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질 듯한 두통이다. 내가 한참 동안이나 이러한 상태로 누워 있었던 것 같다. 도대체 나는 왜 이곳에 있는 것일까? 아무런 맥락도 없이 이곳에 던져졌다는 느낌이 있다. 이러한 무한한 낯섬은 나를 두렵게 하면서도 뭔가 미지의 세계가 나를 요구하는 듯한 열정을 불러일으킨다. 

나는 어떠한 어려움을 당해서도 꿋꿋하게 이겨낸 이력이 있는 사람이라는 막연한 기억이 들듯 말듯 하다. 하지만 내가 근본적으로 누구인지 전혀 기억이 없다. 과연 나는 남자인가? 여자인가? 이것부터 모른다. 그렇다면 나의 나이는? 

그런 것을 떠나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어떤 곳인지조차 알지 못하겠다. 모든 것이 막연해서 모호성 가운데 휩싸여 있는 느낌이다. 이러한 막연한 느낌이 나를 감싸고 나를 포근하게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두통을 없애기 위해서라도 눈을 뜨는 것이 좋을 것이다. 내가 아무리 참혹한 상황에 놓여 있다고 하더라도 견딜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닐까? 

어디 눈을 뜨기 전에 손이나 발이라도 움직여볼까? 손과 발을 움직이려는 의지가 작동하지만, 내 몸이 그 의지에 순종하는 기미가 없다. 손과 발은 그 주위의 강한 저항감을 느낀다. 

나는 실눈을 떴다. 저 머리 너머로 비스듬이 비추이는 햇살이 눈부시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돌려 머리 너머를 바라보려고 하지만 충분히 고개가 돌려지지 않는다. 이렇게 내가 내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어쩔 수 없이 눈을 크게 뜨면서 내 팔과 다리를 바라 보니 단단한 밧줄에 묶여 있군. 역시 예상한 대로였다. 

누군가 나를 침대 위에서 묶어 놓은 것이 틀림 없다. 이곳은 다행히 감옥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가정집이라고 하기도 어렵다. 

뭐라 근거를 대기는 어렵지만 대충 짐작이 가는 대로 맞춰보자면 여기는 병원이다. 나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묶여 있는 것일까? 일반적인 병원이라면 환자를 묶어두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아마도 내가 극심한 진동을 하는 병에 앓고 있나? 이를테면 간질이라든지, 극심한 고통에 몸을 크게 떨게 되는 질환이 아닐까? 

이런 의아심을 느끼며 힘을 모아 양쪽 팔을 잡아당겼다. 내가 가진 힘의 최대한을 동원했지만 자유를 얻을 수 없다. 이내 합리적인 사고가 나를 일깨운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자유를 찾기 위한 발악은 별 소용이 없다. 상황의 진전을 가만히 누운 채로 관망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막연하게나마 성미가 급할 것으로 짐작되는 나로서는 오래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노크 소리도 없이 병실의 문은 벌컥 열렸다. 본능적으로 문쪽을 바라본다. 하얀 가운을 입은 건장한 사내가 기분 나쁜 웃음을 지으며 들어온다. 

"잘 잤나. 아침 용변을 보게 할 테니 진정하라구."

사내는 밧줄의 손목 위 한뼘 부분에 있는 단추를 눌렀다. 오른팔이 풀렸고 곧 왼팔도 풀렸다. 본능적으로는 풀려난 팔을 휘둘려 사내를 때려눕히고 싶었지만 나는 팔에서 힘을 뺀 채로 몸을 맡겼다. 사내는 내 두 손목을 위로 올리더니 찰칵 소리를 내며 각 손목을 묶은 두 밧줄을 연결시켰다. 다행이다. 내 등 뒤에서 손목을 묶었다면 손을 움직이기가 더 부자유스러웠을 테니까 말이다. 

나는 내가 왜 묶여 있는지가 궁금했다. 

"내가 여기에 얼마나 오래 있었지?" (나는 순간 내가 남성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궁금한가?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를 아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을 텐데."

"혹시 여기가 정신병원인가?"
"그렇다고 할 수 있겠지. 너는 지금 이곳에 있을 필요가 있으니까 말이지."

"아 오줌보가 터질 것 같아. 빨리 다리도 풀어줘."
그래 막연하게나마 기억이 났다. 나는 아침마다 다리를 풀고 화장실을 들렀다. 그 다음에는 어떤 일을 당하는지도 막연하게 알겠다. 

사내는 내 다리도 풀어줬다. 나는 오른쪽으로 몸을 비틀어 침대 아래에 두 발을 내딛고 묶인 두 팔로 침대를 지탱하듯 눌려 벌떡 일어섰다. 나는 아주 쇠약한 놈은 아닌듯하다. 글쎄, 나의 신체적인 능력이 어느 정도 되는지에 대해 궁금증이 일었다. 

일어난 후 침대 옆에 놓인 탁자에 쟁반이 있고, 그 안에 무슨 액체가 3분의 2쯤 담긴 주사기가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바로 고개를 들어 짐짓 주사기를 못 본 척 했다. 

사내는 나를 뒤에서 밀어 병실 밖으로 나가게 했고 화장실이 있는 쪽으로 향하게 했다. 화장실 앞까지 불과 열 걸음밖에 되지 않았다. 
나는 두 손이 묶였지만 익숙하게 문손잡이를 돌려 들어가서는 남성용 변기 앞에 섰다. 또 능숙하게 지퍼를 내리고 팬티를 내리고 물컹한 뭔가를 끄집어내어 밤 사이 쌓인 노폐물을 방출할 수 있었다. 억지로 방광에 힘을 주어 최대한 분출의 속도를 높였다. 순환기 계통에 큰 문제가 없는 듯했다. 가볍게 몸을 흔들고 팬티와 지퍼를 원위치로 옮긴 후 바로 천천히 화장실 문밖으로 나와 병실까지 걸음을 옮겼다. 머릿속으로는 복잡한 셈법이 작동했다. 

내가 아침에 대변을 보지 않은 것으로 보아서는 식사형식이 아니라 링겔 주사와 같은 혈액에 의한 영양 공급이 있었던 것 같다.

나는 병실로 들어간 뒤 몇 발자국을 걸은 후 사내가 들어오고 방문이 닫히기를 기다렸다. 방문이 닫힘과 동시에 나는 몸을 잽싸게 돌렸고 모은 팔을 왼쪽으로 휘둘러 사내의 턱을 후려쳤다.  오른발에 힘을 잔뜩 넣어 정확하게 사내의 낭심을 가격했다. 사내는 소리도 크게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고꾸라졌다. 

역시 천천히 걸으며 머릿속으로 상상했던 대로 되었다. 나는 탁자 위 쟁반 안에 놓인 주사기를 조심스럽게 들어 사내 목의 정맥을 찾아 주사를 해주었다. 환자와 간호사(아마 사내는 의사가 아니었을 것이다)가 바뀐 꼴이다. 이 놈은 한 동안 편안하게 잠이 들 것이고 난동을 부리지 않겠지. 

턱으로 손목을 묶는 두 밧줄의 연결부위에 있는 똑딱이 단추를 눌렀다. 이제 두 손도 자유롭게 되었다. 엎어져 있는 사내의 앞뒤 호주머니를 뒤졌다. 열쇠 꾸러미는 발견할 수 없었다. 대신 전기 충격기를 발견했다. 

나는 서서 망연히 생각에 잠겼다. 내가 탈출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어떻게 해야 할지는 막연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히 생각하면 분명히 탈출할 길이 있을 것이다. 탈출한 다음에는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보다도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할 것이다.

나는 쓰러진 사내를 끌어 침대 밑으로 옮겼다. 병실 문을 열고 고개를 둘러 보더라도 침대 밑이 바로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병실 안에서 10분쯤 기다렸다. 터벅터벅 발자국 소리가 들린다. 제법 몸무게가 나가는 성인의 걸음걸이이다. 나의 육체적인 능력에 대한 확신이 들었다. 아주 억센 놈이 아니라면 내가 당하지 않고 제압할 자신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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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장편에 도전을 해보겠습니다. 일종의 환타지가 되겠군요. 과연 로맨스가 섞여있을까요? 아직 명확하지는 않아요. 
소설의 제목은 뭘로 할까요? 우선 제목을 달아 봅니다. 추후 명확해진다면 제목을 바꾸면 되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