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는 진즉에 떨어졌다.

어슴푸레한 참호안에서 두사람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상대는

있을리 없는 적군도, 상태를 확인하러 나타날 간부도 아닌 

바닥의 눈을 흩날리는 바람이다. 

이맘때의 바람은 수고스럽게도 숲속의 공기를 참호안까지 옮겨온다.

문제는 그 기온이 흉물스럽게 깨진 유리파편같아서 두터운옷째로 두사람을 찢어발기는듯하다.

"이상병님 살아계십니까?"

기수차이도 거의없고 동갑인 선임

괜한 약한소리하기는 싫어서 선임의 안부를 묻는척 이 죽을듯한 추위를 어필해본다.

"곳 죽을것 같다."

"순직하시기전에 맥심 인계인수 해주시지 말입니다?"

"짬찌가 그런거나 보고있는꼴은 참을수없으니 살아야겠다."

두사람 다 아직 농을 주고받을만큼의 정신은 있는듯하다.

 

"너 엄병장한테 털렸다면서?"

은연중 물어올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던 화제. 

나름 대답할 내용도 준비해두었었다.

하지만 막상 물어오니 준비했던 것들이 머릿속에서 꼬여버린다.

"원사님이 시켜서 파일철 정리하는데 엄병장님이 전화로 저한테 심부름 시켰지 말입니다."

선임은 "설마?" 하는 눈빛이다.

"뭔일인지 원사님은 열받아 계시고 그와중에 병장님 심부름 간다고 말하기도 뭣하고..."

"그래서 안갔어?"

"원사님이 시킨일이 있어서 못간다 했더니 엄병장님 열받아서 전화로 쌍욕했지 말입니다."

가라앉았던 서러움이 다시 올라온다.

"거기서 원사님한테 심부름 간다 그랬다간 병장님이 개털릴 분위기였지 말입니다."

선임은 조용히 끄덕였다.

"아니 솔직히 병장님 생각해서 ..."

하고싶은 말들이 많은데 너무나도 억울한데

그 말들이 목이 아닌 눈을 통해 흘러나온다.

왜 이런 유치한 일로 본인보다 어린놈한테 욕을 먹어야 하는건지

그리고 고작 그런걸로 울컥해서 눈물흘리는 자신이 싫어진다.

"고생이네"

선임이 해줄수 있는것이라곤 등을 토닥여 주는것뿐

그 일때문에 선임도 엄병장에게 따로 욕먹었다는것을 알고있다.

그럼에도 아무말없이 있어주는 선임이 고맙기도 하고 감탄스럽기도 하다.

 

"콜록"

흐르던 눈물에서 온기가 사라지니 남는건 추위와 부끄러움 뿐이다.

"아 부끄럽습니다."

그저 사실대로 말해 시원하게 잊혀지길 바랬다.

"야야 하늘좀 봐봐라"

머쓱해서 이상병의 말대로 하늘을 올려다 보니 바람이 닦아낸듯한 하늘에

공기맑은 시골답게 무수한 별들이 빛나고 있었다.

"별이 많지?"

"공기만 좋지 말입니다"

"저게 니 남은 전역일수야"

아아 저 하늘을 표현할 수많은 말들중에 최악의 선택을 하다니 

어찌보면 시간의 잔혹함이 지독하리만치 녹아있는 말이지만

어짜피 선임과의 기수차이도 거의 없으니 피장파장인거다

그러하기에 아주 조용히, 조용히 읊조렸다.

"에라이 개새끼"

 

-end-

 

 

군시절 경험을 각색해 보았습니다.

난생 처음 써보는 거라 많이 어색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