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광반조 2장 보러가기


"완전히 무상으로 들어오라는 게 아니야. 장사 해보고 잘 되면 그 때부터 세를 내도록 해. 망하면 할 수 없지만 자기야 명석하니까 잘 되지 않겠어?"

"제가 우는 거를 보셔서 그러시는 건가요."


남편의 실직 이후 거듭된 인생의 좌절로 인해 모든 것에 불신이 가득한 명자는 혹시나 구 사장 모친이 마음을 바꾸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안 그래도 가게 자리 생기고 연희네만한 사람이 없을텐데 싶었다. 오래 생각해서 하는 말이다."


모처럼 온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 그래 한 번 해보자.


"제가 할게요. 다만..."

"다만?"

"친정아버지에는 비밀로 해주실 수 있으시겠어요?"




"... 그래. 그러마."


그제서야 근 몇 개월 간 하얗게 질려 있는 것 같았던 명자의 얼굴에 혈기가 도는 듯 했다.


그렇지만 당장 무슨 장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도 막막했다.


"물건 대주는 데나 있나..."






"가게 자리를 구 사장이 내줬다고?"

"아니. 구 사장 어머니가 내주셨다구. 언제 마주치면 고맙다고 인사나 해요. 또 그냥 보고도 꾸벅하고 지나치지 말고."

"알았어."


"그나저나 연희 아버지. 당신 물건 대줄만한 곳 좀 알어?"

"뭘 대줘?"

"아니, 가게를 시작하려면 누가 물건을 대줘야지 그걸 팔아서 돈을 남길 거 아냐."

"그런 얘기였어? 아니 그런 데가 어디 있어."

"당신 예전에 청량리에서 야채 팔던 때 알던 사람 좀 있지 않아?"

"그게 벌써 30년 전인데 애저녁에 끊겼지."


부부가 머리를 맞대고 살펴봐도 물건을 대줄만한 곳은 생각나지 않았다. 흑석동에서 쌀가게를 하는 친정오빠가 있긴 하지만 거기까지 손 벌리고 싶지는 않고...






"오빠한테 쌀 스무 가마니만 꿔볼까..."


가게 자리를 맡기로 한지 3일이 지난 때였다.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마땅한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러다가 가게 자리마저 놓치는 것이 아닌가하는 불안한 마음에 명자의 마음은 급해질 수 밖에 없었다.


결심은 굳었지만 오빠한테서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두려웠다. 수화기를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다가 눈 꼭 감고 겨우 번호를 누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아차, 오빠가 아니라 올케가 받았다.


"오빠는요?"

"성국 아버지야 이 시간이면 가게 나갔을 시간이지. 웬 일이예요? 요즘 전화가 왜 이렇게 없었어. 사근동에 뭔 일 있슈?"

"그냥 좀 바빴지 뭐. 오빠 들어오면 사근동으로 전화하라고 해줘요."

"어? 진짜 뭔 일 있는갑네? 예사 안부나 물을라구 전화한 것 같으면 기냥 나헌티 안부나 묻고 끊을 일인데 성국 아버지더러 전화하라 허는 거 보니까 뭔 일이 있구만?"


'그래. 차라리 오빠한테 직접 말하느니 착한 올케 통해서 말하는 편이 낫겠구나.'


"이게 사실 좀 말하기가 그래서 오빠한테 직접 말을 할라구 그랬는데 어차피 올케도 알게 될 테니까 내가 말을 해요. 혹시나 이거 우리 시골에 말하면 안 돼."

"무슨 일인데 이럴까ー? 일단 말해 봐요."

"이번에 우리 사근동에 가게 자리가 하나 나와서 연희 아버지가 거기다가 가게를 하나 낼라 그래요. 근데 장사를 할라 그러면 누가 물건을 대줘야 하는데 마땅히 물건 대줄 데가 있어야 말이지. 내가 그래서 웬만하면 흑석동에는 연락을 안 할려고 했는데."

"어. 그래서."

"그래서... 오빠네 가게서 스무 가마니만 좀 빌릴 수 있을까 해서."

"어ー 잠깐만."


잠깐의 정적 속에서 명자의 심장소리만 들렸다. 심장소리가 너무 커서 수화기 너머로 다 들리겠네.


"고모."

"응."

"어. 내가 성국 아버지한테 얘기를 해보고, 이따가 성국 아버지랑 상의해서 성국 아버지더러 전화 넣으라고 할게."

"미안해요. 거기도 성국이 이번에 고등학교 올라간다고 여유가 없을 텐데. 내가 흑석동 형편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고모가 돼서 조카 교복은 못 맞춰줘도 용돈은 줘야 하는데 그러질 못 하네."

"아유. 고모는 흑석동 신경 쓰지 말고 연희랑 대원이나 신경 쓰쇼. 성국 아버지한테는 내가 잘 말해놓을 테니까 걱정하들 말아요."

"고마워요."

"아니 근데 고모, 아주버니 무슨 일 있는 거여? 워낙 불경기니까 나는 무슨 일이나 있는 게 아닌가싶네."

"... 그냥 어쩌다 관뒀어. 그렇게만 알어요. 나도 시시콜콜 얘기하긴 좀 그러네."


회사에서 잘렸다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이다. 아마 흑석동 올케도 그렇게 알아들을 것이다.


"그렇구만. 더 물어봤다간 고모도 체면이 아니지. 알았어요. 끊어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참을 전화기 앞에 앉아서 전화기만 바라보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온다. 전화기가 올려진 서랍 앞에 대충 이부자리를와 베개를 깔고 잠이 든다.


"엄마. 왜 여기서 자."


'벌써 애들 집에 올 시간인가.'


"지금 몇 시야?"

"7시."

"뭐?"


'벌써 흑석동에서 전화 온 거 아니야?'


"너 집에 언제 들어왔어."

"방금 들어온 건데."

"대원이는?"

"대화당약국 앞에서 지 친구들이랑 놀고 있던데."

"해가 졌으면 들어와야지. 너는 또 거기서 데리고 안 오고 그냥 들어왔어? 그리고 너는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와. 학교 마친지가 몇 신데."

"아까 집에 와서 엄마 깨웠는데 뭘 해도 안 깨니까 미선이네 가서 밥 먹고 왔지."


아차차...


"그랬어? 그럼 너 저녁은 안 먹어도 되겠구나."


연희에게 아들을 데려오라고 보내고 흑석동에 전화를 건다.


"언니. 오빠는?"

"조금 있으면 들어올 거여."

"난 또. 잠깐 눈 붙인 새에 전화 왔나 했지."

"아니야. 아직 안 왔어. 알아서 잘 될 건데 뭘 그렇게 안절부절 못 하나 그래. 걱정 마슈."


전화를 끊고 대충 미역국에 밥을 말아 저녁을 때우고 전화를 기다린다. 이제서야 아이들이 들어온다.


"왜 이렇게 늦게 들어오냐. 엄마 지금 신경 쓸 일이 많아서 너네한테 신경 쓰고 싶지 않단 말이야. 대원이는 밥 먹었냐?"

"아니."

"이 놈의 새끼가 밥도 안 먹고 이 시간까지 놀고 있었어? 배도 안 고프던?"


아이들에게 대충 저녁을 차려주고 나서 또 전화기 앞에 앉아있다.


삘릴릴릴릴리ー


"여보세요?"

"응. 나다."

"집사람한티 들었어. 며칠까지 가져다주면 되겠냐?"

"26일. 괜찮겠어?"

"응. 알았다. 거기 주소 좀 불러줘라."

"아, 아니야. 어차피 주소 불러줘 봤자 오빠 동네도 아니니까 잘 모를 거 아냐. 연희 아버지더러 한양대병원 앞에 서 있으라고 할게. 그 날 입구에서 연희 아버지 태우고 그 이가 가라는대로 해서 와."

"응. 알았다."

"그래. 고마워, 오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요 몇 개월 어디로 걸어가도 방향조차 알 수 없는 어두운 빈 공간에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이었지만 이번 개업 건은 생각해 보니 주변 사람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아무 것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이 세상에서 그래도 사람이 삶을 그만두지 않고 살아가는 이유는 언젠가 혹시라도 기적이 찾아오지 않을까하는 희망 때문이다. 그 기적이 찾아올 때까지만 버텨보자고.






삐ー삐ー삐ー삐ー

"오라이! 오라이!"


"오빠. 쌀 스무 가마니만 빌린다니까 이것들은 다 뭐야?"

"쌀집에서 쌀만 파냐?"


적긴 했지만 콩, 조, 보리 등도 딸려온 것이다.


"여봐, 연희 엄마!"

"형님!"

잘 알고 지내는 사근상회 안주인과 양복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키 큰 남자, 그리고 동네 아줌마들이 골목에서 튀어나온다.


"사근동교회 목사님이야."

"아이고, 안녕하십니까."

"오늘 사근동에 또 새 가게가 생긴다고 해서 이렇게 와봤습니다. 언제나 주님의 은혜와 축복이 이 집에 함께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아, 예. 감사합니다."

"가게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그러고 보니 가게 이름은 아직 정하질 못 해서..."


"세민쌀상회 어떻습니까? 세상을 돌보고, 백성을 구제한다는 뜻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이 가게를 통해서 펼칠 수 있게 되길 바랍니다."

"세민쌀상회라... 여보! 목사님이 우리 가게 이름 지어주셨는데 세민쌀상회 어때요?"

"아무거나 해! 뭐라고 하는지도 안 들려!"

"저 이가 저렇게 무신경하다니깐..."

"저... 잠깐 방 안으로 들어가서 여기 계신 신도님들과 연희 어머님을 위해서 기도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명자는 불교 신자였지만 기도를 해준다는데 내쫒을 수 없고, 또, 개시하는 날이다 보니 마음보를 나쁘게 쓰면 어느 신이던 화를 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방 안으로 목사님과 동네 아줌마들은 들인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시여. 오늘 이 자리에 새 사업이 시작됩니다. 주님의 뜻으로서..."


안쪽 방에서는 부녀자들의 기도가, 바깥에서는 남자들이 쌀포대를 옮겨 쌓는 작업이 한창이었다. 가게 한가운데에는 욕조보다 큰 대야에 쌀을 붓는다. 연희와 대원은 신기하다는 듯 대야 가득 담긴 쌀을 손으로 자꾸만 눌러본다.


"이 녀석들아! 그거 자꾸 만지면 때 타는 거야!"

아이들에게 꾸중은 해도 기뻐하는 아이들의 얼굴을 보니 지금 흘리는 땀도 기분 좋게 느껴질 뿐이다.


"아이고, 이제 최 사장이라고 불러야겠네. 이렇게 번듯한 가게 하나 생겼으니 자네 오늘 얼마나 좋은가?"


"개업 축하드려요!"


"동장님이 보낸 화환입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새로 생긴 가게 앞에 멈춰서 덕담과 축하한다는 말을 늘어놓고, 온 동네 사람들이 진심으로 축하해 주었다. 동네 남자들이 모여 쌀포대 나르는 작업을 돕고 작업이 끝나자 구 사장은 집에서 막걸리를 가져와 개업을 축하했다.


사람은 사랑을 쌓으며 역사를 만든다. 보잘 것 없지만 40년 반복되는 일상의 역사, 그리고 한 가족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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