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의사항!*

이 소설에는 종교적 소재가 들어갑니다.

중립을 최대한 지키고 논란이 될만한 내용은 최대한 배제할 예정입니다만,

혹여나 불편하시다면 뒤로 나가주십시오.

감사합니다.




***


적막감.

눈을 떴을 때 느껴진 건 적막감이었다.

소리가 없다.

매일매일 아침마다 쇠를 두드리던 소리가 나지 않는다.

온도가 없다.

용광로와 화로에서 퍼져나오는 막대한 열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누나가 없다.

언제나 나의 옆 침대에서 책을 읽다가 내가 잠든 걸 지켜보고서야 잠들던 누나가 없다.


"...누나?"


침묵. 너무나도 차가운 침묵이 느껴졌다.


사악.

소년이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일어나자, 침묵은 더욱 크게 다가왔다.

침묵은 공허함이 되어 소년을 찌르고 있었다.


"......"


소년은 말 없이 일어나 움직였다.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는 듯이.

소년은 창고로 향했다. 그리고 이상함을 느끼고 말았다.


"...어째서 창고가 열려 있는 거야."


늘 닫혀있는 곳.

그녀가 직접 열고자 하지 않으면 열리지 않는 곳.

소년은 그걸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가장 먼저 창고로 향했다.

하지만, 창고는 열려 있었다. 그리고 비어 있었다.

소년이 기억하던 모습은, 창고의 벽을 빼곡히 채운 수많은 외날검이었다.

하지만, 거치대는 죄다 바닥에 떨어져 있었고, 검은 한자루도 보이지 않았다.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풀썩.

자기도 모르게 무릎을 꿇은 소년이 떠올린 생각은 절망이었다.

어렸을 적, 산사태에 의해 부모를 잃고, 누나에게 거둬져 살아왔다.

슬퍼하는 소년을 거두고, 위로하고 보살펴주었다.

자신이 소년의 부모를 대신하겠다는듯이 거대한 사랑을 주었다.

부모님이 그립지 않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매일이 그리웠다.

하지만 견딜 수 있었다. 부모님이 주신 가르침, 세상은 언제나 양면이 있으며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는 이야기.

부모님을 잃은 건 너무나도 큰 고통이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의 가르침이 소년을 붙잡았다.

누나는 그 가르침에 확신을 주었다.

고통이 있는 만큼 긍정이 있다고.

그렇게 소년은 누나를 두번째 부모로서 받아들였고,

그렇기에 더욱 슬프고 비참했다.

세상 누구도 부모를 두번 잃기는 바라지 않을테니까.


- 에텔. 에텔. -

"...누구야?"


무릎 꿇은 채 눈물로 바닥을 적시던 소년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소년, 에텔은 무의식적으로 반문했다. 누구인지도 모르면서도, 멍청하게도.

창고에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누나를 알 거라는 생각을 하였다.

하지만 사람은 없으니. 누가 말한 것일까.


- 네 앞에. 창고 끝에 있는 상자를 봐. -

"상자...?"


의문의 목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자,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나무 상자가 보였다.

그리고, 상자를 눈치채자마자, 목소리에 대한 의심이 들었다.

목소리는 너무나도 맑고 선명했다.

그래. 마치, 인간의 것이 아닌 것 처럼.


- 무섭겠지. 곁에 있던 누나가 갑자기 사라졌으니. -

"...네가 어떻게 아는데."

- 봤으니까. -

"...봤다고?"


하지만, 이어진 말에 에텔의 의심은 날아갔다.

그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생각.

누나를 찾고 싶다는 마음.

그것이 의심을 밀어내고 그를 상자로 향하게 만들었다.


"...너는 누구야."

- 나는 검이야. -

"...검이라고?"


상자를 붙잡고 건넨 말에는, 믿지 못할 말이 돌아왔다.

세상 천지 어디에 말하는 검이 있다는 것인가. 하지만...

상자의 크기는 누가 봐도 장검 한 자루를 넣을 크기였다.

더 큰 것이 들어있을 리 없었다.


- 열어봐. 나는 너를 해치지 못해. -

"...누가 그걸 믿을 수 있겠어?"

- 너희 누나, 히파이스 아카샤의 이름 앞에 맹세하지. -

"...알겠어."


상자를 열라는 말에 다시금 자리를 채운 의심.

하지만, 그 의심은 뒤에 들려온 말에 의해 녹아 사라졌다.

대륙의 기둥 천축, 그 천축에서 살아가는 영웅의 일족 아카샤 가문.

그 가문의 정점이자, 유일하게 아카샤라는 성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

12대 아카샤, 히파이스.

이 땅에서 아카샤의 이름 앞에 맹세한다는 것은, 결코 깰 수 없는 약속의 증명.

초대 아카샤. 대마법사의 규칙이 그것을 강제한다.

그렇기에, 믿을 수 있다.

에텔의 의심은 이 시점에서 사라졌다.


딸깍, 끼이익.

상자를 열자, 벨벳으로 감싼 거치대 위에 놓인 장검이 보였다.

평범하지만, 균형이 완벽해 사람의 눈을 잡아끄는 검.

목소리가 말한 대로, 상자에는 검이 들어 있었다.


- 잡아. 위험하지 않아. -

"......"


말소리가 들려올 때마다 폼멜 끝에 붙은 보석이 반짝였다.

그 빛을 응시하며, 손잡이를 양손으로 틀어쥐고서 들어올린 검은, 가벼웠다.

아니, 가벼운 게 아니라... 손잡이를 잡는 순간 힘이 강해졌다.

왠지 모르지만, 그렇다고 알게 되었다.


- 다시 소개하지. 내 이름은 프리미티브. 번호는 1번. -

"1번? 설마... 넘버즈?"

- 맞아. 네가 말하는 넘버즈가 특수한 힘을 지닌 10자루의 검들을 말하는 거라면. -


믿을 수 없는 일이 또 다시 일어났다.

넘버즈는, 당대의 아카샤. 히파이스가 대륙의 균형을 위해 총 9개를 만들어 4개의 나라에 나눠줬다는 보검.

하나하나가 도시를 간단히 파멸시킬 힘을 지녔다고 하는 궁극의 냉병기.

No.1, 한 자루는 히파이스 자신이,

No.2부터 No.9까지는 4개의 나라에게 2개씩.

그렇게 나눠진 9개의 검이 바로 넘버즈다.

그런데, 분명 히파이스 누나가 가진 걸로 알고 있던 1번이, 이렇게 내 손에 쥐어져 있다.

...그 말인 즉 슨.


"...누나는, 어떻게 됐어?"


에텔은 고개를 숙였다. 프리미티브가 이렇게 자신의 손에 있다는 것은, 원래의 주인이 이것을 소지하지 못할 상황이라는 것.

그리고, 대장장이인 히파이스가 검 한자루를 더 챙기지 못할 리가 없다.

그렇기에 내려지는 결론.

그것은, 생각하기도 싫은, 동시에 대륙 누구도 믿지 못할 결론.


- 살아 있어. -

"뭐!?"


그 생각은 정면에서 분쇄당했다.

그것도, 히파이스가 만든 검에 의해서.


- 히파이스, 이하 제작자는 잠행을 떠났어. 내게 한가지 부탁을 남기고서 말야. -


히파이스는 살아있다. 그녀의 검이 그것을 증명한다.

동시에, 그녀가 대륙 어딘가에 있음을 인증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에텔은 히파이스가 남긴 부탁에 대한 궁금증이 생겼다.


"히파이스 누나의 부탁이 뭐야?"

- 너의 성장. 내가 너와 함께 대륙을 돌면서 성장해서 제작자를 찾아가는 것. -

"진짜, 살아 있구나. 그리고... 흐윽."


또옥.

히파이스가 살아있고, 자신을 버린 것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자마자, 에텔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나왔다.

긴장과 고통으로 억누른 설움이, 북받쳐 올라 넘쳤다.

하지만, 입가는 미소짓고 있었다. 언젠가 반드시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기에.


- 에텔. 제작자의 부탁, 이하 의뢰의 수행을 위해 소유자 등록을 요청한다. -

"소유자 등록?"

- 그래. 제작자를 만나는 순간, 우리가 의뢰를 완전히 해결했음을 증명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야.

물론, 제작자를 만나게 되면 소유권은 양도할 수 있어. -

"알겠어. 어떻게 하면 돼?"

- 내가 보내는 힘을 거부하지 마. 네 몸 안에 있는 혼원이 나를 받아들여야 해. -

"...알았어."


후우, 하아. 고오오오오오.

에텔은 심호흡과 함께 온 몸의 힘을 뺐고, 혼원의 힘을 풀어서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 틈새로, 프리미티브의 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 느낌은 마치, 히파이스 누나가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듯한 느낌.

편안하고도 온화하며, 따스한 느낌이었다.


- 끝났어. 눈 떠. -

"...벌써 끝난거야?"

- 그래. 네 혼원이 제법 견고해서 비집고 들어가기 힘들었지만... 

등록 준비는 다 됐어. 이제 너도 호응해줘야 해. -

"알았어. 뭘 하면 돼?"

- 머릿속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대답하는거야. - 


머릿속? 목소리? 에텔이 의구심을 품던 때, 갑작스레 머리에 찡한 두통이 몰려왔다.


"윽!? 뭐, 야, 이거!?"

- 집중해. - 


그 말과 함께, 에텔의 머릿속에서 기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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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 만큼은 들려왔다.


검의 주인이 되겠는가?


에텔의 선택은,

긍정. 

그 선택을 마지막으로,

에텔은 기절해 쓰러졌다.


...

......

《구세주의 자격》이 발동합니다.

프리미티브의 주인이 결정되었습니다.

제작자, 아카샤로부터의 지시.

프로젝트 메시아를 개시합니다.




***


"...여기는, 창고... 나, 왜 쓰러졌지...?"

- 깨어났네요. -


에텔이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천장의 형태였다.

익숙한 창고의 천장.

그 뒤에는 바닥의 차가움과 손에 잡힌 딱딱한 것이 느껴졌다.


"...프리미티브, 나, 어떻게 된 거야..?"

- 쓰러졌었습니다. -


이 말을 뒤로 이어간 프리미티브와의 대화.

내용을 요약하자면 이러했다.

첫째, 나는 쓰러진지 10분도 지나지 않았다.

둘째, 프리미티브는 나를 주인으로 인식한 탓에 존대를 하기 시작했다.

셋째, 프리미티브 말고도 넘버즈가 하나 더 존재한다.


"그러고 보면, 아까 처음 봤을때 분명, 특수한 힘을 지닌 검 10자루라고 했지."

- 네. 1번부터 10번까지. 10자루가 맞습니다. -

"그러면... 한 자루는 어디에 있어?"

- 저 상자의 아랫칸입니다. -

"...뭐?"


에텔은 또 다시 충격에 빠졌다.

왜 10번째도 두고 간 거지? 이유는? 상황은?

그가 다시 이상한 생각을 반복하던 중, 프리미티브의 몸체가 떨리는 것을 느꼈다.


"왜 그래, 갑자기?"

- 제작자로부터의 전언을 전달합니다. -

"...전언."


갑작스러운 전언.

히파이스의 전언이라는 말에, 에텔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당연했다. 갑자기 잠행을 나간다는 이유로 모습을 감춘 누나가 전해오는 말.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 상자 밑에 한자루 더 있는 검, 그것도 니꺼야. 챙겨가.   발신인 히파이스로부터. -

"......"


별 것 없었다.

프리미티브가 말해준, 상자 아랫칸에 아직 갇혀 있는 No.10. 

그것 또한 히파이스가 에텔에게 주는 것이니 챙겨가라는 말이 전부였다.


파르르르.

프리미티브를 쥔 손이 떨렸다.

허무했기에. 한 마디의 인사도 없이 그저 용건만을 말한 것에 대한 아픔이 다가왔기에.

하지만, 그는 허무함을 되새기며 다짐했다.


"반드시... 누나보다 강해져서, 대륙 어디에 있더라도 찾아내고 말거야."


다시금 되새긴 마음을 붙잡고, 그는 상자의 아랫칸을 찾아 열었다.

끼긱, 깔탁.

상자의 윗부분을 들어올리자, 칼집에 들어간 채 천으로 싸인 검이 보였다.

스르릉.

아름다운 소리와 함께 뽑아든 검은 아름다웠다.

코등이는 길쭉한 은빛 직선 막대에 금빛 무늬를 새겼고, 손잡이는 하얀 가죽으로 마감한 완전한 원기둥 형태였다.

하얀빛 광택을 뿌리는 칼날은 손잡이와 동일한 폭을 지녔고, 완벽한 직선을 이루고 있었다.


"프리미티브, 이 검은, 이름이 뭐야?"

- 모릅니다. -

"왜 몰라, 같은 넘버즈잖아."

- 그건 모릅니다. 제작자가 알려주지 않았기에. -


기이할 따름이었다. 어째서 누나는 이 검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에텔의 궁금증이 다시 하나 쌓였지만, 대답해줄 사람은 없었다.

대답해줄 수 있는 사람이 히파이스 아카샤 단 하나였기에.


철컥.

칼집에 걸린 가죽 고리와 벨트를 허리와 가슴에 매고, 칼집을 허리 뒤로 돌려 고정하고.

에텔은 그제서야 칼집이 없는 프리미티브에게 생각이 미쳤다.

어차피 여행을 나가기 위해서는 필요했으니, 그는 프리미티브에게 적당한 칼집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에텔은 다시 멈춰설 수 밖에 없었다.

커튼에 가려져 있던 책상의 위에, 프리미티브를 넣으면 꼭 맞을 것만 같은 칼집이 있었기에.

Primitive 라는 이름이 새겨진 하얀 칼집 옆에는, 편지 봉투가 있었다.

편지의 내용은 이러했다.


   에텔, 네가 이걸 보고 있다면 나는 이미 집을 떠났겠지.   

      상심하지 말아라. 힘들어하지 말아라.                      

       언젠가 네가 나를 찾아올 수 있도록,                      

         프리미티브와 10번을 너의 곁에 붙이마.               

        하지만, 한동안의 작별은 어쩔 수 없으니.               

           그동안은 안녕이다. 나중에 보자.                      


짧디 짧은 편지. 하지만 히파이스 특유의 감정이 묻은 편지.

편지지를 다시 곱게 접고, 그것을 품에 넣으며 에텔은 말했다.


"프리미티브."

- 네. -

"출발하자, 누나를 찾으러."

- 네. -


짤그랑.

돈주머니를 차고,

탁, 턱 턱, 와르륵.

대충 식료품들을 챙겨넣은 배낭과,

콱, 콱, 꾸욱.

옷가지를 쟁여넣은 배낭을 어깨에 매고.

저벅, 저벅, 저벅.

에텔은 걸어나갔다.

마음 속에 품은 목표를 가지고.



- 2화에서 계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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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정보 - 대마법사 아카샤

대륙을 호령하고 인간의 땅을 개척한 최초의 영웅.

현재는 머나먼 과거의 일이기에 기록이 부족하다.

하지만 그녀를 칭송하던 이름은 세상에 널리 퍼져 잊혀지지 않았으니.

사람들은 그녀를 '위대한 아카샤' , '대마법사' , '기적의 인도자'라 불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