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고등학교 때 일이었다. 어느 때나 다름 없이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와서 가방을 의자에 내려놓는다. 가방 속에 있던 자습서를 골라 정리하던 중 책상 위에 놓여져있던 필통이 바닥에 떨어졌다. 필통을 다시 주우려고 고개를 숙여 손을 뻗는데, 책상 밑에 있는 서랍에서 여지껏 내가 보지 못한 책 한 권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책을 호기심에 한 번 뽑아보았는데 책이 아니라 파아란 클리어화일이었다. 표지에는 '삶. 그리고 추억' 이라고 단정한 글씨체로 적혀져 있는 색 바랜 리본 모양의 종이가 투명한 고정 판에 넣어져 있었다. 나는 그 화일을 열어 찬찬히 살펴보았다.

 

화일에는 25년 여 전, 아버지의 학창 시절 때 있었던 사진들이 가지런히 넣어져 있었다. 아버지께선 시골에서 사셨었는데, 계곡에서 찍은 사진, 산에서 찍은 사진, 친구들과 함께 수학여행에 가서 찍은 사진들과 할머니와 같이 찍은 사진도 있었다. 군대에서 편지를 쓴 것과, 아버지가 모으셨던 기타 악보들도 나란히 놓여져 있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옛날 모습은 지금의 얼굴과 똑같았는데, 여러 면에서 비교해 보니 웃음이 큭 나올 때도 있었다.

이 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사진이 있었는데, 아버지가 통기타를 들고서 바위 위에 앉아 혼자 연주를 하고 계셨던 사진이었다. 그 사진 속에서 풍기는 형용할 수 없는 옛날에 있었던 기억들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나는 점점 더 사진에 몰입해가고, 내 옛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내 아버지께서는 오로지 자식들을 위한 삶을 살아오셨었다.

아침에 일찍 나가셔서 저녁 늦게 돌아와, 힘든 표정으로 어머니의 품 안에 안기는 모습을 내 어렸을 때 잠 자기 전 종종 보았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트럭으로 물품을 납품하시고, 출장을 다녀오실 때도 있었는데 아버지께선 힘드신 와중에서도 항상 우리들에게 보여주시는 웃음만은 잃지 않으셨다.

내가 어렸을 때, 해야 할 일을 미루거나 거짓말을 했었을 때 아버지께선 나를 호되게 혼내셨다. 비록 엄하신 아버지였지만, 매를 때리시고 나서는 항상 나의 종아리에 약을 발라주시며 안아주셨던 기억이 났다. 점점 가슴이 미어져가기 시작했다.

내 사춘기 시절, 중학교 때 철 없이 아버지의 말을 불순종 했었던 기억이 났다. 아버지에게 말대꾸를 했었을 때도 있었고, 지갑 속에서 돈 몇 만원을 훔쳐 Pc방에서 친구들과 게임을 했었을 때도 있었는데 아버지께선 그런 나를 전부 받아주셨었다. 아버지께서 잠 자시던 도중 밤 중에 은연 내쉬는 탄식을 들은 이후, 나는 양심에 찔려 내 잘못을 아버지께 자백할 수 밖에 없었다.

아버지는 그러한 나도 모두 용서해주셨다. 오히려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맙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내가 항상 고민이 있었을 때면 나에게 먼저 말을 건네 주셨었다. 

 

하지만 그런 아버지는 이제 점점 늙어가시고, 더 쉽게 지치시게 되었다. 나는 아버지의 키를 이미 넘어선지 오래다. 아버지의 손과 얼굴에 한 겹씩 생기는 주름을 아프신 팔 다리를 주물러 드리면서 알게 되었던 것 같다.

어느 곳에서 들은 것만 같은 대사.

 

아버지의 어깨가 나의 어깨보다 작아 보이게 될 때, 자식은 아버지의 마음을 한 층 더 알아가게 된다. 라고.

이제는 조금 알게 된 것 같다. 아버지의 어깨는 때때로 나의 어깨보다 더 작아 보인 다는 것을. 고된 일상에 지쳐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표정에서 느껴지는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아버지, 감사합니다.

 

마음 속으로 인사를 남기고 나는 화일을 덮었다. 그리고 베란다에 가서 한껏 바깥 바람을 쐬고 있었는데, 옆에 보니 통기타가 놓여져 있었다. 그 기타는 내가 사진에서 본 통기타와 똑같은 것이었다. 오래간만에 한 번 연주나 해 볼까. 그 몇 십년 된, 낡아보이는 통기타를 들고 소파에 앉았다.

최근에 조율한 기타였는지, 선을 팅겨보니 소리는 잘 났다. 그리고 떠오르는 가물가물한 기억으로, 아버지가 나와 손을 맞잡으며 하나씩 알려주셨던 코드로 내가 알고 있는 곡들을 떠올렸다.

아버지께선 어머니에게 프로포즈를 하셨을 때, 그리고 바다에 함께 여행을 갔을 때 어머니에게 연가를 항상 통기타와 함께 불러주셨다고 했었다. 이거나 한 번 불러볼까.

팅. 띵. 오래간만에 치는 거라서 코드를 바꾸기가 쉽지는 않았지만, 어설프게나마 한 음씩 나는 연주해나가기 시작했다.

 

"비바람이 치던 바다~ 잔잔해 지면~ 오늘 그대 오시려나~ 저 바다 건너서..."

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조용히 부르니 사진 속에 있었던 아버지의 청춘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청춘은 지금, 시대를 뛰어 넘어서 지금의 나에게로 왔다.

아버지의 마음이 통기타를 통해서 나에게 전해지는 것만 같았다. 눈가가 왠지 모르게 촉촉해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눈물 한 줄기가 땅에 닿으며,

 

"저 하늘에 반짝이는 별빛도 아름답지만, 사랑스런 그대 눈은 더욱 아름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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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의 자식을 이런 인간이 되게 하소서.

 

약할 때 자신을 잘 분별 할 수 있는 힘과

두려울 때 자신을 잃지 않을 용기를 가지고

정직한 패배에 부끄러워 하지 않고 태연하며

승리에 겸손하고 온유할 수 있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그를 요행과 안락의 길로 인도하지 마시고

고통의 길에서 항거할 줄 알게 하시고

폭풍우 속에서도 일어설 줄 알도록 해 주소서.

 

그의 마음을 깨끗이하고 목표를 높게하시고

남을 다스리기 전에 자신을 다스리게 하시며

미래를 지향하는 동시에 과거를 잊지 않게 하소서.

 

그 위에 유머를 알게 하시어 인생을 엄숙히 살아가면서도

삶을 즐길 줄 아는 마음과

자기 자신을 너무 드러내지 않고 겸손한 마음을 갖게 하소서.

그리고 참으로 위대한 것은 소박한데 있다는 것과

참된 힘은 너그러움에 있다는 것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소서.

 

"그리하여, 그의 아비의 헛된 인생을 살지 않았노라고 나직이 속삭이게 하소서."

 

-아버지의 화일 속에 있었던, '맥 아더 장군의 기도'라는 제목의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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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처음 써 본 글이라 많이 부족합니다.

이런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너무나도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