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나 쎈 뱀파이어 얀순이에게서 도망치는 스폰 얀붕이 - 7 - 얀데레 채널 (arca.live)

ㄴ여기서 이어짐


•••


이제 아이작의 눈에 핏빛 환상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떴을 땐, 방금과 다를 바가 없는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별, 담청색 하늘, 그리고 처량하고 쓸쓸한 빛을 흘리는 달.


하지만 그가 서 있는 곳은, 그의 고향이었던 폐예배당이 아니었다.


아이작은 안개가 자욱한 숲에서 수풀을 디뎌 일어났다.


이따금 들려오던 풀벌레 소리도, 바람을 따라 속삭이던 잎새 소리도 없었다.


그저 끔찍하리만치 무거운 침묵이 케케묵은 안개를 타고 돌 뿐이었다.


"...마리?"


그는 함께 지옥에서 빠져 나온 마법사 동료를 불렀다.


그리고 역시나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아이작은 불안한 걸음으로 나아갔다.


안개 속에선 딱딱하게 말라붙은 나무들만이 빼곡하게 모습을 드러냈고, 그는 이것이 방금과 같은 환상인지 현실인지 구별할 수 없었다.


그 모든 것들이 실감나게 느껴졌기에.


느릿한 걸음으로 앞으로 나아가던 아이작은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안개 속에서 보이는 사람의 실루엣.


그리고 안개의 수증기를 타고 반사되는 붉은 색의 눈동자.


핏빛 루비같은 그 눈동자는 아이작이 잊을 래야 잊을 수가 없는 이의 것이었다.


"아이작."


눈 앞의 존재는 서서히 앞으로 나서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작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마리아."


이미 사시나무 떨리듯 부들대기 시작한 아이작의 손발을 보며 마리아는 한심하다는 듯이 윽박질렀다.


"예의를 갖추렴, 건방진 꼬마야! 이름을 부르기 전에는 항상 내 손을 잡고 말하라 했을 텐데!"


으르렁대는 마리아를 보자 아이작은 이것이 꿈과 밤을 통해서 그녀가 보여주는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만약 이것이 진짜 마리아였다면 그는 이미 목이 남아나지 않았을 테니.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알아채자 조금 용기를 얻은 아이작은 힘겹게 입을 뗐다.


"난... 니 년의 애새끼가 아니야. 반려도 아니고. 장난감도 아니야, 난!!"


점점 격양되는 감정을 누르기 힘들었던 아이작은 쩌렁쩌렁 목을 울렸다.


"네 소유물이 아니야. 그리고 맹세컨대, 기필코 네 심장에 말뚝을 꽃아 주지."


"어머, 귀엽고, 안쓰러운 꼬마야."


마리아는 가소롭다는 듯이 웃었다.


"내 환상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그렇게 벌벌 떨리는 손발로 어떻게 내 심장에 말뚝을 꽃겠다는 거니? 꿈도 크구나."


그 말대로였다.


이미 이것이 환상이라는 것을 눈치챘다 하더라도, 본능에 새겨진 두려움은 어쩔수 없는 것이었다.


"닥쳐!!"


아이작은 그 말에 대한 반발심으로 더욱 언성을 높였다.


"네 년, 뱀파이어가 되면 수녀님과 아이들은 살려주겠다 약속했지. 하지만 전부 거짓말이였어...!!"


"음?"


마리아는 그게 무슨 말이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


그리고 생각났다는 듯이 손가락을 퉁겼다.


"그 늙고 비틀어진 수녀랑 싱싱한 어린 것들 말이구나? 어쩔 수 없었단다. 내가 살려주러 가기 전에 월터가 이미 다 죽여 버렸던걸?"


"...뭐...라고?"


"시체를 보고 목숨만 살려달라 하는 건 말이 안 되잖니."


아이작은 경악에 질린 얼굴이 되었다.


"그게 불만이었으면 내게 말을 하지 그랬니, 우리 사랑스러운 아이작. 그럼 그 짐승들도 구울로 되살려줬을 텐데."


"이 개새끼가!!"


아이작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리아에게 달려들었다.


하지만 결국 그 모습도 환상일 뿐, 주먹은 허망하게 마리아를 통과해 허공을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아이작!!"


마리아가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철판을 긁는 것처럼 날카롭고 시끄럽게 아이작의 고막을 울렸다.


그 탓에 아이작은 균형을 잃고 쓰러지고 말았다.


"지금 내가 너를 어여삐 여겨 간신히 화를 참고 있는 게 안 보이니? 그런데 너는 감히 내게 주먹을 휘둘러!?"


마리아는 무시무시한 얼굴로 쓰러진 아이작을 내려보았다.


부들부들 떨리는 눈살과 입술이 그녀의 분노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었다.


"지금이라도 다시 돌아온다면 네 체벌에 대해 다시 재고해 보마."


그리고 언제 그랬냐는 듯 상쾌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더 화를 내기 전에 어서 집으로 돌아오렴."


아이작은 그것이 역겨운 가식 웃음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말했을... 텐테...!"


아이작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내가 그렇게 순순히 바퀴벌레 피나 빨아먹던 남창으로 다시 되돌아갈 것 같아...!? 좆까!!"


마리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그의 생각과는 달리, 마리아는 얼굴을 구기며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는 방식으로 분노를 표현하지 않았다.


그녀의 표정은 싸늘했다.


아이작의 차가운 피가 얼어붙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아직도 필멸의 생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거니?"


데이워커의 말이 아이작의 귀에 비수처럼 꽃혔다.


"고작 몇 시간의 자유 시간 동안 네 옛 발자취를 기억해냈다 해서 네가 다시 인간으로 되돌아간 것 같니, 아이작? 아니, 넌 뱀파이어란다. 한낱 필멸의 존재들에게 공포와 멸시를 한 몸에 받는, 흡혈귀란 말이다."


그저 환상체일 뿐인데도, 마리아가 그에게 손을 뻗어오는 광경은 지극히 공포스러웠다.


"좋든 싫든 넌 내게 돌아오게 돼 있단다, 아이작. 결국 이 세상에서 네가 설 자리는 내 옆뿐이라는 사실만 깨닫게 되겠지."


거의 중얼거리듯이, 마리아는 말했다.


"네가 고된 방법을 택했으니, 그 결과도 네가 감당하렴. 하지만 걱정하지 말거라."


환상은 점점 옅어지고, 아이작의 두통 역시 옅어졌다.


안개가 걷히고 마리아의 환상이 아득해지기 전, 그녀는 따뜻하게 아이작을 향해 웃었다.


그리고 아무런 감촉도 느껴지지 않는 입술을 그의 입술에 겹쳤다.


"난 짓이겨진 고깃덩이가 된 너도 사랑해 줄 터이니."


아이작은 몸에서 소름이 도는 것을 느꼈다.


그 따뜻한 웃음은 거짓 하나 섞이지 않은 진심이었기에.


•••


"허억!"


아이작은 눈을 떴다.


그는 어느새 차가운 땅바닥에 누워 축축한 땀을 흘리고 있었다.


'방금 그건... 최면인가?'


아이작은 혼란스러운 마음 깊숙한 곳에서 절망감이 솟아 올랐다.


결국 속박과 규율에서 벗어나고 도망쳤다 한들 그는 여전히 그녀의 손바닥 위에 있었다.


아이작은 생각했다.


힘이 필요하다.


마리아에게서 벗어날 힘. 마리아를 죽일 힘.


저 잔악한 뱀파이어 로드에게 도망치던, 죽이던, 죽던, 결국 내게 필요한 것은 힘 뿐이다.


아이작이 그렇게 생각을 굳혔을 때, 그의 시선은 예배당 안으로 꽃혔다.


말할 줄 아는 짐승의 피.


그리고 마법사가 가진 정신의 목걸이.


우선 저 목걸이를 훔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게 어떨까?


목걸이를 차고 멀리 도망치고, 사람의 피를 빨고 힘을 되찾는 것이다.


겸사겸사 저 마법사의 피를 빨고 힘을 되찾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그 짧은 생사고락을 함께 한 동료에게 느끼는 죄책감보다 힘에 대한 갈망이 아이작을 더욱 강하게 움직였다.


천천히, 기척을 죽이고 아이작은 예배당 안으로 숨어들었다.


새근, 새근.


마법사는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아이작은 은밀하게 거리를 좁혔다.


그리고 잠든 마리의 모습을 찬찬히 살폈다.


그녀는 마치 시체처럼, 가끔씩 들숨과 날숨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배를 제외하고는 미동도 없었다.


그녀의 속사정을 생각하면 당연했다.


탈주 노예라면 사방을 경계하느라 지금껏 편히 잠자리에 들지 못할 것이 뻔하고, 오늘 밤에는 뱀파이어 로드에게 죽을 뻔한 위기를 겨우 넘겼다.


깊은 잠에 빠질 정도로 피로가 쌓이는 건 무리도 아니었다.


'좋아.'


여기서 더 과감하게 움직인다 하여 그녀가 깨어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이작은 신중하게 그녀에게 손을 뻗었다.


행선지는 그녀의 목이었다.


조금씩, 조금씩.


그의 손이 그녀의 목덜미를 향하려는 순간,


찌르르르르르르ㅡ!!!


"뭐, 뭐야!?"


아이작이 당황할 새도 없이,


우위이잉ㅡ

파앗!


"꺼흑!!"


그의 등에 찌르는 듯한 격통이 느껴졌다.


푸른색 마나 덩어리가 그의 등을 찔렀다.


관통상은 아니었지만 급소를 찔렸는지 아이작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아침 수탉보다 시끄럽게 울리는 마법 경보의 소리를 듣고 마리는 단숨에 눈을 떴고,


등을 움켜쥔 채 쓰러진 아이작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너...!"


무릎을 꿇은 아이작에게 마리는 조금도 주저도 보이지 않았다.


"이그니스!!"


뱀파이어 성에서 보았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화려하게 불타는 불꽃.


아이작은 오늘 두 번째로 죽음의 공포를 느꼈다.


어떡해야 하지?


어떻게든, 무슨 말이든 해야 한다.


뭐라고 해야 하지?


어줍잖게 둘러댔다간 뒷마당에 묻힌 그의 양가족처럼 잿더미가 될 것이 뻔했다.


마땅한 거짓말은 생각나지 않는다.


그럼 도대체 뭐라고 둘러대야 한다?


잠깐,


그렇다면 차라리 사실대로 말해볼까?


아이작은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리를 굴려 기만책을 생각해냈다.


진정한 사기꾼은 한 조각 진실 속에 열 개의 거짓을 숨기는 법이고, 아이작은 그런 사기 화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그는 당황한 척을 하며 얼빠진 목소리로 말했다.


고개를 정신없이 좌우로 휘젓는 스폰 위로 마법 불꽃의 열기가 전해졌다.


"그건 네가 잘 알겠지, 뱀파이어!"


마리는 끓어오르는 감정을 그대로 목소리에 실었다.


"잠깐이라도 널 믿었던 내가 병신이었어. 마지막 배려로 유언은 남기게 해 주지!"


"잠깐, 잠깐! 나도 진짜 이게 뭔 일인지 모르겠거든? 무슨 일인데!?"


"시치미 떼지 마! 내가 자는 사이에 목걸이를 가지고 가려 한 걸 내가 모를 것 같아!?"


아이작은 억울하다는 표정을 지었다가, 곧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떨궜다.


"...미안해."


"뭐?"


마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꿈을 꿨어. 마리아가 나를 잡으러 오는 꿈. 악몽이었어. 나를 다진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서라도 되찾고야 말 거라고 했지."


"갑자기 무슨 헛소리야?"


마리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대꾸했다.


"네 말이 맞아. 나는 수녀님과 아이들을 살리기 위해 스폰이 됐지. 하지만 마리아는 내 가족을 죽인 것조차 기억하지 못했어. 애초에 약속을 지킬 생각 따위 없었던 거지."


그녀는 말없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걸 직접 입 밖으로 말하니 눈깔이 뒤집혔지. 그대로 그 년의 목을 물어 뜯어버리려고 했어. 그런데, 그런데......"


아이작은 비통한 척 다시, 방금보다 더욱 깊숙히 고개를 떨구었다.


"다 환상이었지. 하마터면 너를 죽일 뻔했어."


그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말을 마쳤다.


"정말 미안해."


이 쐐기는 그의 마지막 승부수이기도 했다.


그는 고개를 떨구며, 오른손으로 교묘하게 손톱을 숨겼다.


여차하면 바로 무릎을 꿇은 추진력으로 뛰어올라 목을 그어버릴 심산이었다.


마리는 잠시 말없이 스폰을 바라보았다.


"흐으......"


분노가 섞인 한숨을 내쉰 마법사는,


"일어나."


일순간에 마법 불꽃을 사그라뜨렸다.


아이작은 깜짝 놀라 그녀를 바라보았다.


"날... 믿어주는 거야?"


"믿긴 누굴 믿어."


마리가 차갑게 대꾸했다.


"그냥 알량한 동정심이 들었을 뿐이야. 나도 전투 노예였을 땐 주인의 명령대로 사람을 죽일 수밖에 없었으니까..."


그녀는 스폰에게서 고개를 돌린 채 말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뱀파이어 스폰도 전투 노예와 별 다를 게 없구나 생각했던 거야. 널 믿는다고 착각하지 마."


아이작은 입을 다물지 않았다.


그리고 어기적거리는 움직임으로, 그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정말 고마워."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또 한 번 그러면 동정의 여지도 없이 죽여버릴 테니까 각오해."


"알아. 정말 고마워."


아이작은 마리에게 손을 내밀었다.


마리는 뜬금없는 악수 신청에 미간을 찌푸리며 스폰을 바라보았다.


"내 고향에서 날 지져버리는 걸 두 번이나 참고 넘어가 줘서."


"뭐? 두 번?"


"...맙소사, 기억 안 나는 거야? 석실에서 나를 구워버리려 했잖아?"


"아."


마리는 해골 앞에 무릎을 꿇고 실의에 빠져 있던 아이작을 기억해냈다.


"그걸... 본 거야?"


"저런, 온혈동물인 자기와는 다르게 나는 냉혈동물이라서 말이야."


마리는 그의 차가운 손을 떠올렸다.


"아주 작은 온도차에도 민감하거든. 특히 불이 났을 땐."


"뭐..."


"정말 고마워. 이 빚은 잊지 않을게. 다시는 널 해코지할 일 없을 거야."


마리는 그의 뻗은 손을 의심스럽게 쳐다 보았다.


못미덥긴 했지만, 그녀는 스폰의 손을 잡았다.


아이작은 그녀의 아직 뜨거운 손을 흔들며 생각했다.


절반은 사실이다.


마리처럼 감성적인 면이 강한 사람은 죽이는 것보다 친밀도를 쌓아 인맥으로 만드는 편이 훨씬 이득이니.


그가 맨정신으로 마리를 해코지할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아직은.


노예 소녀는 뱀파이어 스폰의 음침한 속마음을 눈치채지 못한 채, 불신의 눈초리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다음화에 얀순이가 암흑공간 쓰면서 존나강해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