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컥-!


기세좋게 문이 열리며, 그 안에선 다소 퀭한 눈빛의 여성이 걸어나온다.


꿀꺽. 꿀꺽.


익숙한 듯 테이블 앞으로 걸어와 물병을 들어올린 여자는 순식간에 500ml짜리 한통을 비워냈다.  


같은지붕 아래.


방에서 나와 물을 마시는 여자. 그리고 거실 소파에 쓰러지듯 누워있던 나.


다른 사람이 본다면 그 누구나 평범한 부부, 혹은 동거하는 애인관계라고 생각하겠지만, 놀랍게도 우린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그렇기에. 언뜻보아 물을 마시러 나온 것 처럼 보이는 여자또한 단지 물을 마시기 위해 나온 것 뿐 또한 아니었다.


"...할 말이 있어."

"응?"


두 시간에 한번.


그녀는 관리를 위해 나를 찾아오는 것이었다.


마치, 시간이 날때마다 금붕어의 밥을 챙겨주듯이.


"뭔데?" 


스윽-


태평하게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이쪽을 향해 다가오는 발걸음은 멈추질 않는다.


퀭한 눈가와 약간은 쿱쿱해보이는 외견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그녀의 직업은 자택근무하는 프로그래머. 흔히 말하는 프리랜서였다.


적어도 '지 꼴릴때만 일하는 백수'를 뜻하는 프리랜서가 2시간에 한번씩 밖에 여유시간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만 고려해도, 그녀가 상당히 유능한 프리랜서임은 알 수 있지 않을까.


프리랜서.


상당히 포괄적인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의 울림 자체가 싫었다.


왜냐하면 음... 글쎄. 나는 직업도 없고, 그녀의 직업을 뜻하는 단어인 '프리'가, 나에게 있어선 연관이 없어서가 아닐까.


사람은 문득 자신에게 없는것에 대해 질투하곤 하니 말이다.


사라락-!


이런 생각을 하다보니,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온 그녀가 능숙하게 내 바지춤을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늦기전에 다시한번 다급하게 입을 열었다.


"할 말이 있다고 했잖아!"

"들었어. 할말있으면 해."

"...이런거. 이제 그만하자."


달그락-!


꽤나 강경하게 말했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던 행동을 이어가던 그녀였지만, 머뭇거리며 내뱉은 한마디에 행동을 멈춘다.


"...뭐?"


순식간에 험악하게 물들어가는 표정.


원래부터 사나운 눈매를 다크서클과 안경으로 중화시키고 있던 그녀의 화난 표정은, 보는이로 하여금 등골을 오싹하게 만들었다.


여자의 한은 오뉴월에도 서리를 내린다는 말이 있듯, 여자의 분노는 무섭다.


하지만 적어도, 직접 몸에 그녀에 대한 공포는 고작 그런 서리의 서늘함에 비유할 바가 아니라.


"..."


그나마 비슷한 느낌의 공포를 비유하자면, 사자나 호랑이를 야생에서 마주쳐 버린 포식자에 대한 두려움이 아닐까 싶다. 


꿀꺽-


이 대화에 들어가기 전에 생각해야 할 단 하나의 대전제가 있었다.


나는. 이 여자를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이는 자존감 부족이나 현실도피적인 행위가 아니라, 그동안 겪은 수많은 경험을 통해 쌓아온 빅데이터에서 도출한 결론.


그렇기에, 감당할 수 없는 분노가 입밖으로 표출되기 전에 재빨리 선수를 쳤다.


"우선. 나는 진심으로 너를 사랑하고있어. 더는 저항할 생각도 없고."

"..."

"실제로 우리가 철없던 시절처럼 진심으로 싸우는 것도 아니고, 너도 요즘에는 나한테 터치도 잘 안해주잖아?"


당연히도 구라였다.


그녀는 나를 가끔 바깥으로 내보내주기는 하지만, 메신저로 10분마다 사진과 함께 내가 무슨 일을 하고있는지 보고해야만했다.


위치추적 어플이 담겨있는 스마트폰으로 말이다.


"난 그거에 대해 정말로 고맙게 생각해,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라고 생각할 수 있는만큼."

"그런데?"

"...단순한 얘기야. 우리가 서로 너무나도 사랑한다지만, 2시간에 한번은 좀..."


단순히 생각해봐라. 정상적인 여자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소파에 지쳐 쓰러져 누워있던 사람한테 다가와서 바지를 내리려 들까?


물론, 그까짓꺼 2시간에 한번이면 할 수도 있지 않나? 싶을 수도 있다.


근데 시발. 말이 2시간에 한번이지, 이 여자의 방식은 과격한데에다가, 기준은 '더 이상 발정하지 않을때 까지'다.


발정이라니. 마치 개새끼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둘째치고, 이러다가 축 처진 내 분신이 어느샌가 더는 서지 못한다고 해도 이상할게 없었다.


실제로 최근에는 그녀가 방에서 나와도 다시 들어가게 되는 일이 잦았는데,


그럴때마다 의심가득한 표정으로 나를 홀겨보는 눈빛을 마주했고, 나는 억울해서 공중제비를 넉히 세바퀴는 돌 자신이 있었다.


"적어도 다른 사람처럼 일주일에 세네번... 아니. 처음부터 그렇게까지는 힘들겠다. 우선 하루에 한번으로 줄여보자."


애써 웃으며 내뱉어보지만, 그녀의 표정은 살벌하기 그지없다. 


"대신! 하루에 한번 하는 대신. 진심으로 하는거야. 잔뜩 사랑을 담아서, 서로의 고된 하루를 위로해주듯이."

"고된 하루?"

"...말이 잘못나왔네. 내가 무슨 고된 하루를 보내겠어. 다 네덕분이지. 그래서 더욱이 너를 위로해주고 싶다는거야."

"흐응..."


다행이도 조금은 흥미가 돋는지, 눈을 게슴츠레 뜨며 나를 내려다보는 모습.


혹여나 입으로 뱉으면 큰일이니, 마음 속으로 '해치웠나?'를 조심스레 떠올리던 그때.


"이해가 어렵네."

"...응?"

"애초에 너는 움직이지도 않잖아. 힘들어도 내가 힘들지, 왜 네가 힘들어 하는거야?"


씹년이. 


나는 목구멍까지 솟구쳐나온 상스러운 말을 가까스로 억누른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건가?


애초에 나는 움직이지 않는게 아니라, 움직일 수 '없는'거다.


하지만 정말로 그렇게 말할 수는 없기에,


"그...건. 그렇긴한데. 사람에게는 정신적인 고통이라는 것도 있잖아?"

"고통?"

"아."


최대한 순화해서 말해보려했지만, 실수로 진심이 새어나와버렸다.


지금 이 단어는 NG 였다.


적어도 그녀에게 있어, 내가 한창 반항할 때의 기억을 떠올리게 만드는 단어였으니.


'좆됐다.'


아니나 다를까, 조금은 유순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험악하게 굳어갔다.


"...진짜 고통이 뭔지. 까먹었나보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나는 곧장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왈칵끌어안았다.


사람같지도 않은 여자라 할지라도, 팔과 상반신을 통해 확실하게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는 분명히 여성의 육체였다.  


몰캉-!


...정말로. 여성의 육체였다.


'안입었구나.'


그녀가 자신의 집에서 속옷을 입어야만 하는 이유는 없었지만, 적어도 나는 제발 입어줬으면 했다.


그래야 그녀가 옷가지를 벗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더 늘어나고, 지옥같은 시간이 찾아오는 것을 늦출 수 있었으니.


"미안!"


불경한 머릿속과는 달리, 입에서는 떠나는 여배우를 잡는 남자주인공마냥 애처로운 목소리가 새어나온다.


나는 곧장 최대한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꼭 달라붙어 그녀의 목가쪽으로 머리를 파묻었다.


"내가 말하려던건 그런게 아닌거 알잖아. 들려?"


두근. 두근-!


서로 맞붙은 상반신을 통해, 심장소리가 느껴진다.


물론, 내가 이러는건 이런 쌍팔년도스러운 연출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단순히, 눈을 마주하는 것이 두려울 뿐.


실제로, 그녀 또한 이게 지금 뭐하는 짓이냐는 듯 상체를 들어올리기 시작했다.


나는 에라 모르겠다는 식으로, 막무가내로 매달리듯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시발.'


조졌다.


단단히도 조졌다.


그렇게 한동안 달라붙어 있자, 어정쩡한 자세로 침묵이 찾아왔다.


"......"


... 아무말도 하지 않는 것이 괜스레 더 두렵다.


아마도 지금쯤, 목가에 파묻힌 내 뒤통수를 무표정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진 않을까.


만약 이 여자가 내 몸을 강제로 떼어내려 한다면, 협상이고 지랄이고 그나마 살기위해선 곧장 눈앞의 목덜미를 물어뜯곤 현관문을 향해 뛰쳐나가는 수 밖에 없었다.


그럴 의도는 없었지만, 은연중에 급소를 공격할 자세를 취한 나를 칭찬하고 싶구나.


하지만 그렇게 한번 유혈사태가 터진다면, 이후에 만약에 잡히면 나는...


꿀꺽.


끔찍한 미래를 상상해서일까. 식은땀과 함께 내 심장은 RPM을 높여갔다.


두근-! 두근-!


숨막히는 침묵.


들리는 것은 긴박하게 뛰어대는 내 심장소리와, 전신을 통해 느껴지는 그녀의 육체뿐.


ㅡ...


들숨과 날숨을 반복하며 내몸을 꽉 움켜쥐듯 잡았다가 느슨해지는 감각이, 마치 밀물과 썰물을 반복하는 파도와 같이 느껴진다.  


그렇다면 나는, 파도에 휩쓸릴 미래를 앞둔 조개 껍데기 정도일까.


볼을 간질이는 기다란 머리칼의 감촉이 괜스레 더 오싹하던 그때.


"...몰랐어."


경동맥이 대체 어디에 있는걸까 곁눈질로 열심히 혈관을 찾고있던 나의 귓가쪽에, 뜻밖에도 다정한 목소리에 들려왔다.


"어? 응?"

"네가 나와 관계하는걸 싫어하는 줄 알고 있었거든."

"...그럴 리가."


있지.


존나게 있다.


그녀와의 관계는 사랑의 확인도, 욕정의 해소도 아닌. 상하관계를 각인시키는 것에 가까울 정도로 강압적이었으니.


실제로 내가 손끝이라도 잘못 까딱였다간, 반항으로 여겨 제압당하곤 했다.


"이제야 진심으로 나를 마주해주려던 거구나?"

"그...렇지? 아하하... 미안. 너무 늦어서."

"아니야."


스윽-


마치 뒤늦게 철이든 아이를 칭찬하듯, 상냥하게 나의 뒤통수를 쓰다듬는 그녀의 손.


"이제라도 알아줘서 기뻐."


그런데 기분탓일까.


"정말... 언제부터 이렇게 귀여운 생각도 할 수 있게 된걸까."


나의 몸을 옥죄는 그녀의 팔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기 시작한 것 같다.


ㅡ흐읏...하.


 그와 동시에. 거센 숨소리가 내 뒤통수를 촉촉히 적시며 귓가에 파고들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뭔가 잘못돼도 단단히 잘못된 것이다.


"응... 네가 직접 허리를 흔들면서, 내 귓가에 사랑을 속삭여준다는거지...? 나를 사랑하는 만큼?"

   

꽈아아악-!!


이제는, 더는 숨을 쉬기도 힘들 정도로 강하게 조여오는 감각.


두근두근두근- 두근-!


그제야 전신을 타고 느껴지는 그녀의 심장박동에, 나는 처음부터 그녀의 손바닥위에서 놀아나고 있었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도. 하루에 한번은 너무 갑작스러우니까. 세번. 세번으로하자. 아침 점심 저녁으로, 먹고나선 힘들 수도 있으니까... 식전으로."


문득 배려가 느껴지는 말이었지만, 내 귀에는 밥을 먹고 했다간 토할 정도로 격하게 할 거라는 통보처럼 느껴지는 발언과 함께.


터벅.


그녀는 나를 놓아주지 않은 채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한걸음. 두 걸음.


무게를 견디지 못해 자동으로 쳐지는 뒷걸음질. 분명 시야를 알 수 없음에도, 나는 직감적으로 내 발꿈치가 엉거주춤 향하고 있는 곳이 침실이라는 사실을 알고있었다.   


이 여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나를 궁지로 몰아넣고선, 견딜 수 없어 입으로 새어나온 말에 책임이라는 자물쇠를 걸어 족쇄를 채운다.


하지만 별 수가 없었다.


"...좋지?"


천천히, 그녀에게만 느껴질 정도로.


애처롭게 목가에 얼굴을 비비며,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었다.


'그래.'


적어도 '벌'을 받지 않고, 횟수는 하루에 세번으로 줄지 않았는가?


ㅡ스읍...


내가 흘린 땀에 젖어서일까. 조금은 더 쿱쿱해진 그녀의 진한 체향이 코를 가득 매운다.


그와 동시에, 더는 뒷걸음 칠 수 없게 된 나를 위에서 덮치듯이 내리까는 무게감이 느껴진다.


직후에 느껴지는 푹신한 매트릭스의 감각도.


삐걱-!


드디어 자유로워진 시야.


다시 한번 그녀가 가득이 매워진다.


ㅡ츄웁.


따듯하다 못해 뜨거운 숨결과, 매끄러운 혀가 들어오는 감각.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전에 급하게라도 한번 더 숨을 들어쉬어둘걸.


앞으로 한동안은 아무리 숨을 들어쉬어도, 그녀의 체향만이 느껴질테니 말이다. 


하지만 이제와서 생산직에서 서비스직으로 바뀌었다던가, 오히려 시간을 따져보면 손해라는 생각은 애써 하지 않는다.


그런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그녀가 만든 우리에 갇혀, 그녀가 뚫어준 아주 작은 숨구멍으로 희미하게 산소를 느끼며, 스스로를 위로해야 했다.


그것만이 나에게 주어진 유일한.


...하아. 하아.


희망과 자유라는 감정을, 미세하게나마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수단었으니.


"...아."


한동안 계속해서 입을 맞춰오던 그녀는 가쁘게 숨을 내뱉는 나의 모습을 보곤 이제야 떠올랐는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이제부턴. 서로. 사랑하는거였지?"


그리곤 나의 옆에 포개지듯 누워 옆으로 빙글 돌려 누웠다.


고개를 돌려보면, 그곳에는 마치 재롱부리는 반려동물을 보듯, 나를 귀여워 미치겠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그녀가 보여왔다.


앞으로 이어질 기나긴 입맞춤에 앞서 나는. 다시 한번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ㅡ스으읍...


하지만 어째서일까.


느껴지는 것은 여전히 그녀의 체향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