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의 세계는 이제 구체적인 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사울은 이제 모두에게 자신을 뒤따르라는 듯 당당하게 터널의 밖으로 나갔다. 나는 호위병에게 양 팔이 붙들린 채 밖으로 나왔다. 빛의 터널에서 빠져나오자 나의 눈 앞에는 황막한 사막의 광경이 펼쳐졌다. 내 뒤 마지막 병사가 사막에 발을 딛자 빛의 터널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나는 사울에게 말했다. 

"형, 내가 여기에서 아주 조용히 살 테니까, 나를 자유롭게 놓아두지. 어차피 형이 가진 반지가 아니라면 우리가 방금 전에 왔던 세계로는 다시 갈 수 없을 테니까." 

사울은 눈을 가늘게 뜨며 뭔가 집중하는 듯한 인상을 보였다. 그러더니 내 마음 속을 꿰뚫는 듯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순간 나는 나의 숨겨진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내 마음의 숨겨진 비밀의 방에 달린 문을 활짝 열어재끼려는 사울의 정신력에 대항하여 나는 내 마음의 문을 닫았다. 내 마음속 비밀의 문에 자물쇠를 걸어 잠가 사울이 함부로 그 문을 열지 못하게 있다. 사울의 정신 에너지가 얼마나 강력한지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공성전에서처럼 공격을 위해서는 방어보다 몇 배의 전력적 우위가 요구되는 것이다. 나는 약화된 정신 에너지에도 불구하고 사울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었다. 

사울은 사태를 파악한 듯 호탕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정신 감응력에 적절한 저항력을 보여주었군. 이것은 너 또한 정신 감응력을 갖고 있다는 말이 되겠지. 너를 가만히 놔두었다가는 내 백성을 꼬드겨 나에게 반역을 일으키게 할 수도 있겠지. 그럼 어디 볼까?"

내가 전혀 예측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울은 불끈 주먹을 쥐어 나의 복부를 가격했다. 그 충격은 상당히 강력했다. 나는 10미터 이상 날아가 모래 언덕에 등을 부딪혀 쓰러졌다. 이 정도의 충격이었다면 보통은 배가 뚫리고도 남았으리라. 나는 예측하지 못한 상태였는데도 불구하고 본능적인 반사신경으로 배에 조금 힘을 줄 수 있었고 무지막지한 사울의 주먹 충격을 약화시키는 어떤 에너지 흐름을 너무 늦게 작동시키기는 했지만 육체의 붕괴를 막을 정도로는 감쇄시킬 수는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래 바닥을 등으로 비비며 창자를 뚫는 듯한 격통에서 한 동안 헤어나오지 못했다.  

"육체적으로는 많이 약화되었군. 내 공격에 대해 방어는 조금 한 것 같기는 한데, 여전히 에너지를 다루는 기술을 완벽하게 복구하지 못한 것 같아."

나는 사울을 속일 수 없었다. 내가 무능력하려고 하더라도 체득한 기술은 무지불식간에 발휘되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내가 어떤 기술을 가졌고, 그것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전혀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나는 모래에 파묻힌 채 고통을 참으며 두 팔을 밀어 몸체를 일으키려고 했다. 고통스럽지만 자존심이라는 것이 작용했는지 두 다리에 힘을 잔뜩 주어 일어섰다. 최대한 의연한 자세로 사울 앞까지 걸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얼굴에 드러난 고통까지 온전히 감추지는 못 했다. 

내가 배를 두 손으로 감싸쥔 자세로 걷자 사울은 나에게 천천히 다가오면서 허리께 차고 있던 권총을 손에 쥐어 올렸다. 권총의 구멍은 바로 내 이마까지 올라와 멈추었다. 그래, 내 능력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사실이 조금이라도 증명된 이상 사울이 나를 죽이는 것이 합리적인 행동일 것 같았다. 사울은 방아쇠를 미련 없이 당겼다. 찰칵 소리와 함께 나는 쓰러지려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하하하, 죽음의 두려움에 눈이 왕방울 만해졌군."

사울은 손을 여전히 들어올린 채로 방아쇠를 수 차례 잡아당겼다. 착칵 찰칵 착칵 찰칵. 내 심장은 떨리지도 않고 그저 담담했다. 사울은 리발버 권총을 반으로 접더니 총알을 모래 위에 떨어뜨렸다. 발사된 총알은 없었다. 

"내가 지배하는 이 세계에서는 화약이 그 기능을 전혀 발휘하지 못 하지. 나는 원거리 공격보다는 육체적인 전투를 더 좋아해. 하하"

세계마다 적용되는 물리법칙이 다 제 각각이리라. 하지만 내가 보고 있는 사울의 세계는 내가 떠나온 세계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무튼 다행이다. 화약이 작동하지 않는 세계로 넘어온 것이. 내가 총알을 피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주먹이나 에너지 파동에 죽지는 않을 테니까. 

사울이 육체적인 전투를 좋아한다고 하지만, 진정 육체적인 힘만으로 싸우지는 않을 것이다. 아까 나를 가격했던 주먹은 단지 육체적인 힘으로만 설명하기에는 너무나도 강력했으니까. 사울은 자신이 다룰 수 있는 에너지 파동을 주먹의 물리적 운동력에 결합하여 폭발적인 충격을 나에게 안겨주었다.  

"네가 나와 같은 피를 받지 않았다면 너를 진작에 죽였겠지."
"절반의 피."

사울과 나는 아버지는 같지만, 어머니는 다르다. 배다른 형제. 내가 사울의 탐지를 피하기 위해 기억의 문을 모두 잠갔지만 이런 기억은 사울의 말을 듣자 바로 떠올랐다. 나는 나한테 사울에게서 내 기억을 방어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자 내 반지를 어디에 두었는지를 다시 생각해내려고 했다. 하지만 그것은 가능하지 않았다. 

사울은 나를 끌고 사막길을 걸었다. 30분 정도 걷자 저 멀리 녹색의 평원이 보인다. 평원에 도착해서도 한참을 걸었다. 이제는 길이 보인다. 마차와 여러 필의 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총을 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내연기관이 발달하지 않았나 보다. 자동차가 아니라 마차라니.

마차는 8마리의 말이 끌고 있었고, 말의 갈기에는 깃털 장식이 달려 있었다. 사울과 나, 2명의 보위병은 마차에 탔고, 나머지 인원은 각자 날렵하게 생긴 말들에 올라탔다.  

얼마쯤 시간이 흘렀을까? 길은 잘 닦여 있었고 양 옆으로 펼쳐져 있는 목초지와 밀밭은 상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평원의 저 끝에는 지평선이 보였다. 이 정도의 평원이라면 상당한 숫자의 백성을 부양할 수 있을 것이고, 이런 넓따란 평원의 끝에는 사울이 거주하는 웅장한 건축물이 있을 것이다. 짐작컨대, 화약을 이용하는 대포와 같은 위력적인 장거리 무기를 사용할 수 없다면, 왕이 거주하는 건물은 분명 적의 침입을 막는 성의 형태를 띨 것이다. 중세시대가 붕괴한 것은 화약의 도입 때문이었으므로, 아마 사울이 다스리는 왕국은 중세 시대의 모습이 아닐까? 

길은 대체로 반듯하게 닦여 있고 바닥은 촘촘하게 긴 돌을 박아넣어 견고했다.  길의 폭이 마차가 마주 보고 통행할 정도인데다 바닥의 견고성에 비추어 보아 이러한 길을 조성하는 데에 상당한 인력과 자금이 투자되었을 것이다. 이렇다는 것은 사울의 통치력이 매우 견고하고 주민을 잘 조직해서 활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이렇게 강력한 왕권을 행사하는 가운데 주민의 불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마도 내가 이 왕국에서 어떤 활약을 하게 된다면 주민 사이의 어떠한 균열이 있을지 두고 봐야 할 것이다. 

마차는 신속하게 평원을 가로질러 나아갔고, 저 멀리에서는 눈짐작으로는 그 폭을 가늠할 수 없는 폭의 성곽으로 둘러쌓인 도성이 보였다. 도성은 해자로 둘러쌓였고 해자과 성문을 잇는 도개교는 내려와 있었는데, 그 폭이 상당히 넓었다. 마차는 도개교를 거쳐 성문을 지났는데, 성을 가로지르는 길의 양 옆에 세워진 건물은 3층이 주를 이루었다. 

외성문을 통과한 후 1킬로미터를 더 지나자 이제는 왕궁이 있는 내성이 보인다. 왕궁은 내가 예상했던 대로 중세풍의 웅장한 건축물이었다. 

사울의 웅장한 건축물에서 나의 대우는 그리 좋지 못했다. 왜냐하면 궁성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왕궁 오른 편에 지어진 건축물의 지하감옥에 갇혔기 때문이다. 내가 갇힌 지하감옥에는 다수의 죄수들이 있었는데 나는 독방에 감금되었다. 이곳에 갇힌 자는 주로 정치적인 이유로 죄를 범한 자들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