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리즈 역키잡 보고 싶은데 왜 없음?

그래서 빌드업 해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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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돌연 덮쳐온 잠에서 깨어난 어린 마족은 곧바로 자신을 잠재운 상대의 면면을 살피고서 몸에 힘을 줬다.

  

  그리고 그런 어린 마족을 바라보는, 시체보다 창백한 피부를 가진 남성도 흔들림 없는 눈으로 어린 마족을 바라봤다.

  

  빛 한 점 없는 어두운 방에서 그러기를 한참, 남성은 무언가 결단을 내린 듯 턱을 괴고 있던 손을 떼고 먼지가 살짝 내려앉은 술잔을 기울였다.

  

  "확실하진 않았는데, 우린 동족이군."

  

  "알아. 보자마자 날 버리고 도망친 부모가 생각났으니까."

  

  어린 마족의 동족을 자칭한 남성은 문 바깥에서 들려오는 왁자지껄한 소리와, 소녀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로 머리를 자극하여 자신의 피에 각인된 깨달음을 재차 상기했다.

  

  인간들의 사회에 기생해 살아오며 알아낸 것은, 인간을 죽이기 위한 가장 효율적인 수단은 인간들의 화폐라는 사실.

  

  그들은 자그마한 은빛 몇 줄기에 서로를 거리낌 없이, 차라리 즐거워하며 동족을 죽인다.

  

  화폐가 무거워질수록 마음은 가벼워진다.

  

  비단 죽이려 하는 상대에게 부여된 생명의 가치를 낮추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감정 또한 차츰 가벼이 만든다. 그것이 인간들이 만든 화폐의 무게.

  

  남성은 그 사실에 깨달음을 얻고 화폐를 수급하기 위한 집단을 만들었다. 자신을 어둠을 찾아 기어들어 온 인간이라 소개하며, 인간들에게 배운 것처럼 생명을 팔아 화폐를 벌었다.

  

  그는 자신의 깨달음을 재고해 보았다. 딱히 이상은 없었고 그것은 아주 이상한 일이었다. 저 동족이 왜 자신을 보고 제 부모를 떠올렸는지 이해할 수 없었기에.

  

  "그런가. 동족을 본 건 오랜만이라 까먹은 것 같군. 그럼, 나에게 협력해라."

  

  "싫어."

  

  "합당한 이유가 있나?"

  

  어린 동족의 생기 없는 눈동자에서 진심을 읽은 마족은 의뭉스러운 목소리로 물으며 술을 들이켰다. 미지근한 액체가 입에 담겼다.

  

  그는 취하지 못했다. 마족으로서, 취한다는 개념을 이해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관찰해 온바, 취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중대한 일로 보였다.

  

  그렇다면 최대한 독한 술을 촉매로 삼아, 자신이 취한 모습을 상상해서 마력의 힘을 빌려 인간들의 머릿속에 직접 심어두자.

  

  눈앞의 동족은 오늘의 촉매가 될 술을 사고, 주변에서 팔아치울 생명을 물색할 때 우연히 발견한 동족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은 지금에 이르러서도 전적으로 의문투성이였다. 왜 동족이 길 한복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있었는지.

  

  "…"

  

  반면 빛을 잃은 보석 같은 눈과, 한층 더 파리해진 창백한 피부를 타인이 알아볼 수 없도록 어둠 뒤로 숨긴 어린 마족은, 의자에 걸터앉은 동족을 어쩌면 그 자신보다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었다. 

  

  의도와는 상관없이 인간 사이에 섞이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 그는 인간과의 공존을 바라고 있다고. 

  

  그렇기에 남성이 물어왔을 때, 소녀는 덤덤히 말했다.

  

  "아무래도 이유라곤 없는 것 같은데, 맞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말하는 것들은 믿지 않기로 했어."

  

  "그런 이유라면, 나로선 널 팔아치우지 않겠다는 내 본심을 숨기며 설득할 자신이 없군."

  

  어린 마족의 눈에 비친 동족은 인간들 사이에 숨어 생활하는 삶에 무료함을 느끼고 있었다.

  

  단지 그뿐이었다. 행복을 비롯한 안락함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적의라고 부를만한 불쾌감 또한 없었다.

  

  오히려 적의는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동족을 희귀한 상품 취급하는 저열한 적의가.

  

  소녀는 자신을 희생양으로 내버리고 저들의 고향을 향해 도망간 생물학적 부모에 이어, 동족답지 않은 동족을 보며 차츰 동족에 대한 감정을 키워나갔다.

  

  "풀어주기 싫다는 거구나."

  

  "그러하다."

  

  그리고 소녀는, 그 치밀어 오르는 감정에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하소연했다.

  

  "날 따라오게 하던 인간이 있어."

  

  "그 인간을 대신 팔라는 건가. 생각해 보겠다."

  

  "아니, 미친 인간이라 팔기 어려울 거야. 팔도 하나 없어."

  

  소녀가 하려는 것은 차도살인 따위가 아니었다.

  

  소녀는 동물을 죽였을지언정 살인을 해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것이 아닌 일방적인 것 외의 악의를 가져본 적이 없었다.

  

  그렇기에 가진 것을 내놓았다. 어디 내놓기 부끄러운 왜곡된 관계였으며, 알아봐 주기도 선망하기도 바라지 않았다.

  

  그저, 어린아이다운 일방적인 자랑이었다.

    

  "그 인간이 나를 살려주고 따라오게 했어. 그러니까 날 팔진 못할 거야. 날 팔기도 전에 그 인간이 나를 쫓아오게 할 테니까."

  

  그리고 그 자랑을 비롯한 어린아이다운 순수함은, 어느 한 외팔이와 그의 연인이 바라 마지않던 것이었다.

  

  그것을 조용히 감상하며 술잔을 기울이던 마족은 병이 바닥을 보이자 눈에서 인공적인 빛을 발하며 다른 술병을 집어들 따름이었다.

  

  "그런가. 내가 기억해 둘 필요는 없는 정보 같군. 동이 틀 때 팔려나갈 거다. 잠시 눈을 붙여라. 비싸게 팔려야 하니."

  

  그 말을 끝으로 소녀는 이불 없이, 빛없이 기절하듯 털썩 잠에 들었다.

  

  주위에 오롯이 열린 술병에서 풍겨오는 술 냄새만이 있었건만.

  

  그마저도 요즈음에 곁에 두고 살았던 술 냄새와는 달랐다.

  

  

  

  "지랄맞네."

  

  몇십분을 걸어 거리를 배회하고, 몇 명을 마주쳐 길을 묻고, 몇 번을 칼집에서 칼을 꺼내 다시금 길을 묻고. 이어 반복하기를 서너 번.

  

  반복의 늪이 시궁창처럼 피어났다. 늪에서 헤매는 동안 안 그래도 어두운 길이 검은 옷까지 입으니, 그리하여 마침내 자정이로다.

  

  나는 자정이 다 되어서야 술을 납치한 범인이 있는 곳을 찾아낼 수 있었다.

  

  오가며 들은 바로 범인들이 인신매매를 한다는 얘기도 사실이었지만, 그것까진 알 바 아니다. 내가 알아야 할 것은 오직 술의 거취와 마족이 어디로 갔는가. 전자가 우선이고 후자는 나중이다.

  

  시궁창 자체가 도시의 외진 곳에 있긴 하지만, 납치범의 근거지는 몇 번을 헤매는 것이 전제가 아닐까 싶을 만큼 깊은 곳에 있었다.

  

  그리 열을 다해 숨긴 것이 무엇인고 하니, 웬 커다란 건물이 있었다. 꽤 멀쩡해 보이는 건물, 그렇기에 수상하기 짝이 없는 건물이.

  

  물론 수상하고 뭐고 인신매매고 상관없다.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을경우 칼을 겨눌 당위성이 늘어난 것일 뿐.

    

  구름 한 점 없이 맑은 달이 머리 위로 떠올라 있었으므로, 그 건물은 고고한 달빛을 받아 몇 없는 창문 사이로 받아넘기고 있었다. 

  

  문 너머에선 두런두런한 인기척이 느껴졌다. 이따금 들려오는 말소리는 안에 있는 이들로부터 나를 숨겨주는 반가운 동행자이리라.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건물 안의 불빛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곧장 문에 발길질을 날려 문을 열어젖혔다. 

  

  쾅―!

  

  그러자 촛불 몇 개를 중심으로, 자그마한 불빛에 의지해 탁자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는 사내들이 보였다. 자고 있던 몇몇은 방금의 굉음에 잠에서 깨어났다.

  

  그들은 난데없이 찾아온 불청객을 반기지 않는 모양새였다. 그 불청객이 혹시 몰라 검을 쥐고 있었기에 더더욱.

  

  이쪽의 모습이 변명의 여지가 없어 보이자 성질 급해 보이는 이들은 아예 자신의 쇠붙이를 들고 이쪽을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그들의 의도를 파악하고 고의로 그들에게 들리게끔 중얼거렸다.

  

  "도망치게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것이렸다."

  

  나는 그들이 바라는 대로 부리나케 문밖으로 달려 나가는 대신 검을 마룻바닥에 찍어 박아버렸다. 정신이 나간 것 같은 행동에 소수는 긴장했고, 다수는 폭소했다. 빈손이 된 오른손으로 머리를 쓸어 넘기고, 다시금 검을 집었다.

  

  준비를 마친 듯한 일련의 동작에 다가오는 자들은 긴장하며 속도를 늦췄다. 나는 달빛을 등진 상태에서 호흡을 한번 내뱉고, 검을 앞으로 겨누며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앰씹좆됐다."

  

  나는 기억에 의존하여 외팔로 부여잡은 검을 머리 위로 들어 올리고, 상체를 비스듬히, 허리를 곧추세우며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그리고 그 상태로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가장 선두에 선 이가 위축되어 발걸음을 늦춘 그 순간,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를 향해 시선을 고정시킨 채 외쳤다.

  

  "너희가 생명을 사고 팔았다 들었노라. 내게도 해보아라."

  

  돌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얼굴에 붕대를 칭칭 감은 외팔의 검사가 자세를 정돈하고 눈을 부라리며 문 앞을 가로막는다. 그것만으로 건물 안에 있는 이들에겐 어떤 부담감이 가중되었다. 좌중에 여전히 웃는 용맹한 자는 없었다.

  

  그럼에도 동료들에게 등 떠밀려 다가오는 거한, 그는 처음 보는 생김새와 낯선 자세에 긴장하며 아주 느린 한 발짝을 조금씩 내디뎠다.

  

  달빛을 받은 검, 그 검에 다가갈 때마다 호흡이 어지러워지고 눈앞이 흐려진다. 손에 쥔 쇠붙이에 온 신경을 집중해서, 간신히 다시 한 발짝 다가간다.

  

  내가 원한 것이 그것이었다.

  

  나는 확신이 서자마자 들고 있던 검을 냅다 거한의 손목을 향해 집어 던졌다. 그가 쇠붙이를 떨어트리고 비명을 지르는 사이 그의 무기를 빼앗아 상체를 얕게 베고 냅다 발로 차 넘어트렸다.

  

  무기에 들러붙은 피를 바닥에 뿌리고,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 외치듯이 말했다.

  

  "너희가 그랬듯 아무도 죽지 않을 것이다. 죽진 않을 것이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양옆으로 칼날이 끼어들어 왔다. 몸을 숙이며, 뒤로 한걸음. 손에 들린 검을 비스듬히 세워 하나를 쳐낸다.

  

  챙―! 캉―!

  

  쳐낸 칼날로 반대쪽에서 덮쳐오던 칼날을 방해한 뒤. 검의 파지법을 바꿔 재빨리 몸을 숙인 모습 그대로 회전하며 두 명의 다리를 벤 뒤 반동으로 몸을 일으켜 세운다.

  

  "흐아아아…!"

  

  비명이 울린다. 그러나 아니다. 비명만으론 안심할 수 없다. 넘어진 이들의 손바닥에 한 번씩 검을 찍고, 다시 앞을 바라보며 못다 한 말을 마친다.

  

  "말 그대로, 목숨은 붙어있을 것이다."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들렸다. 누워 신음을 흘리는 남성의 시체를 차올리고, 옷깃을 부여잡은 뒤 그 뒤에 몸을 숨겼다.

  

  푹―

  

  눈앞에 핏물이 튀는 걸 확인하고 남성을 내려놓았다. 급소는 피했다. 출혈로 죽을만한 부위도 아니다. 멀쩡히 살아있을 수 있다. 치료만 받는다면. 


  달빛을 등진 나를 기겁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시선이 사방에 가득했다. 나는 가장 가까이에서 얼어붙은 이를 하나 발견하고 그를 바라보며 무표정하게 읊조렸다.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이들의 생명마저 존중해주니, 이것이 자비가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얼어붙은 사내를 뒤로하고 연이어 들려오는 활을 퉁기는 소리, 왼쪽 위에서 하나, 오른쪽 위로 둘. 정면으로 하나. 그 소리 뒤에 숨어 달려오는 흐릿한 인영.

  

  활활 타오르고 있는 촛불을 스쳐 지나가는 파공성이 지친 몸과 마음을 일깨웠다. 촛불을 스쳐 지나간 화살들은 어둠에 녹아들어 흑빛의 섬광이 되었다. 규칙성 따윈 찾아볼 수 없는 불연속적인 움직임들.

  

  이쪽도 그리 해야 할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을 포기했다.

  

  다만, 몸만큼은 가볍게.

  

  불규칙不規則을 불不로 만드는 것이라 하여, 규칙規則. 규칙을 만드는 것은 단초端初. 아주 사소한 실마리.

  

  막지도, 피하지도 않는다. 그저 가장 빨리 쏘아져 온 화살을 검으로 건드려 아주 살짝 옆으로 옮기는 정도.

  

  툭―.

  

  그 조그마한 움직임에 허공을 부유하던 화살이 연쇄적으로 자기들끼리 맞닿으며 힘을 잃고 아래로 추락한다. 화살과 함께 달려오던 인영의 머리통을 검면으로 후려친다.

  

  "그러니 안심하고 덤벼라."

  

  그 말에 발작하듯 달려오는, 머리를 얻어맞은 단창을 든 사내를 향해 나 또한 품으로 파고들어 간결하게 허리를 단 한 번, 검으로 찌르고 발길질로 차 넘겨 고꾸라트렸다.

  

  "끄으윽…!"

  

  두 명까진 운이 좋다면 상처 없이 이길 수 있다. 다섯 명까진 일방적으로 지진 않는다. 열 명부터는 소리 없이 죽을 것이다. 그리고 눈앞에 있는 것은 스물하고도 넷. 모두가 달려든다면 벽을 등지고서야 십초쯤 간신히 버틸 것이다.

  

  생명을 해치는 데에 아무런 제약이 없다 하더라도 그 정도인데, 결코 직접적으로 죽일 수 없다는 황당한 제약까지 걸려있다면 상황은 더 심각해진다.

  

  하지만 그런 걱정은 필요 없다. 허세와 연기는 어릴 때부터 질릴 정도로 익혀왔으니까.

 

  "와보아라."

 

  나는 얼이 빠져 서있다가 발악에 가깝게 달려오는 다섯과, 움찔거리며 자리를 뜰 길을 물색하거나, 은근슬쩍 도망치려는 나머지를 전부 눈에 담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내 눈앞에서 사라져라. 치료를 베풀어줄 곳을 찾든 뭘 하든, 인신매매로 벌어들인 수급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받을 터. 당장 비켜라."

  

  '씨발 왜 진짜 도망치는 놈이 하나도 없지. 기절하기 전에 빨리 내보내고 술만 찾고 돌아가야겠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손가락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 검 끝이 파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깊이 생각해 볼 것도 없이 안색도 창백해진 지 오래겠지.

  

  왜 피를 흘렸더라. 알량한 과거의 정의감이 마음속에 아직 한 톨이나마 남아있어서 그랬던가?

  

  사람을 사고파는 게 뭐 어때서, 그저 돈이나 쥐여주고 술 한 잔만 구걸하면 그만이었을 것을.

    

  싸우는 과정에서 탁자 위에 올라가 있던 술은 전부 집어 던져 깨트렸다.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다. 끔찍한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피눈물이 절로 흘렀다. 그러니, 나는 술을 찾아야만 한다.

  

  그래야만 이대로 있을 수 있다. 덤으로 그렇게 도망칠 궁리를 해놓고 아무도 도망치지 않은 이 마법 같은 현상을 파헤치기 위해서도, 나는 웬 빛 하나 들지 않는 나무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머리를 쓸어 넘기고 몸을 숙였다.

  

  저곳이다. 저곳일 수밖에 없다. 이 자 이전에도 대여섯 명이 이 문을 필사적으로 몸으로 가리는 등 정체를 숨겼다.

  

  이 뒤에 무엇이든 내가 찾는 것이 하나쯤은 있을 터. 그게 술이면 좋고. 나는 피를 흘리면서도 기어코 문을 가로막은 마지막 상대에게 창백한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금 말했다.

  

  "어서."

  

  그럼에도 눈앞의 남자는 벌벌 떨 뿐 아무런 행동도 보이지 않았다. 확실히 이상했다. 생각을 해보려던 중 극심한 현기증이 느껴지자, 피가 흐르는 칼을 주저앉은 남자를 향해 겨누고 윽박질렀다.

  

  "어서!"

  

  그제야 흐리멍덩하게 나를 쳐다보던 남자는 부리나케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리고, 내가 건드리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남자가 몸으로 가리고 있던 문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한기가 들이닥쳤다. 처음엔 몸이 차고 젖지 않아 밖에서 불어온 밤바람인 줄 알았건만, 피에 젖은 몸을 말리지 못하는 걸 보니 그렇지 아니했다. 문 너머의 방에는 창문조차 없었다.

  

  그러나, 시체처럼 창백한 피부를 가진 붉은 눈의 남성과, 구석에 쓰러지듯 잠들어있는 새하얀 어린 마족, 남자가 걸터앉은 책상 위 아직 열리지 않은 술병은 비정상적으로 선명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 환상적으로 정신을 잃을 것 같은 풍경에 조용히 실소했다. 기력이 없어 말하지 못했는데도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느꼈던 추위는 본능이 빚어낸 것이리라.


  "귀하가 내 동족이 말한 인간인 것 같군."

  

  "역시 마족이었나."

  

  "정말로 내 동족을 구하러 올 줄이야."

  

  나는 자연스레 자신을 마족이라 칭한 남자를 마주 보다가 잠들어 있는 어린 마족에게 시선을 돌렸다. 모습을 바꾸는 마법이 풀려있다. 자의는 아닐 것이다. 다시금 남자의 눈을 마주한 순간, 나는 정답을 알 수 있었다.

  

  인신매매를 하는 이들이 필사적으로 그를 향해 가는 문을 막았다. 그 행동 역시 자의는 아니었을 것이다. 정말로 마법인 줄은 몰랐지만, 그렇기에 지금 이 상황을 설명하는 데에는 충분했다.

  

  가만히 칼끝을 떨어트리며 한동안 생각했다. 마족을 베어 넘기고 갈라 죽인 기억이 차츰 살아났다.

  

  피를 흘리고 있는 지금 같은 상황이 오히려 그날의 기억들을 일깨우는데 도움이 되었다.

  

  "오늘은 이해가 안 되는 것 투성이야. 인간에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아직 먼 모양이군."

  

  사회에 숨어든 마족이다. 인신매매로 생계를 이어나갔을 것이며, 저 어린 마족을 길가에서 발견한 뒤 마법으로 잠재워 데려왔다. 인간을 몇 명이고 먹어 치운 것은 굳이 말할 가치도 없을 것이다.

  

  마족을 찾아보기 힘든 남쪽 나라인 만큼 동족과 간략한 대화를 마친 뒤에 팔아넘길 생각이었겠지. 마족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것들이 있는 것도 모르고. 나에 대해서도 들었나 보군.

  

  내가 죽여야 한다. 과거에 몇 번이고 그랬던 것처럼.

  

  방금 들은 마족의 말이 무엇인지 기억나지 않아 대충 손에 힘을 줬다.

  

  "네가 이 집단의 수괴인가. 제 동족도 아닌 걸 팔아넘기니 마음이 썩 편했겠어."

  

  나는 바닥의 틈새에 검을 박아 넣고 몸을 기대 숨을 골랐다. 당장이라도 저 책상 위의 술을 마셔버리고 누워버리고 싶다. 하늘을 원망하면서.

  

  '하늘이여! 하늘이여!! 하늘이여어어!!!!! 왜! 이딴 곳에 마족이 있는가!!! 흐아아아!!!!!'

  

  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머리에 새로운 공기가 들이차자 검을 다시 뽑아 들었다.

  

  "소란은 듣고 있었다. 왜 동족을 구하러 온 건진 모르겠지만, 노력은 가상해."

  

  "목숨을 연명시켜주겠다고 해버려서. 내 부주의로 죽어버리면 제약 위반이니. 보아하니, 이번엔 동족도 팔아넘기려는 모양이야."

  

  하지만 거기까지. 검을 겨우 들긴 했으나 움직이는 건 무리다. 시간이 필요했다. 검을 한 번이라도 휘두를 체력이라도 짜내야 했다. 시간이 필요하다.

  

  이대로 말싸움이라도 하면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회복할까. 아니, 상대는 마족이다. 같잖은 수는 통하지 않겠지. 오히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궁금하다는 듯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게 의외인 상황이다.

  

  그마저도 다음이 마지막일 테지. 나는 기억을 조금이나마 더 떠올리기 위해, 검을 휘두를 힘을 회복하기 위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마족을 보면 죽이려 안달이 나는 것들은 모르는 모양이야, 사회에 기생한 지는 얼마나 됐나? 10년? 20년? 어린것아. 너 따위 개인에게 인간은 악의를 선보이지 않는다. 눈에 띄면 그제야 죽일 뿐."

  

  "그런가."

  

  그 말을 들은 마족은 뭔가 생각하려는 듯, 열리지 않은 술병을 만지작거렸다. 그러길 잠시, 그는 걸터앉아있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킨 뒤 붉은 눈을 발광시켰다.

  

  "용사라면 이미 죽은 거로 아는데. 그게 뭔지는 귀하를 죽이고 천천히 알아보도록 하지."

  

  내겐 검을 단 한 번 간신히 휘두를 힘밖에 남아있지 않았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았다.

  

  눈앞의 것이 내 죽음을 논한다. 내가 죽이려 하는 모든 생명에게는 그리할 권리가 있다. 또한, 내게는 그것을 무시하고 죽일 의무가 있다.

  

  "해봐."

  

  마족의 붉은 눈에서 발해지는 빛이 좁은 방을 뒤덮은 순간, 나는 선명하게 검을 휘둘렀다.

  

  단 한 번을 전제로 한 휘두름. 엉망이 돼버릴 자세도 전부 생각하지 않은 채 떠나보냈다.

  

  한 호흡, 한 동작으로 펼쳐지는 작고 느린 움직임이 서서히 내 팔을 떠나갔다.

  

  그 움직임이 칼날의 끝에 닿는 순간, 어느 한 날의 기억을 온전히 떠올리고 우수를 맞이한다.

  

  떠나보내는 것은 맞이할 준비를 마친 것임을 안다. 묶고 있던 기억의 매듭을 풀자 휘두른 검격에 얽힌 일말의 매듭도 풀려나가 빠르게 나아간다.

  

  마족이 눈을 빛내고 있다. 내가 건물 안에서 흘려온 피를 촉매로 사용한 마법이 어느샌가 창과 가시가 되어 사방을 옥죄어온다. 그리고, 검이 나와 마법의 만남을 주선한다. 그녀와의 만남을 주선한 것처럼, 그리운 모습을 다시금.

  

  검을 들고서, 걷어낸다.

  

  사아―

  

  휘두른 것이 한 번의 움직임이라면 그것에 변화를 담을 필요는 없는 법이었다. 베어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없애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을 날카롭게 휘두를 필요도 없었다. 그저 빠르게. 그리고 강하게 휘두른다.

  

  경악한 눈빛이 그것으로 충분했노라 말한다.

  

  "대체, 무슨."

  

  대답해 줄 마음도 없었지만, 그 전에 입이 도저히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경악한 마족을 향해 안심하라는 듯 웃어 보였다.

  

  '교회에게 난자당하기 전에 편히 잠들 거라, 어린놈아.'

  

  산산이 깨져나간 검을 버리고 몸에 남은 힘을 짜내 구석에 누워있는 어린 마족을 품에 안고, 고민 끝에 술병을 챙기고 방을 나섰다. 마족은 나를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했다.

  

  피로 만들어진 창과 가시 따위는 제 쓸모를 하기 전에 액체로 환원되었고, 눈을 부릅뜨고 경악하고 있는 마족의 몸 위로 점차 미증유의 붉은 선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나가는 길은 비교적 편하였다. 죽지 않을 정도의 상처를 입고 쓰러져있는 다수의 부상자는 마법의 영향으로 신음조차 내지 못했다. 무언가 풀썩 주저앉은 소리가 들렸다. 내가 자아낸 참극이 오감을 채웠다.

  

  나는 마지막 한걸음만을 남기고 불현듯 뒤를 돌아보았다. 피와 싸움의 흔적이 흥건했다.

  

  그것들은 빛이 없어도 어디서든 내 눈에 보이는 것들이었다.

  

  

  

  머리가 깨진 것만 같다. 존재할 리 없는 목소리가 기억에서부터 흘러들어온다. 가지고 온 술을 이빨로 열어 목에 들이붓는다.

  

  과연 내 술을 훔쳐 간 범인이 맞았는지 차가운 액체가 목구멍에 닿자마자 취기가 올라온다. 어질러져 있던 기억이 정돈되고 두통이 조금이나마 잦아든다.

  

  그럼에도 흔들린 손이 술 몇 방울을 품에 안아 든 어린 마족에게 흘리고야 말았다. 대충 입힌 천 가지가 젖어 들었다.

  

  이 몸 상태로 더 마시는 것도 무리다 싶어 내친김에 술을 버리고 마족의 자세를 좀 더 편하게 바꾸어주었다. 술이 아깝진 않았다.

  

  "으음…"

  

  그러자 마족이 어깨 위에서 몸을 뒤척거리며 침음을 흘렸다. 마족의 하얀 머리칼에 내가 뚝뚝 흘리고 있는 피가 묻어 새빨갛게 물들어 갔다. 신경 쓰지 않고 애써 발을 옮겼다.

  

  얼마를 걸었는지는 모르겠다. 애초에 걷고 있긴 했던가? 긴 건물 사이를 헤쳐 나가자, 어느새 넘어져 있었다. 자상을 입은 곳 근처로 피가 흥건했다. 그 와중에 용케도 마족을 감싸안은 것이 참 다행이었다. 

  

  궁상맞게도 넘어지자 입을 열 기력이 생겼다. 뒤지기 전에 허락받은 유예에 가깝겠지만, 나는 이 유예를 마음껏 누리고자 했다. 어쩐지 달이 녹빛으로 보였다.

  

  "…당신… 설마…"

  

  착각이 아니었나. 얼어붙은 것만 같은 목소리에 고개를 안으로 돌리자 녹색으로 반짝거리는 눈을 뜬 어린 마족이 보였다. 감싼다고 감쌌는데, 충격을 전부 흡수하진 못한 모양이지.

  

  상황을 설명하기엔 너무나도 귀찮았다. 신경을 쓸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마족의 시체를 제대로 처리하고 왔어야 했는데.

  

  치료해 줄 이를 찾으라 하고 내보낸 그놈이 데려온 치료사가, 혹시라도 마족의 시체를 보고 교회 놈들이 찾아오면.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말이 형태를 갖추지 못하고 튀어나왔다.

  

  "돌아가자."

  

  "왜…? 이해, 이해를 못 하겠어…"

  

  그리고 지쳐 쓰러질 것 같으니까, 뒤지기 전에 한숨 편하게 자자.

  

  "그럼 이해 하지 마. 그냥, 살아."

  

  그 말을 끝으로, 나는 잠깐 눈을 붙였다.

  

  눈을 떴을 땐, 내리쬐는 햇빛과 마주 누워 곤히 잠자고 있는 어린 마족이 보였다.



빌드업 끝났읆,,, 써온 분량도 끝낫슴,,, 이제 써야댐,,,
오탈자 지적 언제나 환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