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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응급환자가 발생해 급히 의사를 찾고 있습니다! 혹시 의사 없으신가요? 의사! 승무원이 우리가 앉아 있는 좌석으로 점점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에 맞춰 내 심장도 빨리 뛰기 시작했다. 갑자기 난기류라도 만나 승무원이 제 자리로 돌아가는 행운이라도 생겼으면 좋겠지만, 그럴 리 없었다. 웅성거리는 승객들 속에서 여자친구가 손을 번쩍 들어 소리쳤다. 여기요! 여기 의사 있습니다! 그와 동시에 내 얼굴은 울상이 되었다. 승무원이 급하게 우리에게로 뛰어왔다. 나는 여자친구의 팔을 붙잡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있지, 내가 고백할 게 있는데 말이야…. 하지만 이미 때는 늦은지 오래였다. 의사 신가요? 아뇨, 제가 아니라 제 남자친구가요. 동시에 여자친구와 승무원, 주변 승객들이 나를 바라봤다. 그래서, 하려던 고백이 뭐냐는 듯이. 나는 마른 침을 삼키며 두 눈을 꾹 감고 말했다. 실은, 나 수의사야.

 

  수의사라고 말하면 돌아갈 줄 알았던 승무원은, 기어코 나를 잡아 끌고 응급환자가 있는 좌석으로 안내했다. 사람도 동물이지 않느냐. 수의사라도 이 비행기엔 당신 밖에 의사가 없다면서. 어쩌다 미국으로 가는 여정이 이렇게 꼬여버렸는지 모르겠다. 경품으로 양도 받은 비행기 티켓이 문제였는지, 저가 항공의 객실이 문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정작 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그러니깐, 나는 의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소개팅에서 만난 여자친구가 너무 마음에 든 나머지 직업을 의사로 속인 것이 화근이었다. 언젠간 사실을 밝혀야지 하면서 여자친구와 만남을 이어간 것이 벌써 2년이 다 되어갔다. 그 2년동안 말하지 못한 비밀이 결국 폭탄이 되어서 나에게 돌아올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응급환자는 객실에 누운 채로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나는 승무원에게 솔직하게 말해야겠다 생각했지만, 생각보다 행동이 더 빨랐다. 괜찮아요. 괜찮을 겁니다. 안정을 취하세요. 가짜 의사인 주제에 왜 환자를 안심 시켜야 한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을까. 나는 환자의 목에 손바닥을 가져다 대고는, 승무원을 바라보면서 얼버무리기 시작했다. 어, 일단 체온 조절을 하기 위해 담요를 가져와 주세요. 기도를 확보하고, 119에 신고하세요. 여긴 비행기 안 인데요? 아, 아무튼 빨리요! 승무원이 사라진 사이, 나는 심폐소생술을 하기 위해 자세를 잡았다. 심폐소생술이 어떻게 하는 거였더라? 나는 대충 깍지를 끼고는 심장을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심장을 압박할 때마다 환자가 억억하는 신음을 냈다. 그리고 환자에게 숨을 불어넣자 환자가 경련하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다 환자가 몸을 벌떡 일으켰다. 세상에, 살아났어! 승객들이 환호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을 환자를 바라보았다. 환자는 충혈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씩씩 거리더니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당신, 일부러 다 알면서 그런 거지!

 

  객실 내부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환자는 계속해서 고래고래 소리쳤다. 조금만 아픈척하면 퍼스트 클래스로 옮겨줄 줄 알았는데, 일이 커져서 환자인척 했더니만. 사람 잡을 일 있어? 갈비뼈 다 박살나는 줄 알았네, 아이고 삭신이야. 다시 객실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담요를 가져온 승무원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나는 두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사실, 저는 의사가 아닙니다. 여자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어 거짓말한 것이 이렇게 커져버리고 말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소란스럽던 객실이 다시 잠잠해져 슬그머니 감았던 눈을 뜨니 승무원이 펑펑 울고 있었다. 승객들 모두 당황스러운 표정이었다. 사실…저도 승무원이 아니에요. 쌍둥이인 언니 몰래 유니폼을 입고 비행기에 탄 것이 그만…. 죄송합니다. 승무원이 자리에 주저앉아 울기 시작하자 승객들 모두 당혹스러운 표정이었다. 승무원 뒤로 여자 친구가 우물쭈물하며 내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있지, 나도 고백할 거 있는데…오빠, 아니. 형. 실은 나 남자야. 뭐? 형 사진을 본 누나가 마음에 안 든다고 나보고 하루만 대신 소개팅 나가달라는 게 그만…. 하루만 만나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형이 의사란 거 안 가족들이 어떻게든 계속 만나라고 해서… 미안해. 비행기에 탄 사람들 모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기장의 안내방송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승객 여러분, 우리는 곧 미국 뉴욕 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모두 자리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응급환자, 승무원, 여자…아니, 남자친구. 그리고 나. 우리는 뉴욕 경찰서에 피의자 신분으로 사건을 진술하기 위해 앉아 있었다. 누가 더 잘못했는지 모호해지는 이 상황 속에서 우리는 서로 말을 아꼈다. 허 참, 기가 막혀서. 경찰이 어이없다는 듯이 신문지를 책상에 던졌다. 신문의 1면엔 우리가 탄 비행기가 담겨 있었다.

 

  '특종, 14시간 동안의 아찔한 비행…가짜 조종사. 어제 저녁 입국한 항공기를 조종한 기장이 사실 면허도 없는 민간인으로 밝혀졌다. 경찰 진술 때, 거짓 경품 이벤트를 수습하기 위해 항공기를 탈취해 이 같은 행위를 벌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