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왔어요. 이번달에도 1,150원”


“뭐야. 그 애매한 금액은”


“몰라요. 이제 들어주는 사람. 진짜 누나뿐인가봐요”


“과자 사먹어. 딱이네”


“덕분에 잘 먹을게요”


“뭘. 이정도 가지고.”


음악저작권협회에서 남자에게 입금해준 돈은 1,150원. 

한 달동안 멜론부터 소리바다까지 음원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발생한 수익이다.


실제 음원 수익은 저 금액에 수 배가 넘지만.

동료들과 수익을 나눠야하는데다가

남자의 이전 소속사가 ‘관리’라는 명목으로 50%를 먼저 떼간다.


그래봤자 만원 한 장도 안되지만…


“누나…나.. 모레 월급날인데…”


“왜? 돈 모자라? 뭐 필요하니?”


“아냐! 그런게 아니라. 

 밥… 내가 살게. 시간 돼?”


아이돌. 그것도 최애랑 대화를 나누는 법은 무엇일까?


노래를 듣고 콘서트를 가는 방법도 있다.

SNS 든 메신저든 온라인으로 메세지를 보내기도 한다.

요즘엔 시대가 좋아져서, 버블이라고 돈만 내면 연예인이 문자를 보내준다.


여자는 그런 서비스를 잘 이용하지 않는다.

SNS도 이젠 하지 않고.

버블같은 서비스를 구독 하지도 않는다.


가장 좋아하는 남자 아이돌과 

자연스럽게 전화로 통화를 하고

사는 이야기를 나누고

문자를 주고 받는다.


그리고, 다음 번 식사약속이 잡힌다.



“이것밖에 못해? 언제까지 학생처럼 있을거야!”


직장 상사가 여자에게 서류더미를 집어던진다.


폭력의 그 아슬아슬한 지점까지 여자를 몰아세운다.

던지는 서류도 절대 여자를 향하지 않는다.

욕설을 내뱉지도 않는다.


“죄송합니다.”


여자는 떨어진 서류를 줍는다.


돈을 번다는건 생각보다 쉽지 않다.

손님에게 돈을 받는 자영업자도

사장에게 돈을 받는 근로자도

매 순간이 어렵고 힘들긴 매한가지다.


여자가 보기엔 별것도 아닌 사안들.

문서를 꾸미거나 자잘한 오탈자들에 상사는 핏대를 새운다.


분명 학교에선 서식보단 내용에 충실하라고 배웠다. 

문서작업프로그램인 워드와 한글의 차이를 예로 들면서, 

한국의 사무작업은 너무 외향적인 면에 치중한다고 교수가 말했다.


교육과 현실은 사뭇…다르다.


어쨌든 틀린건 틀린 것이고, 여자는 고개를 들지 못한다.


서류를 챙기고 자리로 돌아와

표의 크기를 고치고, 오탈자를 잡아내고

테두리의 선 두께를 바꾼다.


혼나고 난 뒤 사무실의 적막감이 싫다.

자신이 문서를 고치느라 딸깍거리는 마우스의 소리도

저 멀리 다른사람에게까지 들리는 것 같다. 


마음같아선 커피라도 한 잔 뽑으며 기분을 추스리고싶은데, 그러지도 못한다.


“내일 오전에 볼거니까. 오늘 책상위에 올려두고 가”


상사는 가방과 외투를 챙기며 에둘러 야근을 명한다.


“...예”


여자는 커피든, 알콜이든, 평생을 피워보지 않은 니코틴이든 뭐든지간에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터덜터덜

야심한 시내 밤거리를 헤쳐나간다.


사무단지는 대부분 불이 꺼져있고

여자가 들어가지 못한 대기업 소유의 빌딩에서만

불쌍한 영혼들이 아직도 형광등을 반짝이고 있다.


누군가는 퇴근을 하고서 왁자지껄 술을 마신다.

여자도 기름기 있는 음식에 15도쯤 하는 알콜이 당긴다.

그래도, 혼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서 대작을 해볼 깡이 없다.


터덜터덜, 집으로 향하는 길을 걸어나간다.

사무단지를 조금만 벗어나도 상권이 펼쳐진다.

많은 술집들이 30~40대 근로자 취향에 맞춘 인테리어와 메뉴를 갖추고 장사를 하지만

알음알음 젊은 층을 겨냥한 술집들도 있다.


네온사인 같은 형형색색의 조명이 반짝이고

음악을 크게 틀어놓고

소주가 아니라 위스키와 하이볼과 에일을 판매한다.

세상에… 나쵸 더미에 치즈나 녹여주곤 2만원에 가까운 돈을 받는다니

요즘 애들은 돈도 많다.


한 블럭 더 지나친다.

오래된 세계맥주 전문점

여자의 학창시절엔 이런 술집에 자주왔다.


매장에 따라서 외부 안주를 반입시킬 수 있고

호주머니가 빈궁한 사람은 하이트나 카스를 마시고

호주머니가 평범한 사람은 카프리나 호가든을 마시고

호주머니가 빵빵한 사람은 용감하게 기네스를 마신다.


하이네켄을 마시는 치들은 이해할지라도

여자는 버드와이저를 마시는 사람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이름값에 비해 맛은 평범하고. 가격은 비싸기만 하다.


그나마 영국은 위스키라도 잘 만들지

미국놈들은 위스키도, 맥주도 영 젬병이다.


가끔은 KGB니 머드쉐이크같은 특이한 술들에 도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결국엔 맥주로 돌아온다.


세계맥주 전문점의 인기도, 간단한 감자튀김과 생맥주 한 잔을 판매하는

봉구비어에 밀렸다.

그 봉구비어도 봉쥬니 봉식이니 봉창이니 수많은 배다른 형제들과 경쟁을 하다가

요즘엔 하이볼을 판매하는 술집들에 밀려난지 오래다.


유행이 빠르게 변한건지

여자가 나이를 먹어가는건지.


결국엔 참지 못하고 여자 혼자서 세계맥주전문점에 입성한다.

열 개 쯤 되보이는 테이블에 나이 먹은 아저씨 한 무리만 시끌시끌 술을 마신다.

주인장은 핸드폰이나 보느라 바쁘다.


자리에 가방만 먼저 내려놓는다.

줄지어진 유리냉장고 앞에서 좌측부터 살펴본다.


이제는 돈을 버는 소득자이고

씀씀이가 학생때와는 달라졌지만

그래도, 호기롭게 기네스를 가져올 정도로 배포가 커지진 않았다.


오랜만에 하이네켄을 마셔볼까.

전용잔에 호가든을 휘휘 저으며 마시는 것도 좋을거고

아직도 이해할 수 없는 버드와이저는 건너뛰고서

국산 맥주도 하이트, 카스만이 아니라

테라도 있고 클라우드도 있고 켈리도 있다.


고르고 골라서 하이네켄을 한 병 집어든다.

이거 한 병만 마시고 끝낼지도 모르고

다음 한 병을 마신다면 가장 저렴한 국산 맥주나 마실지도 모른다.


냉장고엔 하이네켄 전용 잔이 있지만

혼자 자리를 차지하는것도 미안한데… 설거지감까지 늘리긴 미안하다.


자리에 돌아오자 그새 팝콘이 놓여져 있다.

주인장은 아까부터 핸드폰만 보느라, 안경에 반사된 화면만 반짝거린다.


[하이볼 한 잔에 8,000원]


이 집도 유행에 맞춰가기 위해 메뉴판에 없는 주류도 들여놓는다.

벽면에 큼지막하게 광고문구가 적혀있다.


무슨 위스키를 사용하는지도 모르겠는데도

가격만 만원에 육박하다니…


음, 역시 요즘 애들은 이해할 수 없다.


[치익]


병뚜껑을 열어제끼고

과냉각 1초전의 차가운 맥주를 목에 밀어 넘긴다.


양놈들은 병나발 부는걸 더럽고 천박하다 생각한다는데

소주 병나발하고 비슷한 느낌이려나?


“크…하아…”


반 병이나 비워내고선 숨을 몰아쉰다.

팝콘을 집어먹고 2분만 기다리면 알콜이 파고들 것이다.


그 새를 기다리지 못하고 다시 맥주를 들이부어도 좋지만

그래도 하이네켄인데

천천히 맛을 음미하며 밀어넣는다.


TV에선 재방송하는 음악 프로그램이 나온다.


제일 잘 나가는 가수는 MC를 보고

그만큼 잘 나가는 가수가 마지막으로 공연을 하고

요즘 뜨는 신인가수는 가장 먼저 공연을 한다.


중간부터 보여지는 이 남자 아이돌 그룹은

신인인데다 인기도 별로 없는데

그래도 그나마 그 치들 중에서 재수가 좋아 

겨우 음악방송에 3분동안 노래를 부를 수 있었다.


“와아.. 진짜 못한다.”


여자가 공연을 보면서 한마디 보탠다.


인기가 적은 이유가 보인다.

가장 중요한 덕목인 얼굴이 평범하다.

길거리에 걸어다닌다면 잘생긴 편이지만

TV에 나오기엔 아쉬운 얼굴이다.


‘우리 집으로 가자~’처럼 근육빵빵남을 좋아하는건 여자 동년배들이니까

대부분 10대 소녀들을 노리고 얄쌍한 남자애들이 나오는건 이해한다.


그래도… 요즘 남자 아이돌 시장이 어렵다더니

저런 애들도 데뷔를 한다.


노래는 잘 뽑아낸 것 같은데

시청자들에게 전혀 전달이 되지 않는다.

예닐곱명 되는 남자애들이 합창을 하는데

죄다 따로 논다. 화음이 구성되지 않는다.


춤추느라 가빠진 숨소리가 마이크에 그대로 퍼져나간다.

가장 잘 나가는 일류 아이돌과의 격차가 여실히 느껴진다.


헌데. 여자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인기도 없고, 노래와 춤을 잘 하지도 못하고

금방이라도 공중분해 될 법한 남자 아이돌 그룹에

그나마 센터도 아니고, 센터 왼편에 있는 서브보컬 남자한테

이마를 덮은 새까만 머리의 남자에게

남자라도 머리띠를 씌워주고 싶은 저 답답한 앞머리의 남자한테

시선을 떼지 못한다.



‘덕질’을 깊게 해보진 않았다.

하지만 주변에서 어떻게 ‘덕질’을 하는지 많이 봐왔다.


먼저, 노래를 검색해서 스트리밍 대기열에 추가시킨다.

생각 날 때마다 한 번씩 재생버튼을 눌러준다.


잘때는 소리를 죽이고 반복재생.

유튜브 채널도 좋아요와 구독을 눌러준다.


팬카페인데 소속사에서 만든 팬카페에 가입을 한다

매니저라는 사람이 정해진 한 달 일정을 주르륵 적어놓는다.


맴버들의 신상명세와

잘 짜여진 별명과 좋아하는 음식과 취미들

맡은 직책과 생일들을 살펴본다.


공지사항에 팬미팅이니 뭐니 하는 일정과 응모방법이 게시되어 있다.

앨범 하나를 구매해서

인증사진을 올리고

이름과 응원문구를 적어서 팬카페에 신청하면

추첨을 통해 진행한단다.


팬미팅 정원과

팬카페 회원의 수가 비슷비슷하다.


인기없는 신인 아이돌 팬카페의 회원은 대부분 멤버의 가족이다.

어머님들은 자녀의 성공을 위해 매 공연마다 따라다니면서

회사에서 지정해준 응원법을 목이 찢어져라 외친다.


인터넷으로 앨범을 하나 주문한다.

예전과 달라서 요즘엔 USB에 음악을 담아준다.


구매 인증용 영수증을 캡쳐하고

여자의 이름과 사연을 팬카페에 적는다.


[지치고 힘든 일상속에서, 이 노래가 많은 힘이 되었습니다.

 응원합니다]



“누나! 오랜만이야~ 또 보니까 좋다”


“말은 예쁘게 하네. 안녕”


여자가 참여하는 3번째 팬사인회


미니앨범 한 개마다, 팬사인회가 열렸으니까

이번이 3번째 앨범 발매다.


한 장만 사서 응모를 해도 올 수 있는 팬사인회에

여자는 3장의 앨범을 구매했다.


자신의 것으로 하나,

주변 지인들에게 나눠줄게 두 개.


가늘지만, 버티고 있다.

여자도, 이 아이돌도.


남자는 찾아온 자신의 팬을 향해 손을 흔든다.

악수를 하고, 손깍지를 끼고. 사진을 찍고 가져온 물품들에 사인을 해준다.


“별 일은 없어요? 회사 일은 안힘들고?”


다른 아이돌 팬미팅이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남자는 여자와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다.

인기 없는 아이돌은 한 명 한 명의 팬이 소중하다.

시간과 공간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서 팬과 소통한다.


여자 앞에도 대기줄이 얼마 없었고
여자의 뒤에도 대기줄이 없다.


그나마도 센터와 메인 댄서 멤버에게 사람이 몇명 모일 뿐이지

서브보컬에겐 관심이 잘 없다.


“그럼, 누나는 괜찮아.

 밥은 먹었니?”


“먹었”


[꼬르르르륵]


“죠….”


“푸..푸하하하하하하하하”


“그…감량때문에…저…”


“살 안빼도 돼. 보기 예쁘기만 한데 뭘”


“그래두요. 회사에서 뭐라 해요”


“끝나고, 밥이나 먹을까?”


“아..안돼요. 숙소 들어가 있어야해요”


일정이 없다고 개인활동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게 아니다.

맴버들의 동선관리와 활동보조라는 명목으로

연습실이나 숙소에 가두다시피 아이돌을 키운다.


“흐음… 매니저님~”


“어머, 오늘도 오셨네요. 누나분”


매니저도 이젠 이 여자를 안다.

소속사 직원들도 알음알음 이 여자의 존재를 안다.

공식 유튜브에도 여자의 실루엣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스쳐지나가듯 나온다.


여자는 이제 남자의 누나취급이다.


“끝나고, 동생 밥 한끼 먹여도 돼죠?”


“에이. 안돼요. 누나분도 아시면서.”


팬과 사적인 만남을 가지는 아이돌이라

팬들에겐 꿈과 같은 일이지만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정말 안돼요?”


여자가 매니저를 빤히 바라본다.


매니저도 어쩔줄을 몰라한다.

이정도 VIP는 구매내역도 관리대상이다.

앨범이든 소품이든 응원봉부터 티셔츠까지

저렴하지도 않은 물품을 가장 먼저. 여러개를 주문한다.

그것도 언제나 악성재고인 비인기 맴버의 물건으로만.


최소, 이 아이돌 그룹 서브보컬의 식대는 이 여자 한명이서 책임지는 수준이다.


큰 손의 입김에 휘둘려서도 안되지만

큰 손이 단 한명뿐인 상황에서 냉정하게 내치기도 힘들다.


하물며, 이 뒤에 일정이 없다는것도 이 여자는 알고 있을 것이다.


매니저는 뒤를 돌아서 회사 관계자를 바라본다.

지켜보던 회사 직원도 고개를 돌려 딴 청을 피운다.


거절 할 수도 없고. 책임을 지고싶지도 않다.


“흐..흠흠. 팬사인회 끝나면. 우리 서브보컬은 알아서 복귀하세요.

 통금 시간은 맞춰서 와야해요?”


매니저도 차마 된다는 말은 하지 못한다.

애둘러서 식사를 할 수 있는 시간만 벌어줄 뿐이다.


“뭐 먹고싶은거 있니?”


“정말요? 먹고 와도 괜찮아요? 먹고싶은거 먹어도 돼요?”


매니저는 남자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는다.

좋게 보면 친한 누나가 동생한테 밥 사주는거지

나쁘게 보려면 하염없이 나쁘게 볼 건덕지가 많다.


“말만해. 소고기라도 사줄 수 있으니까”


여자는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남자를 보며 웃음을 짓는다.


여자는 혹시나 있을 다음 팬을 위해 자리를 비운다.

멀찍이 떨어져 손님을 기다리는 남자를 바라본다.


—---


“그치. 아직 이런게 먹고싶지”


“어…누나는 싫어요?”


“나도 좋아해. 어서 먹자”


기껏 온다는게 KFC다.

햄버거 세트, 치킨 바구니 하나, 튀김류 사이드 두 개를 따로 더 주문한다.


나가는 길에 소프트콘도 먹고싶단다.


그나마 아이돌의 체통인지, 음료만 제로콜라로 주문한다.


이런 장소에서 얼굴 다 까고 햄버거를 입에 우겨넣더라도

아무도 이 남자가 연예인인지 알아보지 못한다.


“맨날, 우물우물. 매니저님이. 우물우물. 닭가슴살만 .후루릅..먹으라하고”


“천천히. 체하겠다”


닭가슴살이 질리다면서 치킨은 또 왜 시키는거야.

여자는 남자의 속을 알 수가 없다.


귀엽다.

이렇게 보면 TV속에서 보던 아이돌 가수가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젊은 남자애 같다.


얼마나 먹고싶었을까?


여자도 콜라 대신 주문한 따뜻한 커피를 홀짝인다.


“저…누나.”


“응? 왜? 더 먹고싶은거 있니?”


“그런게 아니라. 누나는 무슨 일 해요?”


“나? 그냥…회사 다니지.

 맨날 혼나고 고치고 혼나고…하아”


아무리 최애라도, 일 이야기는 나누고 싶지 않다.


“...”


“왜?”


“그냥요. 저도…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이 들어서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

 인물 좋아서, 무슨일을 해도 잘 할수 있을거야.

 

 학교 어디나왔는데?”


“안산공고요”


“대학교는?”


“...안산공고만 나왔어요”


“어…그래. 뭐. 요즘 꼭 대학 나올필요도 없지.

가수라는 번듯한 직업도 있잖니”


“다음 곡도 잘 안되면, 다시 연습생으로 돌아간데요”


하나뿐인 팬 앞에서 자신의 은퇴를 암시하는 가수.

남자는 그 와중에도 침울한 표정으로 제로콜라를 홀짝인다.


“직접 한 번 곡을 써보는게 어때?

 작곡이 취미라며”


“그렇긴...한데”


회사에서 만들어준 프로필중에서

그나마 한 줄..아니 한 칸을 겨우 자신이 직접 채워넣은 항목


고등학교에서 선반 실습을 하는 와중에도

언제나 머릿속엔 음표와 멜로디가 떠다녔다.


노래를 배우고 작곡을 배우고 예고에 다니고 싶었다.

부모님과 매일같이 싸웠고, 공부와는 담을 쌓았다.


밀리고 밀려서 공고에 다니고

대학도 가지 않은채로 여러 오디션을 전전하다가

아이돌을 해보라는 제안을 받았다.


남들보다 늦게 연습생 생활을 시작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미룰 방법이 없어 남들보다 일찍 다녀와야 했다.


10대 중 후반이면 데뷔하는 시대에

20대 초반에 겨우 연습생 신분을 벗어나 데뷔조에 낑겨들었다.


식사도, 생활도 모두 엄격한 관리감독이 붙는다.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웃음을 지어야 하는데

관객석의 사람들은 자신의 팀은 물론, 자신에게도 관심이 없다.


“한 번 해봐봐. 누나도 들어보고 싶은걸?  네 노래”


여자는 남자에게 미소를 지어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앞에서 오물오물 햄버거만 먹고

그 나이또래에 할 법한 고민을 하는 남자를 보기만해도


절로 미소가 나온다.

삶의 힘이 되고, 활력소가 되어준다.


—-


“팔 각도가 안맞잖아! 좀 더 번쩍 들어서! 

 언제까지 애처럼 굴거야?”


안무 트레이너가 멤버들을 향해 소리를 지른다.


어쩌면 이 팀의 마지막 곡이 될 수 있는 싱글 앨범.

일자에 맞추어 무대를 완벽히 소화하기 위해 연습이 강행군을 이룬다.


끝나는대로 보컬 트레이닝도 받아야 한다.

체중이 목표치에 도달하지 못한 멤버는 따로 남아서 운동을 해야한다.


간간히 안무영상을 휴대폰 카메라로 찍어 유튜브에도 올려야하고

개인 인스타그램도 업데이트 해줘야한다.

설령, 아무도 읽어보지 않더라도.


회사 대표란 사람도 연습장면을 지켜본다.

손익분기점에 한참을 미치지 못하는 아이돌 그룹.

과포화시장인 여자 아이돌 대신 남자 아이돌을 준비시켰지만

어째 잘 풀리지 않는다.


“좀 쉬었다 하자. 

 머릿속으로 이미징 잊지말고!”


트레이너가 잠시 휴식시간을 명한다.

센터 멤버에겐 트레이너가 직접 음료수를 챙겨준다.

서브보컬인 남자는 아이스박스에서 음료수를 챙기고, 다른 멤버들에게 나눠준다.


젊은 남자들도 힘이 부친다.

풀썩 주저앉아 땀을 닦고, 숨을 몰아쉰다.


“고마워”


메인 댄서 한명만 남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다들 얼굴에 근심이 가득하다.

팬들은 아이돌그룹에서 옛날 신화나 G.O.D처럼 

멤버간의 끈끈한 우정과 케미스트리를 꿈꾸지만

현실은 좀 더 담백하다.


인기가 없는 와중에도 갈리는 멤버간 차별대우

내일 당장 공중폭파 된다해도 이상할 게 없는 수익성

맞지 않는 합, 안무, 노래

누구에게 화 낼 기력도 애정도 없다.


“저..대표님”


“어? 왜. 무슨일 있니?”


남들은 쉬는 와중에도, 남자가 종이뭉치를 들고 대표에게 향한다.


유명 가수들에게 곡을 써준 적이 있다는

작곡가 출신의 회사 대표.


남자는 쭈뼛쭈뼛, 자신이 직접 만든 자작곡을 내민다.


“곡을…하나 써봤는데요.”


“그래. 나중에 한 번 살펴볼게. 연습 잘 하고”


대표는 땀 범벅이 된 남자의 어깨를

아랑곳하지 않고 두드린다.


“감사합니다!”


남자는 꾸벅 폴더인사를 한다.


회사 대표는 연습실을 나가면서 종이를 들춰본다.

10초도 되지 않아서,

정수기 옆 쓰레기통에 집어넣는다.


—-

—-

—-


여자는 일하는 와중에도 인터넷 창에 새로고침 버튼을 누른다.

핸드폰은 무음으로 해놓고선, 같은 음악을 반복해서 재생한다.


모레면 싱글앨범의 첫 공개방송이다.


해줄 수 있는게 이정도뿐이다.


할 필요도 없는 선예매로 앨범을 10장 구매했다.

음악 스트리밍 사이트에서 24시간 노래를 재생시킨다.

유튜브 동영상도 조회수를 늘리고, 좋아요를 눌러준다.


마음같아선 오늘 낮에 있던 공개방송에 가고싶지만

차마 연차를 낼 수가 없다.


일간 인기 100위 목록에 이름만이라도 걸치면 좋겠다.

30분이고 담소를 나눌 수 있던 팬싸인회에

단 3분도 시간이 나지 않을정도로 사람이 많아지면 좋겠다.


키도 훤칠하니까. 옷이나 교복광고를 찍으면 좋겠다.

최애는 성인이니까, 주류광고라도 찍으면 좋겠다.

패스트푸드 브랜드에서 협찬이라도 들어오면 좋겠다.


하지만 해줄 수 있는게 이정도 뿐이다.

최애는 가슴과 지갑으로 키우는거라더니, 진짜였다.


문자가 하나 송신된다.


[공연 끝났어요! 모레 방송 꼭 봐주세요]


남자가 보내주는 문자.

아이돌이 팬에게 개인적으로 문자를 보내는 일은

절대로 있어서는 안되지만.


여자도 남자에게 한 마디 해줘야하나… 고민을 하지만.


그래도 좋은건 어쩔 수 없다.


조회수를 늘려주기 위해 새로고침 하는 것도 잊어버린 채

핸드폰을 바라보며 웃음을 짓는다.



소속사 홈페이지에서 그룹 이름이 사라졌다.


가장 잘 나가던 센터는 다른 사람들과 모여 새로운 그룹으로 재편되었다.

메인 댄서와 다른 멤버 한명은 다시 연습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남자의 이름이 회사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친구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이 가지고, 보관용으로 하나 더 책장에 찔러놓은 뒤에도

비닐을 벗기지 않은 앨범이 4장이나 더 있다.


앨범 표지 왼쪽 구석에, 남자가 진중한 표정으로 자세를 취한다.


그러면 안되는걸 알지만,

매니저의 핸드폰으로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는다.


팬카페는 공중분해되어 접속조차 되지 않는다.


남자의 인스타그램도 없다.

다른 멤버들은 애초에 그런 그룹이 없었다는 듯

새로운 생활에 대한 내용을 업로드한다.


아직 남아있는 유튜브 영상에 댓글을 달아보아도

답변이 오지 않는다.


[공연 끝났어요! 모레 방송 꼭 봐주세요]


남자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내준 문자.

누구는 월 5천원을 내고 달에 한번이나 성의없는 문자를 받았다고 성토를 하는데

여자는 이 문자가 그 무엇보다 소중하다.



“체할라, 천천히 먹어”


KFC 햄버거 라지세트, 치킨 바구니 반반 하나. 닭껍질 튀김과 코우슬로까지.

이제는 제로콜라가 아니라 설탕이 듬뿍 들어간 일반 콜라를 시킨다.


“진짜. 우물우물..배고팠거든요..우물우물 일자리. 꿀꺽”


“다 먹고, 말해도 되니까. 천천히. 알았지?”


“네”


결국엔 문자가 수신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전화가 바로 연결되진 않았다.


그래서 문자를 보냈다.


[밥은 먹었니?]


라고.


한참이나 있다가 온 답장이 이거다


[치킨 먹고싶어요]



그래서 결국엔 다시 여기다.


근황을 알지 못한지 딱 한달 반이 지났다.


뽀얗던 피부가 새까매지고

팔뚝에는 왠 긁힌 상처가 많다.


옷도 후줄근하고

볼게 얼굴밖에 없는 애는 아니었지만

누가 봐도 아이돌 그룹 멤버였다고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남은 치킨 다리 한쪽을 두고 눈치를 살피는 남자에게

여자가 슬쩍 밀어준다.

남자는 닭다리를 게걸스럽게 먹는다.


리필한 콜라를 한 번에 반을 비우고 나서야

남자가 제정신이 든다.


“…감사히 잘 먹었습니다.”


“이정도 가지고 뭘. 잘 지냈어?”


“네…뭐…”


“무슨 일을 하길래 팔에는 상처가 이리 많아. 뭔 일 있니?”


“상하차…해요. 돈벌려고”


“...”


하루 종일 춤추고 운동하는게 일이여서 체력은 자신이 있다.

고졸 학력으로 가장 빠르게 구할 수 있고

급여도 작지 않은 일을 시작했다.


여자의 마음이 찢어진다.

최애의 아이돌이 상하차나 한다는 사실이 슬픈게 아니라

음악을  좋아하고 작곡이 취미인 남자가 

돈 때문에 전혀 해보지도 않은 일을 한다는게 슬프다..


팔에는 박스니 뭐니에 쓸린 상처가 한가득이고

야외에서 일하다보니 피부가 금새 타들어간다.


얼굴밖에 볼게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자의 프로필 배경으로 된 남자의 뽀얀 얼굴 사진과

너무나 대비된다.


여자의 가슴이 갈갈이 찢겨져 나간다.


“왜 그렇게 급하게 돈을 벌어.

 다른데 알아볼 시간은 없었어?”


오디션을 보러 다녀도 괜찮을거고

음악과 관련된 일이 꼭 아이돌그룹만 있는것도 아니다.


새로운 직장을 구하더라도

고졸이라고 정규직을 구하지 못하고 

상하차만 할 수 있는것도 아니다.


새로운 자격증을 따기 위해 공부를 할 수도 있고

취업지원센터도 많다.


나이가 젊으니까, 좀 더 좋은 조건으로 안정적인 급여를 받아볼 수 있다.


헌데 이 남자는 당장에 생활이 궁핍해서 상하차를 뛴다.


“빚이 좀… 있어요.”


“얼만데. 왜.”


답답한 여자가 계속해서 꼬치꼬치 캐묻는다.


“8천만원이요… 데뷔할 때 든 돈… 소속사에서 갚으래요”


K-POP의 어두운 심연을 마주한다.

회사는 손실을 최소화 하기 위해 데뷔 아이돌에게 빚을 지운다.

먹고 자고 행동하고 웃고 활동하는 일거수 일투족을 인형다루듯 하면서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으려한다.


춤과 노래만 연습하느라 세상물정을 모르는 아이들이

이십대 초중반이 되어서 상품성이 떨어지면

그대로 방출되어 버려진다.


이자만 법정 이자로 4.9%만 받겠다며

감사한 줄 알라는 말과 함께.


부모도 포기한지 오래고

사지가 멀쩡하단 이유로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는다.

남자는 당장의 돈을 위해 상하차를 시작했다.


20대의 시작이 1억원에 가까운 빚으로 출발한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온몸의 털들이  삐쭉삐쭉 선다.


“계약서. 아직 가지고 있니?”



어디가서 자랑할 만한 직업은 아니지만

남자는 그래도 정규직이 되는데 성공했다.


공기청정기로 유명한 국내의 소형가전업체의 조립라인

2교대고, 힘들지만 상하차보단 훨씬 안정적이다.


적어도 공장 내부엔 근로자를 위한 냉난방시설이 구비되어 있고

구내식당에서 밥을 먹을 수도 있다.


출근시간과 퇴근시간이 일정하고

퇴근을 하고나면, 음악을 할 수 있는 시간이 있다.


남자는 입문용으로도 사지말라는 10만원대 싸구려 기타를 샀다.

아직 영상을 올리진 않았지만, 유튜브 채널도 만들어놨다.


남자는, 음악이 하고싶다.


예전처럼 데뷔와 앨범과 방송일정을 위해서

쫓기듯 연습하고 

남이 만들어준 악보를 보고 연습하고

혼나면서 춤을 추지 않는다.


음악에 할애하는 시간은 1/10으로 줄어들었지만

10배는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저축도 모을 수 있고

글쎄. 이렇게 사는게 맞는지는 모르겠지만

예전처럼 눈앞이 깜깜하지만은 않다.


누나가 시키는대로 했다.

엄마가 장롱 속에 가지고 있던 계약서를 집에서 몰래 들고나오고

변호사를 돌아가면서 2명인가 3명쯤 만났다.


어려운 말들을 쏟아내고

누나가 변호사를 향해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그리고 마지막엔 모든 변호사가 말했다.


“승산 있습니다.”


“자신 있습니다.”


“맡겨만 주세요”


여자는 수임료가 가장 비싼 변호사와 계약을 했다

남자는 여자가 내미는 서류에, 18살 때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서명을 했다.


대표에게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었다.

버르장머리가 없다느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느니

니까짓게 어디가서 성공할 수 있을거라 생각하냐느니

동료들이 불쌍하지도 않냐느니


남자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욕을 하고 소리만 질러댔다.


누나가 핸드폰을 가져가서, 통화의 녹음파일을 빼냈다.


데뷔하고선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연예부 기자를

처음으로 만나보기도 했다.


묻는 말에 있는 그대로 대답했고

계약서를 보여달래서 보여주었고

녹음파일을 틀어달래서 틀어주었다.


뉴스 기사는 한참이나 있다가 기사로 실리게 되었다.


그 사이에, 다른 뉴스기사가 터져나왔다.


동료였던 센터 멤버의 학창시절 이야기.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떼로 몰려다니면서, 침좀 뱉었다는 이야기.


랩 하던 멤버가 술 마시고 운전한 이야기


성실하고 착하고, 남자에게 잘해주던  메인 댄서의 연애와 여자친구 이야기

매니저의 증언과 인터뷰도 기사로 계속해서 나왔다.


속칭 ‘1군’이라 부르던 대형 아이돌이 있진 않았으니까

대중들에겐 잘 알려지지도 않았고, 그나마도 금방 잊혀졌다.


대신, 전 소속사는 계약을 단 한건도 따내지 못하게 되었고

어떠한 광고와 방송출연도 제의받지 못하게 되었다.


마지막에 마지막으로 나온 기사가

남자의 불공정계약에 대한 이야기다.


그것도 세간에 큰 이슈를 끌지는 못했다.

대중들은 중소 엔터테이먼트 기업이 다 그렇지 뭐 라며 혀를 쯧쯧 찼다.


그리고 잊었다.

남자의 전 소속사도 세간에 잊혀졌다.

 

남자가 빚을 상환해야할 회사는 사라져버렸고

채무도 없어지진 않았지만, 잊혀졌다.


남자가 동료들과 불렀던 곡에 대한 권리 50%만 

이름도 모르는 회사에 넘어갔다


경매가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남자의 채권자가 되지 못했다.

대표였던 작곡가도 회사에 대한 권리를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남자는 돈을 줘야 할 사람이 없어져서, 빚을 갚지 않게 되었다.


누나에게 변호사 수임료라도 갚고자 했다.

누나는 처음으로 남자에게 먼저 손을 뻗었다.

머리를 쓱쓱 쓰다듬으며


“괜찮아”


라고 말했다.

다정하게 웃어주었다.


누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이야기는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누나…나.. 모레 월급날인데…”


“왜? 돈 모자라? 뭐 필요하니?”


“아냐! 그런게 아니라. 

 밥… 내가 살게. 시간 돼?”


—-

—-

—-


순수한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만,

소고기는 언제 먹어도 맛있다.


어린 애가 무리하는거 아닌가 싶다가도

구태여 얻어먹는 입장에서 사주는 음식이 싸네 비싸네 말을 얹는것도 실례다.


남자에게 에스코트를 맡기고

처음부터 끝까지 따라만 다녀 보았다.


언제까지 어린애인 줄 알았는데

많이 컸다.


아무리봐도 잘 키웠다.

새까매졌던 피부도 다시 뽀송하게 하얘전것이 보기 좋다.


여자의 집 주변까지 남자가 데려다주기까지 하고…

순수한 호의는 돼지고기까지만.

흐음. 최애의 아이돌에게 이런 관심을 받는것도 나쁘지 않다.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내려서 현관문을 연다.


“아차차 택배”


큼지막한 택배를 여자가 뻔쩍 안아든다.

현관문을 닫고, 신발만 겨우 벗고서 상자를 뜯는다.


비닐과 포장재로 잘 포장된 10평 용량의 공기청정기.

여자는 포장을 뜯어내고 제품의 일련번호부터 확인한다.


‘M01S24022TRW’


제품 모델명과 생산연월, 주차, 색깔, 판매경로가 

어지럽게 나열된 일련번호


여자는 핸드폰을 들어서 남자가 알려준 근무표와 대조한다.


“어쩜, 맞네. 이번엔 당첨이네. 환불 할 일 없겠다.”


여자는 택배박스를 저 멀리 던져두고

공기청정기를 어디다 설치할지 두리번거린다.


침실도 이미 공기청정기가 있고

거실에도 이미 공기청정기가 있고

옷방에도 이미 공기청정기가 하나 있다.


18평짜리 방 두개 거실 하나 있는 집에 공기청정기만 3대가 돌아간다.


“으음…거실이 넓으니까. 부엌쪽으로 하나 둘까?”


여자는 콘센트를 가리는 식탁을 밀어내고, 공기청정기를 꼽는다.

안방, 옷방, 거실, 그리고 새로 산 부엌용 공기청정기를 작동 시킨다.


“스읍~~하아…”


그리고 집안에서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부모님 댁에도 한 대 놔드렸다.

앨범을 보냈던 친구에게도 하나 선물해줬다.


이젠, 남자의 근무일정에 맞추어 필터만 구매하면 된다.


원하는 주차의 생산품이 아니면 반품시키고

원하는 주차의 생산품이 올 때까지 다시 주문하는걸 반복한다.


남자에게 말해서 얻으면 되지 않느냐고?

에이. 덕질을 할 줄 모르네.


이런건 돈을 써야 의미가 있는 것이다.


꼴랑 음악 한두개 넣어놓고 3만원 5만원씩 하는 앨범이 아니다

티셔츠에 얼기설기로 인쇄를 해놓고 4만원에 파는 팬상품이 아니다.

봉이며 깃발이며 원가는 천원 이천원이나 할법한걸 모아서

몇만원에 파는 공식 응원도구가 아니다.

참가비만 10만원이 넘어가는 팬미팅회가 아니다.


공기청정기 완제품 한 개에 12만원

필터는 교환식으로 한개에 만원가량

배송비 별도.


이정도면 혜자급이다.


아차차… 별로 고급진 표현은 아니지만.

어쨋든, 최애를 덕질하는데 예전보다 훨씬 적은 돈을 들이고

양질의 팬상품을 택배로 문앞까지 가져다준다.


“스읍~~하아…”


남자가 열심히 조립했을 공기청정기

거기서 나오는 공기를 들이마시고, 내뱉는다.


으음…좋다.


남자가 들어간 회사가 식품회사였으면 매일같이 그 냉동식을 시켜다 먹을 생각이었다.

남자가 들어간 회사가 자동차부품회사였으면 년에 한번씩 차를 바꾸고, 중고차로 되팔 생각이었다.

남자가 들어간 회사가 무엇이든간에, 그 회사에 덕질을 해줄 심산이었다.


공기청정기를 주력으로 하는 소형가전회사.

음. 좋네. 좋다. 취직 한 번 잘했다.


저번주에도 소리를 질러대던 부장에 대한 스트레스가

숨만 쉬어도 씻겨 내려간다.


들숨에 폐포부터 정화되고

날숨에 코끝이 간질거린다.


“지니야~, 노래틀어줘~”


여자는 AI스피커에게 명령을 내린다.

설정된 그대로, 남자가 몸담았던 아이돌 그룹의 노래가 재생된다.


남자의 파트에 맞추어 가사를 흥얼거린다.


벽에 걸린 액자엔

대표가 정수기 옆 쓰레기통에 버렸던 악보가 담겨있다.


아직, 아무런 영상이 올라오지 않은 유튜브 채널에

구독과 알람설정까지 마쳐놓았다.

 

“언제쯤~ 올릴려나. 새로운 노래. 빨리 듣고싶다.”


최애만 보면 힘이 솟는다.

최애만 보면 계속해서 살아갈 수 있다.

최애만 보면 없어지던 근로의욕도 샘솟는다.

최애만 보면 삶은 무지개빛의 연속이다.


남자가 연예계 활동을 하던 시절에 쓴 돈 수 백만원

남자를 구하느라 쓴 변호사 수임료 천만원

공기청정기 5대와 필터 사는데 든 80만원

기타등등기타등등


과거와 비교하면 이정도면 혜자…

아차차. 거저다 거저. 저렴하다. 가성비가 넘친다.

남은 돈으론 다음에 남자에게 맛있는 햄버거를 사줄 것이다.


공기청정기는… 딱 하나 더 구매해서, 사무실에 놓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