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께서...용서치 않으실겁니다."


"그러니까. 나도 애석하게 생각하긴 하는데.

 이거 다 사이비라니까?"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보고 느낀 이 경험만은 진실입니다.

 신께선...용서치 않으실겁니다."


"하아...진짜. 꽉 막혀가지곤. 그래서"


"네?"


"그래서. 어쩔건데.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거냐고"


"당신이란 사람은! 그럼 이 참상이 가당키나 합니까?!"


남자가 자신의 앞에 질퍽거리던 검붉은 웅덩이에 발을 담근다.

그 주변으로 시야를 환기시킨다.


거대한 예배당

교황의 권좌

신도들의 기도석

황금 촛대

스테인드글라스

모든게 황금으로 빛나는 장식들과

그에 대비되는 나무로 만들어진 십자가.


검붉은 피웅덩이

입구에 널부러진 경비병의 시체

권좌에 가슴께가 뚫려 고정된 교황

황금촛대에 얼굴이 관통된 추기경

신도석에 스러진 광신도들

얼굴 부분이 깨진 스테인드글라스와 신의 모습


마치, 젊어지기 위해 피로 목욕한 마녀의 자태를 뽐내는 용사.


"그러니까. 신이 날 용서하지 않으면 어쩔건데.

마왕이라고 참칭하던 군벌들 족친 수급만 해도 여기 교단 수납장에 한 가득이야.


사이비 새끼들이 힘좀 실어주니까 오만하게 기어오른거, 손 봐준지 10분 지났어.


그래서? 내가 뭘 잘못했다고?

지금까지 죽인 버러지들을 살려뒀으면, 세상이 좀 살기 나아져?"


"어떤 생명이든 고귀하고..."


"너. 군벌들 죽일땐 그런 말 안했잖아?."


"..."


"왜. 사람만 생명이야?

 걔들은 사람이냐? 목숨이 값어치가 다른가?


머리에 뿔좀 있고

등에 날개가 있고

손톱이 좀 길고

네발로 땅을 다니면 다른가?


알에서 태어나면 하찮나?

피부색이 붉으면 악하나?

마법을 좀 더 잘쓰면 간사하나?


아니잖아.

같다고.

같아.

목이 떨어지면. 죽는건 같아"


"사람이 어떻게 이리 상스러울수가..."


"말 조심해. 아무리 나라도. 동료에게 쓰레기 취급 받는건 견디기...하아...힘드네."


"신께서...용서치 않을.."


"제에에에발 그만하라고!

 그놈의 신이고 나발이고 없단말야!


여기 이 버러지 새끼들 안보여?

널 속이고, 성자라고 치켜 세워서, 단물만 쪽쪽 빨아먹다가, 

황금에 눈이 멀어 네 배까지 가르려던 버러지들이 안보이냐고.


알아?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널 구해준 생명의 은인이란 말야.

신이 있다면. 애초에 이렇게 싸우지도 않았어."


"설령 신이 없다 해도 상관 없습니다.

 신이 없더라도. 신께서 해주신 이 말씀만은 남아있습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

 이건... 이 살육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남자는 머나먼 동방의 부처와도 같은 자세다.

보리수 아래서 깨달음을 얻은 선각자.


자신이 믿는 신이 존재하던

신이 존재하지 않던 

이제는 남자에게 진실이 중요하지 않다.


항상 들고다니던 성서가 사이비 교주의 소설책이라 해도

신의 말씀이라던 십계명도

계율과 기도문들이 모두 거짓말이라 그래도

이제는 남자에게 중요하지 않다.


모든게 사기꾼 사이비 교주의 장황한 거짓말이라 할지라도

남자에게 있어서 신의 말씀이자 성경이다.


믿는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고

따르고 행한다는 자세가 중요한 것이다.


남자는, 신도 말씀도 신도도 없는 사이비 종교의 성자다.

그 자체로, 성자로써 치켜세워질 수 있는 선각자다.


뻘밭에서 만들어진 진주다.

오물과 진흙더미 속에서도 홀로 빛나는 보석이다.


"사랑? 사아랑? 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하하하하하하 길거리 음유시인들 재미없는 노랫말도 아니고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뭐가 그리 웃깁니까"


"그럼 이게 안웃겨?

사랑따위 해본적도, 할 생각도 없는 네가 사랑?

수도원에서 평생을 살아와서, 여자라곤 내가 처음 만나본 사람이 사랑?


 누군가를 사무치게 생각해보긴 했어?

 가슴이 뛰어보긴 했어?

 옆에 서있기만 해도 숨이 가빠져보긴 했어?

 하루 종이 머릿속에 그사람만 생각나서 다른건 신경써보지도 못하긴 해봤어?”


“그런것만이 사랑이 아닙니…”


“그런게 사랑이야!

 그게 사랑이 아니면 도대체 뭐가 사랑인데!!”


“...”


“내 말 잘들어. 사이비 성자님.

 내가 아직 숨을 쉬는거 보니 당신네 잘난 신은 아무래도 없나봐

 평생 널 보호해주던 교단도 내가 깡그리 몰살시킨데다가,

 황제는 이제 종교라면 치를 떨테고

 마침 신의 사자라고 치켜세워지던 성자가 떡하니 살아있네?


 수도원에 토지를 빼앗긴 농노들도 많고.

 헌금을 뜯긴 농민부터 귀족들도 많고

 십자군에 차출된 병사의 가족들도 많고

 그 십자군에 죽어나간 사람도 많고

 십자군에게 돈과 먹을것과 몸마저 빼았긴 사람들도 많아.


 근데. 모든게 거짓말인게 이제서야 들통이 났잖아?

 복수는 용사랍시고 내가 다 해버렸는데

 꼴랑 이정도 피를 흘린 것 가지고

 그들이 용납할 수 있을것같아?”


“저는… 한 점 부끄럼 없이..”


“오.. 아냐아냐. 네가 뭘 잘못해서 그 사람들이 널 미워한단게 아냐.

 나쁜건 여기 비료더미들이지.

 

하지만, 그사람들이 널 가만히 둘지는 잘 모르겠어.

하물며, 계속 눈에 거슬리던 바늘같은 성자를 뽑아낼 절호의 기회인데

황제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할지도 잘 모르겠어”


“...”


“한 가지. 방법이 있어”


“저보고, 황제에게 배라도 뒤집어 까라는겁니까?”


“그럴 필요도 없고. 시키고 싶지도 않네

 말만 해. 황제따위 얼마든지 축출해내고 새로 세워줄테니까.


 아니면, 네가 할래?”


“관심 없습니다.”


“까칠하긴. 뭐, 네가 황제가 된다 해도 누가 널 지켜주기나 할까


어때? “


“무엇을…말씀이십니까?”


“용사의 배우자.

 네 목숨도 살릴 수 있고

 너를 헤치려는 모든 위협으로부터 지켜줄 수도 있어


 어때?”


“분명히, 거절드렸습니다. 저번에도”


“하아.. 그 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다르잖아.

 내가 지금 물어보니까 권유하는걸로 보여?

 이게 프러포즈같아?”


“...”


“자, 이곳은 저번주까지만 해도 신혼부부가 결혼식을 올리던 교회 예배당이야!

 마침 주례를 서줄 교황도 이곳에 있고

 신랑과 신부도 있고

 하객들도 모두 앉아서 우릴 기다리고 있어

 새빨간 버진로드도 있고

 

 꽃다발은…뭐… 있는 셈 치자”


“미쳤어…당신”


“그래, 한 명 살리자고 천 명쯤 베어넘겼는데 안미치고 배겨?

 그걸 묵묵히 옆에서 지켜본 넌 정신이 똑바르고?”


“전, 신 앞에서 순정을 맹세한…”


“그러니까. 그거 방금 내가 다 부쉈다니까?”


여자는 칼로 바닥에 떨어진 성경을 찍는다.

들어올리자 새빨간 피가 뚝뚝 떨어진다.

그대로 교황을 향해 책을 던진다.


교황이 성자를 보호한답시고 세운 수도원과 

성자를 구속하기 위해 만들어낸 계율.

성자를 비롯한 모든 수도자는 혼인을 할 수 없다.


없었다.


“...”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여기서 우린 팔짱을 끼고 버진로드를 걸어나갈거고

 우리의 결혼을 축하하는 팡파레가 울려퍼질거고

 예배당 입구에서 맹세의 입맞춤을 나눌거야.


 결과는 달라지지 않아.

 

 당신의 대답에 따라서

 내 기분만 달라질 뿐이야”


시골 소녀

성검을 뽑은 용사

농노의 자식

악의 심판자

황제의 근위견

세상에서 가장 날카로운 칼날

신벌자

성자의 보호자

구원자

파괴자

모두가 그렇게 가지고 싶던 칭호는 아니었다.


새빨간 버진로드를 남자와 여자가 걸어나간다.

깨진 스테인드글라스 사이로 햇빛이 행진하는 신혼부부를 비춘다.

걸음과 걸음마다 화염이 일렁인다.

화사한 신부의 부케 대신, 예배당 전체에 불꽃이 피어난다.


여자는 콧노래로 결혼행진곡을 흥얼거린다.

사랑은, 여자의 머리를 꽃밭으로 만든다.


남자는 스러진 경비병을 바라보고

여자는 경비병 너머 광활한 미래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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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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