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민 끝에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내 거주지로 가서 필요한 정보를 얻기로 했다. 나는 신용카드를 이용해 가까운 현금지급기에서 최대한의 현금을 인출했고 지하철을 이용해 주소지 근처의 역에서 내렸다. 주소지가 있는 쪽은 역 주위에서도 다가구 주택이 밀집되어 있는 방향에 있었다. 골목은 차가 1대나 2대가 겨우 지나갈 수준이었다. 주소지로 갈수록 언덕은 높아졌고 길목은 더 좁아졌다. 이러한 지역의 다가구 주택은 다소 가격이 쌀 것이고, 나의 경제적 상황이 그리 넉넉한 편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겠다. 

내가 어디에 살았는지조차 잘 기억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당연히 그 주택 안으로 들어가기 위한 열쇠, 비밀번호 등에 대해서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단 도착하면 뭔가 길이 보일 것이다. 올라가는 도중에는 여러 곳에서 주택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내 주소지로 기록된 빌라는 이제 바로 저 앞에 보인다. 그리 허름하지도 세련되거나 고급스럽지도 않은 평범한 빌라였다. 빌라 2층에 있는 주택이다. 정확하게는 1층이 반지하이기 때문에 1.5층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계단을 오르고 왼쪽이 개방된 복도를 통과해서 주소지 주택의 현관에 도달했다. 현관문 손잡이를 잡고 돌리니 바로 열렸다. 문을 밀며 앞으로 전진하니 원룸 형식의 방에는 1명의 청년이 있었다. 의외였다. 가지런히 양복을 차려입는 자이고 20대 중반으로 보였다.  

그 청년은 나를 보며 미소를 짓는다. 나도 가볍고 고개를 까닥였다. 
"잘 오셨습니다. 병원에서는 많이 불편하셨죠?"
"병 주고 약 주는군. 나를 가둔 것이 너희 왕이 아닌가?"

짐작컨대 로빈과 비슷한 양복을 입은 이 자 또한 로빈과 한 패거리일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형 사울이 보낸 자일 것이다. 
"저희는 당신의 평안을 위해 기억하실 필요가 없는 것을 망각하시도록 도왔을 뿐입니다."
"내가 기억하고 싶어 하는 것을 왜 억지로 망각시키려는 것이지?"

나는 안다. 이 녀석은 나를 붙잡아 말을 시킴으로써 시간을 벌고 있다. 과연 놈의 동료는 몇 명이 달려올까? 나는 놈을 헤치우고 사울 형의 다른 부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도망칠 수 있었다. 하지만 적이 나를 공격하지 않는데, 내가 다짜고짜 공격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금 나의 능력을 시험하고 싶기도 했다. 

"그래 이곳에는 왜 온 거지? 내가 살던 곳인데, 나의 사생활 공간을 침해하는군."
"당신께서 이곳으로 올 줄 미리 알고 당신을 모셔 가려고 온 것입니다."

"다시 병원에 가둘 거냐?"
"아닙니다. 사울 왕께서 모셔 오라고 하셨습니다."

"너는 방금 전에 네 동료들을 호출했지?"
"예, 그렇습니다."

"네 동료들이 오기 전에 너를 처치하고 이곳에서 벗어나야겠다."
"그렇게 하기 힘드실 겁니다. 저는 총을 갖고 있거든요."

그는 호주머니에서 리발버 권총을 꺼냈다. 
"당신이 에너지파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하기에 총을 휴대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나의 전력이 많이 노출되었어."

내가 과연 총을 피할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었다. 에너지파와 물리적인 총알은 다를 것이다. 에너지파는 그 흐름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지만 총알 날아오는 방향까지 내가 알 수 있을까? 나의 느낌은 확실한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총알이 육체에 박힌다면 나의 육체에 큰 손상을 줄 것이 틀림없을 것이다. 가장 근본적으로 지금 상황에서 형을 끝까지 따돌리는 것이 나은지에 대해서도 회의감이 들었다. 

결국 형 사울을 대면하게 된다면 그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내 책상에 꽂힌 책들이나 다른 나의 여러 소지품을 살폈다. 대체적으로 건축학과 관련된 책들이 많았고, 나의 취미생활은 아주 단순했다. 취미와 관련된 특별한 소지품은 없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직업으로 건축 관련된 일을 했었을 것이다.

내가 이 세상에서 무술을 연마한 것 같지 않다. 나는 내가 원래 속했던 세계, 시온에서 전투와 관련된 기술을 익혔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속한 세계 또한 이 세계와 마찬가지로 분쟁과 전쟁이 얼룩진 세계가 아닐까? 

컴퓨터를 켰다. 청년은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크롬 웹 브라우저를 통해서 나의 페이스북이나 다른 이메일 계정을 확인했다. 나의 존재와 관련된 특별한 기록은 없었다. 나는 이 세상과 그리 많은 교류를 하지 않은 듯하다. 당초부터 시온으로 되돌아가려고 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의 옷을 살폈다. 회사에 출근할 때 입는 양복이 딱 1벌만 있었다. 아마도 여름에는 아예 양복을 입지 않고, 춘추복 한 벌로 겨울까지 버티는 것으로 보인다. 참 구질구질하게 살았다. 평상복은 대체적으로 청바지와 같이 편안한 것뿐이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나의 존재에 대한 단서를 쉽사리 발견하기 어려웠다. 

내가 집에 있는 잡동사니 같은 물건들을 통해 나에 대한 단서를 확인하려고 노력하는 사이에 주택 현관문이 다시 열렸다. 형의 부하 3명이 들어왔다. 이들도 총을 갖고 있을 것이다. 나는 순순히 일어섰다. 그들에 이끌려 사울 형을 만나기로 체념을 한 것이다. 사울은 다시 나를 정신병원에 가두지는 않을 것이다. 이유는 없지만 그런 느낌이 든다. 실패한 것을 계속 반복한다는 것은 미련한 짓일 테니까. 

나는 아직 사울의 손아귀를 벗어날 역량이 되지 못한다. 나는 사울의 부하들에 이끌려 빌라 앞에 주차된 고급 승용차의 뒷좌석 가운데에 탔다. 내 양 옆에는 양복쟁이가 앉았고, 그들이 주는 고글형 안대로 눈을 가렸다. 깜깜한 상태에서 나는 잠시 잠을 청했다. 1시간 후 차는 주차했고, 양 옆구리에 붙어 양 팔을 부축하며 이끄는 놈들이 가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층으로 내려갔으며, 금속성 문틀이 삐걱거리는 것을 느끼며 몇 걸음을 다 걸었고, 놈들은 내 안대를 벗겼다. 

농구장 장 크기의 강당과 같은 공간이었다. 강당의 단상 의자에는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화려한 옷을 입은 사내가 앉아있었고, 나는 즉시 그가 사울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울은 멀리서 보더라도 큰 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몸은 근육질에 상당한 전투력을 보유하고 있는 듯하다. 사울은 단상에서 내려와 나에게로 걸어왔다. 중년의 형은 검은 머리카락에 돌출된 광대뼈에 묵직한 표정을 지으며 모든 것을 통제하고 있다는 데 만족감을 드러냈다. 눈빛은 주위의 사람을 압도하며 즉각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듯 오만했다. 나를 잡고 있던 사울의 부하들은 즉시 양 팔을 놓고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섰다. 사울은 내 앞에 우뚝 서서 두 손을 들어 내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그 얼굴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유쾌한 기분으로 웃는 것은 아니고 단지 외교적인 의미가 있을 뿐이었다. 

"네가 그렇게 시온의 일을 잊지 못하겠다면, 너를 나의 세계로 데려갈 수밖에."
"사울 형, 나는 이 세계에서 뭔가 할 일이 남아 있다는 느낌이 있어." 

그렇다. 나는 이 세상에 귀중한 뭔가를 숨겼다. 그것이 시온으로 돌아가는 열쇠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네가 이 세계에 남겨둔 것을 더 이상 찾지 못하게 하려고 나의 세계로 데려가는 것이지."

사울의 세계! 나는 궁금했다. 그가 다스리는 세계는 과연 어떤 세계일까? 하지만 나는 아직 이 세계에 할 일이 있다. 

사울은 왼손을 들어올리며 손가락을 폈다. 그 때 약지에 낀 주황색으로 반짝이는 반지가 눈에 들어왔다. 화려하지 않고 순수하고도 평범한 반지였지만 뭔가 귀중한 것을 담고 있을 것이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며 들어올린 왼손의 반지에 어떤 에너지를 보내고 있었다. 그 순간 나는 오른손의 엄지와 검지로 왼손 약지손가락을 문질렀다. 내 손가락의 허전함이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도 반지가 있었으며, 그것을 이 세계의 어딘가에 숨겨두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기억의 일부가 나에게 돌아온 것이다. 

그렇다. 시온에 돌아가기 위해서 반지가 필요했다.

사울은 내가 시온에 영영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고 나의 반지를 빼앗으려 했고 나는 교묘하게 그 반지를 숨겼다. 그 반지는 이 세계에 있다. 사울의 세계에는 나의 반지가 없을 것이다.

사울이 노리는 것은 자신의 세계에 영원히 나를 갇아둠으로써 내가 영영 시온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리라. 

사울의 반지에서는 뿌옇고 은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원판형으로 퍼지더니 지름 2미터쯤 되는 빛의 터널을 만들었다. 사울은 그 부하들과 나에게 터널 안으로 들어가라고 명령했다. 부하들은 나의 양팔을 붙들어 끌고들어갔고 나는 반항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체념한 때문일까? 

빛의 터널은 내가 여지껏 기억하지 못하는 공간을 구성하고 있었다.  우리가 있는 터널 주위로는 엄청난 숫자의 세계가 혼돈의 회전을 계속했다. 터널의 밖은 빛과 어둠의 무수한 반복이 진행되었다. 빛과 어둠의 순환으로 하나의 세계가 지나갔다. 또 다른 세계가 찾아왔고, 그 다른 세계는 더 빨리 사라졌다. 세계의 교체 주기는 더욱 빨라졌다. 어느 순간에는 오직 빛으로 고정되었다가 다시금 빛과 어둠이 교차되었다. 그 교차주기가 점차 줄어들더니 마침내 하나의 빛의 세계에 당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