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도 님의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의 배경을 가져왔습니다.


여러분은 '가을'하면 뭐가 떠오르세요? 가을이 풀이 없어서 먹고살기 힘들다고요? 음, 당신은 분명 헤게모니아 사람이군요. 바이서스 산 밀을 미리 사재기 해야 한다고요? 훌륭한 일스의 국민이군요. 가을이 없다고요? 경비병! 여기 자이펀 인이다!


....음, 얘기가 좀 옆으로 새버렸는네요. 여튼 당신이 바이서스 사람이라면 당연히 '마법의 가을'을 떠올리실 것 같군요. 루트에리노 대왕의 영광의 7주 전쟁이 일어난 그 때. 이래도 모르신다고요? 음, 당신의 지적수준이 크게 의심되지만, 그래도 설명을 해드리죠. 쉽게 말하면 누구나에게, 살면서 한 번은 온다는 마법 같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보통 사람들은 그 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지나치겠지만, 그 시간 안에 있음을 알아차린다면 뭐든지 이룰 수 있는 시간이라고 하죠.


그런데 왜 그 계절이 가을이냐고요? 사실 그렇잖아요. 가을이란 시간이 정말 마력이 있는 시간이라는 거. 무뚝뚝한 사람이라도 한 번은 감정에 푹 빠져들어서 자유로이 흔들리게 되는 계절. 생성과 소멸, 그리고 탄생과 죽음이라는 극단의 중간에 서있는 그런 계절. 저물어가는 한 해의 황혼인 계절이잖아요. 아마 그래서 그런게 아닐까요? 


어쨌든, 오늘 할 얘기는 평범한 한 소년의 이야기입니다. 소년은 중부대로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있는 마을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중부대로를 걷다 지친 사람들이 잠시 쉬러오는 마을이었죠. 그날도 소년은 여관에서 쓸 나무를 조각내고 있었어요. 특별할 것 없는 그런 날이였죠. 네, 그  사람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에요. 가을을 닮은 사람이라고, 소녀를 처음 본 소년은 생각했어요. 밝은 밀빛 머리칼은 햇빛에 비치면 황금으로 빛났어요. 푸르른 눈동자는 맑고 높은 가을 하늘을 담은 듯 했죠. 소녀는 여관에 며칠 묵어가는 행상인의 딸이었어요. 


그날부터 소년은 굉장히 다른 사람이 됐어요. 새벽같이 일어나서 할 일을 끝냈죠. 이유요? 당연한거 아닌가요? 소녀하고 놀려고 그랬죠. 둘은 항상 마을 뒤편에 있는 야트막한 언덕에 올랐어요. 소녀가 황금빛 밀이 물결치는 걸 보는게 좋아했거든요. 소녀가 멍하니 들판을 보고 있는게 소년은 항상 불만이었어요. 말은 못했지만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린 소녀는 소년의 뚱한 얼굴을 보곤 물었어요.


삐졌어? 


아니.


소년의 그 얼굴을 봤다면, 누구라도 웃었을 거에요. 그만큼 소년은 누가봐도 삐진 얼굴이었으니까요. 그 대답을 들은 소녀는 깔깔거리며 웃었어요. 누렇게 너울거리는 바다를 스쳐온 고소한 내음을 머금은 바람이 소녀의 청청한 웃음소리를 스쳐 높은 하늘로 퍼져나갔죠. 아름다운 나날이었어요. 


물론 그 날들이 오래가진 않았어요. 소녀는 떠나야하는 사람이잖아요.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었어요. 소년은 가만히 서서 소녀가 멀어져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했죠. 좋아한다고, 잘 가라고 말하지 못했어요. 입을 때면 그대로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기 때문이었죠. 그렇게 지평선 너머로 행렬이 넘어갈 때 까지 가만히 서서 하늘만 비스듬히 바라보던 소년은 그제야 주저앉아 눈물을 터뜨렸어요. 며칠을 앓고난 뒤 깨어난 소년은 멍하니 앉아 생각했죠. 아, 내 마법의 가을은 이미 가버렸구나.


루트에리노 대왕을 꿈꾸던 소년은, 그렇게 자신도 이미 지나버린 가을을 붙잡으려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했다는 걸 알았죠. 소년의 첫사랑은 끝내 가버린 마법의 가을과 함께 끝이 났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