로?”


자신을 바라보는 공주의 입꼬리가 살살 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에 윌리엄은 그녀가 단순히 자신을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참고로 순백의 기사란 윌리엄 자신을 말하는 것이다.

 

한숨을 쉬고픈 것을 참으며 윌리엄이 정직하게 말을 이어갔다.

 

"이전 도적단의 습격을 막은 뒤로 그렇게들 부르더군요.“

그런 말까지 듣다니 대단하잖아윌리엄역시 내 기사답네.“

단순한 시정잡배들의 과장된 소문에 불과할 뿐입니다공주님이 귀담아 들으실 필요 없는 이야기입니다.“

시정잡배라니레이디들 사이에서 얼마나 유명한 얘긴데요즘 파티에서 날 보면 사람들이 그 이야기만 한다니까그 유명한 윌리엄 얼굴 한 번 보고 싶다고 얼마나 난리인지.“

…….“

피 한 방울 묻지 않았다면서심지어 검을 휘두르는데도 어깨와 머리에 떨어진 눈이 그대로 쌓여 있었고누군지는 몰라도 별명 참 잘 지었네그치?“

 

 

호기심 가득한 소녀의 모습을 보며 윌리엄은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왕족인 그녀에게 대놓고 불편한 기색을 드러낼 수는 없으니 간접적으로 표현한 셈이었다

 

.“

 

결국 재미없다는 듯이 혀를 찬 공주가 고개를 홱 돌렸다

 

윌리엄은 그녀의 품위 없는 행동에 대해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공주가 어리광을 부리는 대상은 자신뿐이었으니까

 

공주는 자신 앞에서는 항상 애처럼 굴면서도 막상 파티나 중요한 회의장 등 군중들이 모여 있는 자리에서는 언제나 기품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심지어는 친부인 국왕이나 친모인 왕비에게도 헛점을 보이지 않았다왕족의 기품이란 그러한 것이었다혈연 사이에도아니 오히려 혈연이기에 더욱 긴장의 끈을 놓치 않는 삶이었다.

 

하지만 공주도 어딘가 긴장을 풀 사람 정도는 필요한 것이다

그렇기에 아마 자신에게는 이렇게 풀어진 모습을 보이는 것일 터.

 

아마 공주의 귀여움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자신 하나뿐일 것이다

 

윌리엄은 내심 그리 여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공주의 수호기사로써 수행해야 할 임무 중 하나일 터였다

 

물론 그렇다 해도 윌리엄은 그런 것에 우월감을 느끼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리고 저번에 간 파티에서 말이야이번에 레이디 그란데가…….“ 

 

이후로도 공주는 윌리엄에게 얼마 전 다녀온 파티에 대한 이야기를 재잘재잘 풀었다허나 평생 검을 들고 살아온 윌리엄에게 귀족 여식들의 삶이란 다른 세계 이야기였다공주가 말하는 와중에도 윌리엄은 그저 그렇습니까그렇군요등의 대답만 할 뿐이었다.

 

몇 번의 짤막한대화라고 하기 민망한 말들이 무미건조하게 오가고 결국 화가 난 공주가 윌리엄을 방에서 내쫓으면서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됐어나 잘래.“

편안한 밤 되시길.“

 

윌리엄은 공주가 잠들 때까지 문 앞에서 기다렸다

한 시간 후 방 안의 공주가 잠든 것을 확인한 윌리엄은 근위기사 둘을 지키게 하고 자리를 떴다

 

왕의 숙소까지는 꽤 거리가 있었다윌리엄은 붉은 융단이 길게 늘여진 복도를 한참동안 걸었다그의 움직임에 따라 입고 있는 풀 플레이트 메일과 은백색 칼자루가 절그럭 절그럭 소리를 냈다외길이 아닌 미로처럼 복잡한 구조였으나 어릴 적부터 오랫동안 지나온 길이었기에 길을 잃을 염려가 없었다

 

윌리엄의 머릿속에 문득 어릴적 일이 떠올랐다.

 

공주가 어릴 적 자주 함께 숨바꼭질을 하던 그 때궁중의 길은 모두 자연스레 다 외우게 되었다어릴 적부터 기억력이 좋았던 공주였다자신이 술래가 될 때면 찾느라고 고생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윌리엄은 당시 7살도 채 되지 않았던 공주의 웃음소리를 떠올리며 마음이 가벼워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가 옛 일들을 떠올리는 사이 왕의 방문 앞에 도착했다

근위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문 앞에서 통과의례를 마치고 지나 곧이어 두 번째 문이 나타났다두 번째 문에는 지키는 자가 아무도 없었다

 

윌리엄은 일정한 간격으로 총 5번을 두드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중후한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게."

 

윌리엄이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었다.

 

거대한 샹들리에가 웅장한 방을 밝게 비추었다

방문의 앞에서 왕좌까지 펼쳐진 붉은 융단이 길게 펼쳐져 있었다

 

윌리엄은 갑옷 소리가 나지 않게 조용히 융단 위를 걸었다단상 위 황금빛 의자에 앉은 왕의 모습이 점차 가까워졌다

마침내 왕좌 앞까지 도달한 윌리엄이 한쪽 무릎을 꿇었다

 

"공주의 호위기사 윌리엄 폰 그레이가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고개를 들게윌리엄 경."

 

윌리엄이 고개를 들고 왕을 쳐다보았다샹들리에가 환하게 비추는 국왕의 초췌한 안색이 한눈에 드러났다

 

"내가 경을 부른 이유는 다름이 아니네

 

허나 그 목소리만큼은 한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힘에 걸맞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위엄있는 목소리로 왕이 윌리엄을 내려다보았다.

 

경을 부르는 연유는 하나 밖에 없을 테니까그건 경이 더 잘 알 테지."

"공주님 말씀이십니까."

"그렇다네."

 

왕은 한참동안 말이 없었다

윌리엄은 왕이 무언가 망설이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

 

수백 명도 들어올 수 있을 만큼 넓은 방

허나 그럼에도 마치 마구간에 들어온 것처럼 숨이 막히는 정적이 이어졌다

 

한참의 침묵 뒤 다시 왕이 입을 열었다.

 

"우리 님블과 가장 외교관계가 좋지 않은 나라 정도는 자네도 알고 있을 걸세."

 

왕의 말에 윌리엄이 속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공주 이야기를 하는 도중 갑자기 나라간의 외교관계를 이야기하자는 것인가

 

의문을 숨기면서 윌리엄은 답했다.

 

"레이언 소왕국으로 알고 있사옵니다.”

최근 급속도로 악화된 경우는 그렇지허나 과인은 우리의 숙적을 말하는 것일세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싸워온 나라 말이야그런 오합지졸이 모인 소국 따위가 아니라.”

트로웰 말씀하시는 것이옵니까?"

"그렇다네이번에 트로웰과 관련되어 있을 것으로 보이는 사건이 하나 터졌어.”

사건이라 하심은……?”

국경 근처에 유행하는 도적단이 있더군자네가 얼마 전 손을 썼던 그 무리들 말일세.”
 

거기까지 말한 왕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소문은 들었네순백색의 기사라고 한다지?”

그것은…….”

아아놀리는 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말게그저 그런 소문이 돌기에.”

 

놀리는 게 아니라고 하기엔 입가의 미소가 방금 전 공주와 너무도 닮아 있었다

 

참으로 죽이 잘 맞는 부녀로구나

속된 생각을 하는 사이 왕이 말을 이었다.

 

트로웰은 국경이 마주치는 위치에 있지때문에 우리 님블을 싫어하면서도 굳이 시비를 걸거나 하지는 않는다네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고그런데.” 

 

거기까지 말한 왕의 표정이 문득 진지해졌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야자네가 활약해준 덕분에 그 도적단의 잔당들이 국경을 넘어 트로웰로 넘어가려고 했다네아마 트로웰의 불한당들과 합세해서 다시 세력을 키우려 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네그러는 도중에 국경 수비대와 충돌이 일어난 모양이야."

"님블의 수비대 말이옵니까아니면 트로웰의 수비대 말이옵니까?"

"양쪽 모두일세도적단들이 국경을 넘으면서 양쪽 모두에 피해를 주었다네결과적으로 도적단 녀석들은 거의 괴멸한 듯하네만그럼에도 몇몇은 도망쳐서 트로웰로 어떻게 들어간 모양이야하지만 문제는 그게 아닐세.“

트로웰 국경수비대 쪽에서 이야기가 나온 것이옵니까?“

그렇다네.“

 

생각보다 심각해지는 이야기에 윌리엄의 표정도 한층 굳어갔다.

그런 윌리엄의 태도를 살피며 왕이 말을 이었다.

 

도적으로 꾸민 님블의 첩자를 보낸 게 아니냐는 이야기가 트로웰 쪽에서 나왔다네그 말을 들은 님블 쪽 수비대 병사들도 좋은 기분은 아니었을 게야그리고 그걸로 시비가 붙었다네그것도 상당한 수준으로."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은 것이옵니까?"

"우리 님블만 해도 사상자가 200명에 달하네트로웰의 경우 그 배는 될 테고.“

폐하그 정도 숫자라면…….“

지금이야 국지전에 그치고 있다지만 곧 국경 전체가 전화에 휩쓸리게 될 걸세이미 트로웰과는 외교도 수 년 전부터 단절한 상황이고.“

…….“

이 정도까지 이야기했다면 내가 뭘 말하고자 하는지 알겠지."

 

전쟁.




그 두 글자가 윌리엄의 머릿속을 맴돌았다



야겜하면서 남라 채널 머머있나 구경 중이었는데 이런 채널도 있길래 옛날에 쓰다 만 글 좀 끄적여봄

2편은 반응 괜찮거나 야겜 질리면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