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은 반을 배정받고 안내 사항들을 들었고 집에 돌아와 베개에 머리를 눕자마자 길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이 되어 등교를 하자 입구에 배치된 게시판에 노랑색 이름표를 단 1학년 생들이 웅성거렸다.

 

“하위 3%는 퇴학이라니. 회장도 너무한 거 아니야?”

“쉿! 들으면 어떡해! 쫓겨나고 싶어?”

“어? 김진우다.”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자 모두의 시선이 내게로 모였다.

나는 낯간지러워 볼을 긁으며 게시판을 지나쳤다.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가 개잖아? 학원 역사상 최악의 입학생.”

“혹시 회장이 재를 퇴학시키려고 규칙을 만든 거 아니야?”

“그럴만 해. 나도 둔재랑 있고 싶지 않으니깐.”

 

내가 만들고도 이름도 잘 기억나지 않는 지나가는 엑스트라들이 하는 말 따위 귀담아 듣지 않았다.

1-3반에 들어서자 김세현이 창가쪽 중간에 자리잡았고 나도 자연스럽게 옆자리에 앉았다.

 

“안녕?”

“…응. 안녕….”

 

의기소침한 상태로 머리를 푹 숙이는 김세현.

 

“왜 그래? 어제랑 다르게 텐션이 떨어졌네.”

“…그 게시판 봤어? 하아. 나한텐 쥐약이야. 정말.”

“미래 일은 미리 걱정하지 마. 그러다 면역력 떨어진다.”

“…….”

 

김세현은 대답할 기운이 없는지 멍하니 앞을 바라봤다.

 

‘걱정이 많나보네. 실전에 매우 약한 설정이 추가됐다고 했지? 그게 트라우마라도 되나 보군.’

 

원래라면 차석이 되어있어야 할 김세현이 이렇게 걱정하는 게 낯설다.

내 원래 소설에서는 후반에 최강의 남자가 되어야 하는 주인공이 쭈구리 여자가 되버리다니….

 

“…내 얼굴 그만 봐. 이쁘지도 않은데…….”

“아 미안. 근데 너 되게 이뻐. 삐친 머리만 정리하고 웃기만 하면 이 학원에서 젤 이쁜 걸?”

“…기분은 좋네.”

 

김세현이 이제야 기운을 차렸는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학생들이 다 착석한 상태에서 담임 채유화가 앞문을 열고 들어왔다.

 

“반갑다. 애들아. 어제도 얼굴은 봤지만 새학기가 시작되니 정식으로 인사할게. 앞으로 1년간 너희들의 담임을 맡은 채유화라고 한다. 부디 무탈하게 사망자와 퇴학자없이 같이 보내자고 말하고 싶지만… 하아.”

 

20대 중반쯤 되는 늘씬한 담임 채유화가 나를 보고 한숨을 뱉었다.

 

“아무래도 그건 힘들 것 같네.”

“푸풉.”

“풉.”

 

비웃는 소리가 여기저기 또 들려온다.

이능 학원의 공인된 꼴지가 이런 느낌일까?

갑자기 조금 서러워졌다.

하지만 착한 김세현이 위로하려는 듯 옷매무새를 남몰래 잡아당기자 조금 힘이 났다.

 

“1교시는 적성 평가가 이뤄질 거야. 이미 모두의 능력은 파악하고 있지만 좀 더 세밀하게 말이지. 숨겨진 재능도 발견할 겸 하고.”

““네!””

 

신이 난 학생들이 이구동성으로 대답했다.

채유화는 흰 수정구를 교탁 위에 올려놓았다.

 

“순서대로 책상 위에 이걸 올려놓고 1분간 양손을 대고 눈을 감을 거야. 강렬한 색깔일수록 재능의 빛이 강한 거니깐 참고하도록 해. 그 외 숨겨진 스킬과 능력은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를텐데. 모두 나타나는 건 아니니 안나타난다고 실망하지 마렴. 그럼 앞줄부터.”

 

모두의 시선이 수정구에 집중됐다.

색깔은 다양하게 나타났다.

어떤 학생은 파란색이, 녹색이, 노랑색이 나타났지만 모두 다 하나같이 색상이 얕았다.

 

“선생님! 어떤 색깔이 좋고 나쁜 거예요?”

“재능은 비교가 아니라 개성이고 색깔이야. 좋고 나쁜 건 없단다.”

 

순서는 앞자리에서 뒷줄로 돌고돌아 내 옆자리인 김세현에게까지 왔다.

김세현이 눈을 감고 수정구에 양손을 갖다대자 얕은 빨강색이 둥그스름하게 떠오르더니 순간 강렬한 장미같은 화사함이 수정구를 뒤덮었다.

 

“와!”

“이게 재능의 강렬함이구나!”

“김세현 진짜 대박이다.”

 

채유화가 조금은 떨린 손으로 교탁을 탕 두드렸다.

 

“조용! 세현이가 필기 때 실수하지만 않았다면 수석은 어렵더라도 차석은 되었겠지. 너희들도 모두 알고 있었잖니? 근데 참. 이런 강렬함은 이세은 말고도 처음이구나….”

 

채유화가 감탄하듯 말했다.

그리고 시선이 옆자리 내게 다가왔다.

 

“시간 없으니 빨리 하렴.”

“…….”

 

완전히 개무시하는 담임의 말과 벌써부터 쿡쿡 웃으며 비웃을 준비를 하는 반 학생들이 되려 짜증났지만 김세현의 부드러운 눈빛을 보며 화를 삭혔다.

그리고 나도 얼른 보낼 겸 눈을 감고 수정구에 양손을 댔다.

 

“…….”

“오오. 변한다.”

“최초 퇴학자는 무슨 색이냐?”

“하얀색인데?”

“하얀색?”

 

그 순간.

 

<신검……>

 

“!”

 

뜻하지 않은 스킬의 발견에 나도 모르게 눈이 번쩍 떠졌다.

 

‘뭐지? 이게 왜 나한테 있는 거지?’

 

멍하니 앞을 보자 수정구는 완전히 하얀색으로 뒤덮혀졌다.

 

“와. 진짜 강렬하다. 하애서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네. 크크.”

“얼마나 재능이 없으면 저런 색깔이 나오냐?”

“이름은 기억해둘게. 후배들 오면 말해줘야 하니깐.”

 

반은 왁자지껄했다.

나는 괜찮았지만 옆을 보자 김세현이 주먹을 굳게 쥐며 손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나는 김세현의 손을 꽉 잡았다.

 

‘어제 처음 만난 애한테 이렇게 화도 내고 애도 참 성격 좋긴 하다. 하긴 주인공이라 그렇게 만들었으니깐.’

“괜찮아. 뭐 앞으로도 계속 그럴텐데.”

“……알았어.”

 

김세현은 화가 안풀린 듯 고개를 깊이 숙였다.

나는 수정구를 뒤로 넘겨주는데 채유화가 날 멍하니 바라보는 게 아닌가?

나도 사람인지라 볼멘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왜요? 할 말 있어요?”

“……그건 아니겠지. 응응. 아무것도 아니란다. 자 그럼 다음.”

 

채유화가 헷갈려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하얀색은 모든 색상 중 가장 밝은 색.

아예 무능력하거나 아니면 재능이 철철 넘치거나.

김진우에 대한 리메이크가 조금은 일어났다면 과연 그건 어느 쪽일까?

 

 

 

********

 

 

 

점심시간.

같이 밥 먹자는 김세현에게 양해를 구하고 잠긴 옥상으로 올라갔다.

나는 자연스럽게 열쇠가 숨겨진 벽에 걸린 시계를 들춰 열쇠를 꺼내 다시 문을 닫았다.

문을 열자 학원을 둘러싼 온 도시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넓다는 게 실감이 났다.

봄바람이 날 휩쓸며 지나갔다.

시원하다!

 

“캬.”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누워 잠깐의 여유를 만끽했다.

그야 생각해봐라. 일어나자마자 빙의가 되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퀘스트를 받고 바로 학교에 가고 김세현을 만나고…….

 

“이게 정보의 저주인가. 머리가 지끈거려. 하지만 희소식도 있으니깐.”

 

1교시 때 수정구에서 떠오른 김진우에게 숨겨진 스킬.

 

<신검합일>

 

등급은 무려 S등급.

검에 대한 숙련도를 가파르게 올려주는 초반에, 특히 김진우처럼 능력치가 낮고 아무런 숙련도도 없는 캐릭터에게는 천군만마와도 같은 굉장히 귀중한 스킬이다.

 

“중간 고사떄까지 검만 죽어라 휘둘러야 겠네.”

 

사실은 시험 결과를 조작하거나 다른 퀘스트를 해결해 영약을 먼저 구하거나 등등 다른 방법을 선택했지만 신검합일만 배운다면 중간고사에서 하위권에 있을 확률은 턱없이 낮다.

그리고 애초에 학원에 남아있으려는 이유가 내 몸 하나 튼튼하게 지킬 힘이 필요해서기도 하니깐.

 

“버티면 돼. 얀데레 덫만 밟지 않으면 괜찮을 거야….”

 

누가 얀데레 속성이 있는 히로인들인지 뻔히 알고 있다.

그런 무서운 여자들은 일단 피하고 본다. 그게 상책이다.

 

“세현이는 괜찮겠지. 그런 거 없는 주인공인데다가 애가 하자도 없고 엄청 착하잖아. 설마 얀데레 속성이 추가되었겠어? 크크.”

 

친구도 사귀었고 대책도 마련되었다.

슬슬 일어나려고 하는 찰나.

 

“……누구야?”

 

갑자기 뒤에서 들려오는 여자애의 목소리.

얼른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자 큰 가슴팍에 책을 끌어안은 안경을 쓴 갈색 머리의 여자가 궁금하듯 말했다.

 

“어떻게 열쇠가 있는 위치를 안 거야?”

 

이름표를 보지 않아도 안다.

2학년 서유리.

직업은 연금술이다.

 

나는 고개를 갸웃하며 <설정안>을 발동시켰다.

 

<서유리>

 

의심이 더 많아지게 바뀌었습니다.

혼자 있을 수 있는 위치를 찾았습니다.(옥상)

??????

??????

……

 

설정안의 레벨이 낮아 더 열람할 수 없습니다.(현재 3%)

 

‘아. 설정이 조금 바뀌었구나. 귀찮게 됐네….’

“저기. 나 혼자 대여한 곳은 아니니깐 있어도 상관 없지만 조용히 해줄 수 있어?”

“아 네. 선배님.”

 

서유리는 옥상에 둘러친 철조망에 등을 기대 책을 펼쳤다.

다시 봄바람이 불어와 서유리의 갈색 머리칼이 옆으로 휘날렸다.

나는 그림과 같은 그 광경에 속으로 휘파람을 불었다.

 

‘여기 세계의 등장인물들은 진짜 뭔 짓을 해도 화보를 찍는 구나. 내가 만들었지만 진짜 잘 만들었다.’

“할 말 있어?”

 

시선을 느꼈는지 서유리가 고개를 들어 날 바라봤다.

 

“아, 아니예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응. 문 닫고 가.”

“네.”

 

나는 부리나케 옥상을 나갔다.

상냥하고 한없이 평화로워 보이는 서유리지만….

 

‘진실은 아니지.’

 

완결 전 지은 서유리의 배드엔딩 외전 편에서 서유리는 질투심에 완전히 사로잡혀 주인공을 오체분시하고 그 조각난 시체에 방부처리해 매일 밤 자위도구로 사용했던…… 아니. 그만 말하자.

아무튼 얀데레 히로인들 중 그 수위가 굉장히 높은 캐릭터다.

무서운 여자라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