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2월 26일


세상은 멸망했다.


지구 온난화?


핵 전쟁?


그런 이유가 아니었다.


그 종말은 어느 순간 갑자기 나타나, 우리 곁으로 순식간에 다가왔다.


종말의 시작은 11월 말부터였다. 


직경이 12km 정도 되는 운석이 12월 말 즈음에 지구에 충돌한다는 소문이 나온 것이었다.


매년 있었던 종말론이었고, 사람들은 전부 다 그 말들을 무시했다.


대신 모두들 크리스마스 휴가니, 수능 점수니, 기말고사니... 하는 일상을 계속 살아갔다.


12월 5일.


난 아직 그날을 잊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20일 전. 상점 곳곳엔 온갖 색으로 빛나는 작은 불빛 장식을 두르고서 캐롤들을 틀어대고 있었다.


사람들은 북적였다. 코로나 사태 뒤 제대로 즐겨보는 연말이니까.


모두가 다 행복했었다. 한 속보가 방영되기 전까지.


에드몬드 역 건물의 거대한 스크린에서 나온 그 속보.


운석이 충돌한다는 것이 사실이고, 종말까지 딱 20일 남았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괴성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고, 빨리 그곳을 도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후자였다.


그곳을 벗어나자마자 휴대폰이 미친 듯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부모님, 친구들, 심지어 몇 년 동안 만나보지도 못 한 동창들까지.


다들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울먹거리며 말해주었다.


마지막 전화가 끊기고, 난 갑자기 우울했는지,


갑자기 공허해졌는지,


그 자리에서 주저앉고 말았다.


그리고 멍하니 하늘을 몇 분을 쳐다보았다.


환각인지 운석이 저 하늘 너머로 희미하게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흰 , 아주 흰 , 부드러운 눈이.


눈은 어느새 내 머리카락, 피부에 닿았다.


허탈하게 웃었다.


지금까지 경쟁이 넘쳐나는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해온 노력.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고통을 이겨 내기 위해 만들어온 우정.


...이 모든 게 한꺼번에 사라져버린다는 거니까.


그 후로도 몇 분을 눈 맞으며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람 아무도 없는 공허한 길을 몇 시간이고 걸었던 것 같다.


그 후 일주일 동안 온갖 일들이 일어났다.


식료품점, 마트는 죄다 동났고, 귀중품점이나 그런 가게들은 죄다 약탈되었다.


경찰들이 막기엔 너무나 많이 그랬기 때문에 경찰들도 막을 수 없었다. 


결국 중앙은행도 약탈자들을 막을 순 없었다.


돈이 바닥에 흩뿌려졌고, 사람들은 그걸 조용히 주워갔다.


뉴스에선 분석 결과도 나왔는데, 운석은 지구 반대편에 추락하지만, 어차피 그 여파 때문에 빙하기가 찾아와 종말 할 것은 똑같다는 분석이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정확히 일주일 후, 12월 12일이었다.


벙커, 즉 지하세계로 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정부가 사람들을 위해 들어갈 수 있는 군용 벙커들을 죄다 열었다는 것이었다. 


수용 가능 인원들은 500만이었다.


다 냉전 시절 지어졌던 벙커들 때문이었다.


하지만 2억이라는 인구 사이에 500만은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다.


즉 단 2%만 생존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신청은 온라인으로 진행되었고, 나도 그 추첨에 참여했다.


내가 배정받은 번호는 487번이었다.


번호는 100번부터 999번까지 있었는데, 각 번호마다 사람들을 배정하고, 당첨된 사람들은 생존하는 방식인 듯했다.


오후 8시, 공영방송에서 추첨이 시작되었다.


원래는 로또가 진행되었어야 할 시간이었지만, 오늘은 이것으로 대체되었다.


그리고 로또는 다음 주부턴 방영되지 않을 것이다.


추첨자가 등장했다.


로또 때와 달리 굉장히 침울한 표정이었고, 그 표정에서도 살아남고 싶다는 간절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추첨 순간이 다가왔다.


첫 번째는 493번.


두 번째는 689번.


세 번째는 210번...


이렇게 숫자들이 호명되기 시작했다.


불과 3번밖에 안 돌렸는데 내 이웃에서 환호성이 들리기 시작했다.


"... 나도 되겠지... 제발..."


계속 숫자가 호명되었다.


그리고 방송 와중에 추첨자의 번호였던 140번이 당첨되었고, 우리는 추첨자가 싱글벙글하는 모습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얼마나 배가 아팠는지.


시간이 1시간쯤 지난 것 같았을 때, 그때부터 슬슬 불안감이 나와 나의 가족을 엄습하기 시작했다.


"이거 몇 번째까지 뽑지...?"


"아마 225번 정도 뽑을걸...?"


"지금 몇 번 뽑았어?"


"저기 쓰여있네. 100번 뽑았다고."


난 내 번호가 적인 종이를 쓱 바라보았다.


"에이, 125번의 기회가 남아있는데 나는 뽑히겠지..." 일부러 밝은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지만 내 불안한 표정은 숨길 수 없었다.


"야, 야, 다시 시작했다."


"네, 139번입니다!"


...로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번호들이 불렸고, 또다시 한 시간이 흘렀다.


"현재까지 뽑힌 번호 185개. 기회는 단 40번."


그때까지 우리 가족은 단 한 명도 생존할 기회를 얻지 못했다.


무심결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야, 넌 살았냐?"


"... 살아야겠지..."


"너 몇 번인데?"


"784번.... 어 잠만.... 와 대박!!!!!"


친구의 목소리가 전화 밖으로 쩌렁쩌렁하게 나왔다.


TV를 쳐다보니 정말 784번이 뽑혔다고 나와 있었다.


"너 몇 번인데?" 친구가 한층 밝아진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487번."


"야, 너 되겠는데? 벌써 4,8이 나왔어!"


TV를 쳐다보니 4,8까지 이미 나와있었다.


이제 7만 나오면 되는 것이었다.


공이 원형 구 사이에서 돌기 시작했고, 이윽고 공 하나가 구 밖으로 나왔다.


"네, 486번입니다!" 6이 적힌 공을 보여주며 추첨자가 말했다.


"엇..." 친구가 머쓱했는지 말했다.


"그... 그래도 넌 뽑힐 거야!"


"됐어, 끊어."


난 너무 희망고문 당해 침울해진 기분을 안고 전화를 매정하게 끊어버렸다. 


"하..."


난 한숨을 내쉬었다.


남은 기회를 살펴보았다. 이제 남은 기회는 20번.


"신이시여..."


뒤에서 엄마가 기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398번..."


"나도 902번 나왔으면..." 내 아버지도 거들었다.


계속 추첨이 진행되었고, 이제 기회는 단 3번.


"여기서 398, 902, 487 이렇게 나오면 웃기긴 하겠다 그지?" 아버지가 애써 웃으며 말했다.


하지만 이미 분위기는 모두 다 죽을 거란 듯 암울해져있었다.


223번째 추첨.


100의 자리를 의미하는 첫 공은 2였고, 여기서 우리 중 한 명은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실이 확정되었다.


난 뒤의 부모님들을 바라보았다.


엄마는 울고 있었고, 아버지도 체념한 듯 공허한 눈으로 TV를 보고 있었다.


224번째 추첨.


100의 자리를 의미하는 첫 공은 9였다. 


아버지가 관심을 가지고 TV를 보았다.


"여보라도 살아요..." 어머니가 흐느끼며 말했다.


그리고 두 번째 숫자는 5.


희망의 꽃은 금방 시들어 버렸다.


그리고, 마지막 225번째 추첨.


추첨자가 이게 마지막 추첨이라고 강조해서 말했다.


첫 번째 공이 굴러갔고, 그 공은 4를 의미했다.


난 그때까지 별 기대를 하지 않고 있었다.


그다음 공은 8.


이제 마지막 숫자만을 남기고 있었다.


"제발 7... 제발 7..."


공들이 구 속에서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곳에서 공이 나오는 데에는 10초밖에 안 걸림을 알고 있었지만, 나한테는 10시간처럼 느껴졌다.


공이 마침내 나왔고, 그리고 그 공의 숫자는...


.


.


.


"네, 마지막 숫자는 487번이었습니다!"



"우와아 아아아 아아!!!!"


내가 소리를 질렀다.


이때만큼 기뻤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뒤에 부모님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챈 것이었다.


"너라도 살아서 다행이다."


아버지가 말하였다. 덤덤한 듯했지만 그 말엔 슬픔이 묻어났다.


"..."


한동안 불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 밥이나 먹을래?"


"... 응."


곧 어머니가 요리를 시작했고, 음식은 완성되었지만, 입맛이 없었다.


식사 시간에도 여전히 불편한 분위기가 맴돌았다.


난 억지로 밥을 위 속으로 욱여넣고, 집을 나왔다.


11시 30분. 자정이 가까워져 오는 시간.


눈 쌓인 거리엔 2%의 축복받은 사람들과, 98%의 시한부 인생인 사람들이 공존하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의 당첨 여부를 물어보았고, 만약 당첨된 사람이 같이 당첨된 사람을 마주했을 땐 서로가 얼싸안았다.


그리고 누군가가 나에게 다가왔다.


"혹시 당첨되셨어요?"


"에...에? 네..."


"오, 진짜요?? 이리로 한 번 와보세요."


그 누군가는 나의 손을 잡고, 나를 어느 곳으로 이동시켰다.


파티가 벌어지는 듯했다.


저 편의 우울하게 좀비처럼 돌아다니는 98%의 사람들과 대비되게 말이다.


"자, 이거 드세요."


로스티드 치킨이 맛있게 놓여져 있었다.


"근데 음식 이렇게 막 써도 되나요?"


"아무렴, 당연히 되죠! 어차피 이 나라 식량을 먹는 사람의 98%가 줄어들 테니까요!"


아무렇지 않게 그런 말을 하는 모습에 난 꽤 소름이 돋았다.


아까도 말했듯이 난 식욕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난 먹는 척만 한 후 다시 그곳에서 나왔다.


그런 하루를 보내고, 또다시 그런 하루를 보냈다.


그 와중에 빌보드 차트가 집계를 중단한다는 뉴스가 떴다.


유튜브에도 "곧 전 죽습니다." "안녕히 계세요." 류의 제목의 유명 유튜버들의 영상들이 인기 급상승 동영상을 메웠다.


드물게도, "전 살았습니다." 류의 영상이 올라왔긴 했지만, 그런 영상엔 싫어요가 보통 좋아요의 1.3배 정도를 차지했다.


뉴스에선 약탈 소식 대신 살인 소식이 즐비했다.


대부분 시한부가 된 사람이 당첨자들을 죽인 사건들이었다.


살인 이유는 다양했다.


너무 나대서, 짜증 나서, 그냥 죽이고 싶어서...


그래서 그런지 난 최대한 조용하게 다녔다.


하루가 지나며 온갖 서비스가 하나둘씩 중단되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1주일이 흘렀고, 크리스마스이브가 다가왔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분위기는 없었다. 우울과 절망 만이 그날을 가득 메웠다.


12월 24일 오후 4시. 난 마지막 대학교 등교를 멈추었다.


그리고 곧바로 오후 8시, 난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네츠먼 벙커에 배정받았으니, 그곳으로 12월 26일 자정 전까지 도착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칼, 화약, 라이터 같은 위험물품들은 검문 때 걸리면 벙커 당첨 명단에서 말소될 테니 절대로 가져오지 말라고 적혀있었다.


또한, 식료품도 첨단 기술과 시드 뱅크를 이용해 충분히 자체 생산할 수 있으니 걱정하지 말고, 의료품이나 인품이나 가져오라고 적혀있었다.


난 확인 후 짐을 싸기 시작했다.


일단 옷들을 잔뜩 넣었으며, 항생제, 연고들도 잔뜩 넣었다.


"네츠 먼 벙커는 꽤 먼 데... 지하철 타고 가야 하나...?"


"야,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아버지였다.


"아, 아빠..."


"저 네츠먼까지 데려다주실 수 있으세요?"


"왜?"


"제 벙커..."


"... 알았다."


"그럼 좀만 기다려 주세요."


"내려가 있으마."


그러고 아버지는 집 밖으로 나갔다.


나도 곧 아버지를 따라갔다.


난 곧 차에 탔다. 시간은 10시. 영원한 이별을 할 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아버지가 라디오를 틀었다.


라디오엔 클래식 음악만이 계속 나오고 있었다.


그러고 텅 빈 고속도로를 달렸다.


1시간이 지나고, 오후 11시쯤, 우린 네츠먼 벙커에 도착했다.


내가 내리려는 순간, 아버지가 내 손을 붙잡았다.


"이거, 가져가라."


"뭐예요?"


"가족사진이다."


내가 겨우 12살이었을 때의 사진이었다. 이 사진 속에선 모두가 행복해 보였다.


"네..."


난 그 가족사진을 챙겼다.


"잘 갔다 와라. 우리 걱정하지 말고." 아버지가 덤덤하게 말했다.


순간 마음이 울컥했다.


다시 볼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리 온."


아버지가 손을 벌렸고, 난 그 품 속에 안겼다.


유독 그 손의 온기가 따뜻하게 느껴졌다.


"자, 가라. 시간이 얼마 없다."


난 그 품 속에 계속 있고 싶었지만, 그 말에 결국 마지못해 차 안에서 나왔다.


"다녀와라."


"다녀올게요!" 슬픔을 숨기기 위해 괜히 소리쳤다.


그리고 아버지의 차는 가버렸다.


이젠 나 혼자밖에 남지 않았다.


"후... 들어가야지..."


검문은 까다로웠다.


그들은 온갖 것을 다 의심했다. 심지어 그들은 가족사진에 뭔갈 숨겨두었을 까봐 몇 분을 보기도 했다.


난 그걸 다 뚫고, 내 방 키를 받았다.


"439호."


난 벙커 속 거리를 걸었다.


확실히 밖보단 그 거리의 분위기가 좋았다.


"덜컥."


난 방문을 열었다.


방 안엔 침대, 세면대와 결합한 변기, 책상 등이 있었다.


교도소 독방과 비슷한 구조였지만, 이곳에 오지도 못하는 사람을 생각하니 이 정도면 괜찮다 생각하기로 했다.


그리고 너무 피곤했는지 곧바로 잠을 청했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마치 훈련소에 처음 왔던 나의 모습 같았다.


겨우 잠을 청할 수 있었던 것은 새벽 4시였다.


.


.



.


.


"아."


일어나 보니 정오였다.


난 배급 식당을 찾으러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벙커 안 모든 사람이 중앙의 TV를 보고 있었다.


나는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보기 시작했다.


잘 보니 운석이 추락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운석이 추락하는 모습을 생중계하고 있었다.


왼쪽 위엔 운석 충돌까지 남은 시간을 기록하고 있었다.


10초밖에 남지 않았다.


도시가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운석은 그곳을 향해 곤두박질치고 있었다.


3초.


2초.


1초.


쾅 하는 소리와 함께 화면이 끊겼고, 난 그 여파를 느낄 수 있었다. 


얼마 후, 화면이 전환되었다.


우리나라였다.


하지만 우리가 기억하던 푸른 우리나라는 없었다.


이젠 먹구름 낀 얼어붙은 나라만이 있을 뿐이었다. 


작가의 말: 3시간 정도 써본 포스트 아포칼립스 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