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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편



동대륙, 또는 동방.

범위가 명확하진 않지만, 어찌되었든 동쪽에 있는, 별개의 문화권이 지배적인 땅.

동방에는 요괴가 있다.

본질적으로 몬스터와 닮아 있지만, 다르게 진화한.

어찌보면 호랑이와 고양이같은(강함의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관계에서, 몬스터는 서쪽과 중부, 요괴는 동방의 존재.

인격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선할 수도, 악할 수도.

정해진 것은 없기에 수많은 설화가 전해져내려오며, 지금도 적지 않은 수의 사건이 일어난다.

그 탓에 굳어진 것은, 종류와 특성을 불문하고 사람들은 요괴를 가까이하지 않는다는 점.

그 탓에, 이 집의 주인은 이렇게 마을에서 떨어진 곳에 집을 지었다.

'평범한 인간보다 강하다면, 지배하면 되는 것을.'

그러나 그녀는 숨는 것을 택했다.

"와놓고 문 앞에 서서 뭐 하는 거야? 들어와."

내 앞에 나타난 것의 모습은 열넷 남짓한 소녀의 모습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아홉 꼬리의 여우이며 인근의 요괴들을 억누르는 힘 그 자체이다.

내게는 조금만 집중하면 깨질 둔갑이나, 그런 짓을 하러 온 것이 아니다.

"실례하지."

"...와, 내가 지금 인사라는 걸 들은 건가? 그 빙룡의 마도사한테?"

빙룡의 마도사.

마지막으로 그 별명을 언급한 녀석을 3시간 동안 얼음 동상으로 만들어버린 지도 4년이 넘게 지났다.

"저번에 얼려버린 귀가 아직 덜 나았나? 이번엔 조금 더 정교하게, 다시 얼려주지."

"아니, 됐거든. 얜 졸업하고도 바뀐 게 없네."

"흥."

대문 안으로 들어서자 낮고 넓은 테이블(평상이라고 불리는.)이 놓인 마당이 시야를 채웠다.

하인을 거느리는 집만이 가지는 몇 개의 방은 보이지 않으며, 그런 건물이 있어야 할 자리는 어색하게 비어있다.

넓이는 어색할지언정, 마치 부부가 단둘이 사는 집과 같다.

안쪽은 깔끔하면서도, 곳곳에 있는 장식은 하나하나가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나무로 지어진 집을 하나 구해둘까.

"예전부터 제 굴 하나는 잘 파는 여우로군."

"또 그 여우 굴 타령이야? 이건 집이라고 부르는 거야. 굴을 파는 동물은 토끼고."

"그렇다면 내 앞에 있는 건 토끼인가?"

"뭔 헛소리를-"

"뭐가 그리 무서워서, 방 하나를 통째로 결계로 봉인했는지 모르겠는데. 겁쟁이 토끼라면 말이 되지."

"아... 그러고보니 너한테는 보였겠구나."

이 집에, 하인의 방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존재했다.

무엇을 위해 그리 심혈을 기울였는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땅 밑에 있었으니까.

"잠시 위치를 바꿔치기해서, 흙만 치워놓았어. 때가 되면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아야지."

"건물을 매장해버렸다는 걸 별 것 아닌 것 처럼 말하는데, 대체 뭘 하고 싶은 거지?"

"으음... 숙성?"

"뭐라는 거냐."

_____

그러니까, 내가 이곳으로 돌아왔을 때였어.

알지? 내가 원래 무녀인 척 했던 거.

당연히 종적을 감추고 탈주했던 몸이니, 모습부터 싹 바꾸고 돌아왔지.

그런데, 알아보더라고.

응? 아니, 딱 한명만.

무녀로 지낼 때 만난, 그때 모습 기준으로는 대충 두 살 어린 애였어.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았지만, 뭐...

애초에 나 좋아한다는 놈이 한둘이었어야지.

거기다 어린애들은 원래 이랬다 저랬다 하고.

응? 본론으로 들어가라고?

에잇, 여기부터가 재밌는 건데.

알겠어, 빨리 할게. 그러니 제발 귀만은... 으아악!?

나, 걔한테 반했어.

처음으로 사랑한다는 걸 알았어.

그 애, 구미호라는 존재가 본질적으로 갖추는 유혹의 특성이 안 통했어.

카닐, 걔 기억하지?

그런 쪽이라 그래야 되나, 영혼의 벽이 두꺼웠지.

그런 애가, 나를 좋아해줬다고.

순수하게 내 모습을, 물론 둔갑한 모습이었지만...

그래도, 그 애가 날 사랑해줬어.

...행복했지.

그런 시간이, 언젠가 끝난다는 걸.

끝나고 난 뒤에도, 나는 끝없이 살아갈 거라는 걸 알기 전까지는.

나는 깨달아 버린 거야.

그는 나와 다르다는 걸.

그것 때문에, 조금 멀리했어.

적게 만나고, 짧게 만났지.

거기서 문제가 생겼어.

어떤 빌어먹을 창녀가, 그에게 접근했어.

도사, 라고 했던가.

강한 혼을 가졌다는 걸 알고는 접근해서-

날 배신하라고 부추겼어.

감히, 내가 무엇이라 생각한 건지.

물론 그런 상황도 오래 안 갔어.

더러운 창녀라고 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거든, 그를 덮치려 들었으니.

그는 저항했고, 혼에 손상을 입었어.

그년이 바란 건 그의 혼이 가진 힘이었으니까...

너도 봐서 알잖아, 영혼을 어떤 식으로든 공격당하면 돌아올 방법은 없어.

순환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그대로 영멸하는 거야.

당연히 인정 못했지.

그래서, 음...

내 기운을 흘려넣었어.

많이는 아니고, 인간에서 벗어날 때 까지?

강한 기는 영혼과 몸에 동시에 작용하니까.

그래서 지금 땅 속에 있어.

안정될 때 까지 두지 않으면 기운은 흩어지고, 장수할 뿐인 인간이 되어버리니까.

하지만 충분히 안정화시키면.

영원한 나의 권속이 되는 거야.

_____

"그래서, 왜 온 건데?"

"라피스가 정신 조작 계열의 마법에 당했다. 애초에 '홀린다'라는 용어까지 있는 너희 종족이라면 뭔가 알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래? 그거 꽤 어려울텐데. 어떻게 당했는데?"

"분명히 여자와 만나고 왔는데, 본인은 그럴 리가 없다더군. 재워서 살펴보니, 마법의 흔적이 꽤나 강했다."

"마력의 주인을 추적하는 건?"

"실패다. 외부의 힘으로 착란을 일으켜, 라피스 스스로 기억을 지우게 했어."

"으음... 어려운데, 난 모르는 쪽이야. 차라리 아예 도술이라면 되려나."

"도술? 본질적으로 마법과 같다고 알고 있는데."

"소드 스피어도 창이고, 마상시함용 랜스도 창이야. 본질 타령만 해서는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고."

"그런가."

"그리고, 그런 거라면 그냥 네가 쭉 붙어있어 주는 게 낫지 않아?"

"그러면 라피스가 부담스러워 하지 않나."

"부담? 부담?? 천하의 네가 그런 걸 신경쓴다고? 웃기지 마, 뺏기면 끝나는 거야."

"...!"

"슬슬 가봐, 왠지... 곧 내가 기다리던 사람이 돌아올 것 같거든."

휙휙.

단순히 손을 휘저은 것 만으로, 방문자는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녀가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약간의 소음과 함께 방금까지는 없던 건물이 솟아났다.

"좋군. 사랑이란."

스토킹 및 감금과 인체의 개조.

그 정도는 사랑을 위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가만, 라피스에게 드래곤의 피를 섞는다면... 정신 공격도 안 통하는 건가?"

영혼의 손상과 같은 특이한 일이 없다면, 본디 두 종족을 섞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것의 결과물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카닐, 그 녀석에게 가볼까."

반은 인간, 반은 정령.

기원종의 후손이 아닌, 기원종의 친우와 섞인 키메라.

그녀는 그런 괴물에게 향했다.

"그런데 어디 있다고 했지?"

당장 어디 있는지는 모르지만.

_____

"카닐, 누군가 와요."

"으읍, 으븝..."

"아, 미안해요. 묶어놨었지 참."

앞날을 내다보는 성녀는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야 정한 방향성이지만, 이건 빙룡의 피를 이어받은 마법사 '오즈'의 여행 이야기가 될 예정임. 대충 3화 정도 더 구상해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