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님, 일어나세요.”

 

커튼을 걷으며 말하는 도로테아의 손짓에, 밝은 햇살이 창 너머로 쏟아져 들어왔다.

 

얼굴을 비추는 햇살을 가리기 위해 채원이 손을 뻗었다.

 

“벌써 ......?”

 

“저하께서 기다리십니다.”

 

“조금 더 기다리라고 해”

 

그렇게 말한 채원이 이불을 그러모아 쥐고선, 머리까지 덮었다.

 

“조금 전에도 그렇게 말씀 하셨다구요.”

 

그렇게 말한 도로테아가 이불을 걷었다.

 

“도로시, 나 정말 피곤해 .......”

 

채원이 빼앗긴 이불을 원망스럽게 바라봤다.

 

투정 부리듯 베개에 머릴 파묻은 채원이 생각에 잠겼다.

 

정말 어렵사리 트인 말문에, 당장의 의사소통은 해결됐으나, 몇 주 전부터 느껴지는 피로감과 맞지 않는 음식들이 자신을 좀 먹었다.

 

매번 밤마다 찾아오는 바실리오스도 채원을 힘겹게 했다.

지치지도 않는지, 잠시 요양을 위해 별궁을 찾은 것도 무색하게, 하루 멀다하고 찾아오는 그의 열정에서 애정도 느끼지만, 지금은 그저 부담스러울 뿐이니까,

 

말문이 어느 정도 트일 무렵, 그가 돌연 승마를 가르쳐준다며 그녀를 데리고 숲 속으로 나섰다.

 

처음 탔을 때 보다 어색하진 않았지만, 운동 하나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자신에게 승마는 역시나 버거운 일이었다.

 

이리저리, 그저 손짓 하나와 입소리만으로 말을 모는 그의 모양새가 신기하다.

 

“엘피다”

 

채원이란 이름을 두고서 그는 그녀를 그리 부른다.

 

바실리오스의 웃는 눈이 붉은 노을 아래에, 반짝였다. 

 

그 눈은 선명한 갈색 빛이었고 포부로 가득했다.

 

“엘피다, 나와 결혼해다오.”

 

그가 뒤에서 안아왔다.

 

“엘피다,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사랑했다.”

 

첫 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더듬는 기억 사이로, 그가 강제로 자신을 품은 날을 떠올렸다.

.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니, 확신할 수 없다.

 

그의 입에 실린 말들이 진실일지 아닐지도 알 수 없다.

 

하지만, 이 낯선 곳에서 기댈 곳 하나 없는 자신이 유일하게 기댈 수 있을 사람이 그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다.

 

고민하는 채원의 모습에, 바실리오스가 단검으로 손바닥을 긋는다. 

 

붉은 피가 새어나왔다.

 

채원이 놀라 바라보자, 바실리오스가 꺼내든 손수건으로 피를 닦더니 그걸 채원에게 건넨다.

 

“내 피로, 맹세하겠다.”

 

피에 담긴 의미, 그가 그걸 걸고서 채원에게 맹세했다.

 

도대체 자신이 그에게 무엇이기에, 이토록 원하는 걸까?

 

채원이 피 묻은 손수건을 움켜쥐었다.

 

그에 대한 감정이 확실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그를 밀어낼 수 도 없다.

 

 

도로테아의 목소리가 상념에 잠긴 채원을 현실로 끄집어냈다.

 

“저하 드십니다.”

 

말을 마친 도로테아의 손짓과 함께 문이 열리고 바실리오스가 들어섰다.

 

기다리다 못해 찾아온 모양새의 바실리오스가 채원에게 성큼 성큼 다가갔다.

 

“엘피다”

 

걱정 어린 목소리가,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어디가 아픈 것이냐”

 

“속이 좀 안 좋아요.”

 

자신이 아픈 것처럼 끙끙 거리던 바실리오스가 침대 맡에 앉아, 조심스레 채원의 손을 쥐었다.

 

“의원을 부르겠다.”

 

그렇게 채원의 머릴 쓰다듬던 바실리오스가, 뒤에 시립한 시종을 채근했다.

 

“진즉에 불러야 했는데”

 

불안한 그의 목소리가 초조했다.

 

날을 더 해 갈수록, 초췌해지는 채원의 모습이 그를 불안하게 만든다.

 

한사코 의원을 거부하던 채원이 원망스럽다.

 

자기 맘도 모른 채, 돌아누운 채원을 바라봤다.

 

채원의 시선이 창밖을 향했다.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잠시 채원을 진찰하던 의원이 바깥 회랑에서 바실레오스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살짝 미열이 있으신 게, 몸살을 앓으시는 것 같기도 한데 ......” 살짝 뜸들이던 의원이 말을 이었다.

 

“도움이 될 만한 약들을 처방 하겠습니다.”

 

그리 말을 마친 의원이 황급하게 그곳을 벗어났다.

 

 

희멀건 죽 같은, 낯 선 음식의 생김새가, 목으로 넘어갈 것 같지 않아보였다.

 

바실리오스가 걱정 어린 눈으로 그것을 뜨더니 채원의 입가로 가져 간다.

 

코앞에 올라오는 냄새가 메스껍다.

 

원래도 입맛에 잘 맞지 않았지만, 오늘은 유난히 더 심했다.

 

들이민 숟가락을 무시하고 고갤 돌려 창밖을 바라보자, 바실리오스가 한 숨 쉬며 말했다.

 

“먹어라”

 

“못 먹겠어요.”

 

“먹지 않으면 버티지 못 버텨”

 

“하지만 못 먹겠는 걸요.”

 

“그래도 .......”

 

계속 싫다고 하는데도, 먹어보라며 권하는 바실리오스에게 짜증이 치밀어 오른다.

 

저도 모르게 움직인 손이, 상에 놓인 그릇을 밀쳤다.

 

보기 좋게 나뒹구는 그릇과 함께 그릇이 담고 있던 죽이 쏟아져 바실리오스와 바닥을 더럽혔다.

 

채원이 말했다.

 

“혼자 있고 싶어요.”

 

숟가락을 거둔 바실리오스가, 시녀들을 부르자, 그녀들이 황급히 바닥에 쏟아진 죽을 치웠다.

 

이윽고 자신을 슬프게 바라보던 그가 방안을 떠나고, 마침내 다시 혼자 있게 된 채원이 다시 생각에 잠겼다.

 

스스로도 종잡을 수 없는 행동을 하는 자신 이상하다.

 

배를 매만졌다.

 

이상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친다.

 

도로테아를 불렀다.

 

 

들어선 도로테아에게 채원이 말했다. 떨리는 목소리가 바람 맞는 쥐만큼이나 작았다.

 

“도로시”

 

“네, 마님”

 

“나, 이상해”

 

말하며 배를 쓰다듬는 채원의 행동에, 도로테아가 되물었다.

 

“네?”

 

“아무래도 생긴 것 같아”

 

채원의 눈길이 도로테아를 떠나 자신의 배를 향했다.

 

가까이 다가온 도로테아가 채원의 손을 붙잡았다.

 

“언제부터요?”

 

“모르겠어, 하지만 달거리 안한지도 꽤 됐으니까”

 

채원이 뜸 들이더니 말을 이었다.

 

“말해야 할까?”

 

침울하게 말하는 채원을 도로테아가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물론이죠. 경사스럽지 않으신가요?”

 

기뻐하는 도로테아의 물음에 채원이 속으로 말을 삼켰다.

 

‘모르겠어’

 

“말하기 힘드시면 제가 직접 .......”

 

“아니, 내가 할게”

 

답답한 속마음을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어 도로테아에게 말했지만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단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도로테아를 다시 밖으로 내보내고 혼자 남은 방안에서 채원이 손으로 배를 쓸었다.

 

그와의 무분별한 행위가 불러올 일 정도는 예상했지만, 예상했음에도, 불안한 생각이 떨쳐지지 않는다.

 

“너를 사랑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