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폭력적 묘사 주의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어리숙하고 자신감이 부족해 항상 위축되어 있었다. 그런 탓인지, 나는 항상 타인과의 관계를 형성하는 데 있어 어려움을 겪었다. 또래 아이들과 좀처럼 어울리지 못하던 나는, 쉬는 시간이면 교실 한쪽 구석에 조용히 앉아 책을 읽곤 했다. 같은 공간 안의 누구도 내게 관심 없었고, 나 또한 그러했다. 


어느 날, 그녀는 그런 나에게 조용히 접근해 왔다.



“책 좋아해?”


“응? 아…….”


“항상 책을 읽고 있길래. 나도 책 자주 읽거든. 읽고 있는 건 무슨 책이야?”



단아한 외모의 그녀는 항상 차분하면서도, 나에게 적극적이었다. 같은 반 학생도 아니고, 다른 반 학생이었던 그녀는 어느새 하교 시간을 나와 같이하기 시작했다. 수업이 모두 끝나면, 함께 학교에서 벗어나 함께 걸으며 이야기하는 십여 분……. 그녀가 가진 금색 빛 눈동자와 부드러운 몸짓은 그녀만의 독특한 분위기를 자아내 사람을 빨아들이는 힘이 있었고, 나는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만을 기대하게 되었다.


그녀와 대화하며 알게 된 것은, 그녀와 나는 놀라울 만큼 관심사의 많은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 역시 독서를 즐겨 했는데, 그녀가 좋아하는 작가마저 나와 비슷했다. 내가 말이 통하는 또래와 교류하게 된 것은 처음이었고,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그녀의 또래 아이들 답지 않게 성숙하고, 또 지적인 모습은 줄곧 동경해 오던 이상형과도 일치했다.


그녀는 나와의 관계를 주도했고, 자연스레 그녀와 나의 만남은 잦아졌다. 그 무렵 나는 항상 빛나는 그녀를 마음에 두기 시작했다. 나는 자신을 가꾸는 것에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동시에, 나는 그동안 소홀했던 학업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우등생인데다가 성격도 쾌활한 그녀의 옆에 당당히 서고 싶었던 마음이었다.


그녀와 함께하는 시간은 항상 즐거웠는데, 나는 이전보다 적극적으로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녀가 어떤 것을 좋아할지, 무슨 이야기를 하면 좋을지 생각하곤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머니 없이 나를 홀로 키워내시며 항상 다정하셨던 아버지는…… 학생 신분의 나로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큰 금액의 빚을 지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가까운 친척 하나 없던 나는 홀로 세상에 내던져졌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던 내가 직면한 문제는 하나하나가 감당하기 어려운 것들이었다. 한 분밖에 안 계시던 부모님을 잃은 슬픔도 잠시, 처음 보는 남자들은 장례식장까지 찾아와 어머니는 안 계시느냐, 다른 재산이 얼마 정도 하는지 아느냐와 같은 질문을 던지기도 하고, 개중에는 다짜고짜 행패를 부리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 놓인 나에게 그녀는 정서적인 도움뿐만 아니라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큰 힘이 되었다. 그녀는 우선 내가 상속 문제를 해결하고, 여러 법적 절차의 진행을 도와줄 변호사를 알아봐 주었다. 이후 경매가 진행되면서 당장 마땅한 보호자도 없이 오갈 곳 없던 나는 멀리 떨어진 지역의 보육원에서 생활하는 것으로 결정되는 듯했으나, 그녀는 자기 부모님이 소유의 작은 빌라에 빈 방이 있다며, 내게 잠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당분간은 여기서 지내. 학교랑 거리가 조금 멀긴 해도, 투룸이라 혼자서 그럭저럭 지낼만할 거야."


"고마…워."


"이런 걸로 뭘.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바로 연락해. 나는 가볼게. 내일 학교에서 보자."


"아…… 저기…!"


"응?"


"내가…… 뭐라도 도와줄 수 있는 게 있을까? 너무 미안해서……."



그녀는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나를 그 자리에서 꽉 끌어안고선, 따뜻한 위로의 말을 건네왔다. 나는 그녀 품에서 그동안 참아왔던 눈물을 터트렸다.


그 이후로 나는 그녀에게 생활 전반은 물론이고, 심적인 부분에서도 의지하기 시작했다. 그녀가 나를 도와준 일은 나에게 강렬한 부채 의식을 남겼다. 그렇게 남은 부채 의식은 지워지기는커녕 더 많은 도움을 받게 되면서 더욱 진해졌다.


내가 가지고 있는 부채 의식을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듯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내게 노골적인 부탁을 해오기 시작했다. 나는 당황스러웠다.


손을 잡아도 되냐는 부탁으로 시작해서, 나중에는 꽉 껴안아달라 거나, 입맞춤해달라는 식이었다. 연인 사이에서 할 법한 행위들을 요구하는 그녀의 부탁은 차마 거부할 수 없었다. 그녀에게 받은 도움은 너무나 큰 것이어서, 이렇게라도 그녀에게 도움이 된다면, 어떤 요구에라도 나는 기꺼이 응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는…… 부탁을 거절했을 때 혹시나 그녀가 내게서 멀어질까 하는 두려움의 감정을 품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그녀의 요구들을 단 한 번도 거절하지 못했다.


노골적 요구와 그에 기꺼이 응하는 행위가 몇 번이나 이어지면서, 그녀와 나의 관계는 복잡해졌다. 우리는 연인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일반적인 친구 사이는 더더욱 아니었다. 내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고 난 뒤에 그녀가 돌아갈 때면, 그녀는 항상 몇 장의 노란색 지폐를 놓고 가곤 했는데, 그건 내 마음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녀가 돌아간 뒤면 그녀가 제공한 공간에서, 그녀가 사준 침대 위에 앉아, 그녀가 선물한 옷을 입고, 그녀가 놓고 간 지폐를 만지작거리던 일은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나는…… 더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녀를 멀리할 수 없는 처지의 내가 비참하고, 한편으론 나 자신이 역겨웠다.


나는 상황을 타개하고자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미성년자를 고용하는 곳은 찾기 어려웠지만, 여기저기 들쑤신 끝에 인상 좋은 아저씨가 운영하는 작은 가게에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날 밤에 여느 때와 같이 그녀의 요구를 들어준 뒤, 그녀의 머리맡에서 기쁜 소식을 전달했다.



"나 내일 저녁부터 아르바이트 시작하기로 했어…! 그러니까…… 돈은 그만 줘도 괜찮아. 그…… 내가 아르바이트 열심히 해서 조금씩이라도 계속 갚을게. 항상 고마워."


"……어디서 하는데?"


"근처 라멘 가게! 저번에 같이 갔었던 곳인데 기억나지? 지나가다가 알바 구한다길래 얼른 가서 말씀드려봤더니 내일부터 출근하라고 하시더라고."


"……잘 됐네. ……돈은 굳이 갚을 필요 없어."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눈은 여전히 기묘하게 아름다웠지만, 평소와 달리 무언가…… 서늘하게 찌르는 듯해서, 놀란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차갑게 반응한 그녀는 돌아갔고, 나는 내가 뭔가 잘못했으리라 지레짐작해 혼자 심란해졌다.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는 어쩐지 평소보다 많은 양의 돈이 놓여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나는 한 통의 문자를 받았다.



「미안해요 학생. 다른 사람을 구해서 나오지 않아도 돼요. 미안해요.」



나는 좌절하지 않고 계속해서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봤다. 그러나 이후에도 그 결과는 다르지 않았다. 어떻게든 자리를 구한 다음 날이면 출근하지 않아도 된다는 일방적 통보와 함께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이번 아르바이트도 어떻게 구한 건데……. 야간 아르바이트라도 해보려고 했는데 잘 안되네. 미안해…."


"돈 걱정은 하지 마라니까……. 돈은 나중에도 벌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졸업도 얼마 안 남았잖아. 내가 계속 도와줄 테니까 지금은 공부에 집중해."


"그래도……."


"그만. …키스해도 돼?"


"……응."



어쩐지 기분이 좋은 듯한 그녀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늘 하던 것처럼 나를 밀어 넘어뜨리고는 강하게 껴안아 입을 맞춰왔다. 내가 입을 살짝 벌리자 그녀는 혀를 밀어 넣었고, 그녀의 타액이 흘러들어왔다. 그녀의 부드러운 혀는 수십 분 동안 나를 탐했다. 그리고…… 오늘도 그녀는 몇 장의 지폐를 침대 위에 올려두고 갔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그녀와 나는 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그녀는 내게 지원을 약속하며 대학 진학을 권했지만, 나는 더는 그녀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다시금 용기 내 구직활동을 시작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저소득층 청년을 대상으로 주거를 지원하는 제도가 시행된다는 소식을 들어 인근 복지센터로 향했다.



"음……. 선생님은 선정 기준에 맞지 않으셔서, 신청이 불가능하세요."


"네? 저 지금 버는 돈도 없고… 가족도 없는데……."


"그러면 혹시 기초생활보장제도 통해서 받고 계신 지원이 있으신가요?"


"기초생활보장제도……? 그런 건 받아본 적이 없는데요."


"이상하다……. 잠시만요. 아, 선생님 배우자분이 계시잖아요? 2인 가구 기준으로, 소득 인정액 기준을 한참 초과하셔서 이번 주거지원 사업은 신청이 불가능하세요."


"배…우자요?"


"네, 배우자분 앞으로 소득이 잡히네요."



……나는 결혼한 적이 없다.



"자…잠시만요, 배우자로 등록된 사람이 있다고요? 저는 결혼한 적이 없는데……?"


"……. 가족관계증명서 확인해보시겠어요?"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받아들고, 가족 사항란을 확인했다. 그리고 배우자란에는 그녀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나는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혼란스러웠다. 온갖 잡다한 생각들이 물밑에서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라탄 나는, 차창 밖의 도심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볼 뿐이었다. 어느덧 밤은 찾아와 차창은 거울처럼 기능하고, 그 위에는 내 얼굴이 떠올랐다. 유리창에 비치는 내 목덜미에는 그녀의 흔적이 눈에 띄게 남아있고, 나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목을 가렸다.


나는 집 근처 공원의 벤치에 앉아 그녀에게 어디서부터 뭘 어떻게 따져야 할지 고민했다. 오늘따라 집으로 돌아가기 싫다. 하늘을 바라보며, 나는 몇 해 전의 일을 추억했다. 기억 속의 그녀는 여느 때와 같이 상냥한,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그녀에게서 멀어질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빌라 계단을 올라 현관문을 열자마자 내가 마주한 것은, 그녀였다. 공기는 차갑게 가라앉아 고요했다.



"걱정했잖아. 왜 전화를 안 받아?"


"……이거 말인데, 나는… 원하지 않아."



나는 가족관계증명서를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그 종이를 흘겨보곤 다시 나를 응시했다.



"이거 때문에 심술이 났어? 전화도 안 받고?"



뭐? 심술? 그녀의 말에 나는 은연중에 억눌려 왔던 것들을 쏟아냈다.



"너 나 몰래 혼인 신고까지 해놓고 그런 말이 나와? 나 어려울 때 도와주는 건 정말 고마운데, 그래도 그렇지……. 너… 가끔 무서운 거 알아? 오늘도 그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내 허락도 없이 현관문을 직접 열고 막 들어오고!"


"그래서?"


"……."


"하고 싶은 말 다 했어?"



그녀가 날 무표정하게 쳐다봤다. 나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평소와는 다르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미묘한 기류를 읽어낼 수 있었다.



"하아…. 그럼 이때까지 껴안고 키스하고 비벼댄 건 뭔데? 너도 좋아서 한 거 아니야?"


"그…그건 네가 항상 돈으로……."


"좋아서 한 게 아니었다?"


"……아니야."



처음 하는 반항. 내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고, 몸이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라앉지 않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



"누가 너 좋아한대? 이딴 돈 필요 없어. 내가 언제 돈 달라고 했어? 소름끼치……!"



그녀는 열변을 토하려는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고…….


둔탁한 소리와 함께, 말을 끝내지 못한 나는 바닥에 쓰러졌다. 나는 상황 파악이 잘되지 않았다. 다시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 순간에야 나는 복부에서 시작되어 온몸으로 퍼지는 육중한 고통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럼 경찰에 신고해."


"아으……."


"너 신고 못 하잖아. 아닌 척하면서 그 야한 몸으로 계속 나 유혹하잖아. 너한테 쓸모 있는 건 그 몸밖에 없다는 거 너도 잘 아는 거 아니야?"


"콜록…! 콜록."


"같이 있을 때가 좋다고 하질 않나, 불면증 생겼다는 애가 내 품에 안겨서는 금방 잠들질 않나, 뻔히 내가 오는 시간 알면서 그때마다 구석구석 씻고 기다리질 않나……. 싫다는 소리 한 번 없다가 이제 와서? 나는 네가 계속 유혹하는데도 어떻게든 참고 있는 거 안 보여?"


"……."


"돈이 필요 없다고? 그럼 이때까지 네가 쓴 돈은 뭔데? 누구 돈이었는데?"


"……."


"내가 돈 안 주면, 혼자서 아르바이트도 못하는 네가 어디서 돈을 구하게? 밖에 나가서 다른 여자 꼬시게?"


"너 무슨 말을 그러으읍!"



그녀가 내 입을 강제로 막은 뒤, 다시금 둔탁한 소리가 들려오고, 복부로부터 다시 한 번 느껴지는 격통에 나는 몸을 떨며 그녀의 손을 막으려 애썼다.


그런 내 턱을 잡아 올린 그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눈은 빛나는 대신, 그 속이 공허했다. 나는 그것이 오싹하여 벌벌 떨었다.



"어차피 넌 내 거야. 좀 더 자각을 가져."


"……."


"물어보면 대답을 좀 해."


"네…네에에……."



몸이 축 처졌다. 다시금 생각해 보면, 나는 단 한 번도 불만을 말한 적이 없다. 그녀에게 너무나 많은 도움을 받게 되면서 나는 그저 순응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에게 종속되어 있었다.



"후우……. 이렇게 아프게 하니까 나도 마음이 아프잖아. 응?"


"네…네……."


"예쁜 얼굴이 창백해졌네. 오늘도 들어줬으면 하는 부탁이 있는데, 이거 먹고 시작할까?"



그녀는 더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녀는 내 입을 강제로 벌려 정체를 알 수 없는 두 개의 캡슐을 쑤셔 넣었고, 나는 그걸 받아 삼켰다.


정체불명의 약은 금세 기능하기 시작했다. 몸이 뜨겁게 달아오르고,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이 몽롱한 와중에도 그녀의 눈이 야성적 충동으로 가득 차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뇌쇄적이고 파괴적인 눈과 마주하고서야 나는 그녀가 위험한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을 온 몸으로 느꼈다.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까? 해외로 가는 게 좋아? 결혼식은 어느 정도 규모로 할까? 아, 신혼집은 이미 봐뒀으니까, 내일 일어나면 짐부터 싸자."



그녀는 대답 없는 나를 완전히 제압하고선 동이 틀 때까지 몇 번이고…….



"하아…… 좋아. 좋아해. 사랑해. 널 너무 사랑해……. 예뻐하고, 귀여워하고, 항상 사랑할게."



그녀는 열성적으로 내게 사랑을 갈구했고, 그건 무척이나 비현실적으로 다가와서…… 나는 두려움이나 불안한 감정을 더는 느끼지 않았다. 정신이 흐려지고, 몸이 두둥실 떠올랐다. 나는 그녀를 받아들여 그 상태를 유지하고자 했다.


생각해 보면, 나를 유일하게 사랑해 주고 거둬줄 수 있는 건 지금의 아내밖에 없었다. 행복이란 건 어떤 걸까? 그런 질문을 마음에 남겨둔 채로, 나는 그녀를 더욱 끌어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