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피곤하다.”

 

바닥에 걸터앉아 청명한 하늘에 수놓은 빨래들을 지켜봤다.

내 하얀 하인 복장은 노동으로 땀에 얼룩져있다.

 

“좆같은 이세계.”

 

그렇다.

난 빙의당했다.

이제는 어렴풋이 떠오르는 전생에서의 삶.

그 마지막 순간에 분명 파란불이었던 횡단보도에서 트럭이 나를 치고…….

 

“뒤져버렸지. 그리고 봉투 속에 든 <악역영애 죽이기>에 빙의된 거고.”

 

침을 퉷 바닥에 뱉었다.

기분이 더럽다.

엔X디아에 우연히 저점을 잡고 한몫 단단히 땡겼는데….

청년희망적금도 이제 만기가 몇 개월 안남았는데.

 

“씨발. 신이 어딨어? 이렇게 열심히 사는 청년을 죽인 것도 모자라서 왜 이딴 이세계에…”

 

그 순간.

 

“루크!”

 

귀를 멍멍하게 울리는 근육질의 남자가 저 멀리 내 이름을 소리쳤다.

씨발놈.

 

“어디서 농땡이를 피우는 거냐? 분명 빨래 다 널고 달려오라고 했을 텐데?”

 

이 남자는 볼츠.

하인들의 왕이라 부를 수 있는 하인장이다.

그리고 이 새끼는 나를 싫어한다.

 

“네 행실은 주인마님께 단단히 일러 바치겠다.”

 

씨발.

마음 같아선 속마음을 오픈하고 싶지만 내 몸은 고작 13세.

당장 UFC에 데뷔해도 손색없는 이 남자의 근육질에 대항할 수 없다.

난 당장 빌었다.

 

“죄송합니다! 하인장님. 너무 힘들어서 그랬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봐달라고?”

 

웬일인지 볼츠가 너그러운 미소를 짓는 것이 아닌가?

나는 싹싹 빌었다.

 

“예! 아시잖아요. 주인마님 귀에 들어가면…….”

“그래. 모가지지.”

 

볼츠가 손으로 목을 쓱 선을 그었다.

볼츠가 말한 주인마님이란 사람은 이 거대한 저택의 주인이다.

그런데 소녀다. 나와 똑같은 나이의 <악역영애 죽이기>의 주인공.

나에기 이아가르.

 

성깔 더럽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운, 성격이야 당연한 거고. 그 이쁜 외모와 대단한 재능으로 나중에는 더 흑화해 모든 사람들의 공적이 되는…….

봉투 속에 든 마지막 권을 읽어보진 못했지만 대충 어떤 흐름인지는 이해할 수 있다.

 

난 싫은 거다.

안 그래도 마음에 안드는 주인공인데 하필 빙의해도 이딴 집의 하인이라니.

씨발.

씨발!!!

 

볼츠는 쓱 손을 내밀었다.

나는 손을 맞잡았다.

그러자.

 

“멍청아!”

 

깡!

소리가 나면서 내 대갈통을 쥐어박았다.

악!

 

“악!”

“누가 악수하랬냐? 이거 달란 말이야. 이거.”

 

볼츠가 익살스럽게 검지와 엄지로 동그라미를 만들었다.

씨발놈. 개새끼.

 

“하인장님… 박봉인 거 아시잖아요. 저 돈 없어요.”

 

볼츠는 내 말이 비웃기라도 하듯.

 

“뭐? 니가 돈이 없어? 이곳에서 제일 짠돌이인 놈이 뭐? 돈이 없어?”

 

볼츠가 왜 화내는지 난 모르겠다.

내 돈이잖아. 씨발놈아.

하지만.

 

“…알았어요. 하지만 집에 아프신 부모님 때문에 많이 드릴 순 없어요.”

 

그러자 볼츠는 놀란 듯 두 눈을 커다랗게 떴다.

 

“엥? 그,그랬냐?”

“네…. 부모님이 아프셔서 저한테 의존하고 있어요. 흑흑흑.”

 

아동착취,아동폭력하는 이 새끼한테 아까 맞은 게 서러워 닭똥같은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물론 거짓말이다.

볼츠는 미안한 듯 얼굴을 긁었다.

 

“…아,아니 됐다. 왠 그지새끼처럼 돈을 그렇게 저금하나 했더니……. 에잉 씨발. 그럼 일이나 제대로 해야할 거 아니야!”

 

볼츠는 겸연쩍은 마음을 지우려는 듯 발로 내 가슴을 팍 차고 뒤돌아갔다.

씨발.

 

“하아….”

 

가슴이 욱신거리고 머리는 빙글빙글 돈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누워 새파란 하늘을 바라봤다.

지옥같은 서울 생활. 숨 쉴 틈 없는 지하철 출퇴근을 생각하면 지금 이순간 만큼은 아픈 것 빼면 전생보다 나은 몇 안 되는 부분 중 하나다.

 

“하. 이대로 뒈져버릴까. 그럼 다시 전생할 수 있는 거 아니야?”

“전생?”

“그래. 전생…… 엥?”

 

나긋한 목소리 뒤에 숨은 광오함을 느낀 난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아까 무서웠던 볼츠가 아무것도 아니게 느껴졌다.

눈 앞에 대체 왜 있는건지 모를 저택의 주인마님. 

나에기 이아가르가 바람에 금발을 휘날리며 날 노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나에기가 비릿히 웃었다.

 

“전생이라…. 재밌는 걸 들었네? 훗.”

 

신이시여.

그냥 죽였으면 죽였지. 왜 제게 이런 시련을…….

아니면 하다 못해 개사기 스킬이라도 하나 쥐어주던가.

신 씨발놈아.

 

“따라와. 루크.”

“…예,예.”

 

나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의 심정으로 나에기의 뒤를 졸졸 쫓아갔다….

 

 

 

 

********

 

 

 

“이건 진실의 수정구야. 대륙에 몇 없는 엄청난 아티팩트지. 이걸 왜 가져왔을까? 내가?”

 

전생에 살던 3평짜리 내 원룸보다 열 배는 더 큰 거대한 방에 끌려가 의자에 앉혀놓고 탁자에 나에기가 가져온 건 보라색 빛깔의 아름다운 수정구였다.

나에기는 손으로 수정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사람은 말이야. 혼자 속삭일 때 나오는 말이 진실이라고 하잖아. 방금 네가 한 말도 진실이겠지?”

“…….”

 

내 머릿속에서 ‘위험! 위험!’이 계속해서 울렸다.

나에기는 성인이 돼서 한 번 각성하기 전에도 대단히 악명 높은 악역영애.

진실의 수정구에 만약 전생이 사실이라고 뜬다면….

 

‘토해지겠지. 이아가르의 전속마법사들에게 뇌가 해부되고, 모든 전생의 지식들이……. 그럼 난 처참하게 죽는거야. 전생 때 뒤진 것보다.’

“물론 진실이라고 해도 네게 해를 줄 건 없어. 보아하니 기억이 있는 모양인데…… 그게 조금 궁금할 뿐이야. 후후.”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럽게 웃는 나에기의 웃음이 너무나도 같잖고 역겹고 화가 났다.

씨발년!

 

“…주인마님. 간히 한 말씀만 드리겠습니다.”

“응. 해봐.”

“그때 제가 한 말은 저 혼자 망상하면서 지껄인 시시껄렁한 이야기였을 뿐입니다. 절대로 전생이나 그런 게…….”

“조용.”

 

나에기가 손을 내 입술에 갖다댔다.

그리고 더럽다는 듯 손수건으로 검지를 닦았다.

 

“명령은 간단해. 수정구에 손을 올리고 ‘나는 전생의 기억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면 돼. 진실이면 보라색이 파란색이 되고 아니라면 붉은색으로 변할 거야. 다시 말하지만 네게 손해를 끼칠 일은 없어. 자. 루크.”

 

나에기는 의자에 앉아 손가락으로 수정구를 가리켰다.

 

“손을 올려. 지금 당장.”

“…….”

 

나는 천천히 다가가다가 잠깐 멈칫했다.

 

“제가 방금까지 일하느라 손이 더러운데 화장실에서 손만 씻고와도 되겠습니까?”

 

나에기가 눈을 치켜들었다.

 

“도망가려고?”

“아뇨! 절대로요! 제까짓게 도망간다고 도망가지시겠습니까? 주인마님.”

“그럼 당장 손을 올려. 자꾸 이상한 말 하면서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마. 무슨 말인지 알지?”

 

씨발.

씨발!!!

이 세계에 전생한 지 3년이 지났다.

특전 스킬 같은 것도 없던 나는 무기력하게 하인으로서 아등바등 버텨내며 겨우겨우 살아갔다.

수전노처럼 돈을 긁어모아 그 돈으로 하인짓거리를 일찍 졸업하고 내 삶을 살아간다.

대충 어느 도시가 안전하고 어떤 곳에서 보물이 있는지는 아니깐.

그것만 믿고 희망을 품으며 3년을 버텼다.

근데 이게 뭐라 말인가?

왜 씨발 나에기가 빨래터에 나타나서 내 혼잣말을 듣냐고!

내가 혼잣말 했다고 날 죽이려 드는 이 년이 단단히 돌은 년이야!

 

나는 수정구에 손을 댔다.

단단히 움켜쥐면서.

 

“…저는 전생의 지식이 있습니다.”

 

수정구의 보라색이 소용돌이치더니 점차 어떤 색의 형상으로 변해갔다.

그러자 나에기도 긴장을 풀고 수정구에 눈길이 점점 집중됐다.

노린다면 이때밖에 없다.

 

“이야아아아!”

 

수정구를 나에기에게 순간적으로 훽 던졌다.

 

“!”

 

이 괴물같은 년은 그 가까운 거리에서 묘기에 가까운 반사신경으로 수정구를 피했다.

하지만 그건 실수였다.

와장창창.

 

“수, 수정구가…!”

 

그 귀한 아티팩트가 벽에 부딪히고 산산히 조각났다.

나에기가 사태를 파악하고 혼잣말을 하는 순간 나에게 뒤를 완전히 노출됐다.

 

“씨발년아!”

 

쾅!

 

“꺄아…! 읍.”

 

나에기의 뒤를 잡고 그대로 돌진해 바닥에 옆으로 눕혔다.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한 손으로 입을 막고 다른 한 손으론 목을 조르고 무릎으론 명치를 조였다.

이렇게 급소를 압박하지 않으면 평범한 하인인 내가 무조건 당한다.

 

“그… 읍윽… 그,그만……읍.”

“씨발! 내 기억을 뒤져봤자 엔X디아가 먼저 튀어나온다고! 그다음이 청년희망적금이고!”

“…읍,그,그게 뭔…… 소리…”

“돈이야! 돈 어딨어! 돈 어딨냐고!”

“소,손 좀…… 읍… 말,말을… 읍 하,할 수가…….”

 

머리에 핏기가 안 도는지 침이 줄줄 새고 손발을 덜덜 떨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제압을 했다 생각한 난 방 안에 있는 왜인지 굴러다니는 가위를 들어 커튼을 찢고 나에기의 손과 발을 단단히 묶었다.

나는 위협스럽게 가위를 치켜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지금 난 반쯤 미쳐있다.

미치지 않으면 이런 짓을 할 수 없다. 

 

“소리 한 번 질러봐! 그땐 이 가위로 네 두 눈을 파버릴 테니깐! 어!?”

 

나에기는 무서운 듯 눈물을 흘리며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예상외에 반응에 잠깐 생각에 잠겼다.

 

‘아 하긴. 이때의 나에기는 악행을 본격적으로 저지르기 전이니깐. 포텐셜만 갖춰진 상태였지. 나중엔 이따위 짓거리를 오히려 비웃는 강심장으로 변하는거고.’

 

“돈 어딨어?”

“왼쪽 서랍에…….”

 

화려한 침대를 밟고 지나가 왼쪽 서랍을 뒤졌다.

바로 100골드 Get.

 

“‘청석의 단검’도 내놔.”

“…그걸 어떻게?”

“닥치고 말해. 어디 숨겨놨어?”

 

내가 위협적으로 가위를 들자 나에기도 마지못해 말했다.

 

“…침대 밑바닥에 숨겨진 금고에… 있다. 하지만 금고만 선물받은 거라 열쇠는 나도……”

 

나는 나에기의 푸른색 목걸이를 거칠게 뺏고 침대를 치워 바닥에 숨겨진 금고를 꺼냈다.

그리고 목걸이를 자물쇠에 넣자 철컥하고 풀리는 소리가 났다.

나에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그게… 열쇠였다니…!”

 

금고엔 한 눈에 봐도 대단한 아티팩트인 청석의 단검이 청색을 흉흉히 빛냈고 그 옆에는 <가변술> 비급서가 놓여 있었다.

하나는 무엇이든 뚫을 수 있는 단검이고, 하나는 어떤 것으로든 변할 수 있는 비급이다.

나에기가 가지고 있어봤자 이것들로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니 착하고 선한 현대인인 내가 가져가는 게 누가봐도 옳다. 암암.

 

“씨발놈아! 그거 가져가면 아버지가 날 용서하지 않는다고! 당장 손 떼!

 

나에기는 갑자기 울분이 찼는지 무서움도 잊고 욕설을 했다.

나는 만화에서 봤던 대로 손목 스냅을 강하게 휘둘러 나에기의 뒷목을 치자.

뚝 소리가 나면서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헐… 씨발. 뒤졌나?“

 

나에기가 죽는 건 아무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내가 죽이는 건 아무래도 좀 그렇다. 아직 살인을 하고 싶진 않으니깐.

맥박을 확인해보니 다행히 딱 기절할 정도만 스냅이 제대로 들어간 모양이다.

 

”후우. 도망가자.“

 

나는 나에기가 깨어났을 때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입을 단단히 묶고는 방을 나와서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나에기의 방에 아무도 접근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고 하수인들에게 전했다.

도망갈 시간은 벌었다.

군대보다 좆같은 3년의 시간.

떠나려니 마음은 홀가분할 뿐이다.

 

”가즈아~!“

 

그렇게 심부름을 받았다는 핑계로 저택을 떠나 나는 열심히 튀었다.

기절한 나에기의 옆에는 진실의 수정구가 파란색 물결을 일렁이며 마지막 받은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안간힘을 쓸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