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온이 눈을 떴다.

보이는 것은 고급스러운 이불과 침대 그리고 넓은 방이었다.

 

"일어났나?"

 

옆에서 이리안이 의자에 앉은 채 책을 덮었다.

 

"여긴 어디지?"

"…주인한테 반말인가?"

"아."

 

레온은 노예의 인장인 갈색 목줄을 확인했다.

이로써 이리안에게 반항할 수 없다.

 

"3일간 잠들었다. 에나족은 마법 내성에 취약한 모양이야? 별 거 아닌데?"

"……."

"하지만 보여준 검술은 기대 이상이었어. 아직도 믿겨지지 않아. 손발이 꽁꽁 묶인 채로 다 썰어버리다니. 훗."

"그…런가."

"……."

 

레온은 눈치를 보고 반말을 유지했다.

이리안이 기분 내켜하지 않는 듯 했으나 일단은 두고보려는 듯 보였다.

 

"아까 여기가 어디라고 물었지? 내 저택으로 가고 있던 도중에 인간 영주의 호의를 받아서 영주의 성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그런가."

"……."

 

이리안이 어깨를 으쓱했다.

 

"내 노예가 된 소감은 어때?"

"뭐?"

"이렇게 아름답고 인간의 눈엔 소녀일 뿐인 내 노예가 된 소감이 어떻냐고."

 

꼬르륵.

레온의 배가 울렸다.

 

"배고프다."

"……식사를 불러야겠네. 기다려."

 

이리안이 방을 닫고 나갔다.

그 사이 레온은 생각을 정리했다.

 

'특이한 엘프긴 하군. 숲속에 사는 엘프들과 다른 성정이 느껴진다. 뭔가 고독한 것 같은……'

 

그리고 뚱뚱한 추녀 스라나 부인을 떠올렸다.

외관이 비교돼서 떠올린 게 아니라 그녀 밑에 들어갔으면 정신착란을 겪었을 게 분명했다.

 

"일단… 나쁘지는 않다고 해야하나."

 

모르겠다.

노예가 된 상황에 뭐가 나쁘고 좋고를 따지는게 우스울 뿐이다.

 

 

 

********

 

 

 

탈모가 한창 진행중인 40대 중년 남성 레오폴 영주가 저녁 식사를 열었다.

레오폴 영주가 가운데에 앉고 레온과 이리안이 좌우로 앉았다.

 

"쓸쓸한 늙은이만 있는 성에 이렇게 아름다운 엘프분이 지나가시다니 정말 영광이오."

 

이리안이 떨떠름하 듯 대답했다.

 

"말했을텐데. 간단한 식사면 괜찮다고…"

"천만에 말씀!"

 

레오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귀한 손님을 맞이했으면 그거에 걸맞는 대접을 하는게 인지상정이오! 그게 우리 가문의 철칙이란 말이오!"

"알았어. 그만 앉아."

"흠. 내가 실례했군."

 

레오폴이 기침을 하고 레온에게 고개를 돌렸다.

 

"그래서 실례지만 그쪽은 연인분이신가?"

"……."

 

레온은 침묵을 유지했다.

어째서 깨어났을 때 목을 가리는 긴 팔의 흰 상의로 갈아입혔는지 알 수 있었다.

이리안이 대신 대답했다.

 

"응. 맞아. 연인이야."

"…하하. 정말 잘 어울리는 한쌍이오!"

"고마워. 하지만 회복한 지 얼마 안됐으니깐 질문은 나한테만 하도록 해줘."

"그거야 쉬운 부탁이지."

 

생전 처음 먹어보는 맛있는 식사들이 식탁에 깔려 있었다.

레오폴과 이리안이 품위있게 먹었지만 레온은 그런 것도 모른 채 열심히 먹었다.

레오폴이 인상을 찌푸렸다.

 

"…거참 맛있게 먹는 청년이군. 어째서 도도함이 넘쳐흐르는 아름다운 이리안 양과 연인이 될 수 있는 건지 참 알 수가 없군."

"내 남자친구를 욕하지 마요. 영주."

"아, 실례했군 이리안 양."

"……."

 

식사가 끝나자 레오폴이 말했다.

 

"이제 디저트를 먹을 차례오."

 

이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괜찮아요. 그건 사양하죠. 먹은 만큼의 음식은 돈으로 지불하겠어요."

"그건 아니되오! 내가 말했지 않소! 당신들은 내 귀한 손님이라고! 손님에게 어떻게 돈을 받는단 말이오!"

 

이리안이 고개를 저었다.

 

"내 호의를 거절하면 내 호감을 절대 살 수 없을 거예요."

 

그런 강경한 태도에 레오폴이 시무룩해졌다.

 

"…아,알겠소."

"좋아요. 맛있는 음식 고마워요. 당신의 호의가 아니었다면 벌레가 지나다니는 여관에서 묵을 뻔 했지 뭐예요?"

"하하. 내일 떠나실거요?"

"그래요. 레온도 괜찮아보이니. 상처는 아직 낫지 않았지만."

"알겠소. 짧은 인연이었지만 만날 수 있어 영광이었소."

"……."

 

레온과 이리안은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걸어갔다.

레오폴은 물끄러미 이리안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음식은 어땠어?"

 

이리안이 레온에게 물었다.

 

"맛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들이었어."

"정말 애처럼 먹네. 키는 나보다 두배는 크면서."

"그럼 너는 얼마나 산 거지?"

"겨우 200년 살았나?"

 

레온이 혀를 내둘렀다.

어째서 자신을 대할 때 연상의 여유가 느껴지는지 알 수 있었다.

솔직히 믿겨지지 않았다.

겉모습은 11살쯤 되보이는데.

 

"대단하군. 장생 족들은."

"그게 꼭 좋지만은 않아."

"…?"

 

레온은 묻고 싶었지만 그 눈빛이 쓸쓸해보였기에 더 묻지 않았다.

이리안과 레온은 각자의 방으로 흩어졌다.

레온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흠. 이상하군."

 

맛있는 음식을 양껏 먹었기에 기분은 좋았다.

하지만.

 

"졸립군."

 

식사 후 졸린 건 당연한 이치다.

하지만 지금은 뭔가 이상하다.

머리가 무겁고 팔다리에 힘이 안들어가질 정도로 나른했다.

이정도로 졸린 건 험악한 사막에서 생존해왔던 레온으로서는 익숙지 않은 일이다.

레온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피곤함이 쌓였나?"

 

그렇다면 이해가 되는 일이다.

몸 군데 군데는 검에 베인 상처들이 가득하다.

모두 3일 전 벌어진 사투 때문이다.

졸음은 끝없이 몰려왔다.

아무리 봐도 낯설다.

위험하다.

본능적인 신호가 레온을 계속해서 일깨웠다.

 

"!"

 

레온이 구석에 놓인 검집을 들고 방밖을 나섰다.

 

"이리안!"

 

어디로 가야할지 모른다.

마침 지나가는 집사의 멱살을 잡아챘다.

 

"이리안의 방은 어딨지!?"

"예…? 영주님이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흐익."

 

레온이 검을 시퍼렇게 들자 집사가 어서 빨리 말했다.

 

"왼쪽 맨 끝으로 가서 좌측으로 돌면 맨끝 방에 이리안님의 방이 나옵… 컥."

 

레온은 대답도 다 듣지 않고 뛰어갔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지만 느낌이 완전히 달랐다.

 

"이리안!"

 

쾅!

레온이 문을 차자 손잡이가 나가 떨어졌다.

덜렁거리는 문을 치운 레온이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침대에 누운 이리안을 반쯤 벗긴 레오폴을 쳐다봤다.

레오폴은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하하. 오해다. 오해."

"떨어져라."

"그러지. 남자친구 분이 오셨으니."

 

레오폴이 세발자국 벗어났다.

그러면서 소리를 들은 경비병이 어서 올라오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벌려고 애썼다.

 

"수면제를 썼군. 그것도 아주 독한 수면제를…."

"하하. 아니야. 맛있는 음식을 먹었기 때문에 깊게 잠든 것 뿐이다. 하지만 이상하군."

 

레오폴이 입술을 쓰다듬었다.

 

"어째서 자네는 그렇게 양껏 먹어놓고도 잠들지 않은 거지?"

 

레온은 답변할 마음이 들지 않았지만 충동성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대답했다.

아무리 그래도 영주를 베는 건 위험부담이 있으니깐.

최종 판단과 결정권은 노예인 자신이 아닌 주인에게 있다.

 

"사막에 사는 부족들이 젤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나?"

"사막? 부족?"

 

레오폴은 뜬금없이 나온 단어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물도 밤도 아닌 독이다. 조그만 전갈 하나에 부족이 전멸당한 사례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부터 어린 시절에 독을 조금씩 주입해왔지. 내성을 얻으려고 말이야."

 

레온의 시선이 살갗을 노출된 이리안에게 향했다.

비웃듯 말했다.

 

"엘프 족은 약물 내성에 취약한 모양이야. 별 거 아니군."

"하하하…."

 

레오폴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소란을 들은 경비병들이 우루루 몰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마음의 여유가 생긴 레오폴은 레온이 신중한 성격이라는 걸 깨닫고 농담을 던졌다.

 

"자네 말이야. 혹시 돈 부족하지 않나?"

"돈?"

"그래. 귀족들의 은밀한 취향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의 애인을 남에게 대여하고 관람하는 문화가 있다네."

 

경비병들이 검을 치켜들고 문 앞으로 치켜들었다.

레오폴이 손을 들고 경비병들을 제지했다.

 

"내가 자네에게 제안하지. 여기서 자네를 구금하고 당신의 애인을 강간하겠네. 물론 상처를 주고 싶지 않다면 이리안이 깨어난 후 자네가 성관계했다고 해도 상관 없네. 물론 속에 넣은 정액까지는 어쩔 수 없……"

 

레오폴은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기도 전에 이미 머리와 몸이 분리됐다.

 

"못 들어주겠군."

 

레온은 이리안의 옷을 다시 입혀줬다.

 

"아!"

"아아! 여,영주님…!"

"죽으셨다! 죽으셨어!"

 

레온이 말했다.

 

"죽을 짓을 했으니깐 죽었지. 안타까워 할 것 없다."

 

경비병들은 충성심은 있었는지 레온에게 모두 덤벼들었다.

레온도 그들을 상대했다.

싸움은 언제나 익숙하고 자신있는 일이었다.

 

 

 

******

 

 

 

"하아아아암! 잘 잤다! 개운하다!"

 

이리안이 일어나며 기지개를 했다.

 

"어머."

 

방안은 개판이었다.

굴러다니는 레오폴의 머리와 몸, 경비병들의 시체에는 이미 날파리가 끼어들었다.

 

"일어났나?"

"응. 덕분에 잘 잤어."

"…그 소린 마치 수면제를 알고도 먹었다는 뜻으로 들리는데?"

"맞아. 근데 음식이 맛있어서야 말이지. 후후."

"뭐?"

 

이 상황에 농담 따먹기라니 레온의 입이 벌어졌다.

이리안이 말했다.

 

"스라나 부인은 네 몸과 얼굴이 맘에 들어서겠지만 난 에나 족을 잘 알고 있었으니깐 1300골드나 되는 전재산을 주고 사려고 했단 말이지."

"……."

"이 정도 해주지 않으면 곤란해. 물론 지금 난 널 무일푼으로 거둬였지만 후후. 운이 좋았지. 그리고 아주 만족스러워."

 

난리가 난 자신의 방을 보며 이리안은 휘파람을 불었다.

 

"아주 만족스러워. 널 가지길 잘했어."

"……."

"이리 와. 레온. 오늘은 그때처럼 잘생긴 얼굴에 피가 묻지 않았네."

"손과 발이 묶여 있지 않았으니깐."

"넌 내 믿음을 배신하지 않았어. 그 기분이 아주 흡족해. 네게 상을 주고 싶어."

 

이리안이 바닥에 걸터앉은 레온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입을 섞었다.

곧이어 혀가 레온의 입속으로 침투했다.

 

1초가 1분같은 시간이 지나고 침이 늘어지며 입술이 떼어졌다.

이리안이 침을 입술에 가져다대며 말했다.

 

"넌 내꺼야. 그 몸, 그 영혼 하나하나까지 다 내꺼야. 그야 내 노예니깐. 어때? 이렇게 황홀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녀의 노예가 된 기분은?"

"……."

 

레온은 대답하지 못했다.

이리안이 건방지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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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연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