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봐, 이 몸께서 이렇게 오늘도 강림해 주셨다고! 얼른 나와서 맞이하란 말이야!”
밖에서 들려오는 시끄러운 소리에 나른한 대낮의 선잠을 깼다.
아름다운 목소리와 반면 그렇지 못한 칭얼대는 내용, 보지 않아도 그녀다.
문을 열어보니 역시나 예상대로다.
하늘의 빛깔을 가득 담은 듯한 눈부신 머리카락의 아가씨, 히나나와 가의 텐시 아가씨가 내가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리는 것을 소홀한 준비보다 더 싫어하는 그녀의 성격을 알기에, 나는 부스스한 모습을 다듬지 않은 그대로 그녀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다.
환상향에 흘러들어온 첫날, 요괴의 습격으로부터 나를 구해줬던 그녀와의 인연이 이어진 것도 오늘로 세 달째이다.
거의 한번도 거르지 않고 매일마다 내 방을 찾아와주는 그녀 덕분에 아는 이 하나 없는 환상향 생활이 외롭거나 무섭지 않았다는 점에 대해서는 정말 감사하고 있다.
나중가서야, 그녀가 천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지.
천인이란 이 환상향에서는 일반인이 범접할 수 없는, 신과도 같은 높은 존재,
이름난 요괴조차도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고귀하고 강한 존재라고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녀가 그런 높은 존재인 것을 알게된 것은 얼마 전의 일이다.
하긴, 매번 강림이라는 표현을 지겹지도 않은지 꼬박꼬박 쓰는 걸 보면 그녀 입장에서는 어느정도 힌트를 줬다고 생각했어야만 했다.
아니, 부족한 대우에도 크게 불평이 없었던 걸 보면, 그건 내 착각이려나...?
아무튼 그런 고귀한 아가씨인걸 안 이상 나는 매번 초라하고 누추한 움막에 들이는 것에 대해서 매번 부끄러움과 초라함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역설적인 말이지만 나를 막대하는 듯한 태도가 오히려 나에게는 다행이었다. 그런 고귀한 아가씨가 그녀가 정녕 아가씨다운 기품과 몸짓으로 나를 대했다면 나는 더더욱 견디지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뻔뻔하고 막나가는 태도였기에 차라리 예의와 범절을 잘 지키는 것보다 더 마음의 부담을 덜어낼 수 있었기에 훨씬 나았던 것이다.
“얼른 차라도 내와, 보나마나 싸구려겠지만, 그래도 당신이 직접 내려주는 차는 그럭저럭 삼킬만 하니까.”
건성으로 한 느릿느릿한 대답과 함께 나는 천천히 부엌으로 들어가 주전자에 물을 담고 물이 끓기만을 기다렸다.
마침 선물로 받은 찻잎이 있었기에, 허름한 움막을 질리지도 않고 매번 찾아주는 빈객에게 내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은... 조금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할 테니까.
아마 히나나와 아가씨는 오늘도 무언가를 잔뜩 준비해왔을테니, 그것에 곁들일 차정도면 괜찮겠지.
한낮의 밝은 햇살을 완상하며, 우리 둘은 마루에 앉아 차와 다과를 즐기고 있었다.
오늘도 어김없이 천계의 과자들을 몰래 싸온 아가씨 덕분에, 차를 마시는 시간이 그간 즐거웠다는 것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겠다.
차향을 한번 맡고는 아가씨는 감탄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제법이네. 오늘은 왠일로 싸구려가 아니잖아?"
“만족하셨다니, 다행입니다 아가씨. 실은 선물로 받은 것을 한번 내봤는데 괜찮게 내려진 모양이네요.”
칭찬에 나는 괜시리 흐뭇해져, 괜히 쓸데 없는 내용까지 말했다.
곧 이 말을 뱉은 것을 수습하느라 애먹게 될 줄도 모르고.
“...선물? 당신에게? 누가?”
“네, 어제 홍마관의 메이드로부터 질 좋은 찻잎을 받았거든요.”
“흐음... 그래?”
히나나와 아가씨는 이전까지의 표정을 싹 굳히고 나를 찬찬히 살피는 듯이 살펴보았다. 그동안 보여준 적 없는 실로 진지한 표정이었다.
“무슨 일로?”
“네?”
“무슨 일로 받았는지 물었어.”
“그게...”
갑자기 그녀가 왜 그런 것까지 물어보는 것일까.
텐시 아가씨의 태도가 너무나 단호하고 또 얼핏 노기까지도 어려있어서 나는 말을 한참을 골라야만 했다. 그녀의 태도를 보았을 때 실언을 한 것이 분명했다. 어떤 것인지는 몰라도...
그러고 보니 어제 무슨 일로 이 차를 받았더라.
매번 신선한 채소만을 팔아줘서 고맙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매번 공짜로 채소를 주는 것도 아닌데 말이지.
아무튼 몇 번 거절했지만 어느새 그녀는 자리에 없었고 손에 딱 봐도 귀해보이는 포장으로 감싸진 찻잎이 들려져 있었다.
굳이 숨길 이야기도 아니었기에 아가씨에게 있는 그대로 전달드렸지만 아가씨의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그렇구나.”
아가씨는 조용히 차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는 천천히 그것을 삼켰다. 얼핏 보기에는 차를 마시는 모습이 아닌, 찻물을 질긴 고기인 양 물어뜯고 씹어먹는 듯한 난폭한 표정과 함께.
둘 사이에 한참을 자리잡은 무거운 침묵을 깬 것은 아가씨의 날선 질문이었다.
“그 뒤로는 메이드 장과 무슨 일은 없었고?”
“그 뒤라고 하셔도... 바로 어제 일어난 일인걸요.”
“거짓말.”
“거짓말이 아니에요. 사실상 강제로 떠넘겨지다시피...”
“거짓말! 또 그 사람 좋은 표정으로 헤실거리면서 고맙다며 웃어줬을 거 아냐!!”
“그건 손님이니까 어쩔 수 없...”
“그런 식이니까 쉬운 외래인이라면서 발정난 암컷들한테 노려지는 거라고.”
쉬운 외래인...?
발정난 암컷...?
천인의 고귀한 입에서 그런 상스러운 말이 나올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평소같이 무언가 가볍게 따지고 드는 어조가 아니다.
이 말투에는 진지함이 서려있었다.
갑자기 아가씨가 그런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왜일까.
홍마관의 그 메이드장과 무슨 문제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가씨. 아가씨를 기쁘게 하려 한 선물인데, 제가 너무 무지했군요. 어떤 결례를 저질렀는지는 몰라도 아가씨께 사죄드리겠습니다.”
“하, 당신... 나는 당신한테 그런 말을 들으려 하는게 아니라...”
“그렇지만 아가씨는 제 은인이에요.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아가씨는 제게 언제나 고마운 분이니까요. 제 마음속에서 아가씨는 언제나 1순위니까요.”
그 말에, 약간이나마 기분이 풀린 듯,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그녀는 고개를 돌렸다.
그럼에도 히죽이는 미소가, 입의 끝부분에 걸려 내게도 보인다.
정말, 이런 부분은 외견상 보이는 것처럼 소녀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이, 이거...봐... 이런 식이면 당신 정말로 위험...”
“그러니까, 제가 이 곳을 떠나기 전에 당신의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그때 순간 아가씨의 눈동자가, 그 고귀한 천인이 담으리라고 생각할 것 같은 짙은 어둠으로 흐려졌던 것으로 보인 것은 다시 생각해보면 착각이 아니었을 것이다.
“당신... 지금 뭐라고 했어...?”
당황스러울 것이다. 갑작스러울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곳이 아니라 바깥에 속한 사람.
떠남은 필연일테고 내 존재가 더 이상 그녀를 흔들어서는 안된다.
내 존재로 인해 고귀한 천인이 앉은 자리가 즐겁지 않게 되는 것(不樂本座)은, 은혜를 배반하는 것일 테니까.
나는 마치 삼키기 힘든 커다란 무언가를 밀어대듯, 바싹 마른 입의 도는 침을 억지로 목구멍으로 밀어넣어 삼켰다.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힘겹게, 나오려 하지 않는 말을 내뱉어야만 했다.
“저는 곧 이 환상향을 떠나 제가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에요.”
...
집이 난장판이다.
그녀는 화풀이랍시고 온갖 악을 쓰다가 결국 지쳐서 하늘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녀는 노호하듯 배은망덕한, 파렴치한 인간이라 나를 매도했다.
그리고는 울면서 무릎꿇으며 내게 애원했다. 그녀가 입은 하얀 옷이 지상의 진흙과 그녀의 흐르는 눈물에 더럽혀졌지만 그녀의 제안을 받아줄 수는 없었다.
나를 위해서도, 그녀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그녀의 눈물이 멈추고 화산처럼 들끓던 분노가 겨울철에 딱딱하게 얼어버린 호수처럼 차분해졌을 때, 흐릿한 불빛 사이로 비치는 아가씨의 비릿한 미소는 이전까지 보여준 적 없는 표정이었다.
마지막으로 그녀는 날선 말을 비수를 꽂듯 내게 뱉어두고 떠났다.
“좋아, 당신 말대로 떠나보던가.”
“그렇지만 당신도 내가 없으면 안된다는 것을 알게 될거야. 머지 않아.”
“어쩌면 내게 빌게 될지도 모르지.”
나는 말없이, 떠나는 그녀를 전송했다.
그녀를 위해서 그녀에게 상처입힌다는 모순은 오로지 내가 끌어안아야 할 모순이다.
청초한 그녀에게 지상의 더러운 진흙은 어울리지 않으니까.
그녀도 나도 있어야 할 자리로 돌아가야겠지. 그녀는 하늘로, 나 역시도 바깥 세상으로.
오늘로서 그녀가 이곳을 찾지 않은 것이 오늘로 사흘째가 되었다.
나는 평소처럼 살아가야만 했다.
그녀가 떠난 뒤로 특별한 일이 있었다면 배고픔도, 목마름도 느껴지지 않았다는 것.
정말로 몸에서도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기망행위다.
죄책감과 쓸쓸함 때문에 정작 필요한 것을 망각하고자 하는 것은 마음 뿐만이 아니라 몸도 마찬가지로 벌이는 행위인 것이다.
그러니 실제로 내 몸도 마음처럼 피폐해져 가고 있었을 것이다.
억지로라도 삼켜야겠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고 간단하게 차린 쌀미음을 입에 가져갔다.
시장기란 전혀 느껴지지 않고 그야말로 생존을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라는 생각만 드는 행위였다.
그러나 수저를 입에 가져간 순간, 혀에서 역함을 느껴 수저를 급히 내려놓았다.
“...!”
쌀이 썩은 것은 아니었다. 나흘 사이에 쌀이 썩었을 리가 없다.
그렇지만 몇 번을 다시 수저를 들어 맛을 보려 해도 역겨움만을 느낄 뿐이었다.
혀에서 느껴지는 맛 자체는 상한 음식의 시큼함이 아니었다.
미음에서 느낄 수 있는 은은한 쌀내음만이 날 뿐이지만 그 맛사이에 섞인 역함은 확실히 느껴지는 진짜였다.
나는 직감했다.
이건 미각의 문제가 아니다.
나는 홀린듯이 집 안의 식재료를 모두 털어 입안에 넣었다,
그리고 이윽고 또 토해내듯 뱉어냈다.
이상하다. 모든 음식이 이상했다. 산지 얼마 안되는 식재료뿐만 아니라, 분명 상할 리 없는 찻잎에서도 마치 오폐수의 들끓는 듯한 역겨움이 치밀어 오르자 나는 무언가 잘못된 것을 느꼈다.
음식이 이상하게 변한 것이 아니다.
내 혀가, 내 몸이, 내가 음식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
나는 서둘러 우물가로 향해 맑은 물을 한모금 입에 대려 했으나, 역시나 전에는 맑고 시원한 물이라 생각한 우물물에도 욕지기를 불러오는 역겨움이 한가득이었다.
“대체 왜?”
틀렸다. 어떤 것을 입가에 가져가도, 이제는 역함에 모든 것을 게워내버릴 것 같다.
이미 몇 번이나 반복한 일이라 이제는 몸에 힘 조차도 없다.
힘이 빠진 나는 마루에 몸을 누였다. 좀 자고 난다면 괜찮아 질거야. 일시적인 것일 테니까.
아니
일시적인 것 같은게 아냐.
이 역겨움, 사실 얼마전부터 조금씩 느껴졌었어, 의식할 정도로 커진 것이 오늘일 뿐이지.
언제부터였지...?
아마 사흘 전부터..
그러니까, 히나나와 아가씨가 안오기 시작한 날 부터...
설마...
아닐 거야.
아니야.
정말로...?
하지만... 어째서...?
“당신, 곤란한 거 같네.”
그렇게 널부러진 나무토막처럼, 마루에 몸을 던졌던 나는 들려오는 목소리에 겨우 몸을 일으켰다.
절대 잊어버릴 수 없는 목소리.
그녀다.
온몸에 기운이 빠진 나는 겨우겨우 말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어째서,.. 이 누옥을 다시 찾으신 건가요...”
그리고 나는 마음 속으로 빌었다.
그녀가 다시 온 것은 이 일과 무관한 것이라고.
그녀는 그저 못다 표출한 분노와 실망을 마저 내뱉으러 온 것이거나, 다 잊고 작별인사를 하러 온 것일 뿐이라고.
사실, 직감하고 있었는데...
“버러지처럼, 기면서 내게 자비를 구하는 것까지도 보고 싶었지만.”
그녀는 그 말을 하나하나 분노를 담아 말했다.
“그렇게 고통에 몸부림치면서 내게 의존하는 모습을 상상했지만.”
그녀는, 마치 그래야만 한다는 듯이 저주하듯 내뱉었다.
“당신의 고통을 잠시라도 지켜보는 건 너무 가슴이 아파서 말이야.”
그리고 그녀는 손에서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러니까 당신에게 한번 더 기회를 줄게.”
온 몸에 힘이 빠져, 기운이 없음에도 밝게 빛나는 형체와, 은은히 흘러나오는 암향은 그 존재를 결코 다른 것으로 오해할 수 없는 표지였다.
선도,
그녀에게 이름만 들었던 천상의 복숭아다.
한입을 먹으면 몸이 가벼워져 날 수 있어지고.
두 입을 먹으면 영원히 살 수 있게 되고.
전부 다 먹으면 하늘의 신선이 될 수 있다는 영약.
그녀가 내민 손을 그대로 붙잡기 전에, 나는 모든 충동을 겨우 이겨내어 가까스로 그녀에게 물을 수 있었다.
“전부... 당신이... 꾸민 짓인가요...?”
“아아, 아니야. 당신이 자초한 일이지.”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기 전에, 그녀는 음산하게 웃으면서 내게 말했다.
“그러니까 지상의 인간은 함부로 천상의 음식에 입을 대는게 금기인 거야.”
그리고 그녀는 맛좋은 음식을 보듯 나를 보며 여러 번 입맛을 다셨다.
“천상의 깨끗함을 맛봐버린 인간은 천상을 그리워하게 되거든. 그러다가 지상의 역함을 견디지 못하고 굶어죽어버려.”
이제는 공기마저도, 내가 내뿜는 숨결마저도 역해오기 시작했다.
이 지상의 모든 것이 더럽고 역하다는 것을 알아버린 이상, 그 인지는 점차 모든 것으로 확대될 것이다.
내게 다른 선택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나는, 죽어버리고 말겠지.
이 선택이 어떤 결말을 불러올 것인지 나는 이제야 알게 되었다.
그녀가 내민 복숭아를 잡기 전, 머릿속에 수십가지의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이 모든게, 처음부터 그녀의 설계였던 것일까.
그녀가 몰래 훔쳐왔다는 천상의 음식들은,
천상의 깨끗함에 나를 중독시키기 위해서...?
내가 만일 떠나지 않겠다고 말했어도,
언젠가 그녀는 이런 일을 벌였을 것일까.
내가 그녀의 품에서,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한다면.
결국 그녀에게 내 발로 다시 돌아가게끔.
그런 모든 생각은 무의미했다.
그저 잊혀졌던 굶주림과 목마름이 온몸에서 일깨워져 저 복숭아를 잡으라고 하고 있을 뿐.
나도 알고 있다.
그것을 집는 순간 내게 남는 것은 오직 파멸 뿐이다.
이전의 삶은 없이, 그녀에게 모든 것을 저당잡히는 삶을 살아야만 하겠지.
더러움의 끔찍한 것을 알아버렸으니까.
더러움을 잊을 방법은 오직 그녀만이 제공해줄 수 있으니까.
“이걸 받으면 당신은 이제 나만의 당신인거야. 오직 내 뜻대로만 사는.”
그녀는 밝은 미소로 내게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눈동자 속에서는 고귀한 천인의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이 혼탁하고 더럽혀진 욕망의 소용돌이가 일렁이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