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와 남자는 노을빛이 조금씩 사라져가는 차가운 밤의 술집에서 취해가고 있었다.


"흠흠."


사내가 헛기침을 하더니, 남자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흠. 흠. 이런 서늘한 날엔 술이 잘 안들어 간단 말이지. 흠. 흠."


남자는 사내가 자신에게 말을 걸려고 운을 띄운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남자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처음 보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리에서 일어나 다른 취기의 향을 쫓기엔 그도 많이 취해 있었다.


"이봐, 청년, 자네는 무슨 일로 여기서 혼자 이러고 있는가?"


"그냥 혼자 마시는 거지요."


남자는 단답으로 대꾸했다.


"혹시 나이를 물어봐도 되겠소?"


"...."


남자는 조용히 술이나 마시고 싶었지만, 사내가 자신에게 계속 말을 걸어올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23살입니다."


"그렇군. 그렇군. 그렇군.... 좋을 때야.

젊을 때란 말이지. 아니, 어쩌면 어리다는 말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어. 나도 36살이지만 이렇게 모르는 게 많은데 말이야."


남자는 사내의 말투가 특이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차피 혼자 온 것 같던데, 가만히 있으면서 몸을 얼릴 바엔 입이라도 녹이면서 있는게 낫지 않겠나?"


"재밌는 이야기라도 있으신거요?"


남자는 이쯤 되자 사내의 말을 들어주는 시늉이라도 하는 것이 차라리 좋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 이야기란 말이지.

이야기는 참 좋은 거야. 감정이라는 것을 조종하는 것이니 그럴 만도 하지. 이야기, 이야기라...."


사내는 취기에 말을 두서없이 늘어놓으면서도 일정한 속도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 내 이야기를 해주지.

나는 평범한 사내라네. 군청에서 일하며 꾸벅꾸벅 돈을 타먹는 월급쟁이지.

공무원이라는게 그렇지만, 참 재미없고 무난한 직업이라네."


남자는 사내가 공무원이라는 것에 조금 놀랐다.

지금 그의 행색은 단정함과는 거리가 먼, 즉흥적이면서도 신경질적인 그것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19살에 결혼했지.

우리 아내는 옆 동네 금산 지역의 지주 딸이라네. 남부럽지 않은 부잣집에서 자랐지. 장인어른은 딸만 2명인데, 그렇게 딸을 금지옥엽으로 기르는 아버지는 처음 봤어. 당연히 나와 결혼할 때 장인어른은 반대가 극심하셨어."


"귀하게 기른 자식은 원래 쉽게 내주기 어려운 법이죠."


"맞는 말이야. 나 같아도 옆집의 마땅한 직업 없이 외제 책만 부여잡고 있는 남자에게 딸을 시집 보내고 싶진 않을거야."


"아내 분과 같은 동네서 사셨군요?"


"그렇네. 우리는 7살 때부터 같이 알고 지냈지. 국민학교도 같은 곳을 나왔다네. 이상하게 아내랑은 같은 반이 자주 됐었어. 그러면서 더 친해진 것이기도 했지만 말이야."


"그러다가 고백을 하신건가요?"


"아니, 고백은 아내가 먼저 했네. 나도 당황스러웠지. 그렇게 예쁜 여자가, 얼굴을 붉히며 마음을 흘리는 것이 얼마나 매혹적인지 아나? 그렇게 사랑스러운 얼굴은 정말이지 본 적이 없었어. 그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말이야."


"예?"


"장인어른은 반대가 심하셨지. 나는 변변찮은 직업도 없었고, 집안이 좋은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야. 아내는 교제를 허락해달라고 끊임없이 빌었지만, 장인께서는 나를 내쫓아내려고 하셨지."


"잠깐만, 짐작이 가는걸요. 그래서 그 마을을 떠나셨고, 아내가 당신을 따라오신 것 아닌가요?"


사내는 잠시 남자를 바라보곤,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어나갔다.


"아니야, 그 반대였지. 아내는 차라리 목숨을 끊겠겠다며 매듭으로 아버지 앞에서 자기 목을 졸랐어.

미친 짓이지. 나는 그녀가 그렇게 무서운 광기를 지녔는지 몰랐다네."


남자는 순간 흠칫하며 사내를 바라보았다.

자신이 사내의 이야기에 빠져들고 있는 것도 모른 채로 말이다.


"결국 장인어른도 두 손 두 발 다 드셨지. 결국 우리의 혼인도 허락하셨어.

그러면서도 아직도 내가 밉다고 결혼 자금 따윈 없다고 으름장을 놓으셨는데, 결국엔 자식 정은 못 떼어놓으셨지."


"뭐, 과격해도 어찌저찌 잘 됐군요."


"그래, 그 땐 그랬지. 혼인 한 달 전에 내가 반듯한 직장도 가지게 되자, 장인어른도 조금은 화를 푸셨으니 말이야."


"그래서, 지금은 잘 지내고 계신건가요?"


사내는 조금 곤란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렇진 않아."


사내는 그렇게 말하곤 목소리를 낮춰 남자에게 말했다.


"자네, 밤일은 해본 적 있나?"


"예?"


남자는 당황스러웠다.

혹시 자신에게 음담패설 같은 것을 하려는 건 아닌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진지하네. 이상한 말을 하려는 건 아니야."


"뭐, 있긴 합니다만, 저도 약혼자가 있거든요."


"자네, 밤일을 일주일 내내 해본 적 있나?"


"아뇨, 그 정도는...."


"아내는 기운이 왕성했지. 나에게 끊임없이 밤일을 원하곤 했어-하루도 빠짐없이 말이야!"


그제야 남자는 사내의 얼굴을 자세히 바라보았다.

사내의 안색은 창백하고, 헬쑥했다.


"그래도, 뭐, 아내가 그만큼 당신을 사랑한다는 뜻이니까요."


"그래. 하지만 사랑이 너무 거대하면 사람이 깔려 죽을 수도 있지."


남자는 무슨 말을 하려고 했지만, 말을 꺼내기도 전에 사내가 말을 이어나갔다.


"나는 도망쳤네. 그래. 꼴볼견이지. 남편으로서도, 가장으로서도 실격인 행동이야.

하지만 밤일로 사람이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다른 생각이 들지 않더군. 이건 미친짓이다, 그런 생각 밖에 들지 않았어.

그날은 내가 억지로 '쥐어짜인' 후 기절했다 깨어났을 때였어.

나는 냅다 집을 뛰쳐나왔지."


사내는 잠시 숨을 고르곤 다시 말을 이어나갔다.


"그러곤 다시 잡혔지. 겨우 사흘 만에 말이야.

소문을 들으니, 아내가 온 마을과 장인 어른 댁까지 미친 듯이 뒤졌다는군.

나는 그제야 깨달았어. 내가 사랑이 너무 무거운 사람과 결혼했다는 걸 말이야."


"....그래서 어떻게 되셨습니까?"


"다시 끌려왔지. 집으로 말이야. 아내는 집과 직장에서 항상 붙어 다녔지.

전보다 더 잘 먹이고 신경을 써주었지만, 그만큼 밤에는 책임을 져야 했어.

거의 어떤 정도였냐면 말이지..."


사내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래, 강간! 억지로 범해진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네. 나는 그렇게 17년 동안 결혼생활을 했어.

지금이야 익숙해졌지만, 그 때는 그보다 두렵고 무서울 수가 없었지. 사실 지금도 아내에게 거의 속박 당하듯이 살고 있으니, 별반 다를 건 없어."


그러곤 사내는 입을 닫았다.

남자는 조금은 충격적이고 또 조금은 안쓰럽다는 표정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꽤 자세한 이야기하시는 분이시군요."


남자는 조금은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고자 시시콜콜한 농담을 던졌다.


"글쎄, 글쎄말이야. 어제 일곱 째가 태어났어.

돈이 부족한 건 아니지만 말이야, 아내는 여덟 째를 원하고 있어. 나는 지금도 그게 두려워 미칠 지경이라네."


남자는 자신의 농담이 적절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사내는 조금 시무룩해진 남자를 바라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약혼자가 있다고 그랬나?"


"네...그렇습니다.


"있지, 그거 아는가? 공무원은 이 동네 사람들의 인적사항을 꽤 자세하게 파악할 수 있다네. 세세한 것까지 말이야.

동료 직원에게 돈 좀 찔러주며 부탁하며 되는 일이지."


"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자네는 우리가 처음보는 사이라고 했지? 뭐, 딱히 그렇다고 할 순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야."


남자는 조금 혼란스러웠다.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술을 너무 많이 드신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야, 아니야, 김얀붕 군. 난 자네를 알고 있다네."


"...제가 이름을 알려드린 적이 있던가요?"


"그 것 아는가? 좋아하는 상대에게 집착하는 경향은 보통 유전일 때가 많지. 우리 아내도 그런 경우였고 말이야."


"점점 무슨 이야기를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장인 어른은 딸이 2명이었으니 말이야. 아내의 동생도 의처증이 심할지도 모르는 노릇이야."


"...혹시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이라도 있는 겁니까?"


"있지, 처제는 아내와 나이 차가 꽤 있다네. 그러면서도 집착은 둘이 눈에 띄게 닮아 있었어. 작년에 장인어른 댁에 찾아뵈었을 때, 처제는 좋아하는 남자와 약혼했다며 무척이나 들떠있었지."


"...."


"처제는 그 남자를 놓치지 않을 거라고 했어. 그 남자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죽일 수도 있다고 내게 넌지시 말했지. 난 별로 놀랍지 않았다네. 그저 내가 모르는 그 남자는 나랑 비슷한 아내를 맞이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지."


남자는 다급하게 사내에게 물었다.


"제가 모르는 것이 있는 거죠? 그런 것 아닙니까?"


그러나 사내는 대답 대신 의자에서 일어나 코트를 챙길 뿐이었다.

그는 종업원에게 돈을 더 얹어주고, 술집의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는 나가는 대신 다시 뒤돌아 남자에게 마지막 말을 건냈다.


"무거운 사랑은 좋지 않다네, 동서. 나는 그걸 너무 깨달았어..."


그러면서 사내는 비틀비틀 걸어 나갔다.

그것이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기력이 없어서인지 알 수는 없었다.


그러나 남자는 잠시 말을 잃고 있었기 때문에, 그를 붙잡을 수 없었다.




그가 술집 밖으로 박차고 나왔을 땐, 그는 이미 저 멀리 검은 실루엣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 옆엔, 또 다른 배 부른 여자의 실루엣도 있었다.





남자는 그가 떠난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종업원이 계산서를 들고 그를 찾아오기 전까지, 그는 그저 멍하게 서있을 뿐이었다.

온 몸이 굳는 듯한 기분이, 그리고 도통 풀리지 않는 의문이 그의 머리를 죄여왔다.






그 날의 늦겨울 바람은 그렇게 잦아들고 있었다.