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사 핀의 스승, 기사 벨라


여신의 대리, 성녀 세이라


세계수의 숲 파수꾼, 신궁 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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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으으아아아악!!!”

 

“허억… 허억…”

 

드디어 이 망할 짓거리도 끝났다.

마왕의 몸은 서서히 잿가루처럼 변하며 흩어지고 있었다.

 

“어, 어떻게… 내 100번째의 비수를 뚫어낸 거냐…”

 

“허억… 다 아는 방법이… 있었다, 쿨럭, 개자식아…”

 

“결국 용사의 힘은 넘을 수 없단 뜻인가…”

 

아니, 너무 잘 넘어서 1109번이나 회귀했다 망할놈아.

그리고 이게 1110번째의 시간대. 드디어 마왕 놈의 뇌절의 뇌절의 뇌절을 넘어선 숨겨진, 히든의, 필살의 등등을 뛰어넘어 100페이즈라는 어이없는 수준의 전투를 끝낸 것이다.

 

드디어 끝났다. 정말로 끝났다.

 

하지만 어째서일까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듯 손에서 전대 용사들의 힘이 담긴 성검을 놓을 수가 없다.

 

용왕의 선물로 받은 두 번째 심장은 비어버린 몸속의 마나를 열렬히 채워주고 있고, 드워프들의 왕이 용암 속에서 목숨을 걸고 재련해 준 무구들은 지금도 망가진 부위들을 자동으로 수복하며 다음 전투를 준비하고 있다.

 

수인들이 새겨준 피부 아래의 비전 문신들은 각각의 부위마다 강력한 축복을 내려주며, 세계수의 가지와 나뭇잎, 수액으로 만들어진 정령의 장신구들은 지치고 다친 몸을 회복 중이다.

 

그리고 신께서 하사하신 용사의, 나만의 권능 중 몇 가지는 자동으로 발동하여 내 뒤를 보호한다. 그래 내 눈앞의 마왕과 나 사이가 아닌 정반대인 뒤를 말이다.

 

캉!

치리링!

티티팅!

 

이미 느끼고 있었지만, 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를 바라본다.

 

그곳엔 분명 마왕과의 전투로 기절하거나 지쳐 쓰러졌었을 자랑스러운 동료들이 저마다의 눈동자에 광기를 담고 어떠한 목적을 가진 채 나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분명 너덜너덜한 갑옷을 보면 내부도 정상이 아닐 텐데도 전신에 푸른 오오라를 일으켜 웃으며 달려오는.

 

“핀! 같이 왕국으로 돌아갑시다. 그곳에서 같이 최강의 기사단을!”

 

나와 같이 전열에서 같이 싸워주는 스승, 기사단장 벨라

 

 

 

 

왕국에서 처음 만났을 때, 스승님은 아직 실제로도 미숙하고 어렸던 나를 애송이라 생각하며 용사로 인정해 주지 않았지. 하지만 왕의 명령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동행하는 게 눈에 보여도 난 첫 파티의 동료였기에 스승님과 친해지길 바라며 검을 배웠어.

 

“크윽!”

 

“자 다시 일어나세요. 당신이 마왕을 쓰러뜨릴 용사라는 게 아직은 믿기진 않습니다만 그렇다 하더라도 저에게 왕명이 내려진 이상 고작 이 정도의 수준은 용납 못합니다. 당신은 강해져야 할 의무가 있어요.”

 

“퉤! 아직이야 더 할 수 있다고 난!”

 

“…그 자세입니다.”

 

이리저리 굴려지면서 가끔은 이렇게까지 날 심하게 대하는 스승님을 미워하던 적도 있었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모든 게 의미가 있던 훈련이었어, 그 덕에 몇 번이나 위기를 넘기기도 했고, 이윽고 내 실력이 스승님을 뛰어넘는 날도 오게 되었지.

 

티잉!

 

드디어 스승님의 검을 쳐내고 안으로 파고들었다.

 

“읏…! 훌륭합니다.”

 

“후우… 이걸로 드디어 같은 지점에 서게 됐네요.”

 

“…흠! 아직입니다. 전설 속의 용사라면 제가 100명이 오더라도 가뿐히 이겨낼 정도는 되어야죠.”

 

“하하하! 그럼 당연하죠. 앞으로도 지도 부탁드립니다 스승님.”

 

초기의 여행 때는 여성인 스승님과 단둘이서 돌아다니는 일이 많아서 당시 숙맥이던 난 마치 데이트라도 하는 듯 즐거웠었지.

 

평소에 몸에 새겨진 흉터와 근육질이 몸으로 자신은 여자답지 않다면서 보석이 박힌 액세서리 같은 물건이나 프릴이 달린 옷들도 어울리지 않을 거라며 자책하는 일들이 많았던 스승님에게, 그 당시 몰래 읽었던 인기 있는 로맨틱 소설들을 보면서 어떻게 해야 여성에 대한 칭찬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을지 고민도 하기도 했지.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호오, 베르니움 들판의 명물인 야생마 무리의 질주인가.”

 

“엄청난 장관인데요. 저렇게 많은 말들이 달려가는 건 처음 봅니다.”

 

“이곳에선 저 무리를 보며 시원하게 들판을 달리는 모습에 마음속 무언가 터져 나와 한 무리가 된 것처럼 달려 나가는 머저리도 있다곤 하지. 그걸 보면서 같이 달리는 놈도 있다 하지만 나로선 이해하긴 힘들군.”

 

“머저리라… 전 그렇게 생각되진 않네요.”

 

“오 우리 핀 용사님은 아직 애송이라서 그런 마음을 이해하는 건가?”

 

“그렇네요… 가끔 저와 옆에서 같이 달려나가는 스승님을 보면 마치 저 야생마들처럼 앞만 보며 달려나가는 흔들림 없는 눈동자, 속도를 못 이겨 바람에 밀려나가는 땀방울, 묶어 올린 붉은 머리의 꽁지가 휘날리는 모습을 바라보자면 들판을 달리는 붉은 갈기의 말처럼 보여, 그 모습에 매료되어서 바보 같이 먼저 달려 나갈 때가 있죠. 그런 제가 머저리라면 딱히 틀린 말은 아닌 것 같군요.”

 

화아아악

스승님의 얼굴이 마치 본인의 머리색처럼 붉어졌다.

 

“그… 그건…”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스승님은 여자로서의 매력이 없는 게 아닙니다. 그걸 눈치채지 못한 남자들이 바보인 거죠.”

 

……멍청한 놈.

 

그 후로는 스승님은 제 말에 더 자주 웃어주셨죠. 가끔은 스승과 제자로서 같이 지내야 한다면서 침실에 들어오는 건 참을만했지만 그래도 목욕은 아니었어요.

 

 

 

그리고 마왕을 처단할 때 횟수 제한이 있으니 신중하게 사용하라며 여신께 하사받은 주박의 사슬을 들고 있는.

 

“핀님, 저와 함께 신성제국으로 가시죠. 그곳에서 같이 신을 받들어 모시는 겁니다!”

 

파티의 회복과 버프를 부여해 주는 힐러, 성녀 세이라.

 

 

 

 

꿈에서 신께 계시를 받아 신성제국에 도달한 날, 교회에서 세이라 널 처음 만났지.

 

본인도 여신께 뜻을 받아서 미리 우리가 갈 교회에서 기다리고 있었다고 말하며 교황께 안내되었고, 교황께서 손녀라며 잘 부탁한다고 했을 땐 부담스러웠지만 네가 먼저 다가와서 금방 친해질 수가 있었어.

 

“용사님, 신성제국에 귀의하시는 건 어떠신가요?”

 

“뭣!? 이놈은 용사이기 전에 왕국의 국민이다!”

 

“용사는 신이 점지하신 자, 신성제국에선 아버지라 뜻하며 그의 짝인 여신께선 어머니라 뜻합니다. 신의 뜻을 받은 용사님이 신성제국의 성자로서 지내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닌걸요.”

 

“이놈이…!”

 

“자, 잠깐만. 두 분 다 진정하세요.”

 

…물론 그 시작이 평화적이진 않았지만 서로 대화하여 충분히 친해질 수가 있었어.

 

신성제국에선 곧바로 떠날 준비를 하려 했지만, 신의 계시로 용사로서의 권능과 그걸 다루기 위한 신성력을 배우기 위해 계획도 없이 그곳에서 지내게 됐지만, 신성제국에 대해 모르는 것과 거주 문제 등에 대해선 세이라가 많은 도움을 줘서 다행이었어.

 

“용사님. 권능과 신성력의 연습은 잘 되어가시나요.”

 

“세이라가 쉽게 알려줘서 엄청 잘 되는 걸! 이것 봐봐 전대 용사들이 사용했던 권능을 벌써 3개나 사용 가능하다고. 물론 빠르고 동시에 사용하는 건 아직 연습이 필요하지만 말이야.”

 

“이미 훌륭하십니다. 이렇게 시민들의 모범이 되어 착실히 노력하며 정진하시면, 신과 여신께서도 당신을 축복하실 겁니다.”

 

“그 정돈 아니지만, 칭찬을 들으니 힘이 나는 걸 고마워.”

 

벌컥!

 

“용사님 검술 훈련의 시간입니다.”

 

“아, 넵!”

 

“흐으음……”

 

검술과 신성력을 같이 훈련하면서 바쁜 시기였지만 성장한다는 게 느껴져서 좋았었어, 신성제국의 어둠이 우릴 덮치긴 전까지 말이지.

 

세상에 위대한 자는 오직 한 분이라며 아버지 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광신도들은 여신께 선택받은 성녀를 죽이려 했고, 반대로 어머니 여신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광신도들은 신께 선택받은 용사인 나를 죽이려 했지.

 

화르륵!

 

“여기에 그년이 있다 불을 질러라!”

 

쿵!

 

“마차를 끌고 와 길을 막아라! 절대로 쥐새끼 한 마리도 놓쳐선 안 된다!”

 

우오오오오오오!!!

 

카앙!

 

“용사님 비키십시오! 저 사악한 이단인, 스스로를 성녀라 칭하는 악의 주구를 처단해야만 합니다!”

 

“그건 신께 선택받은 용사인 내가 알아서 할 테니 저리 꺼져!”

 

서걱!

 

“크아아악!”

 

“허억… 허억…”

 

“용, 용사님…”

 

세이라는 이러한 경험은 처음인지 허벅지에 화살이 스친 것만으로도 다리에 힘이 풀려 제대로 서있질 못하였다.

 

다행히 상처는 그녀가 재빨리 치유하여 상처가 더 이상 피가 흐르진 않았지만 이대로 여기에 있기엔 위험하다. 얼른 스승님과 합류하여 이들을 뚫어내고 신성제국군들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네, 네! 흐읏…!”

 

세이라는 일어나려 했으나 다시 쓰러진다. 역시 상처가 다 나았어도 공포가 쉽게 가시지 않나 보다. 그렇다면… 일단 몸을 가볍게 하기 위해 금속 갑옷은 벗어낸다.

 

“용사님?”

 

“제 등에 업히시지요, 주변의 소음을 들었을 때 적들의 수가 많아 이대로 내려가 대로에선 싸우기엔 불리합니다. 그리고 성녀님의 거동이 힘드시니 제가 업고 지붕 위로 올라가 그대로 건물들을 뛰어넘는 게 빠를 듯합니다.”

 

“아,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성녀로서 전투사제의 공부도 한 몸, 제 한 몸을 지키는 것쯤은 어렵지 않습니다.”

 

나는 말없이 세이라에게 다가가 등으로 보이며 무릎을 꿇었다.

 

“성녀님, 아니 세이라. 이래 봬도 용사이기 전에 한 명의 남자야. 나 한 몸 편하자고 여자의 위기를 그대로 보고 있을 순 없지. 이럴 때 필요한 게 용사님 아니야? 자 업혀.”

 

“……네.”

 

그렇게 우린 머물고 있던 건물 지붕 위로 올라간 뒤, 기운을 재빨리 탐지해 최대한 스승님과 신성제국군이 있는쪽으로 도망쳤지. 중간중간 화살이 날아오기도 했지만 그건 등에 업힌 세이라가 신성벽을 펼쳐준 덕에 무사히 넘길 수도 있었어.

 

아군의 곁에 도착했을 때 적들의 피로 범벅이 된 스승님이 다가올 땐 무서웠지만 금세 “다행이야 핀…”라며 안으셔서 안도했고. 내 등에서 내린 세이라는 내 곁에서 웃음을 보여서 다행히 일이 잘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지.

 

그 후엔 신성제국군과 스승님, 성녀, 나, 심지어 교황님도 직접 나서서 광신도들을 물리치고 우린 보상을 받고 다음 목적지인 세계수의 숲으로 떠날 수가 있었지.

 

 

 

 

그리고 세계수의 묘목이 성장하며 활의 형태로 자라나는 목궁, 거기에 세 개의 화살을 메어놓고 네 속성의 정령들을 부리며 달려오는.

 

“핀! 같이 세계수 아래에서 은총을 받고 즐거운 모험을 떠나자!”

 

모두의 눈과 귀가 되어주는 엘프, 신궁 페이

 

 

 

 

첫 만남은 정말 안 좋았어, 숲속을 걷고 있는데 바로 코앞에 화살이 박힌다면 그 누가 좋아할까?

우린 사방을 경계 중일 때, 네가 나무 위에서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진 위치를 가늠조차 할 수가 없었어, 그야말로 은신의 달인이었으니. 그리고 그때 엘프의 귀는 정말로 길단 걸 처음 알았어.

우리가 용사 일행이라고 말하자 넌 얼굴을 찡그리곤 뒤돌아 내려와서 자신을 따라오라고 했지, 우린 무작정 따라오라는 말과 일단은 네가 엘프였단 점을 믿고는 따라갔어. 그리고 한참을 걷고 나서야 네가 진짜로 우릴 세계수의 곁으로 데려왔단 걸 알았어, 하지만 세계수의 곁으로 당장 갈 순 없고 먼저 여왕님을 봬야 한다고 말을 하고 우린 따라갔어.

 

“어서 오세요 용사들이여. 전 이곳 세계수를 지키는 엘프들의 여왕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용사 핀입니다. 이쪽은 같이 동행하는 제 동료들이고요.”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하셨을 텐데 오늘은 여독을 푸시지요. 제 막내딸 페이가 안내할 겁니다.”

 

“내, 내가 또?”

 

“숲의 입구에서 무례를 범한 것은 알고 있다. 그에 대한 사죄로서 용사분들이 이곳에 지내는 동안은 네가 수발을 들거라.”

 

“으으윽…”

 

물론 처음엔 우리도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어, 화살을 꽂고 시작하는 첫인상은 물론, 대놓고 귀찮아한다는 게 표정에 보였으니까.

 

그래도 심성이 나쁘진 않아서 그곳에서 며칠을 지냈더니 생각보다 금세 마음을 열더라고 바깥에서의 적들과의 무용담과 신비로운 유적이나 살면서 한두 번 볼까 말까 하는 경관을 본 모험담을 얘기하니 친해지기 쉽더라.

 

넌 가끔 바깥에서 들어오는 동화책이나 소설을 읽으며 숲 바깥에 대한 동경을 가진 어린아이였지 실제 나이는 우리 셋을 합친 것보다 많았지만, 넌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변화도 커다란 사건도 없는 마을에 싫증을 내고 있었어 10년 전 같은 친구와 같은 장소, 같은 얼굴, 같은 옷을 입은 채로 만나면 10년 후에도 변화가 없다고 짜증을 냈었으니.

 

“정~말이지 지겹다니까, 이런 곳에서 그나마 내가 미치지 않은 건 이 책들 덕분이야. 내 보물들이지.”

 

“그렇게 말 해도 바깥의 평범한 사람들도 그다지 다르지 않아, 엘프들과는 시간의 개념이 다르겠지만 그들도 1년 전과 1년 후의 모습이 크게 변하진 않지, 우린 그걸 평화라고 부르는걸.”

 

“뭐, 나도 이게 평화고, 중요하다는 건 알지만 말이야~ 몇백 년간 같은 곳에 있다 보면 자극이 부족하단 말이지…”

 

“그럼 너도 한번 여행을 가보지 그래? 엘프들은 모두가 자기 몸 하나는 지킬 줄 아니까 바깥에서 모험가나 험하더라도 용병 일을 하면서 돈을 벌면 충분할 것 같은데.”

 

“으음~ 그건…… 앗! 나 해야 할 일이 있단 걸 까먹었었네 미안, 나중에 또 얘기하자!”

 

그렇게 바깥으로 나가보면 어떠냐고 물어봐도 넌 얼버무리며 대답을 피하고 자리를 떴었지, 그건 내가 봤을 땐 두려움이었어, 책으로만 본 바깥과 어른 엘프들에게 듣는 바깥의 괴리감에 두려웠던 거겠지.

 

그 후로도 우린 여기에 온 목적인 세계수의 축복과 엘프들의 특기인 정령이 부여된 장비를 얻기 위해 여러 도움을 주는 중이었지. 그러다 큰 사건이 일어났지, 세계수가 눈에 띄게 시드는 게 보이는 거야.

 

여왕님은 급하게 마을의 원로와 중진들과 외부인이지만 우리들을 불러서 회의를 열었어. 여러 의견이 오갔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나오진 않았고 그러던 도중 세계수에 직접적인 원인을 확인하러 간 경비대들이 돌아와선 누군가 세계수에 손을 대었다는 정보를 말했지.

 

직후 몇몇은 우릴 의심하길 시작했어, 엘프들의 장비를 얻는 게 그리 빨리 진행되질 않으니 직접 세계수에 손을 대곤 그 재료들로 바깥에서 직접 장비를 만들려는 게 아니냐고 말이야.

 

물론 우린 부정했어 이곳을 돌아다니면서 세계수에 가까워진 적은 있어도 그 가지를 꺾을 만큼 가까이 갈 수도 없고, 세계수의 가지도 없으니까. 하지만 그들은 계속 언성을 높이며 우릴 질타했어, 거짓말을 한다며 말이야. 그걸 보다 못한 다른 엘프들은 반대로 우릴 두둔하면서 그들과 언쟁을 벌이기 시작했어 이러다가 진짜 피를 볼 것처럼 서로의 면면을 깎아내렸지. 하지만 그때 네가 나지.

 

“제, 제가 그랬어요……”

 

“페이 네가…?”

 

“여기 이것도…”

 

페이는 그러면서 허리에 차고 있던 주머니에서 검은 기운을 풍기는 나뭇가지를 꺼냈다. 우린 알아보지 못했지만, 엘프들은 달랐는지 그것을 보자마자 눈빛이 확연히 달라졌다.

그리고 여왕이 입을 열었다.

 

“정말로 네가 그런 것이니? 그렇다면 그 악한 기운은 무엇이냐, 엘프도 세계수도 가질만한 기운이 아니야.”

 

“이, 이건 원래부터 이런 상태였어요. 보기만 해도 썩어가는 듯 한 가지가 있길래 그걸 제거했더니 갑자기 세계수가…”

 

“…사실 규명은 차차 진행토록 하지, 하지만 페이 넌 중요한 증인이며 용의자다. 경비대! 페이를 감옥으로 데리고 가도록.”

 

“네!”

 

“잠깐 페이!”

 

“미안하군 용사 이 일은 매우 중대한 문제다. 함부로 끼어들진 않아 줬으면 한다.”

 

“괜찮아… 그리 걱정 안 해도 돼 용사…”

 

그렇게 무력하게 끌려가는 널 바라볼 수밖에 없었지. 넌 절대로 마을에 나쁜 짓을 하지 않을 친구란걸 알아 그래서 계속 생각했지 어떻게 하면 널 도와줄 수 있을지 동료들과도 상의하고 다른 엘프들이나 네 자매들 또는 여왕님에게도 몰래 갔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운의 정체나 드러났는데 그건 마왕의 기운이었어, 어떠한 경로로 들어왔는진 모르겠지만 그 힘에 의해 세계수는 점점 썩어들어가고 있던 거였지.

 

당연히 마왕과는 관련이 없는 페이의 누명은 벗겨졌지만, 아직 몇몇은 너를 보는 시선이 좋지 않았기에 너에게 제안했어. 우리와 같이 함께 세계수를 정화하자고, 정화하여 너의 실력과 진심을 모두에게 보여주자고.

 

넌 내 손을 잡아줬고 그 후는 시련의 연속이었지, 동물의 모습으로 위장한 마물들의 뼈, 늪지대 깊은 곳에 봉인돼 있던 회복의 정수, 엘프들도 모르게 강력한 힘으로 숨겨져 있던 숲의 동굴 속 거대한 이무기의 독샘까지. 그 모든 걸 모아서 성녀와 엘프 여왕의 힘으로 정제한 정화의 정수로 세계수를 구할 수가 있었어.

 

페이가 세계수의 밑동에 조심스레 정화의 정수를 올려놓자 정수는 그대로 녹아들어 세계수의 뿌리로 스며들었다.

 

세계수의 모습은 더 이상 보기엔 괴로울 정도로 곳곳이 거뭇거뭇해지고 나뭇잎마저 썩어 떨어지고 있었다. 이게 통하지 않는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나와 성녀가 신의 힘을 빌려서라도… 생각하고 있을 그때 변화가 일어났다.

 

파아아아앗!

 

뿌리부터 시작한 그 빛은 점차 위로 솟구치며 세계수의 전신을 감싸기 시작했다. 이윽고 가지 끝, 나뭇잎 하나까지도 모두 빛에 감싸였을 때.

 

쩌적!

쩌저적!

 

“세계수가!”

 

“갈라진다…”

 

퍼어어엉!

 

파열음과 함께 전신에 금이 가던 세계수는 이윽고 한계를 맞이하여 전신이 폭발하며 터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는.

 

“전설의 황금빛……”

 

이전의 모습보단 크기가 줄어든 모습이지만 더욱더 찬란하고 생기가 도는 모습의 황금빛 세계수가 나타났다.

 

또륵.

 

그 모습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페이에게 다가가 등을 한번 쳐주고 어깨동무를 하였다.

 

“윽!”

 

“어때 페이. 네 힘으로 세계수를 살려낸 기분이?”

 

“…최고야. 어찌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감동적이야.”

 

“흐흐흐. 기분 좋지? 이게 우리가 바깥에서 좋은 일도 하면서 하는 ‘모험’이야.”

 

“이게 모험…”

 

“그래 이게 모험이야.”

 

페이는 그리 말하면서 내게 몸을 기대어왔다. 아마 방금전까지 이무기를 상대했으니 피곤한 거겠지.

 

그 후 엘프들의 마을에서 세계수의 부활 기념 축제를 벌인 후 여왕께선 세계수께서 주신 선물이라며 양손에 황금빛이 나는 나뭇가지와 나뭇잎, 그리고 수액이 담긴 병을 들며 이것으로 우리에게 최고의 장비를 만들어주시겠다고 선언하셨다.

 

그렇게 장비가 만들어지고, 우리도 회복을 위해서 좀 더 시간을 보낸 후 드디어 장비가 완성이 된 날, 나는 페이에게 말했다. 우리와 같이 가는 게 어떻냐고, 바깥이 두렵더라도 우리와 함께하면 무서울 게 없다고 말이다.

 

넌 아무 말 없이 떠났길래 거절의 의사라 생각하고 나도 마음을 접고 숲을 떠났지만 그때 만났던 숲의 입구에서 넌 가방을 맨 체로 우릴 기다리고 있었지.

 

“……뭐 해, 안 가?”

 

그렇게 우린 실실 웃고, 넌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려 보이지 않게 하며 우린 같이 걸어갔었지.

 

 

 

 

그런데 결국은 이렇게 되는 건가.

 

1110번의 회귀동안 난 그녀들의 어둠을 점점 알게 되었다.

 

스승인 벨라는 훈련이라는 명목으로 구태여 나에게 가까이 붙는 일이 많아졌다.

 

처음엔 뭉친 근육을 풀어야 한다며 하던 마사지도 어느 순간부터 점점 노출을 요구하는 일이 많아졌고, 최종적으론 자기도 받아야 한다며 거의 알몸에 가까운 수영복을 입고는 누워있는 게 아닌가.

 

여체에 손을 댄다는 게 부담스러웠고 손을 대거나 힘을 줄 때마다 나오는 신음 때문에 다음부턴 어떻게든 전신을 감싸는 면 옷을 입도록 하고 가끔은 마사지 자체를 거부하기도 했다.

 

성녀인 세이라는 나도 신에게 기도해야 한다며 같이 있거나 기도 시간의 횟수를 늘려 힘들게 했다. 원래는 스승님과 페이도 세이라를 견제하기 위해 참여했으나 페이는 지루해서 얼마 안 가 포기, 스승님은 세이라와 몇 번 개인면담[회귀를 하며 깨달았는데 그쪽은 훈련, 나는 기도라고 서로 타협한 듯 하다.]을 가지 더니 어느 순간부턴 나타나지 않길 시작했다.

 

우린 강대한 적과 전투하고 난 뒤엔 장비든 옷이든 엉망진창이 된다. 드워프제 장비를 얻고 나서 이제 그런 일은 없지만 그전엔 언제나 너덜너덜한 상태로 마을로 복귀했다.

 

다른 동료들은 그때마다 전과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의 의복과 장비를 구매했지만[그래도 자세히 보면 조금 노출이 늘어난 것 같긴 하다.] 세이라는 노골적으로 점점 여성적인 곡선이 드러나는 수녀복을 입기 시작했다.

 

분명 처음 만났을 땐 머리카락도 보이지 않던 그녀가 지금에 와선 몸의 곡선뿐만 아니라 골반부터 시작하는 옆트임에 그 사이로 보이는 가터벨트로 강조되는 각선미, 심지어 가슴에는 십자가로 구멍을 내어 골이 전부 다 보이는 남사스러운 수녀복을 입게 되었다.

 

아마도 본인에겐 스승님처럼 나와 같이 가까이 붙을 명분이 없으니, 반대로 내 육체를 직접 노리기보단 본인의 육체를 노리도록 그런 옷을 입은 거겠지.

 

엘프인 페이는 같이 모험을 다니는 것이 주목적인 줄 알았는데 정확히는 ‘나와 같이’ 모험을 가는 게 더 중요했던 듯하다.

 

처음엔 어색했더라도 시간이 지나서는 어딜 가더라도 내게 찰싹 붙어서 따라다니거나, 나 혼자 어디 멀리라도 간다면 불안해해서 따로 가기도 미안해진다.

 

거기다 페이는 엘프 기준에서도 분명 성인이라 할 만큼 나이를 먹었지만 그곳에선 여왕의 막내딸이어서 그런지 오냐오냐 키워져 조금은 아이 같다는 인상을 보인다.

 

그래서 취침 때 나와 같이 자겠다는 걸 스승님과 세이라가 말리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도 같이 동침하는 바람에 좁은 천막에 같이 잔적도 있었는데 그때 내 품속에서 자던 페이가 새벽에 자기 고간에다가 내 손을 비비고 있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부끄럽지만 같은 여성인 스승님과 세이라에게 페이의 인간에 대한 이런저런 지식과 상식, 특히나 ‘성교육’을 중점으로 부탁드렸다.

 

그렇게 힘들면 그녀들을 파티에서 빼고 다른 멤버를 넣으면 되는 거 아니냐고?

회귀를 그렇게나 했으면서 아직도 제대로 대처를 못 하는 게 말이 되냐고?

 

전부 소용없었다.

 

내 경험상 우린 4명이 있을 때 최고의 기량이 나온다. 단독파티론 이 중에서 한 명이라도 빠졌을 땐 마왕에게 도달한 적도 없고, 군대의 힘을 빌리더라도 마왕과 마주하여 싸울 뿐 치명적인 피해는 주지 못했다.

 

즉, 나의 회귀로 인한 마왕공략법이 있다해도 그녀들이 있어야 제대로 사용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사실 나도 몇 번의 회귀동안 그녀들이 질려서 일부러 만나지 않는 동선이나 태도를 취한 적이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디를 가더라도 ‘우연히’ 그녀들을 만난다.

 

시장에서, 모험가 길드에서, 대장간에서, 도적들을 토벌할 때, 마물을 잡을 때, 마을에서 길을 걷다가, 숲에서 걷다가, 다음 마을을 향해서 마차를 얻어 탔다가. 결국 필연적으로 파티가 결성된다.

 

싸가지 없는 태도나, 변태적인 태도, 초탈하거나 무관심한 태도를 취해도.

 


“네놈의 그 인성! 내가 머리부터 발끝, 피부부터 뼛속까지 전부 바꾸어서 용사답게 개조해주마.”


“네, 네놈 왕국의 왕실기사단장에 무슨 짓이냐! 크흠… 용사로선 조금 비뚤어졌으나 걱정말도록 남성기사들의 주체 못 하는 성향 정돈 얼마든지 고쳐본 경험이 있다. 뭐, 그때를 생각해보면 나도 꽤 즐거운 시간이 되겠군.”


“흠, 제법 진중한 놈이구나. 내 아랫놈들도 너를 반의반 이라도 닮으면 좋으련만, 마음에 들었다. 너의 기량을 확실하게 끌어올려 주지.”

 


“이러한 분이 선택받으신 용사님이라니… 걱정마세요 형제님, 저와 함께 다니시며 봉사하시다 보면 분명 그 선행의 의미를 깨닫고 올바르게 나아가실 겁니다.”


“가, 가슴이라니… 크, 크흠… 아무래도 용사님께선 조금 많이 개방적인 생각을 지니신 분 같군요. 걱정마세요 저희 교단은 고작 그 정도로 엄벌이나 차별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시도 때도 없이 그러는 건 용사님의 위신에 흠이 갈 수 있으니 제, 제가 해소를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이렇게나 건실하신 분이라니 마치 역사서로 전해져온 초대 용사님과도 같은 면모군요. 아아, 정말로 다행입니다. 자, 저를 따라오시죠 교황님께 안내하겠습니다.”

 


“퉤! 뭘 그렇게 꼬라봐!? 괜히 이렇게 보내면 네가 저기 검사나 성녀에게 못된 짓 할까 봐 감시차 따라가는 거야. 허튼짓하면 그 미간에 내 화살이 박힐 테니 언제 어디서나 손 조심, 눈 조심하라고?”


“따, 딱히 네놈 때문에 가는 게 아니거든! 네가 엘프 마을에서 했던 짓을 밖에서도 했다간 지명수배라도 됐다간 큰일이니 내 눈과 귀로 감시해서 예방하기 위해서 가는 거야!”


“너 말이야 왠지 그렇게 보내기엔 좀 그렇더라. 마을의 몇몇 내 자매들을 보는 것 같아 마치 정해진 대로만 살다가 사라지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 그러니! 널 따라다니면서 즐겁다, 행복하다 같은 감정을 알려줄게! 바깥의 책이 내게 가르쳐준 것처럼, 안쪽의 내가 너에게 세상이 재밌다는 걸 알려줄게!”

 


그래서 나는 그녀들을 배제한다는 걸 포기했다. 모로가도 도로가도 결국 만나는 거라면 내가 모르는 곳에서 만나는 것보단, 처음부터 같이 하는 게 그나마 나은 선택이겠지.

 

하지만 이런 주마등 같은 회한보단 먼저.

 

캉!

 

“스승님, 손에 든 그 팔찌는 왕국의 최고위험 범죄자에게 사용하는 마력봉인구 아닙니까, 도대체 그걸 어떻게 들고 왔는지 둘째치고 도대체 왜 저한테 쓸려는 겁니까!”

 

“네가 너무 강해져서 그렇다 핀! 도망치지 않고 서로 끈적한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서라면 이 정돈 기본이다!”

 

“흡!”

 

오라를 실어 최대한 다치진 않게 스승님을 아주 멀리 날려보낸다.

카카캉 부웅!

 

“으읏…!”

 

다음은…

 

치리링.

 

챙! 챙!

 

“세이라! 그건 여신께서 마왕과의 결전 때 사용하라고 하사하신 주박의 사슬이잖아, 도대체 왜 여력을 남기고 있던 거야!”

 

“후후후, 그거야 이때를 위해서지요. 마왕과 대적이 가능한 용사님을 붙잡기 위해선 당연히 그와 동일한 수준의 힘이 필요한 법, 걱정마세요 용사님, 설사 손가락 까딱 못하는 몸이 되더라도 제가 정성껏 보살펴 드리겠습니다.”

 

세이라와 나는 같은 신성력을 사용해서 짧게 결판이 나질 않아. 그렇다면, 수인족의 비전문신을 전부 다리에 집중한다!

 

쉬익-!

 

“헛, 이렇게나 빠르” 퍽! “크헙…!”

 

털썩

 

내부가 조금 진탕이 됐겠지만 깔끔하게 무력화를 위해선 어쩔 수가 없다.

그리고…

 

휙- 휙-

 

날아오는 두발의 화살은 가볍게 어깨와 고개를 살짝 틀어서 피한다.

 

“페이, 이제 그만해!”

 

“미안해, 하지만 평소에 네가 초탈한 모습을 보일 때마다 이 여정이 끝나면 사라질 것 같았거든, 그러니 우리 곁에 두기 위해선 절대로 포기안해!”

 

후우우우웅.

 

정령과 본인까지 합쳐서 동시에 끝없이 화살을 쏘는 무사각 공격, 심지어 페이 본인이 들고 있는 화살촉 끝엔 검보라색 액체가 묻은 걸 보니 히드라의 마비독인가 저 많은 수중에 하나라도 스쳤다간 끝이다…!

 

잠깐, 그런데 우리? 이 셋은 서로 날 차지하기 위해서 사이가 안 좋았던 게 아닌가?

 

푹-

 

“윽… 세이라 어떻, 게…”

 

“크흡, 쿨럭… 말씀드렸잖, 아요 용사님. 전 전투사제의 공부도 한 몸… 고작 이정, 도론 하아…! 기절하진 않는답니다?”

 

그녀의 왼손엔 십자가 형태로 숨겨져 있었을 작은 칼이 쥐어져 있었고, 그 끝엔 분명 페이의 화살촉에도 묻어있던 검보라색 액체가 묻은 상태로 내 발목에 꽂혀있었다.

 

“이… 러…”

 

벌써부터 혀가 굳어간다.

 

몸에 가득 찬 축복과 권능들이 독을 해독하기 위해 열일중이지만 히드라는 마왕이 잠시 쓰러진 66페이즈때 등장하는 애완 마수, 그 독성은 신에게도 효과가 있기에 유일한 파훼법이 나와 세이라가 동시에 신의 권역을 만들어서 겹쳐서 독을 중화하는 동안 나머지 둘이 히드라를 잡아야 하는 터무니없는 방법뿐이다.

 

털썩.

 

드디어 100페이즈를 공략해 냈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결국엔 이런 결과인가, 사실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 일이다. 내가 중상을 입거나 죽기직전까지 간 이후엔 언제나 그녀들이 여기서 여정을 멈추고 도망쳐서 숨어서 단둘이 행복하게 살자고 할 때마다 달래주는 일이 얼마나 많았는지, 그에 대한 매뉴얼도 만들었을 정도다.

 

터벅 터벅

터벅 터벅

 

“핀… 미안하구나, 사실은 마왕성에 들어가기 전 모두와 협의했다. 모두가 공유하자고, 용사인 널 혼자선 막기 힘드니 힘을 합치자고.”

 

“용사님… 걱정마세요. 당신이 고생한 만큼 저희들이 남은 평생, 봉사를 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핀… 너와 함께하는 모험도 즐거웠지만 이젠 평화와 안정에 대해서 잘 알아. 한곳에 정착해서 살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거라는걸.”

 

뭐 그래 포기하자, 어차피 마왕도 쓰러뜨렸겠다, 그녀들에게 쥐어짜일 운명뿐이지만 그건 이전 회귀에서도 몇 번이나 경험해 본 일이다. 그럴 때마다 마왕이 완벽하게 죽질 않아서 세계멸망으로 결국 회귀했지만 이젠 아니잖아? 그녀들과 즐겁게 여생을 보내고 안식에 들 수 있을 것이다.

 

“크, 크흐흐흐흐! 마지막에 와서 분열인가 역시나 저열한 미물들이군.”

 

이 목소리는 마왕? 유일하게 움직이는 눈동자를 돌려 분명 잿더미가 되어 사라졌어야 할 마왕을 바라본다. 그곳엔 머리와 우측 어깨, 오른팔밖에 남지 않은 마왕이 우릴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방심한 너희들의 최후다! 흐아아아압! 이것이 나의 목숨을 바친 최후의 일격!”

 

……씨발? 100페이즈를 넘어서 101페이즈라고? 아 진짜 거짓말 하지마. 이번엔 또 무슨 능력이야.

 

마왕의 이마에서 강력한 에너지가 집중되는 것이 느껴진다.

 

“HOEGWI(회귀)마법!”

 

어? 뭔가 혀를 굴려서 말하긴 했지만 회귀?라고 말하지 않았나?

 

“나도 아직 완벽히 해석을 못했지만 시간의 파수꾼에게서 훔쳐낸, 시간의 흐름에서 튕겨져 완전히 소멸하는 힘이다!”

 

어… 잠깐 설명만 들어보자면 저거…

그러나 더 이상 생각을 이어갈 수도 없이 마왕의 머리에서 발사된 힘은 우리 모두를 감싸버렸다.

 

“크하하하하! 이걸로 너희들은… 음? 어째서 용사에게서 같은 힘이?”

 

마왕의 웃음소리를 마지막으로 내 의식은 꺼졌기에 놈의 마지막 말은 듣질 못하였다.

 

 

 

 

짹짹-♩

휘리릭~♪

 

평화로운 오후, 여러새들의 지저귐이 섞여 마치 하나의 음악을 연주하는 듯하다.

 

“으으음… 헉!”

 

익숙한 부유감과 함께 눈을 뜬다. 1110번 동안 느꼈던 감각과 같다. 그렇다는 말은 난 결국 15살 시절로 1111번째 회귀를 한 것인가? 항상 그 시작 지점은 같겠지만 그래도 확인을 위해 주변을 둘러본다.

 

난 푹신한 솜이 들어간 매트리스에 비단으로 만든 듯 매우 부드러운 이불에 감싸여있고, 주변을 둘러보니 대리석으로 만든 듯한 하얀 벽, 다양한 종류의 책들이 책장에 꽂혀 벽면을 장식한다. 앉아서 티타임을 가질만한 테이블엔 4개의 빈자리가 있었는데 정말로 티타임을 가진 것인지 4개의 빈 컵과 과자를 먹은 듯한 흔적이 남아있는 접시 4개가 식기 도구와 함께 있었다.

 

이게 뭐지? 난 왕국의 일반 가정집 아들이었는데? 이런 귀족 같은 집에서 회귀를 한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끼익.

 

“어머, 티타임이후 졸리다고 자시더니 생각보다 일찍 일어나셨네요.”

 

“세이라?”

 

“네~ 당신의 세이라랍니다. 오늘은 마침 페이도 복귀하는 날이에요. 저녁엔 넷이서 다함께 식사하고 그 후엔 오랜만이니 다 같이 씻고 성(性)스러운 밤을 즐겨볼까요?”

 

“에, 아니, 잠깐. 그게 다 무슨 말이야. 네가 왜 여기 있어? 성녀로서의 의무는? 페이가 복귀? 넷이라니 그럼 벨라 스승님도?”

 

내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채 횡성수설했지만, 세이라는 드디어 해냈다는 듯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입을 양손으로 가렸다.

 

“……드디어, 드디어 용사님도 회귀하셨군요.”

 

“설마…”

 

1111번의 회귀동안 눈치를 밥 말아 먹은 것은 아니다. 현재 거주 상황, 세이라의 반응, 그리고 그녀들이 서로 아는듯한 대답, 마왕의 최후의 공격.

난 회귀했다 그녀들과 함께. 그녀들도 회귀했다, 나보다 더 빠른 시간대로.

 

깨닫자마자 난 침대에서 뛰쳐나와 문을 가로막는 세이라를 피해 창문을 향해 뛰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도 못해 내 탈출계획은 무산되어 버렸다.

 

치리링!

 

“끄엑-!”

 

침대에서 얼마 가지도 못하곤 무언가가 내 목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뒤로 넘어졌다. 그래서 찬찬히 목을 만져보니 익숙한 기운과 형태가 만져진다.

 

“이건 주박의 사슬?”

 

“다행이에요. 언젠가 이런 일이 일어날 걸 대비해서 미리 안전장치를 해뒀답니다. 그럼, 나중에 다 같이 보도록 하죠, 안녕히 주무세요 용사님.”

 

세이라는 내게 다가와 신성마법을 사용하여 날 잠들게 했다.

 

 

 

 

“드디어 내가 알던 핀과 재회를 하는군.”

 

“정말이지 다행이에요. 물론 순수하던 용사님과 즐기던 겄도 재밌었지만, 살짝 죄스러운 느낌도 있었으니까요.”

 

“다행이다 핀! 이제서야 너와 함께 세계수의 은총을 받으러 갈 수 있겠어!”

 

다시 침대에서 눈을 뜬 내 앞에는 내 기억보다 몸에 흉터가 없는 스승님, 이젠 수녀복도 입지 않는 세이라, 신체적으론 차이가 없지만 좀 더 웃는 얼굴이 자연스러워진 페이.

다들 나를 빼놓고 아주 즐겁게 대화 중이시다. 아니 이미 상황설명은 전부다 들었지만.

 

“그래서 너희들은 거의 어린애 수준으로 회귀를 했다고?”

 

“음, 그렇다. 그 덕에 부끄러운 흉터 없이 자랄 수 있었지. 실력도 회귀전을 거의 따라잡았다.”

 

“저는 성녀라는 직함을 떼기가 힘들었지만, 다행이도 할아버님의 도움 덕에 광신도들을 미리 제거하고 제 후배라고 할만한 예비 성자, 성녀들을 교육해서 금방 자리를 내려놓을 수가 있었죠.”

 

“솔직히 나만 뭔가 억울해, 혼자서 몇백 년을 기다렸으니. 그래도 회귀 전의 경험을 살려서 답답한 마을을 바깥과 안전하게 교류가 가능하게 해서 변화가 쉽게 되게 했고, 모험가 길드와 용병들 사이에선 최강의 S급 궁수, 별명도 필중의 저격수, 굽어보는 자, 유적 사냥꾼 등등 엄청 유명해졌다고.”

 

“…마왕은?”

 

“분명 있어야할 마왕성이 없어졌다… 아니 이 경우엔 아예 없다가 맞겠군, 마물조차 보이질 않으니.”

 

“저희 셋이서 확인했을 땐 그곳은 그저 황폐한 땅이었어요. 어떠한 악의 기운도 느껴지질 않았죠.”

 

“그래도 그대로 두면 안되니까 세계수의 묘목을 심어놨어. 엘프가 없어서 크게 성장하진 않겠지만 몇백 년만 지나면 그곳은 자연스레 생명이 가득한 숲으로 변할 거야.”

 

“그렇다면 마왕은 없어진 건가… 하아 다행이야.”

 

1110번의 회귀, 그 중에선 늙어 죽은 적도 있으니 적어도 2만년이라는 시간이 되겠지.

마왕을 죽이는데 2만년이라… 드디어 해방이군.

 

“나도 용사라는 직함을 내릴 수 있는 건가.”

 

스르르륵

 

“음? 우왓! 뭘 벗고 있는 거야!”

 

달성했다는 감격을 느끼기도 잠시 옷이 스치는 소리에 앞을 바라보니 세 명의 여인들이 각자 옷을 벗고 있었다.

 

평범한 의복 아래에 숨겨져 있던 것은 속옷이라는 기능은 전무한, 반투명하여 그녀들의 나체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란제리였다.

 

나는 당황하여 손으로 눈을 가리지만 욕망엔 버티지 못하여 손가락의 틈 사이로 엿보며 말했다.

 

“자, 잠깐 뭐라도 걸쳐 입어! 갑자기 무슨 짓이야!”
 

“에잇!”

 

세이라의 손짓에 그 끝에서부터 불티가 튀더니 순식간에 내 옷에 달라붙어 의복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뜨겁진 않다, 그러나 이러한 연속적인 의문의 상황 때문에 머리가 따라가질 못한다.

 

“그럼 기념적인 날이니 오늘은 보다 더 끈적하고 농밀하게 해야겠죠? 체력과 정력은 걱정마세요 회복은 특기랍니다.”

 

“걱정 마라 사용인들에게 말해서 내일 점심까지는 반경 200미터 안에 우리 외에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마음껏 소리 지르도록.”

 

“피임 같은 건 없으니 안심하고 전부 안에 싸라고! 히히히!”

 

“아, 아아아……”

 

나의 1111번의 회귀가 말하고 있다. 그녀들에게선 도망칠 수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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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밌게 읽어주셨다면 감사합니다.

이번엔 우리 얀순이들이 얀붕이를 어째서 사랑하게 됐나를 최대한 압축시켜서 써보았습니다.

얀데레를 좋아하지만 아직은 글로써 녹여내기엔 모르는 게 너무 많네요 좀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사실은 이렇게까지 길어질 소재가 아니었습니다. 마왕 죽이기 → 얀순이들 배신 → 마왕의 회귀빔 → 모두 함께 회귀해서 해피 얀데레 라이프였는데 중간에 사랑의 이유를 넣다보니 길어졌네요. 그래서 연재탭으로 바꿔 상, 하로 구분지을까 했습니다만, 그랬다가 뭔가 후일담이나 19를 써야할 것 같아서 무서워졌길래 단편으로 도망쳤습니다.


AI로 이미지 뽑는거 쉽지만 귀찮네요. 언제나 손수 그려내시는 오가닉 일러분들을 존경합니다.


*수정 - 각 여성캐릭터별 외모 묘사를 하려다가 이미지로 대대체하기로 했는데, 깜빡하고 지우지 않은, 미완성 문장인 "붉은머리를 묶어올렸다."를 삭제했습니다. -03/31.02: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