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풉..."



다른 사람이 들었다면 무서운 협박으로 여겼겠지만, 나한텐 귀여운 투정으로 들렸다.



"걱정 마. 그럴 일 없으니까."



"하긴, 날 두고 어떻게 한 눈을 팔겠어?"



안심한 듯 팔을 풀고 벌러덩 누워버린다.



"너도 누워."



"이제 가야될 것 같은데."



"시끄러."



리타는 나를 끌어당겨 제 옆에 눕게 만들었다.


날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 나도 그랬다.


피곤한지 조금 풀린 눈과 땀에 젖어 헝클어진 머리가 묘한 색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언제 봐도, 너무 예쁘다.



"사랑해."



"..."



"늘 말하고 싶었어."



그녀는 그리 말하곤 배시시 웃었다. 마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그 얼굴을 본 순간, 가슴에서 온 몸으로 따뜻한 무언가가 퍼져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어쩌면 이 얼굴을 보려고 지금까지 살아왔던 게 아닐까.



"나도...사랑해."



몸의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왔다.


우리는 서로를 껴안고 잠에 들었다.



'나가야 하는데.'



하지만, 지금은 왠지 여기서 자도 괜찮을 것 같았다.




*




다행히 일찍 눈이 떠졌다.



'아직 새벽...'



눈 뜨자마자 홀딱 벗고 있는 몸이 앞에 보이니 다시 욕구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가슴과 엉덩이를 깨지 않을 만큼 살살 주물렀다.



'진짜 신기하네...이렇게 말랑한 몸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거지.'



따뜻하고 말랑하고, 뭐라 설명할 순 없는데 야릇한 느낌이 난다.


가슴 모양도 예쁘다는 생각을 하며 한참 감촉을 즐기다 고개를 들자 눈이 마주쳤다.



"그만 좀 만져 변태야."



"깼어? 미안..."



다시 자라고 말하려 했는데 리타는 일어나 옷을 입고 있다.


아. 나도 나가야 하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순순히 벗을걸.


한숨만 푹푹 쉬고 있는데 리타가 내 등을 툭툭 쳤다.



"자. 이거 입고 나가."



시종들이 입는 옷. 크기도 나한테 적절하다.



"어제 몰래 챙겼지."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불렀구나..."




*




/


존경하는 백작님께.


...(중략)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백작님과 아가씨를 모실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건강하십시오.


/



그저께 쓰다 만 사직서...엄청난 정성을 들여서 썼는데 갖다 버리게 생겼다.


마크랑 릴리. 얼굴 보기는 앞으로도 힘들겠구나.






"아가씨는 여전히 아프세요?"



"아!..."



"왜 그래? 어디 아파?"



"걷기 힘들어..."



"...네. 걷는 게 조금 힘들다고 하시네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니 거짓말을 한 것이 아니다.


이미 아프다며 누워있었으니 들킬 염려는 없었다.



"근데 뺨은 왜 그래요? 조금 부었네요."



아.



"...부딪혔어요."






어찌어찌 넘겼지만, 그 후엔 더 큰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통증이 낫자마자 리타가 지금까지의 시간을 보상받겠다며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씁..."



등을 얼마나 할퀴었는지 옷 입을 때 엄청 쓰라리다. 이건 그냥 내가 참을 수 있지만,



"야 임마. 보는 사람 민망하게 그게 뭐냐. 좀 가릴 것이지."



"네? 뭘요?"



"거울 좀 봐라. 나 어제 물고 빨았어요 하고 광고를 하는데."



"헐."



이렇게 남은 자국 때문에 들키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시발. 너무 노골적이잖아. 붕대라도 감아야 하나?'



"진짜 몰랐냐. 이거라도 써라."



브룩스 아저씨한테 맨 처음 걸려서 다행이다.



"아주 뜨겁구만. 한참 좋을 시기지. 상대는 누구냐?"



"...창관이요."



"뭐라고? 이 자식이! 허우대도 멀쩡한 놈이 벌써부터 그런 델 가면 어떡해!"


"병 걸릴 수도 있어 임마! 설마 이미 빠진 거 아니지? 그런 거 다 가식이고 영업용 멘트야."


"서비스 잘해주는 걸 자기 좋아하는 거라고 착각했다가 돈 다 날린 놈들이 얼마나 많은 지 알아!"



'억울하다...'



"사실 좀 무서워서 본게임 하기 전에 나왔어요..."



"그나마 다행이구만. 다신 그런 데 얼씬도 하지 말아라!"



"넵..."






바보 취급받는 건 괜찮다. 또 다른 문제는...



"오늘 밤에도 와."



"..."



물론 나도 좋다. 당연하다. 사랑하는 사람이랑 하는데 싫을 이유가 어디 있나.


하지만 내 체력은 무한하지 않다는 문제가 있었다.



"...왜? 싫어?"



"정말 미안한데...오늘 아침에 움직이질 못했어. 진짜. 눈 뜨기가 힘들었다고."



"으...."



사정사정한 끝에 오늘은 넘어갈 수 있을 줄 알았다.



"일어나~"



'...?'



사람이 너무 피곤하면 일어나도 정신을 못 차린다.



"으...왜...여기?"



그리고 말도 제대로 안 나온다.



"잠이 안 와서 잠깐 얼굴만 보려고 왔지."



"...응..."



"근데 자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깨웠어. 한 번만 하자. 잠도 좀 잤으니까 괜찮지?"



여기선 진짜 소음 때문에 들킨다고 겨우 설득해서 그냥 껴안고 자기만 했다.






"어제 쉬었으면서 왜 벌써 끝이야?"



"미안...허리가 너무 아파."



"...알았어."



시무룩한 표정이 마음 아프지만 도저히 몸이 안 따라주니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이스!'



속으로 약간 해방감을 느끼며 옷을 챙겨 입고 나가려는데 다시 날 붙러세웠다.



"잠깐, 잊은 거 없어?"



"뭐가?"



"안아줘."



포옹을 재촉하고 있는 리타를 힘껏 껴안았다.



'너무 귀여워...그런데.'



분명히 내가 안고 있는데도 키 차이 때문에 내가 안겨있는 꼴이다.


그리고 그 생각은 나 혼자만 한 게 아니었는지 리타가 입을 열었다.



"나보다 힘도 약하고 키도 작고. 완전 내가 누나 같네."



"응..."



"누나라고 해볼래?"



엄청 기대하는 눈빛. 저 반짝이는 눈을 어떻게 거절할 수 있을까.



'안 해주면 계속 조르겠지...'



"...누나."



하지 말았어야 했다.



"❤️❤️❤️"



눈빛이 무섭게 돌변한 리타는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았다.


결국 그날은 방을 나갈 수 없었다.






'나는행복합니다나는행복합니다나는행복합니다'



"그...어디 아파요?"



"아니요..."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아까는 힘도 못 쓰고. 지금은 정신이 나가 있고."



"그냥...잠을 못 잤어요."



"심한가 보네요. 얼굴도 많이 야위었고..."



'심하긴 하지...'



"마침 이 차가 잠이 잘 온다던데, 이거라도 드세요!"



"고마워요."



'줄이자고 말해볼까...'






"너 소피 씨랑 친하게 지내지 마."



"왜?"



질투하는 건가. 너무 사랑스럽다.



"괜찮아. 소피 씨는 내 취향이 아니니까."



"나도 알아. 봤으니까."



"어?"



"근데 소피 씨는 아니야. 그러니까 거리 둬."



"알았어..."



여자의 감이라고 하는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런 기류는 없었다.



"그나저나, 우리 밤에 이러는 거 말인데."



"응?"



"...좀 줄여야 하지 않을까?"



"뭐? 죽을래?"



"아닙니다."






'살려줘...'



일주일 중 5일은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다크서클은 기본, 살과 근육이 조금씩 빠지고 있다.


살려면 오늘 밤, 아니 당분간 하지 말자고 빌어야 한다.


몸 상태 때문에 사람들의 의심을 살 수 있다는 핑계까지 섞어야겠다.



"끼이익..."



당연히 밤에 몰래 들어가는 거니까 노크는 안 한다.


기대하고 있을 리타에게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백작님이었다.



"..."



"..."



쿵. 쿵. 쿵.


온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안 들키고 싶다면, 살고 싶다면 대답을 잘 해야 한다.


할 수 있어! 나!



"앉거라."



"넵."



"리타에게 이미 다 들었다."



살아나갈 수 있다는 희망이 처음부터 무너졌다.


리타와 함께 세심하게 짜고 있던 도주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평민이 귀족 딸내미를 취한 죄...


강간이라면 극형이고, 아니라면 병신으로 만들어 쫓아낸다고 들었다.



"칼, 너를 처음 데려왔을 때가 생각나는구나."


"얼굴도 항상 어둡고, 축 처져 있었지. 가엾다고 생각해서 데려왔지만 오히려 널 더 힘들게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렇다고 돌려보낼 수도 없으니, 원한다면 언젠가 떠날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고 생각했단다."



"네..."



"그러다 리타에게 너를 보냈지. 또래끼리 어울리면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고."


"너도 알겠지만 그때 리타는 항상 누워있었잖니. 좋은 결정이었어. 너도 리타도 얼굴이 밝아졌으니."


"차기 가주가 될 몸이라 바쁜 아들놈 대신 네가 오빠 노릇을 해주는 걸 보니 참 기특하더구나."



긴장돼서 백작님의 말을 쫓아가기가 힘들다.



"늑대에게서 딸을 지켜준 이후로 너에게 교육을 시켰지. 그건 리타가 떼를 써서 그리해준 게 아니다."


"너에게 보상을 내린 것도 아니다. 다른 곳으로 가려면 지식이 있어야지. 원래부터 그럴 생각이었다. 좀 앞당겼을 뿐."


"너의 후견인이 되어주고 싶었다. 널 아꼈으니까."



"..."



"미안하구나."



"...예?"



"떠날 생각이었다고 들었다. 그걸 들은 딸이 널 강제로 깔아눌렀고."


"유사시에 제 몸을 지킬 수 있도록 단련시켰는데, 그걸 그렇게 쓰리라곤 생각지 못했다."



"...아닙니다."



시작은 그랬을지 모르겠으나 결국 서로 좋아서 한 일인데. 나를 감싸려고...



"아니라고? 내가 미안할 필요가 없다는 건가?"


"그래. 그렇다면 안 미안하다. 사실 처음부터 조금도 미안하지 않았다."



?



"우리 딸의 사랑을 받는 게 내가 미안할 일인가. 오히려 네가 나한테 죄송해야지. 딸을 채갔으니."


"...농담이다. 몸이 잔뜩 굳어있길래."


"표정 풀고 편히 듣거라. 이렇게 될 건 이미 알고 있었다."



이미?



"한창때 남녀가 종일 붙어있는데 안 타오르면 그것도 문제가 있는 거지."


"아주 눈물겨운 사랑이더구나. 자기가 다 강제로 했다고, 걔는 아무 잘못 없다고 눈을 부릅 뜨는데..."


"내가 직접 얘기하고 판단하겠다고 했지. 따박따박 말대답을 하는데 어릴 때 아빠가 제일 좋다던 말은 기억도 안 나는지 너무 서러웠..."



"..."



"모르는 사람이랑 결혼하느니 콱 집을 나가버리겠다는데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무슨 험한 꼴을 당할 줄 알고."


"크흠. 어쩌다 보니 너에게 못할 얘기도 하는 것 같구나."



"질문이 있습니다."



"뭐든지."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예전에 너희 둘을 떨어뜨리려고 했었는데, 어찌나 떼를 쓰는지...그때 느낌이 왔었다."


"다른 귀족 아들들을 만나도 전혀 반응이 없었지. 여자들과는 잘만 얘기해서 동성애자라는 소문도 났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왜 아가씨를 막지 않으셨습니까?"



"그 애가 널 보고 있을 때의 표정을 봤거든. 그걸 보니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지."



"아..."


나만 눈치 못 채고 있었나?



"그 아이는 그렇고, 너는 어떻지? 사랑하나?"



"네. 정말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래...얼굴만 봐도 알겠다. 바람만 피우지 말거라. 내가 아니고 딸한테 죽을 테니."



"넵..."



"아무튼 서로 행복하다면 그걸로 됐다. 그리고 내일부턴 너도 같이 단련하거라. 이렇게 비실비실해서는."


"앞으로 어떻게 할지는 천천히 정하자꾸나. 이만 가보마."



"감사합니다. 편안한 밤 되십시오."



정신이 하나도 없네...






백작님이 나가시고 곧장 들어온 리타의 표정이 좋지 않다.



"무슨 일 있어?"



"아버지가...당분간은 금지하셨어."



"!!!"



내 몰골을 보시더니 리타에게 자제하라고 한 소리 하셨다는 모양이다.


백작님...여러모로 감사합니다...



"어쩔 수 없지. 잘 자."



"그래도...네가 원해서 한 거라면 아버지도 뭐라고 못하시겠지?"



"아니, 그럴 리가..."



"이리 와!"




*




쓰면서 진짜 고통스러웠지만 재밌었다.


봐준 사람들 정말 고맙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