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군은 단조로운 일상을 싫어하는 사내였다. 그러나 제 스스로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침 해가 뜨고 한참이 지나서야 눈을 뜬다. 눈을 뜨고 또 한참을 이불 안에서 몸을 비비적대다가, 뱃속에서 소리가 날 때 즈음 몸을 일으킨다. 멍한 눈과 정신으로 자신 앞에 놓여진 빛배랜 벽지를 한참 바라보다, 기지개를 크게 편다.
"밥."
오랫동안 잠겨있었던 목소리였기에, Q군의 소리는 곧 갈라질 듯 들렸다.
넓지는 않고, 그렇다고 좁지도 않은 방. 한켠에는 요와 이불이 깔려있다. 남쪽으로 작은 창이 하나 나있다.
"큼, 큼. 카악, 큼."
그렇게 목을 가다듬기를 몇 번. Q군은 나갈 채비를 하였다. 오랜만에 밖을 돌아다니며 요기라도 할 작정이었다. 어지러이 놓여있는 잡동사니의 틈 사이에 있는 거울을 빼내어 얼굴에 묻는 눈꼽이니, 침자국을 대충 문질러 지우고, 산발로 뻗친 머리칼을 손으로 눌러 정리했다. 아직 한 겨울은 아니었지만, 입김을 불면 허연 김이 나오는 것을 핑계 삼아 Q군은 나갈 채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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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보면 이상하게 보일 듯한 Q군의 모습이었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남들의 시선 따위는 어떻단 말인가.
내가 눈을 감으면 온 세상은 사라질 터인데.
아무튼 Q군은 문을 나와 힘차지도, 그렇다고 흐느적거리지도 않는 적당한 발걸음으로 중심가로 나갔다.
낙엽은 이미 다 졌다. 그러나 나무 아래에는 나무의 시체가 가득 쌓여있었다. Q군은 괜히 그것들을 밟으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美林堂 - 西洋 一品 料-理를 보여 드리겠읍니다-
맛드러지게 그려진 커틀렛의 그림이 가게의 벽면에 붙어있다. '미림당'이 저 커틀렛을 파는 가게의 이름일 것이다. Q군은 별생각은 하지 않고, 저 커틀렛을 먹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발걸음을 떼었다.
사람들은 바쁘게 산다. 언제나 바쁜 듯이 옆은 돌아보지 않고, 떨어진 낙엽 따위 밟아보지 않고, 바쁘게 제 갈 길만을 걸어간다. 저 앞 외투와 중절모를 쓴 나이 지긋하게 들어 보이는 남성은 곁에 모던한 여인을 하나 끼고 걸어간다. 근사하게 기른 콧수염이 위아래로 움직이며 여자의 물음에 답하듯 쉴 새 없이 움직인다. 남성은 곤란한듯 헛기침을 하다가도, 다시 여자의 말에 맞장구 따위를 쳐주며 더욱 끌어 안았다.
작금의 조선은 불량하다.
아무튼 Q군은 제 속으로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며 걸었고, 이윽고 그 가게에 다다랐다. 우연하게 중절모의 사내와 모던한 여인도 그 가게로 들어갔다. Q군은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마는 커틀렛이 먹고 싶었으므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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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 제일의 경양식, 미림당입니다. 어서오십시오-.
하얀 셔츠와 까만 바지를 깔끔하게 입은 사내, 아마도 종업원이 말했다. 머리는 기름을 발라 일정한 규격에 따라 손질하고, 수염 따위는 깔끔하게 면도해 버린 사내였다. 그는 생글생글하게 웃으며 혼자 온 Q군에게 자리를 안내했다. 볕이 잘 드는 창가의 자리에 종업원은 안내했다. 아마도 정오, 점심때가 되어서인지 사람은 많았다. 쉴새없이 떠드는 어린 학생들과 고운 한복을 입고 눈웃음을 지으며 아양을 떠는 기생, 그 앞에 아무것도 모르는 척 하는 사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가득했다.
Q군은 자리에 앉아 종업원이 가져다 준 메뉴판을 보았다.
커틀렛
오무라이스
점심 정식
그 외에도 Q군이 들어보지 못한 이국의 메뉴가 가득했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종업원에게 무엇이 제일 맛있냐며 추천을 요구했을 테지만, Q군은 커틀렛을 먹기 위해 이곳으로 왔기에 주저 없이 커틀렛을 주문했다. 종업원은 생글생글 웃으며 Q군의 주문을 받았고, 이내 등을 돌려 걸어갔다.
"나는 옥가락지는 싫어요. 조금 더 모던한 디자인을 가진 반지가 좋아요."
Q군의 옆, 가게의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코에 바람이 가득 들어간 여성의 목소리. 방금 전 Q군과 같은 동선을 걸어온 중절모의 사내 곁에 있던 여성의 목소리였다.
"흐음, 그렇지만 그런 건 동경에나 가야 있는데.."
사내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고심하는 듯 했다. Q군은 그런 사내의 모습을 곁눈질 하며 보았다.
'여자에게 휘둘리는 삶이라니, 못 볼꼴이군. 불량한 것도 정도가 있지.'
"내가 원하는 별이든, 달이든 따다 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지금 와서 못해주겠다는 거예요?"
여성은 소리쳤다. 그러자 가게의 손님들이 일순간 정적하더니, 그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이 여자가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서둘러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어머나, 웬 보석이죠?"
사내의 품에서 꺼내어진 것은 큼지막한 크기의 보석이었다. 사내는 그것을 꺼내보이고는 헛기침을 '크흠'하고, 여성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한 눈빛을 내놓았다.
"옥가락지 대신, 이걸로 당신이 하고픈걸 하도록 해. 어때, 이정도면 충분하겠지?"
"그럼요. 이정도면 충분하고도 말구요. 고마워요!"
그렇게 한참을 여성과 남성의 대화가 이어졌다. Q군은 힐끔거리며 그들을 관찰했다 꽤나 큰 보석이었다. Q군은 보석에 대해 잘 몰랐으나, 한눈에 보아도 꽤나 값이 나가 보였다. 작은 보석함 안에 소중하게 놓여 있는 푸른 빛의 보석. 사내는 사업 수완이 좋은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으니, 집안의 돈이 꽤나 많은 인물인가 보다. 아무튼 Q군은 힐끔거리면서 그 보석을 한참 보다가 종업원이 커틀렛을 가지고 오자 관심을 껐다. 남의 것에 눈독을 들이면 배앓이가 난다는 것을 알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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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틀렛은 맛있었다. Q군은 흡족한 듯 배를 두드리며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마셨다.
'경성 제일의 경양식이라더니, 헛말은 아닌가 보군.'
그런 생각을 속으로 하며 홀짝이다가 아까의 옆 테이블에서 큰 소리가 쾅-하고 났다. 주위는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웅성대는 소리와 비명을 지르는 소리, Q군은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가게의 모든 이들이 옆 테이블에 서 있는 종업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손님, 이것은, 아니, 이게, 왜 이런 건지, 참, 아이고."
Q군의 주문을 받았던 종업원이 그곳에 서 있었다. 종업원은 당황해 하며 시뻘겋게 물들어버린 얼굴의 사내 앞에서 변명을 하고 있었다. 사내는 당장에라도 터질 듯한 얼굴색으로 종업원에게 외쳤다.
"당신 미쳤어! 어! 아니, 그게 얼마짜리 보석인데! 어!"
사내 앞 여성은 백옥같이 흰 손으로 입을 막으며, 놀란 듯이 사내에게 말을 뱉었다.
"어머, 어머, 어머, 저 손가락 좀 보셔요. 손가락. 어머나."
Q군도 그 여성의 말을 듣고 종업원의 손가락을 보았다. 종업원의 손가락은 개구리의 앞발 같이, 손가락 끝이 동그랗게 변해있었다.
"그게 얼마짜린데, 함부로 만지는 게야! 어! 무슨 수작을 부리는 게냐고!"
사내는 침까지 튀겨가며 외쳤고, 이내 뒷목을 잡았다. 얼굴은 더더욱 붉게 변했다.
"아이고, 손님, 이것이, 떨어지지가 않습니다. 보셔요. 이렇게 흔들어도 떨어지지가 않는다니까요."
종업원은 금방이라도 울 듯한 얼굴로 손가락을 세차게 흔들었다. 그의 말 대로 손가락에 붙어버린 보석은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손가락 안으로 점점 더 들어가는듯 보였다.
"아니, 저 놈이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냐. 어! 어디서 못된짓만 배워서 그런 짓거리를 하면 내가 속을 줄 알았어!"
사내는 제 앞에 놓인 커틀렛 접시와 함께 나왔던 나이프를 감아쥐며 외쳤다. 이미 사내에게는 이성 따위는 남아있지 않았다.
"오냐, 떨어지지가 않으면 그 손가락을 끊으면 되겠구나."
여성은 일어서서 금방이라도 종업원의 손가락을 끊으려 하는 사내의 행동을 말리려 했지만, 이내 사내의 눈과 행동을 보고 무서워 말리지 못했다. 그러한 광경을 보며 Q군은 심상치 않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작금의 조선이 미쳐간다.
사내는 종업원에게로 다가갔다. 종업원은 사내의 광기 어린 걸음에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보석! 그게 어떤 보석인줄 아느냐!"
사내가 나이프를 휘둘렀다. 나이프에 묻은 커틀렛 소스가 가게 안을 날아다녔다. Q군의 책상에도 튀었고, 근처 한복을 입고 고운 웃음을 띠며 놀라지 않은척 하는 기생의 저고리에도 튀었다. 종업원은 손사래를 치면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훔칠 생각 따위는 가지지 않았다고, 그저 손가락 한 번 대어 본 것뿐이라고.
그렇게 손사래 치는 종업원의 손에 나이프가 스쳤다. 손바닥 손금을 따라 붉은 피가 배어나왔다. 그러나 눈 깜짝할 새에 멎었다. 흐르는 핏물이 바닥에 채 떨어지기도 전에. 종업원은 두려워하면서도 자신의 왼손으로 다시 한 번 휘둘리는 나이프를 잡았다. 역시나 피가 철철 흐를 법도 한데, 바닥에 떨어지는 핏방울은 없었다.
나이프가 종업원의 손에 잡히자, 사내는 아주 잠깐 정신이 들었는지 종업원의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아까의 개구리 손가락 같던 것은 온데간데없고, 정상적인 사람의 손가락이 달려있었다. 그러나 손 끝은 푸른 빛을 품고 있었다.
가게의 창을 통해 들어온 햇볕이 종업원의 손가락을 통과해 푸른빛을 바닥에 비추었다.
"아이고, 이것이 참, 아이고."
종업원은 계속 같은 말을 반복했다. 이미 새하얗게 질려버린 그의 표정은 산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그래, 피도 안 나는 괴이한 것이 되었다는 것이지. 이 요물 같은 것이."
사내는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내었다. 한 손에 들어오는 권총. 찰칵-하고 실린더가 돌아갔다. 종업원은 손을 번쩍 들었다. 경성 한 복판에서 총이라니, 저 사내도 이제 산사람이 아닐 것이고, 종업원도 산 사람이 아니게 될 것이 분명했다.
"네 놈을 죽이고 손가락을 잘라서 보석을 꺼내면 되겠구나, 그래. 그래"
사내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종업원의 심장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탕-
가게는 다시 조용해졌고, Q군은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몸을 숨겼다. 몸을 덜덜 떨면서 어서 난리 통인 상황을 그 누군가가 정리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램만을 가졌다.
탕-
총성이 다시 한 번 울렸고, 사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심장을 한 번, 어깨를 한 번, 정확하게 쏘았는데, 종업원은 멀쩡했던 것이다. 뚫린 셔츠에서는 핏물조차 배어나오지 않았다. 종업원은 눈을 질끈 감고 날아온 총탄에 밀려 뒤로 넘어졌을 뿐이었다.
"오호라, 이 요물 같은 것. 죽지도 않는 다는 것이냐. 그래, 그래. 칼로 후벼 파면 무어라도 되겠지."
사내는 제 앞접시 대신 여성의 접시에 놓인 나이프를 들었다. 그리고는 나이프에 뭍은 소스를 대충 닦고 쓰러진 종업원 앞에 섰다. 종업원은 죽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이 상황이 너무나 무서워서 눈을 질끈 감고 뜨지 않는 것이다. 사내는 그러한 종업원의 손을, 오른손을 붙잡고 칼로 내리 찍었다. 마치 밀랍에다 찔러 넣은 듯한 느낌. 이미 사람이 아닌듯한 느낌에 사내는 놀랐지만, 다시 한 번 빼내어 제대로 손가락을 향해 내리 찍었다.
그 순간 쩌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보석이 빛나기 시작했다. 사내는 이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 따위는 안중에도 없이 보석을 바라보았다.
보석은 빛을 내기 시작하더니, 이내 번쩍 거리고 사라졌다. 종업원은 크게 한 덩이, 두 덩이로 금이 가더니, 곧 수만 가지 조각으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뭔, 이런……."
사내는 보석이 사라진 위치와 갈라지기 시작한 종업원을 보며 드디어 정신이 돌아온 듯, 어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보석.. 보석이……."
사내의 외침은 저 아래 깊은 곳에서 끌어온 소리인지 갈라지고, 금이 가 있었다. 허망한 소리와 광인의 소리. 사내는 그렇게 그 곳을 바라보았다. 종업원은 계속 갈라지다 사내의 호흡이 일으킨 작은 바람에 오래된 책장 위의 먼지처럼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Q군은 눈을 감았다. 단조로운 일상을 싫어하는 Q군이었으나, 지금 자신 앞에 놓인 괴이한 일을 바란 것은 아니었다.
눈을 감은 그의 귀 저편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들려왔고, Q군은 눈을 더 질끈 감았다.
'내가 눈을 감으면 온 세상은 없는 것이다.'
라는 말을 속으로 계속 되풀이 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