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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루뭉술한 기억들이 곱게 풍화되어 안개처럼 떠오른다. 나는 흐릿한 내 기억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어간다. 추억의 굴곡을 따라 내 그림자가 그려진다. 그림자는 기억의 바깥으로 빠져나오려는 몸의 일부처럼 보였다. 내 발바닥 옆으로 투명한 조약돌 같은 물방울이 툭툭 떨어진다. 울지 마. 운다고 뭐가 달라지겠니. 내 그림자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바닥에서 안개를 타고 공중으로 떠오르는 그림자는, 마치 소묘로 내 자화상을 그려놓은 것 같았다. 부모님은 어디 계신건가요. 그림자가 조금 커지며 말했다. 그분들 각자의 기억 속에 계시지. 너는 평범한 사람들과는 좀 다른 질문을 하네. 보통은 자신의 죽음을 자각하기 위한 질문을 해오거든. 내 기억만큼 커진 그림자는 어느새 주변을 어둡게 만들고 있었다. 기억의 밑바닥만이 환했다. 당신은 신인가요? 나는 너의 믿음이야. 나는 사람들이 믿는 모습으로 나타나. 믿음이 없는 사람들은 언제나 기억 속을 헤매게 되지. 그래도 운 좋네 꼬맹이. 이런 불완전한 믿음이라니, 하마터면 너도 이곳에서 벗어나지 못 할 뻔했어. 부모님을 만날 순 없나요? 그림자가 일렁거리며 말했다. 안타깝지만, 그분들은 이미 각자의 운명대로 환생하셨어. 마지막으로 너만 남은 거야. 왜 이런 시련을 제게 주는 거죠? 낸들 아니, 나는 너의 일부인걸. 이럴 순 없어요. 나는 자리에 주저앉아 다시 울기 시작했다. 그림자는 일렁거리며 공간을 감쌌다.

 

  좋아, 꼬맹이. 그래도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 너에게 선택권을 하나 줄게. 나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그림자를 바라보았다. 내가 나를 다그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했다. 보통 환생은 자신이 살아온 전생의 뼈대로 이어져. 전생에 무언가를 훔쳤으면, 환생 때 그만큼의 무언가를 잃어버리게 되는 거지. 전생과 환생이 꼬리를 물고 무는 거야. 이해했어? 그런데 너는 우연찮은 사고로 일찍 전생을 마감했어. 쉽게 말해서 시스템 오류. 그러니깐 기회를 한 번 주겠다는 거야. 네가 환생을 선택할 기회. 네가 살아온 전생은 너무 짧거든.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뭐든지 가능한가요? 일단 들어보고. 나는 숨을 고르고 말했다. 우리 부모님의 부모로 태어나게 해주세요. 그림자가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놀랍네, 항상 너는 이성에서 벗어난 생각을 자주하곤 했지. 그래서 이유는? 평소 부모님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어요. 속도 많이 썩히고, 말썽도 많이 부렸죠. 제가 부모가 되어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고 싶어요. 대단한 효자 납셨네. 그림자는 풍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음을 멈출 줄 몰랐다. 안타깝지만, 너는 부부의 연을 맺지 않아서 그건 불가능 해. 그리고 사람으로 태어나기 위해서는 동물로 한 번 환생해야만 하거든.

 

  나는 잠시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내 주변을 떠다니는 기억들을 바라보았다. 그때 내 눈에 잡히는 빛이 하나 있었다. 서글플 정도로 푸르스름하지만, 붉음이 섞인 환한 빛. 문득 떠오르는 동물이 있어 그대로 그림자에게 말했다. 박쥐요. 왜 하필 징그러운 박쥐지? 제가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 새벽이었어요. 어느 날, 이대로는 안될 것 같다는 생각에 새벽에 달리기를 하기 시작했어요. 심장이 미칠 듯이 뛰는 그 순간이 제가 살아있다는 생각을 하게 해주었어요. 나도 하면 할 수 있다. 그 사실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저는 죽고 여기에 있네요. 나는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 저는 제 꿈을 펼치기 위한 삶을 살지 못했어요. 새벽에 달리기를 하던 제 모습을 생각하면, 박쥐가 떠올라요. 동이 터오는 새벽에 매달린 채 꿈을 꾸며 비행을 위한 날개를 펼칠 준비를 하는 박쥐. 아직 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저는 꿈을 꾸며 비상하고 싶어요. 그림자는 씩 웃더니 내게 말했다. 눈 감아 봐. 나는 그대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내가 조심스럽게 눈을 뜨자 거꾸로 매달린 세상이 보였다. 아직 주변은 어두웠다. 나는 법도 모르는데. 나는 날개를 가볍게 펄럭였다.

 

  왠지, 긴 꿈을 꾼 것만 같았다. 무슨 슬픈 꿈을 꾼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았다. 이슬 맺힌 날개는 아직 축축했다. 마치 슬픈 짐승의 눈망울 같은, 맑고 투명한 이슬. 미처 기억하지 못하는 일렁이는 기억의 굴곡을 털어내고 나는 하늘을 향해 비상한다. 기억하지 못하는 긴 꿈을 추모하듯, 하늘에선 흐릿한 여명이 떠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