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세상이 좋아졌다고 한들, 육아는 여전히 지옥이다. 


깨어 있을 때에 울음을 터뜨리면 후다닥 달려가 원인이 뭔지 파악하고 대처해야 하고, 아이가 잠든 밤에도 안심할 수 없다.


최강의 종족인 드래곤 역시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후우.."


허브와 올리브유를 발라 구워낸 닭고기를 양동이에 가득 담은 채, 양손으로 들어올렸다. 


체감상 30kg는 가볍게 넘기는 무게였다만, 부족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될 뿐이었다.


오두막을 나와 비탈길을 조심스레 걸어내려가면, 저 아래에 평평한 초원에서 뛰어노는 아이들이 보인다.


입고 있는 옷은 한 종류, 유치원복이었다만 각자의 머리카락은 무지개를 풀어놓은 것처럼 진한 단일의 원색이었다.


아직 폴리모프가 익숙하지 않은 어린 아이들이라 그런지, 종종 뿔이나 꼬리가 툭 튀어나와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만.


알에서 나온지 10년도 안 된 아이들임을 고려한다면 상당히 훌륭한 폴리모프였다.


가르치는 사람, 아니 용이 용이다보니 그렇겠지만. 


"흥~ 흐흥~"


뛰어노는 아이들 한가운데, 가볍게 콧노래를 부르며 아이들과 어우러져 춤을 추는 것만으로도 대기의 마나가 출렁이게 만드는 여인.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금발에 어울리는 빛이 나는 외모, 그리고 아무런 무늬가 없는 하얀 고급진 원피스가 어우러진 미인이었다.


물론 본체를 아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 생각이 안 든다만.


"얘들아~ 점심 먹고 놀아~"


"와아아~!!"


점심이라는 소리에 눈이 휘둥그레진 아이들이 무리지어 와다다다 달려온다. 


미리 가져다 둔 식판에 닭고기를 산처럼 쌓아올려 아이들에게 하나씩 내어줄 준비를 하면서도, 달려오는 중에 넘어지는 아이들은 없는지 눈으로 꼼꼼히 체크한다.


"감짜합니다!!"


"그래, 그래. 맛있게 먹으렴."


아직 볼살이 포동포동하게 올라와 있어 귀여운 아이들이 산처럼 쌓인 고기를 받아들곤 해맑게 웃는다. 


그 모습에 찌르르, 하고 가슴 깊은 곳에서 감동이 차올라온다.


그래, 이렇게 기뻐해줘야 이 고생을 하는 이유가 있지.


물론 원장님이 직통으로 내어주는 금덩어리들이 착착 쌓이고 있긴 하다만, 여태 벌어둔 것만으로도 공작 직위 하나는 살 수 있다.


동기부여에는 물질적인 근원이 분명히 필요하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내적 동기부여인 법.


그런 면에서 귀여운 아이들이 해맑게 웃는 이 광경이야말로 내게는 충분한 동기부여였다.


"이런, 한창 노래 중간이었거늘."


"잘 들었어요. 로드도 고기 드실래요?"


"으음, 향이 좋군. 조금만 주게."


식판에 고기 두 덩이 정도를 올려 로드에게 건넨 뒤, 나도 내 몫을 챙겨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로드는 살풋 미소를 짓더니 내 옆에 기품있게 앉았다. 


역시 고룡 중의 고룡이라 그런가, 이런 사소한 행동 하나 하나가 기품있-


"늙었다는 생각은 그만하게. 인간 나이로 치면 나와 그대는 동갑 정도일 뿐이니."


"아무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을까요."


"흠. 역시 자네는 여자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네."


본능적으로 딴지를 걸려고 했다만, 이 말이 내 목구멍에서 넘어가는 순간 진노한 로드의 등짝 스매싱을 맞을 것만 같아 도로 삼켰다.


그러나 로드는 그마저도 불만스러운지, 고기를 뜯다 말고 흥, 하고 볼을 부풀렸다.


저러다가 브레스 뿜는 건 아니겠지.


그런 실없는 생각을 하며, 무의식적으로 손수건으로 로드의 뺨에 묻은 기름기를 닦아냈다.


"아, 실수."


".....!"


로드는 볼을 부풀린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푸쉬~ 하고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천천히 저리로 돌려버렸다.


이런, 아이들 입가 닦아주던 게 습관이 되어버려서.


로드로서도 아이들 같은 취급을 받는다는 게 자존심에 꽤나 스크래치가 되었겠지.


사과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등 뒤에서 해맑은 목소리 하나, 무뚝뚝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왔다.


"에헤헤, 선생님~!"


"선생님, 우리 왔어."


"깜짝이야. 잘 갔다 왔어? 고생했어."


방긋방긋, 해맑은 웃음이 귀여운 하얀 머리카락의 소녀, 아일렛. 


그리고 표정은 없지만 하는 행동은 귀여운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바란.


말해 무엇하랴. 이 두 소녀 역시도 드래곤이었다.


그리고 이 드래곤 유치원을 열게 된 가장 큰 이유들이기도 했고.


마왕군과의 전쟁이 끝나긴 했다만, 전쟁은 전 대륙에 큰 흉터를 남겼다.


드래곤 역시 그 예외는 아니었다.


아일렛의 어미 드래곤은 인간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왕에 직접 대항하다가 전사.


그리고 바란의 어미 드래곤은 평생을 꿈꿔왔던 강자와의 전투라며 마왕에게 덤벼들었다가 마찬가지로 전사.


후자는 어떤 의미에서는 자연사라고도 볼 수 있겠지만, 레드 드래곤의 종족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강자를 꺾음으로써 제 강함을 뽐내고 싶어하는 본능이 때로는 생존 본능마저도 집어삼키고 마는 종족이었으니.


그렇지만 문제는 죽고 난 뒤, 언데드 드래곤이 되어버린 그 용들의 목을 잘라낸 게 나라는 사실이었다.


언데드라는 것을 알면서도, 또 내가 목을 베어냄으로써 온전한 죽음을 맞이할 수 있었다는 것을 알면서도 마음이 불편해지곤 했으니.


그런 불편한 마음을 애써 구석으로 몰아낸 뒤, 두 아이에게 밝게 웃어주었다.


"고기는 냉장고에 넣어놓았지?"


"물론이죠! 바란이랑 안 싸우고 마을 잘 다녀왔어요."


"아일렛이 먼저 시비 걸었는데, 내가 무시했어."


나 잘했지, 라는 아우라를 뿜뿜 뿜어내며 달라붙는 바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여전히 무표정이면서도, 눈을 지긋이 감고 손길을 받아들이는 그 모습이 퍽 귀여웠다.


"우우..! 시비 건 거 아니거든요! 한숨 쉴 때 불을 뿜어대는 탓에 제 옷이 타버릴 뻔했다니깐요!"


"그래, 그래. 아일렛도 이리 오렴. 고생했단다."


그렇게 아일렛을 달래주면, 눈치를 슬금슬금 보며 다가오더니 폭, 하고 품에 안기는 것이었다.


그런 두 아이를 끌어안은 채, 머리를 살살 쓰다듬어주고 있자하니-


"흠."


언제 삐졌냐는 듯, 도끼눈을 한 로드와 딱 시선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선생."


"....옙."


"아이들과 친하게 지내는 것은 보기 좋다만-"


"저는 아이들을 그런 눈으로 바라본 적이 없습니다. 저는 교육자니까요."


"...그래, 그렇지."


재빠른 대답에도 불구하고 나를 노려보는 로드의 눈은 여전히 날카로웠다.


그 모습에 속으로 한숨을 푹 내쉴 수밖에 없었다.


이 아이들은 다른 원생들과 달리, 졸업해야 할 나이가 진작에 지나긴 했다.


육아에 고생하는 육아초보 드래곤들을 위해 연 유치원인만큼, 어엿한 드래곤인 이 아이들은 진작에 유치원을 떠났어도 되고, 또 떠났어야 하니깐.


그럼에도 이 아이들을 여전히 유치원에서 데리고 있는 까닭은 순전히 나 때문이었다.


드래곤은 홀로 알을 낳고 홀로 아이를 기른다. 그렇기에 어린 드래곤에게는 어미가 곧 부모고, 가족이며, 유일한 버팀목인 법.


이 아이들이 제가 살던 레어로 돌아갔을 때 마주하게 될 쓸쓸함과 고독함이 떠올라 이 아이들을 졸업시키자는 로드의 말에도 줄곧 반대를 하고 있었다.


물론 로드가 보기에는 못마땅할 수밖에.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로드에게 자비를 구하자, 살짝 얼굴이 달아오른 로드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한참 어린 단명종하고 눈싸움하고 있자니 부끄러웠겠지.


그렇지만 이 몸이 누구인가, 전직 용사 아닌가. 필요한 건 끌어다 쓰고, 이기기 위해선 무엇이라도 한다!


그것이 설령 제 자존심을 깎아내리는 일이라고 해도!


*


그렇지만, 그런 용사도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로드가 도끼눈을 한 채로 노려보고 있던 건 용사가 아니라, 그의 품에 안겨있는 두 용들이었다는 것을.


고작해봐야 20년도 안 산 새끼용들 주제에 용사의 품에 안겨있는 것을 자랑하듯 힐끔힐끔 로드를 보며 용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더 주는 꼴이라니.


게다가 하얀 녀석은 명백한 승자의 웃음을 지으며 용사의 목에 고개를 파묻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드는 연장자로서의 자비를 베풀기로 마음 먹었다.


그야 용사가 저 핏덩이들한테 관심을 가질 리가 없으니까!


아까 비탈길에서 내려오던 용사가 그녀에게 완전히 홀린 채로, 멍하니 쳐다보지 않았던가.


그러니 이 싸움은 시작하기도 전에 이겨있다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용사 입장에서는 제가요? 홀렸다고요? 라고 반문할 것이다.


본체를 본 사람 입장에서는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 거대하고 위압적인 본체만 떠오를 뿐이었으니.


차라리 귀여운 해츨링 시절에서부터 봐온 아이들 쪽이 정감 가지 않을까? 아니, 그렇다고 해도 자식처럼 키워온 아이들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것도 좀.


그러니 밸런스 게임에서 머리를 싸매게 만들 정도로 황금 밸런스인 라이벌 구도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


점심시간이 끝나고, 로드의 마법강의가 시작되고 나면 두 아이와 함께 오두막으로 돌아온다.


겉으로 보기에는 초라한 오두막이지만, 안에는 공간 확장 마법이 걸려있는 데다가 전생 - 그러니까 현대의 문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시원해~!"


방에 들어온 아일렛은 빙글- 하고 한 바퀴 돌더니 침대에 폭 드러누웠다. 푹신한 매트리스 덕에 몸이 잠깐 매트리스 사이로 사라졌다가 드러났다.


바란도 그런 아일렛을 한심하게 바라봤지만, 폭신한 침대는 어쩔 수 없는지 착착 걸어와 침대에 조심스레 드러누웠다.


그런 모습에 픽, 웃음이 터져나왔다.


드래곤이라고 해도 이럴 때만 보면은 영락없는 그 나이대의 아이들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아이들을 보고 있다보면 유치원 선생으로 취직하기를 참 잘했다 싶다.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어릴 때에는 그 누구든지 따뜻한 어른의 손길을 필요로 하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냉장고에서 반찬들을 꺼내 보온 봉투에 집어넣고 나니, 이쪽을 바라보는 아이들과 눈이 딱 마주치고 말았다.


침대에 앉아 여전히 무표정으로 바라보는 바란은 그렇다 쳐도, 아일렛은 침대에 드러누운 채 고개만을 들어올린 탓에 공포영화의 한 장면 같은 섬뜩한 꼴이었다.


"....선생님 갔다 올게?"


"흐응~"


"다녀오세요, 선생님."


의미심장한 콧소리만을 내는 아일렛과 무표정하지만 무언의 압박을 가하는 바란을 뒤로 둔 채, 도망치듯이 오두막을 빠져나왔다.


나는 유치원 선생님이니까, 모든 아이를 골고루 챙기는 것도 내 일이다!


그런 생각을 품은 채로.


*


"바란."


"...왜."


"그 여자, 죽일까?"


아일렛은 여전히 싱글벙글 미소를 지은 채였지만, 입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내 독은 약해서 안 되지만, 네 불꽃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잖아."


"싫어."


바란은 슬쩍 제 옆에 누운 여자를 가소롭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나는 선생님한테 미움받기 싫어."


"누군 아니래?"


"그러면 너가 죽여."


바란은 그리 중얼거리며 두 다리를 끌어안은 채,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그녀는 평범하고 전형적인 레드 드래곤이었다.


그 말인 즉슨, 제 강함과 혈기를 이기지 못하는 전투에 미친 드래곤이라는 것이다.


제 어미, 기억이 나지도 않는 어미가 죽은 것도 레드 드래곤이라서 그러했다. 그렇지만 어떤 유감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레드 드래곤들은 다 그렇게 죽으니까. 


그러니 바란은 용사 - 그리고 선생님이 제게 죄책감을 가지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싸움이라는 것은 본래 패배한 쪽이 죽는 법. 제 어미가 죽은 것도 패배했기에, 죽을 정도로 약했기 때문.


이미 죽고 난 뒤의 시체를 마왕군이 언데드로 썼든, 그 언데드 드래곤의 목을 용사가 쳤든.


그건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지만.


선생님의 품은 양보할 수 없다.


자비로운 강자, 스스로의 강함을 나누어주는 강자. 싸움의 승패에 연연하지 않는 절대적인 보호자.


지금 당장이라도 로드를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을 꺾고 그 목숨을 앗아갈 수도 있으면서, 그저 자애와 희생으로 이들을 돌보는 강자.


자신이 평생을 수련하더라도 따라잡을 수 없는 승리자.


그 사실을 떠올릴 때마다 미약한 패배감과 함께, 형언할 수 없는 질척한 감정이 그녀를 휘감곤 한다.


그러면 그녀는 깜짝 놀라면서도 은연중에 그런 생각을 품곤 하는 것이었다.


레드 드래곤이 그토록 싸움을 걸어대는 이유는 언젠가 자신을 패배시켜줄 이를 찾기 위해서가 아닐까. 


자신을 발 밑에 둔 채로 업신여기며, 생명을 포함한 모든 것을 그 남자의 손에 넘기기 위해 살아가는 족속이 아닐까, 하고.


그러니 '그 여자'가 아무리 거슬린다고 해도, 지금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런 위험을 감수할 정도로 가치 있는 일이 아니니까.


"흐응~"


아일렛은 못내 아쉽다는 듯, 다시금 콧소리를 내며 침대 위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녔다.


화이트 드래곤은 드래곤 중에서 육각형, 즉 만능형의 드래곤이긴 하다만, 무엇 하나 특출난 점이 없다고도 할 수 있는 종족이었다.


그러니 그 여자가 아무리 거슬린다고 해도 직접 죽일 수 있는 수단이 없는 이상 방치하는 수밖에.


아일렛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선생님은 바보. 우리 마음도 몰라주고.


아일렛은 바란과 달리 선생님을 그리 믿지는 않았다.


인간이란 족속은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종족이다. 어미도 약속을 지키기 위해 마왕을 상대했지만, 인간들은 어미를 도와 마왕을 상대하기는 커녕 제 금은보화를 챙겨 도망치기 바빴다.


그럼에도 묵묵히 마왕군을 상대하던 어미는 쓰러졌고, 끌려가 시체를 분해당한 채, 흉측한 꼴의 언데드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그런 어미의 목을 베어준 용사에게는 늘 감사하고 있었다. 그가 베풀고 있는 호의에 대해서, 또 그가 진심으로 호의를 베풀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도.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그런 남자에게 사랑에 빠지는 것 역시 당연한 일이었다.


종족이 다르더라도, 이렇게 인간으로 폴리모프한 채 평생을 살아가면 그것이 인간과 다를 바가 무엇인가.


아이를 품고, 낳고, 기르고, 그렇게 평생 행복한 가정을 이룬 채 살아가는 것. 배신당하지 않는 사랑을 받는 것.


그것이 그녀가 바라는 전부였기에.


그렇기에 그를 탐내는 시커먼 용가리가 거슬릴 수밖에 없는 노릇이었다.


*


똑똑-


"칼렌디아. 안에 있니?"


정적.


그럼에도 인내심을 가지고 다시 나무 문을 두들겼다.


똑똑-


그제서야 안에서 인기척이 들려온다. 이곳 저곳에서 우당탕탕, 와장창, 짐을 몰아넣는 듯한 소리.


한창 소란이 이어진 뒤에야 칼렌디아가 나무 문 틈새로 얼굴을 빼꼼 내밀었다.


이제는 놀라지 않겠지, 생각하면서도 그 얼굴에 흠칫 놀라고 말았다.


"..뭐야, 무슨 일이야."


"아, 그, 간식, 간식 말고 반찬 좀 가져왔어."


"...들어와."


방문을 열고 들어가자 달큰한 땀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앞서 걸어가는 칼렌디아의 목덜미가 땀으로 젖은 것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말을 건넸다.


"운동 중이었나 보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


"웃..!"


칼렌디아는 갑자기 빨개진 얼굴로 휙 나를 돌아봤다가, 씩씩대며 다시 고개를 돌려 소파로 척척 걸어갔다.


그 모습에 무언가 잘못한 게 있나 생각이 들어버리며, 또 다시 주눅들어 버리고 만다.


블랙 드레곤 칼렌디아.


그녀는 내 옛 동료의 자식이니까.


용사파티의 여검사, 칼. 용사 파티의 유일한 사망자이자, 전장을 함께 누비던 검사. 


두려움을 모르며, 정의를 위해 검을 휘두르던 드래곤.


"용사. 나 사실 자식 있다?"


"...갑자기?"


"쿡쿡, 뭘 그리 놀라. 드래곤들은 원래 혼자서도 자식 만들어."


"해츨링 혼자 내버려두고 전투에 나와도 돼?"


"당연하지."


칼은 우수에 찬 눈빛으로, 마지막 전투 직전에 마왕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마왕을 없애야 내 자식이 평화로운 세상에서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살 거 아니야."


그리 말한 그녀는 마지막 전투에서 제 본모습을 꺼내 대규모 마법을 제 몸으로 막아내곤 홀로 죽어버렸다.


전쟁이 종식되고, 어느 정도 평화가 찾아온 뒤 찾아간 칼의 레어에는 시커먼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는 블랙 드래곤 하나가 덩그러니 앉아있을 뿐이었다.


칼렌디아, 아일렛, 그리고 바란. 이 셋으로 시작한 유치원이 이렇게 커졌음에도 여전히 칼렌디아에게는 제대로 말도 못하는 처지였다.


볼 때마다 칼이 떠올라서, 마법에 누더기가 된 그녀의 시체가 떠올라서, 그리고 레어에 홀로 남아있던 칼렌디아가 가슴을 괴롭혀서.


"하아.. 선생님."


"어, 어?"


"또 이상한 생각 중이지."


스륵-


뺨을 감싸온다. 나보다 어린 드래곤이 내 뺨을 감싸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칼을 똑닮은 눈빛으로, 얼굴로.


"말했잖아. 드래곤들은 가족 간의 유대가 별로 없어. 나는 칼, 내 엄마가 어찌 죽었는지 관심이 없고, 슬프지도 않아."


그러니 당신도 슬퍼하는 일 좀 그만해. 나도 우울해지니까.


그 말에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애초에 오두막이 아니라 자그마한 동굴에 홀로 사는 것도 내가 이런 반응을 보이는 탓이 아니었는가.


"...미안. 반찬 좀 가져왔어."


"냉장고에 넣어놔. 나는 씻고 나올테니까."


"그래!"


애써 힘을 내, 쾌활한 목소리로 대답하자 칼렌디아가 픽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갑자기."


그래도 그게 훨씬 보기 좋네. 


칼렌디아는 그리 중얼거리며 욕실로 걸어들어갔다.


*


그리고 욕실, 홀로 물줄기를 맞던 칼렌디아는 멍하니 거울을 바라봤다.


엄마를 닮은 얼굴. 아니, 똑 떼어다가 붙인 것만 같은 얼굴.


아직 어린 드래곤들은 제 외형을 자유자재로 바꿀 수 있는 고도의 폴리모프를 쓸 줄 모른다. 


그렇기에 그녀의 외모는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선천적으로 그저 엄마를 닮았을 뿐인 외모. 


자신을 찾아온 용사 - 선생님이 가끔 제 얼굴을 볼 때마다 깜짝 놀라는 게 불편하기만 하던 때도 있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얼굴이 좋았다.


그야 나에게 관심을 주니까.


옆에서 늘 혀를 낼름대는 하얀 도마뱀과 붉은 도마뱀을 오두막에 둔 채, 나를 찾아오니까.


아일렛, 바란과의 사이가 처음부터 안 좋은 건 아니었다. 오히려 동질감을 느끼고 서로 어울려 다녔으니까.


그런 셋, 정확히 말하자면 둘과 하나의 사이가 갈라진 건 선생님 때문이었다.


다른 둘을 돌볼 때와는 달리 칼렌디아를 볼 때면은 늘 괴로우면서 슬픈 표정이었으니까.


칼렌디아에 대한 부채의식, 죄책감. 칼렌디아는 그런 감정을 적극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고, 나머지 둘은 그런 칼렌디아를 좋게 보지 않았다.


그저 그 뿐이었다. 둘과 사이가 나빠지는 데에는 그런 이유면 충분했다.


이 감정을 애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글쎄, 선생님이 자신에 대해 가지는 감정이 애정이라고 한다면, 자신의 감정은 그와는 좀 다른 감정이리라.


독점욕. 애욕.


자신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선생님을 그 죄책감에 푹 절여서, 나만을 바라보게 해주고 싶다.


홀로 레어에 남겨졌던 자신처럼, 그저 홀로 자신의 레어에 가둔 채로 나만을 바라보고 나만을 기다리게 만들고 싶다.


할짝-


칼렌디아는 무의식적으로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그런 미래가 너무나 기대돼서, 군침이 솟을 정도로 기대가 되어서.


엄마의 죽음에 대해 죄책감을 느끼는 선생님을 볼 때마다, 그녀는 죽은 엄마에게 감사함을 느꼈다.


그녀를 닮은 얼굴로 낳아준 덕분에, 이 남자를 붙잡을 수 있었으니까. 


블랙 드래곤 칼의 자식, 칼렌디아인 덕분에 선생님이 자신을 두 번이고 세 번이고 뒤돌아보도록 만들었으니까.


그리고, 솔직히 말하자면.


자신을 그저 어린 아이라고 보는 그 남자의 콧대를 깔아 뭉개고 싶다는 생각도 조금 있다고 할까.


킥킥-


칼렌디아는 따뜻한 물을 맞으며, 그리 홀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